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체험과 윤회의 굴레
에세이문예 24년 봄호 시를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체험은 경험적 인식론이나 인식기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 내지 지각작용에 의해 깨닫게 되는 내용을 직접 경험한 생체험을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체험으로 보았던 것은“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는 정말로 체험인 것이다.”라고 <말테의 수기>에서 한 릴케의 피력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체험시론은 스티븐스에 의해서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시를 읽는 것은 체험이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시를 쓴다는 것도 체험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떻든 체험은 현대시를 성립시키는 철학적이고도 문학적이며 심리적 근간이 된다고 하겠다. 체험은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도 지적인 작용에 의해 깨닫는 내용이다. 이 말은 대상존재나 대상 사물을 파악함에 있어 사실적이고도 실제적 경험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이 된다. 관념이나 주관, 그리고 감정으로 대상 존재를 파악하고 해석했던 19세기의 낭만주의 시를 우리는 모순의 미학이라고 한다. 이 말 속에는 체험이 가미되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가공적 세계인식이나 존재인식을 배제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Ⅱ.
이 점에서 체험시론은 실증적이라 할 수 있다. 체험을 통한 사실이나 실물의 해석이 아니라 창조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의사진술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여름호 시 계간평은 체험시학이 빛나는 김희영 시인의 <밥상 앞에서>와 불교적 사유가 빛나는 남현설 시인의 <낙엽지는 거리에서> 두 편이다. 딱히 대상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기준을 정하지 않는 이유는 좋은 시를 선택 기준으로 하면, 대체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이 매 번 대상자가 되기 때문에, 평자는 대상을 고를 때, 작품의 우열을 선정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결국 그 기준은 <선택과 배제의 원리>다. 딱히 정해진 룰도 없고, 시를 감상해서 뭔가 그 시에 대해서 쓰고 싶은 충동을 주는 시가 있으면, 그 시를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을 선정 기준으로 삼고 있다. 김희영 시인의 <밥상 앞에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한국적 정서가 수놓아져 있어서 우선적으로 선정하였고, 그래서 희미해져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되살려보고자 했고, 마지막으로 남현설 시인의 <낙엽지는 거리에서>는 현대인의 실존을 윤회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어서 관심을 끌어 문제작으로 뽑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밥상머리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가족들의 모습이 아닐까
달그락달그락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
아삭아삭 반찬 씹는 소리
감미롭게 번지는 밥 먹는 소리
밥을 적게 먹는다고
좋아하는 반찬만 골라 먹는다고
잔소리해 온 시간도
밥을 안 먹는다고
인스턴트 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걱정으로 채워온 날들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사랑이어라
밥상 앞에서 느껴보는 행복이리라
김희영의 <밥상 앞에서> 전문
가족이 함께하는 밥상머리는 ‘가정의 심장’이고, 식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제공해 준다. 시적 화자는 가족끼리 밥상머리에 앉아 식사하는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호박국을 냄비에 끓여 밥상 한가운데에 놓고 식구끼리 같이 떠먹던 한국인의 모습을 바라본 서양인들은 위생관리가 안 되는 민족이라 했다지만 한국인이면 누구나 정말 그 시절이 그리워한다. ‘식구’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민족의 유산이자 전통이고 개념이다. 오늘날 진정 옛날과 같은 가족애를 느끼며 살아가는 '식구'라는 게 있기는 할까. 시적 화자는 잔소리와 걱정으로 얼룩졌던 그 시간들을 모두 사랑이란 이름으로 녹여내고 있다.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우리의 단어 '식구'가 그립고,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까닭이리라.
