|
천국 잔치에 초청 받은 존귀한 자들(출애굽기 24장 1-11절)
----------------------------------------------------------------------------------------
가을이 점점 오는 것 같습니다. 가을 하면, 추석, 수확, 단풍, 천고마비, 이런 단어들이 문뜩 떠오릅니다. 또 가을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등산입니다. 우리나라 등산인구가 무려 1,8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저는 서울에 살게 되었으면서도 가까운, 00산, 00산도 아직 못가(게을러서 안가) 보았습니다. 등산 잘 안 다니시는 분도 “‘악’자 들어가는 산은 무시하면 큰 코 다친다.”는 말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우리나라 3대 악산으로, 월악산, 치악산, 설악산을 꼽습니다. 저도 3대 악산 중에, 치악산을 십 몇 년 전에 올라갔었는데, ‘사다리 병창’이라는 코스로 올라가면서, 정말 악 소리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병창’이라는 뜻이 영서 방언으로 ‘벼락’, ‘절벽’이라는 뜻인데, 2.7km 구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다리로만 되어 있습니다. 정말 힘든 구간이라 올라갈 때는 잘 선택하지 않는 코스라고 합니다. 이 곳으로 올라가는 것도 어려운데,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해서 다리는 온통 마비되고, 가다가 몇 번 주저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역시 ‘악’ 산은 ‘악’산 이구나 생각합니다. 가을에 산행도 좀 하시고, 환절기에 건강관리 잘 하십시오. 건강해야 일도, 공부도, 예배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시내산은 구약 시대 성막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사람을 만나 주셨던 거룩한 산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소명을 받았던 산이어서, ‘예벨무사(Jebel Musa, 모세의 산)’ 혹은 ‘호렙산’ 이라고도 불립니다. 참고적으로 구약에는 4개의 성스러운 산(four primary sacred mountains)이 나옵니다.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산(Mt Ararat )’,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Mt. Sinai)’,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곳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모리아산(Moriah or Mt. Zion)’, 마지막으로 변화산으로 알려진 ‘다볼산(Mt. Tabor)’이 있습니다.
시내산은 2,291m나 되는 아주 높은 산입니다. 온통 바위투성이의 험한 산입니다. 우리나라 ‘악’산 중에 최고로 높은 설악산(1950m)보다도 훨씬 높습니다. 모세는 이 높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의 나이 80세였으니 그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물론 9개월만 지나면 성막이 완공 되어서 평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몇 번이나 올라갔을까요? 대개 생각하기를 십계명 두 번 받았으니, 두 번 혹은 세 번쯤 올라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34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무려 8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의심이 드시는 분은 성경을 자세히 정독하면서 찾아 보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의 중간쯤에서 만나 주신 것이 아니라, 항상 정상에서 만나셨습니다.(출 19: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모세는 한 번 산에 오르내릴 때마다 왕복 4,500m를 다닌 겁니다. 하나님이. “모세야, 전해 줄 말이 있으니 나에게 나아오라”고 말씀 하시시면 곧 바로 2,291m를 강제 등산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런 만남의 상황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못 가겠다고 불평 하지 않았고, 며칠 쉬었다 가겠다고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만사 제쳐 두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의 모습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에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던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매주 마다, ‘악’산 보다 훨씬 더 높은 산에 강제 등산을 하실 자신이 있으신가요? 거기다가,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니, 동물들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올라가야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 뿐 입니까? 산에 올라가서 쉬지도 못하고, 살아 있는 동물들을 끔찍하게 희생시키는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면 몸서리까지 쳐집니다. 평지에서, 냉‧난방 잘 되는 건물 안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예배드린다는 것만 생각해도 감사할 조건은 차고도 넘칩니다.
이 모든 조건이 우리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공로 덕분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감사하시죠? 감사가 안 되시는 분은 옛날 방법으로 매 주 2,291m 등산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산에 오를 필요도 없고, 희생 제물도 죽일 필요 없이, 오직 우리의 대 제사장이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담대히 나아가면 됩니다. 오늘 예배가,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짧은 내용이지만,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시내산에 오른 이야기입니다. 다섯 번째는 1-8절까지, 여섯 번째는 9-11절까지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다섯 번째 산에 오른 모세에게“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칩십 명과 함께 산으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라”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을 산에 올라오라고 초청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 했을 때, 누구든지 경계를 벗어나 산에 올라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내린 명령으로, 아주 강력하게 경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들을 산으로 올라오라고 초청하셨을까요?
3-8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과 거룩한 피의 언약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추측해 보면, 하나님은 언약이 맺어진 이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수고와 격려의 만찬을 베풀어 주시려고 초청을 하신 겁니다. 고대 근동(이스라엘을 기점으로 가까운 동쪽)지역에서는 언약을 맺은 당사자들이 서로 우의를 다지며 축제를 여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26장에서 이삭과 아비멜렉(블레셋의 왕)이 서로 계약을 맺은 후에, 밤이 새도록 함께 먹고 마시며, 서로에게 축복을 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끼리의 약속이나 계약도 이러할 진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언약식 이후에 잔치를 열고 축복해 주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입니다.
