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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4:1-4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 칼빈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만물과 모든 인류의 조물주와 통치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을 인하여 찬송합니다.
다윗은 이 생각에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나머지 인류보다 더 우선적으로 자신의 특수한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자신의 성소를 세우심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보여주신 특별한 은총을 찬미합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성소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공개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지하게 섬기며 거룩과 의에 몰두하려고 이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청결케 한자들에게만 가까이 계셨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 더욱더 분명하게 제시되었기 에 다윗은 이 은혜를 웅장한 시적 운율로 송축함으로서 참 신자들로 하여금 더욱더 기민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존귀케 하는 생활을 계속하도록 격려합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절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입니다.
다른 많은 성경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나머지 모든 인류들과 비교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을 다른 모든 민족으로부터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호의로 그들을 받아들이심으로 더욱더 뚜렷하게 비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 시편 서두의 의도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친근하게 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섭리에 의해서 이 세상을 보존하시기에 그분의 통치 능력이 모두에게 골고루 미치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아 마땅한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아버지로서의 보살핌을 주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모든 민족보다 유대인들을 더 기뻐하셨던 만큼 그들을 이방민족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어떤 거룩한 관계가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시편 24 편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다윗은 그 백성들에게 거룩할 것을 유도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로 택한 자들이 그들에게 특유한 특징을 가져야 하며 모든 면에서 이방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그 백성들을 자극해서 하나님의 독점적인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에 대해서 편견을 갖도록 함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다윗은 그 백성들의 선택 목적과 계획에서부터 그 백성들이 정직하고 거룩한 생활에 전념할 그때 가서야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들에 비해 그 백성들에게 베푸신 존귀를 확고하고 평화롭게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그들이 거룩함을 갈고 닦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특수한 민족으로서 뚜렷한 단체를 이루게 한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왕으로 선포함으로서 만민으로 하여금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적은 소수와 구원의 계약을 맺으시고 성전 건설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자신의 임재에 대한 상징을 보여주신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그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밝혀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의 숫자에 들고자 한다면 마음과 손을 청결하게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충만함'이라는 말에 관하여 우리는 바울의 권위에 의해 증거된 대로 이 땅을 장식하고 있는 모든 재물이 이 말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 기자가 이 표현을 통해서 이 지상의 가장 두드러진 장식과 영광인 인간 자신들을 뜻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 인간들이 끊어진다면 이 지상은 하나님께서 거기서 다른 모든 재물을 없애버리는 경우보다 더 흉측하게 될 것이며 황폐와 고독의 풍경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이 땅에 무수한 종류의 과일이 그렇게 풍성하게 맺히는 것과 이 땅에 아름답고 유쾌한 곳이 그처럼 많은 것은 인간들의 용도와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고 무슨 목적이겠는가?
다윗은 다음 소절에서 자기가 주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동일한 내용을 두 번씩 반복하는 것은 다윗의 통상적인 방법이요 여기서 '땅의 충만함'과 '세상의 거민들'은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표현 속에 인간의 용도로 풍성하게 가득 차 있는 이 땅의 재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음식을 두고 강론하면서 어떠한 음식도 불결하지 않는 이유가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전10:26)는 자신의 논리를 지지하는 뜻에서 바로 이 구절을 정당하게 인용합니다.
시편 24 편
2. 본문 2절은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입니다.
다윗은 인간들이 본래부터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 아래 있으며 어느 장소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진리를 확증합니다.
또 다윗은 피조물계에 드러나 있는 질서를 통해서 이 진리를 확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경이적인 섭리가 지상의 모든 표면에 뚜렷하게 반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윗은 가장 명백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땅이 물 위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들의 거주처로 마련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철학자들도 물이라는 요소가 땅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알아서 땅의 어느 부분이라도 물에 덮이지 않고 거주할 수 있도록 남게 되는 것은 두 요소의 성질에 어긋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욥(28:11, 25)은 억제받지 않을 경우 당장 이 땅을 뒤엎고 무서운 혼란을 가져오고야 말 바다가 이 땅을 뒤엎지 못하도록 바다의 격렬하고 무서운 광기를 억제하는 하나님의 특이한 기적을 장엄하게 찬미합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서 이 점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합니다.
다윗은 물이 온 지면을 덮을 정도로 퍼졌다는 점을 말한 다음에 그 물이 하나님의 뚜렷한 명령에 따라서 한 곳으로 물러가서 후에 창조될 살아있는 피조물들을 위해 빈 공간을 남겨 주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창1:9).
이 문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그들의 거처와 다른 편의를 마련하심으로서 그들을 보살피셨다는 점과 한 가장이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후대하는 것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낯선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라는 말로서 이 지구에 대해서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통속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배우지 못한 자들의 수준에 맞춥니다.