가족은 영어로 패밀리family다. 노예를 포함해서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구성원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에서 왔다. 즉, '익숙한 사이'라는 의미다. 중국은 '일가(一家)', 일본은 '가족(家族)' 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즉 한 지붕 밑에 모여 사는 무리라는 의미다. 반면 우리나라는 ‘식구’라는 말을 주로 사용해 왔다. '같이 밥 먹는 입'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는 '가족'이란 ‘한솥 밥을 먹는 식사 공동체’라는 뜻이다. 가족이란 나의 분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가족들은 물리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들인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 밥상머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깝던 가족들이 옆에 있어도 아주 멀리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각자 바라보는 시선들이 너무 달라 보인다. 각자 살아오면서 삶의 가치관도 너무 달라져 간다. 이런 차원에서 이 시가 주는 의미는 크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한 집에 살아도 한 상(床)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식사를 할 기회가 없다면 엄밀히 말해서 "핏줄이기는 해도 '식구'랄 수는 없다. 최근 한국 가정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가족 간에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풍조가 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몇 년 전 뉴스에 나온, 고된 이민 생활 속에서도 6남매를 모두 미국 예일대와 하버드대에 보내, 미국 최고 엘리트로 키운 ‘전혜성’ 여사도 자녀 교육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식사는 가족이 함께 했다”며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편식한다는‘잔소리’나 인스턴트 음식을 즐겨 먹는 데 대한 부모의 걱정을 전부 ‘사랑’과 ‘행복’이란 이름으로 감싸는 시적 화자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이 시를 통해 고양시키고 있다.
어쩌다 아이들이 깨어 있더라도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제 방에서 건성으로 인사만 건내고, 그러니 밥상머리 교육이나 대화는 기대하기 힘들고 나아가 얼굴은 자주 못 보더라도 서로 각자의 시간과 생활은 간섭이나 침범을 하지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 찬바람 불듯, 집안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게 현실이다. 평소 눈길 한 번 준 일 없던 애완견만이 한 밤중에 쓸쓸히 반갑게 맞아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오지 않는가. 시대와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자식이 결혼으로 분가하기 전까지는 가급적 ‘식구’들과 지지고 볶는 생활을 갖는 것이 진정한 ‘식구’이며 진정한 삶의 행복이라는 시인의 전언이 따갑게 귀전을 울린다.
가을이 깊어지면
우리는 이별한다
하늘에라도 닿을 듯
뻗어있는 가지에
서린 비 지나면
푸른 기억은
마술에 걸린 듯
색색 옷을 입고
바람에 부르는 노래에
훨 훨 춤추며
훠어이 훠어이
길 떠난다
어디로 가야 할까
생의 질문에는
해답이 없지만
그래도 묻는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남현설 <낙엽지는 거리에서> 전문
시적 화자는 한 그루 나무를 소재로 하여 시를 썼다. 푸른 나무가 계절이 바뀌면서 낙엽으로 변하여 땅에 떨어지는 과정을 윤회라는 철학적인 사유로 풀어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바람과 구름이 엉켜 비가 되고, 빗물은 다시 태양에 증발되어 수증기로 변했다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로 변해 한 바퀴 도는 것이 바로 자연의 윤회현상이라고 한다. 나무의 잎을 눈에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별 꾸밈이나 변용없이 그저 진솔하게 표출한다면 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우리는 이별한다’는 1연 구조로 볼 때 시적 화자는 이 시를 연역추론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우리’는 나무의 잎을 가르키기도, 대상을 보고 있는 시적 화자를 비롯한 인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별한다’는 것은 ‘별리’와 동시에 ‘자연으로의 귀의’라는 죽음을 의미한다. 시적 화자는 봄의 푸른 기억을 간직한 채 가을을 맞아 춤을 추며 기꺼이 길을 떠난다는 진술을 통해 자연의 이법에 따른 생의 순리를 잘 묘파하고 있다. 낙엽의 윤회과정을 ‘색색 옷을 입고// 바람에 부르는 노래에/훨 훨 춤추며/훠어이 훠어이/길 떠난다’로 구체화함으로써 낙엽이 졌다는 사실을 낙엽이 떠난다는 사실로 전이시킨다.