언약식 장면을 살펴보면, 3절 앞부분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였다”라고 합니다. ‘모든 말씀’, ‘모든 율례’는 그 동안 모세가 산에서 들었던 모든 율법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와서’ 라는 말은 산에서 내려왔다는 말인데, 이 말이 “백성들에게 전하였다”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일이 빠른 시간 안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체 없이 산에서 내려와서,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백성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자세가 이러해야 합니다. 전하는 자는, 가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가감 없이, 즉시 선포해야 합니다. 듣는 자는, 열린 마음으로 모든 말씀과 모든 율례들을 귀 기울여 세심하게 들어야 합니다. 말하는 입술과 듣는 귀가 궁합이 딱 맞아야 합니다. 앞으로 00교회의 말씀의 자리가 항상 이러한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언약식은 활기가 넘치면서도 엄숙하게 치러졌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백성들은 제단을 쌓고, 12지파를 상징하는 12 기둥을 세웠습니다. 청년들은 소를 제물로 드려 화목 제사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낭독했습니다.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화답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세가, 제물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리며, “이는(이 피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선포 했습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언약 의식이 끝났습니다.
이 언약은 “쌍방적인 언약”입니다. 만약에 어느 한쪽이 언약을 파기하거나 어기게 되면, 피 흘리고 죽은 동물과 같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초청 받았다 하여도 피 언약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상실 됩니다. 이 예식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는 의식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히브리서(9:22)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피의 언약이 맺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언약은 집단과 맺어졌지만, 신약의 언약은 극히 개별적인 언약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 보혈의 언약을 맺지 못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는, 총 74명(모세, 아론, 나답, 아비후, 70명의 장로)만 초청 받았지만, 신약은 모든 사람이 초청 대상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초청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합니다. 확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초청은 절대로 없습니다. 초청을 받아 놓고도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언약을 맺어 놓고도 딴 곳에 더 관심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약속 다 뿌리치고 하나님의 초청에 즉각적으로 응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과 22절을 읽어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우리가 마음에 뿌림(피 뿌림, 죄 사함)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아멘,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이것이 초청을 받은 사람, 초청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취해야 하는 유일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 성경 공부 등 모든 경건의 시간은 광범위한 의미에서 다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다 보면 약속 천지입니다. 경조사, 직장 모임, 세미나, 동창회, 동문회, 산악회, 동호회, 취미생활, 여가활동, 여행, 식사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약속의 연속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모임이나 활동을 안 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임들과 하나님의 초청이 겹친다면(예배와 나의 개인적인 모임),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지금껏 무엇을 선택해 오셨습니까? 가장 최우선의 선택이 하나님의 초청 이었습니까? 제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저의 경우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선택한 시간이나, 기회 보다 세상을 선택하거나 포기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온전히 하나님만 선택해도 균형을 이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초청하심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따라서, “시내산으로 올라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장소에 가장 우선적으로 참여 하시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자녀 된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시간을 많이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만을 선택하시기를 기대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언약을 꼭 붙잡으시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예배로, 기도로, 말씀으로 초청받아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는 선택 받은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초청 받은 74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서 무엇을 하였을까요? 우선 이들은 모세처럼 정상까지 올라 간 것은 아닙니다. 모세만 가까이오고 나머지는 멀리서 경배하라고 했으니, 산기슭이나 중턱쯤 까지 올라갔을 겁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의 발아래”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발이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낮은 곳까지만 올라갔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선택 받아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라 하여도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은 선하신 하나님을 보는 순간 죽음을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위투성이 산이 아니라, “청옥 같고 청명했다(우리말 번역, 하늘처럼 맑고 밝은 사파이어로 된 것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24:10)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 6절에, “보좌 앞에는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이 있었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일부분만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머무른 곳이 곧 천국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한 일은 하나님을 “ 뵙고(보았고),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보았다”는 말도 실제로 목격 했다는 뜻이 아니라, 환상과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실체를 깨닫고 기쁨을 얻었다는 의미로, 영적인 큰 자각이 일어났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함께 먹고, 마셨다”는 말도, 단순하게 음식을 먹거나(화목제물로 드려진 음식 먹었을 것) 마시는 동작이 아니라, 훈훈한 대화가 오고가며, 기쁨이 넘치는 현장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산상 잔치를 통해 언약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성도 간에 영원히 회복된 교제의 참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이렇게 가까이 오도록 한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구약에서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과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게 보고, 먹고, 마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 이유는 11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손을 대지 아니하셨다”는 말은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당연히 손을 대셔서 죽여야만 하는 죄인들 이었지만, 존귀한 자들(의로운 자들)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살려 주시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뵙고도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피의 언약의 효과입니다.