하지만 육안에 의해서 판단된 것으로 보이는 이런 표현법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땅의 요소가 그것이 지구층(地球層)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물 밑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땅의 주거 부분은 물 위에 있는데 이러한 물과 땅의 구별이 계속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터를 위해 물을 밑에 두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후로 모든 인류에게 자신의 아버지로서의 배려를 확대하셨듯이 유대인들이 다른 모든 민족을 능가하게 된 가장 특이한 존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별한 값없는 그리고 주권적인 선택으로부터 나올 뿐입니다.
시편 24 편
3. 본문 3절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소를 세우시고 자신을 위해서 유대인들 가운데 거처를 선택하신 것이 순전한 은혜에서 나온 일이었다는 점은 당시 잘 알려져 있었던 만큼 다윗은 이 주제를 다만 암암리에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윗은 본 구절에 담겨있는 다른 내용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참 이스라엘 백성을 거짓된 자들과 사생아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나머지 세상 사람으로부터 구별한 것은 그들을 자신의 특수한 기업으로 삼으려는 뜻에서였다는 점을 들어 그들에게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합니다.
나머지 인류도 물론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그 분의 제국에 속하지만 그러나 교회에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운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무리 속으로 받아들이시는 모든 자들을 거룩함으로 부르며 하나님의 택함에 따라서 그들에게 거룩함을 따르라는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서슴없이 사칭하는 위선자들을 간접적으로 꾸짖습니다.
이 위선자들은 이러한 명칭이 갖는 탁월성은 하나도 없으면서 자신들에게 이러한 명칭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개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단지 외형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오히려 다윗이 하나님의 독특한 은혜를 의도적으로 강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순결하게 섬기려면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 전에는 성전에 들어가거나 접근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스스로 배우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불경건한 자들과 악인들도 성전을 자주 드나드는 습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사1:12) 그들이 자격이 없으면서 하나님의 궁전에 들어와 그곳의 마당만 밟는 것으로 책망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을 다룹니다.
하나님의 집은 거룩하므로 어떤 사람이 무모하게 그리고 아무 권리도 없이 거기에 쳐들어갈 경우, 그들의 타락과 남용은 그 집을 오염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합법적으로 거기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에 다윗은 여기서 그들이 거기에 올라가는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 속에는 사악하고 세속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성소에 올라가서 불결로 그것을 더럽히는 행동에 대한 가혹한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제 15편에서 더 자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시편 24 편
본 구절 하반절에서 다윗은 불굴의 인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시온산에 올라 하나님 전에 나타나 설자가 누군고'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물론 (쿰)이라는 히브리어에는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제 1편에서 살펴본 대로 대부분 그것을 '서다'로 봅니다.
이것은 앞 소절에 언급된 것과 동일한 생각에 대한 반복이지만 단순히 그것에 머물 뿐만 아니라 다윗은 그들이 마땅히 올라가야 할 목적을 표현함으로서 그 주제를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 반복과 강조를 종종 다른 시편에서도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간단히 말해서 다윗은 당시 교회에 제아무리 많은 악인들이 의인들과 뒤섞여 있더라도 내면적인 인간 속에 진실을 동반하지 않는 외형적인 고백을 일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하는 점을 밝히 말합니다.
다윗이 언약의 성소에 관하여 말하는 내용은 교회의 지속적인 통치에 적용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4. 본문 4절은 "큰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그는 손이 깨끗하여 마음이 청결하여 영혼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칼빈)" 입니다.
손과 마음의 청결,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하는 표현으로 다윗은 모든 경건심을 암시하고 정돈된 생활을 가리킵니다.
참된 청결은 물론 마음에 그 자리를 두고 있지만 그 성결의 열매는 손의 작업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깨끗한 마음을 전체 생활의 청결과 관련시키는 것은 아주 적합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열매를 통해서 뿌리가 선하다는 점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건전한 마음을 가졌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스운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이 외형적인 전제보다 앞서지 않는다면 손과 발 그리고 눈을 의의 법칙에 따라 맞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손을 먼저 취급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우리는 주저없이 결과가 종종 원인에 앞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순서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잘 알려진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익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앞에 깨끗한 손을 가져오고 그것과 함께 꾸밈없는 마음을 가져오기를 원합니다.
여기 '영혼을 .... 두다' 라는 말은 '맹세하다' 라는 말 대신에 쓰였습니다.
시편 24 편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종들에게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그 종들이 맹세할 때 존경과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한가지를 통해서 인생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신실성과 정직성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대유법적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서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점은 다음에 곧 이어지는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 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는데 이것은 앞 내용에 대한 설명 형식으로 덧붙여집니다.
'뜻'(영혼-칼빈) 이라는 히브리어는 거기에 붙어 있는 점(히렉) 때문에 '나의 영혼'과 '그의 영혼'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으므로 유대 주석가들 가운데는 '나의 영혼을 허영에까지 들어올리지 않은 자'로 읽으면서 '나의'가 하나님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우리는 이것이 무리하고 억지 해석이므로 거절하겠습니다.
