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한강
어느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 말은 필요하지 않을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 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겅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첫댓글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의 시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결코 꾸미지 않은 일상의 평범한 독백 같은 언어들이 잔잔히 스며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