만약에 시내산 아래에서 피의 언약을 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로 나아왔다면, 시내산 중턱은 고사하고, 산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보좌로부터 나오는 불에 전부 타 죽었을 겁니다.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죄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을 찾고, 뵙고,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초청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체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았을 겁니다. 마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처럼, 죽음 대신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일평생 자랑하며,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석한 사람 중에 중도에 실패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론의 장남인 나답과, 차남인 아비후가 바로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막이 완공되고, 성막 봉헌식이 거행되던 8일 째 되는 날 향로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불이 나와 순식간에 타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명령하신 말씀과 규정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제사장 위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초보자라고 해서 결코 봐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실수 할 수도 있지, 잘 못 한 번 했다고 죽이기까지 하시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인애와 자비가 넘치시는 분인데, 왜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시지 않고 그들을 일거에 죽이셨을까요?
나답과, 아비후는 이스라엘을 이끌 차세대 제사장들 이었습니다. 장남은 아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에 단 한 명 뿐인 대제사장이 될 신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실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어겼습니다. 존귀한 자로 대우해 주었지만 그 은혜를, 그 언약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거룩한 것과 속 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기 위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레 10:9-10) 이 말씀에 비춰 볼 때,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는 일주일 째 계속 되는 봉헌식 기간에 너무 흥에 겨워 술에 취해서 성소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추측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기까지 진노하셨던 바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었더니 보란 듯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앞장서서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당시에 제사장들이었다고 해서, 그럼 지금의 목사님이나 장로님들만 조심 하면 되는 걸까요? 안 그렇습니다. 지금은 만인 제사장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동일하게 언약이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시내산에 초청된 사람들과 똑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언약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언약 아래에 있으며, 영원한 천국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일분일초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갈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 어떻게 24시간 감시당하는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나? 이래서 신앙생활 하겠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초청을 받지 못하다가, 하나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시내산에 들어가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부담감이 큽니까? 아니면, 말씀과 명령을 지켜가는 것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켜보심의 부담감이 큽니까? 한 쪽은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부담감 이고, 한 쪽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영생을 얻게 해 주시는 부담감 이라면 얼마든지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부담감 없이 하나님의 초청에 정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사탄 마귀는,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 천국 잔치에 못 가게 하는 것이 사탄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본보기로, 우리가 한 번의 잔치에 참여했다는 사실(은혜 받았었다는 과거의 일시적인 체험)에 자만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 잔치에 들어갈 때까지 인내함으로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가야 합니다. 천국 잔치에 내 이름이 초청되었음을 굳게 믿고, 범사에 감사하시고,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언약아래에 있음을 확신 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셔서, 온전한 자로 영원한 나라의 천국잔치에 당당하게 들어가는 00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죄인 된 우리를 존귀한 자로 여겨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천국 잔치에 초청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영원토록 감사하면서, 자만하지 말고 영생이 나라에 들어갈 그날 까지 언약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참고자료
모세의 시내산 등정 기록 (출 19-34)
1차 등정 : 시내산 언약 체결 | |
올라감 | 19:3,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
내려감 | 19:7,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
2차 등정 : 백성들 성결 명령 | |
올라감 | 19:8-9,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 ① 올라갔다는 언급은 없으나, 모세가,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하겠다는 말을 하나님께 전하였고, 하나님도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올라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 ② 14절에 내려간 것을 보면, 8,9절에 올라갔음이 것이 확실하게 증명 |
내려감 | 19:14,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
3차 등정 : 백성들 입산 금지 명령 | |
올라감 | 19: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
내려감 | 19:25,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알리니라” |
4차 등정 : 칠십인 장로 초청, 율법 주심 | |
올라감 | 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① 올라갔다는 언급은 없으나, 모세에게 이르렀다(말씀 하셨다)는 것은 올라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 ② 24:3절, 와서(백성에게로 내려가서)라는 것을 보면, 24:1절이 올라간 상황임을 확실하게 증명 |
내려감 |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 ① ‘와서’, 표준새번역 ‘내려와서’, 모든 말씀, 모든 율례=율법(규례, 계명) 총칭 |
5차 등정 : 칠십인 장로와 먹고 마심 | |
올라감 | 24: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
내려감 | 내려갔다는 기록은 없음 |
6차 등정 : 40일 머물면서, 성막제조법, 십계명 돌판(1차) 받음 | |
올라감 | 24:13,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
내려감 | 32: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
7차 등정 : 모세의 중보적 기도 | |
올라감 | 31: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① 올라갔다는 언급은 없으나, 모세가 여호와께 다시 나아가(돌아가서)서 여쭈었다는 것은 올라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 |
내려감 | 내려왔다는 기록은 없음 |
8차 등정 : 두 번 째 40일, 두 번째 십계명 돌판 받음 | |
올라감 | 34: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
내려감 |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