이것은 크게 강조할 때 쓰이는 표현법입니다.
맹세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담보로 내어바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영혼을 들어올리다'가 '그것을 거짓말하는데 적용하다'는 의미 대신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우리는 이 해석을 큰 반대 없이 채택하겠습니다.
이런 해석이 의미에 별 차이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왜 믿음과 하나님을 부르는 문제에 대해서 한 마디로 분명히 잘라 말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유는 쉽게 설명됩니다.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서 신중하게 행동할 정도로 그분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부여받기 전에는 자신의 형제들에 대해서 정직하고 순직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희박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신앙을 평가할 때 그들의 동료 인간에 대한 그들의 행동의 성격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마23:23) '심판, 의와 인과 신' 을 율법의 핵심으로 표현하십니다.
바울도 한때는 '사랑'을 '율법의 목적'(딤전1:5)으로 말하는가 하면 "온전하게 매는 띠"(골3:14)로 말씀합니다.
시편 24 편
시24:5-6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1. 본문 5절은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교회의 회원이 되며 하나님의 양무리로 계산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따로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구절에 참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가운데 타락하여 서자가 된 자들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인들이 스스로 더 방종하게 나가면서 그만큼 더 주제넘게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빚이라도 지고 있다는 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하는 것은 그들에게 참 신자들과 같은 동일한 외형적인 상징이나 표시를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음 구절에 나오는 '이는'이라는 지시대명사에는 아주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외형적인 의식의 가면만 가지고 자랑하는 모든 사생자의 세대를 명백히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 구절에서 다윗은 '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약속된 복에 참여할 자들은 이름만 가지고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행세하는 자들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위선이 없이 각자의 소명에 응하는 자들뿐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결코 부족하지 않는 복을 그들을 위해서 마련하셨기 때문에 이를 추구하는 자신들의 노력이 호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경건과 올바른 생활에 대한 큰 자극제입니다.
'의' 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복을 뜻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의롭고 신실하다는 점을 입증할 수도 있고 또는 신자의 의의 열매내지는 보상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다윗의 의미는 충분하고 분명합니다.
다윗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를 불의하게 더럽히는 자들에게 의의 열매내지는 보상이 베풀어질 것으로 예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참 예배자들을 실망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것이 다윗의 특수한 임무이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2. 본문 6절은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입니다.
시편 24 편
우리는 '이는' 이라는 지시대명사를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종들의 목록에서 자신들의 할례와 짐승의 제사만 믿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전혀 무관심하면서도 무모하게 교회에 자주 드나드는 모든 가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살해 버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예배를 기뻐하는 것으로 위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능한 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자신들을 떼어내려는 욕망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자신들 모두가 거룩한 후손에 속하는 것으로 떠들어대기 마련이므로 시편기자는 거룩한 민족이라는 명칭을 율법을 참으로 준수하는 자들에 국한시킵니다.
이는 마치 자기가 육신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적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시편 27편에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많은 곳에서 자신들의 경건성을 증거하기 위해 언약궤 앞에서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자들로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그들이 순수하고 거룩한 마음에 이끌려 그곳에 왔을 경우에 국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이란 내심으로는 그들의 허풍과 거짓 구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피하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어떤 점에서 참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기에 다윗은 여기서 거룩과 의를 열심히 갈고 닦지 않는 한 하나님을 진실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이 문장을 더욱 더 강조하는 뜻에서 다윗은 제 2인칭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상대로 자신의 강론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위선자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소환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서 다윗은 우리에게 그들의 빈 말로 무엇을 이야기하든 하나님의 심판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다윗은 동일한 가르침을 확증하는 뜻에서 '야곱'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야곱의 자손들에게 적용합니다.
이것은 마치 할례가 육신에 따른 야곱의 모든 자손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하긴 해도 우리는 하나님 경외를 통해서만 선택받은 백성을 구별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시편 24 편
시24:7-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박윤선 주석에 의하면 "이 구절들은 여호와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는 사실을 너무 감격히 여기는 말씀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다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도 그 우주를 부족으로 여기실 만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옛 백성들을 위하여 성전에 임하시고 오늘날의 교회에 임하시며 우리의 심령에 임하시다니'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 본문 7절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입니다.