‘어디로 가야 할까/ 생의 질문에는 / 해답이 없지만 / 그래도 묻는다 //다시 돌아올 수 / 있을까.’5,6연에서 시적 화자는 나목의 겨울나기를 윤회라는 관점에서 사유한다. ‘어디로 가야 할까’는 인생을 살면서 실존적 인간이 시시각각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번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하는 것은 유한한 인생을 인정하면서도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 하는 인간의 속성을 나타낸다. 마치 우리 인간이 죽기 전에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으로 또 다른 무엇으로 환생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으로 그 의미를 전환 내지 이동시킴으로써 또 다른 치환을 성립시키고 있다. 이렇게 해석해 놓고 보면 단순히 대상 사물인 나목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진솔하게 진술하지 않고 이러한 생각, 느낌, 보임을 다른 의인화나 의미화로 변용하거나 치환시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나목을 구체적 체험으로 해석하는 다시 말하면 대상사물에 몰입하지 않고 거꾸로 객관화함으로써 상기할 수 있는 체험적 해석인 것이다.
체험은 감각을 통해 외적이고도 객관적 대상물과 만나는 일이다. 이 만남은 우연이었건 필연이었건 혹은 의도적이었건을 막론하고 만남을 통해 필연적인 관계설정을 성립시킨다. 시적 화자가 나무의 푸른 잎이 노랗게 또는 빻갛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 나무가 유발시키는 정서의 환기는 그 후 소멸하여 자취를 감추지만 춤을 추며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현상 그대로가 고스란히 시인의 의식이나 뇌리에 인화된다. 이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지녔을 때 이는 마치 여인이 아이를 배듯 시인은 이미지로 포태하는 것이 된다. 감각적 체험에 의해 배태된 사물의 그림들이 시로 창출되는 분만으로 해석되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매체가 바로 객관적인 대상사물이다. 불교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연기(緣起)요 윤회다. 남현설은 ‘낙엽’을 통해 자연의 윤회적 사상을 독특한 미감으로 표출했다.
우주의 섭리에 의해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윤회를 하게 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순환하는 모든 것들을 세계라고 표현한다. 삼라만상은 이 윤회 굴레의 인과를 따르며,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제행무상은 삼라만상은 인연법에 의하여 모두 윤회함을 전제로 하고 삼라만상의 운행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나 자신이 사망한 뒤 영혼이 되었다가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고 생로병사를 거친 뒤 다시 영혼이 되어 또 태어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 윤회는 불교에서 말하는 순환론적 시간관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자 곧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변화, 인간과 만물 혹은 자연의 순환 원리 그 자체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 중에 윤회가 아닌 것이 없다. 이 시 역시 나무가지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잎의 변화, 사계절의 변화와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유전, 어김없이 교대하는 낮과 밤이 시간의 윤회라면, 여기저기 이곳 그곳과 같은 동서남북의 방위변환은 공간의 윤회다.
Ⅲ.
제대로 시를 볼 줄 아는 독자들은 위대하고 큰 것이 주는 압도감보다 작고 절실하고 당연한 것이 주는 소박한 감동에 더욱 매료되는 법이다. 이런 절실한 것에 대한 배려나 인생에 대한 깊은 사유는 시의 미덕이다.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이를 구원해야 할 작가적 사명이기도 하다. 사라져가는 것 중에서도 살려야 할 것 미풍양속이나 죽음으로부터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사상적 접근을 위한 시인의 노력이 큰 감동으로 다가서는 것은 시인의 이러한 노력이 시 속을 절절히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보이게, 잴 수 없는 행복을 잴 수 있게 구체어로 치환하는 두 시인의 능력은 역시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아침 밥상 앞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행복의 향연, 낙엽을 보며 생각해 보는 윤회의 문제가 우리를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바로 이런 시적 원리를 통해 시가 생성된다는 데서 우리는 시가 힘을 갖고 감동을 주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