성막에 비해 외형으로 더 웅장한 성전의 화려한 구조가 아직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여기서 장차 그 성전 건축을 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다윗은 신앙이 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더 자발적이고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율법의 의식적인 준수에 전념할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상징에 의해 그 백성들 가운데 거주 해 주시고 자신의 하늘의 거처가 지상에 보여지기를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결코 평범한 표시가 아닙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연약성이 허락하는 한 우리가 신앙의 단련에 의해서 하나님에게까지 들려 올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전파, 성례, 거룩한 성회 그리고 교회의 전반적인 외형적 통치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연합하기 위한 것 외에 다른 무슨 의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서 자신을 성도들에게 제시하시고 또 그 성도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마다 신속한 구조에 대한 보증을 주시는 것을 다윗이 보고서 율법에 지정된 하나님 예배를 그처럼 극찬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외형적인 화려함을 기뻐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편 24 편
그러나 아직 미숙하고 유아기에 있던 옛날, 하나님의 백성이 지상적인 요소를 통해서 하나님에게까지 들어올려지는 것이 유익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던 만큼 다윗은 서슴지 않고 그 백성들의 신앙을 확증하는 뜻에서 성전의 호화찬란한 구조를 제시함으로서 그 성전이 하나의 무익한 극장이 아니라 그 백성들이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하는 대로 올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할 경우에 그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가까이에 계시다는 점을 실제로 체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다시 종합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시온산에 짓도록 명령한 성전이 성막보다 더 웅장했던 만큼 그 성전이 유대인들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밝은 거울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 자신이 성전 건축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불타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다윗은 모든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동일한 간절한 욕망으로 불타게 함으로서 그들이 초보적인 율법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어서 더욱더 발전을 가져오게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문들'이 '영원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분의 지체로 두신 그의 백성의 지속적인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은 재료 면에 있어서나 솜씨 면에 있어서 뛰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성전의 으뜸가는 탁월성은 시편132편 14절에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거기에 새겨진 것에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문들을 '영원한' 것으로 말함으로서 시편기자는 성막과 성전을 대조시켜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성막은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이곳 저곳으로 이동했는데 마치 방랑자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온산이 선정되고 성전이 세워졌을 때부터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고 고정된 주거 장소를 갖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눈에 보이는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성전이 온 세상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된 오늘날에는 시온 산 위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벨론 포로 시기에 솔로몬이 세운 문들이 파괴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은 그 일시적인 전복에도 불구하고 확고하게 서 있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성전은 후에 곧 재건되었는데 이것은 그것이 항상 온전히 계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칠십인 역은 무지의 소치로 본 구절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시편 24 편
우리가 '머리들' 로 번역한 히브리어 (라심) 이 때에 따라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왕들' 이라고 쓰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진 '너희'라는 단어는 '문들이 그들의 머리를 든다'는 뜻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너희 왕들' 이라고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자는 여기서 왕들과 위정자들에게 하나님께 가는 길과 출입구를 여는 임무가 권고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럴듯한 해석이지만 이 예언자의 의도와 말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 말의 자연스런 의미로 알 수 있는 것은 교황주의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이 구절을 악용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의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의견을 확증하려는 목적에서 이 구절을 들어 그리스도가 지옥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기 위해 그 문을 두드리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건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추잡한 불신앙으로 그 말씀을 이렇게 곡해하고 와전시키는 교황주의자를 몹시 미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 본문 8-10절은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거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찬미하는 데 사용되는 칭송의 의도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할 일 없이 그의 성전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속히 구출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뜻에서 그 성전에 거처를 정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이 문장이 의문문으로 되어 있고 동일한 문장이 반복되어 있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양하고 구원하며 신실한 자들을 자신의 그림자 밑에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무적의 힘으로 무장하고 오신다는 점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뜻에서 자신이 놀라고 있는 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시편 24 편
이미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시는 것으로 말해질 때 그분의 무한하시고 신비하신 본질이 그 속에 봉쇄되거나 국한된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아 거기에 임하셨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내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20:24)고 모세에게 하신 약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허망하고 공연한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자기백성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로서 굳게 서 있습니다.
곧 이 말씀들은 신실한 자들이 체험한 사실들입니다.
그 신실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마치 성전에 꼭 붙들려 있는 것처럼 미신적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성전과 그 안에서 거행된 예배를 통해서 그 신실한 자들의 마음을 하늘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여기 언급된 말씀의 내용은 그 백성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이어지는 결과를 통해서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헛되고 환상적인 상징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 백성을 방어하고 보호하는데 있어서 전능한 하나님의 팔을 펴실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주제를 부지런하고 한결같이 묵상하는 일에 있어서 참 신자들에게는 끝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는 뜻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을 입고 이제 자신을 "영광의 왕"과 "만군의 여호와"로서 그 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림자와 상징을 통해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뿐 아니라 실제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들어가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 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무적의 인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랑하지 못하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시온 산이 오늘날 성소로 지정된 장소는 아닙니다.
언약궤도 하나님이 그룹들 사이에 거하신다는 형상 또는 상징이 더 이상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상들과 더불어 말씀 전파와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이 특권을 공동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로서는 이러한 도움들을 정중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만일 우리가 교만하여 불쾌하게 이것들을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에게서 자신을 완전히 멀리하지 않을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