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니라고 봐
2021.11.02
지난여름에 경력 아나운서를 뽑았습니다. 방송 경력 2~5년의 아나운서를 선발한다고 공지했는데, 1,200명이 넘는 아나운서가 지원했습니다. 한국아나운서연합회에 등록된 아나운서가 600명이 조금 넘는데 경력 아나운서 채용에 전체 아나운서의 배 이상 인원이 몰린 겁니다. 한국아나운서연합회 소속 아나운서는 해마다 숫자가 줄어드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아나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주식, 스포츠, 게임 등등에서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들을 아나운서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전통적인 의미의 아나운서는 줄었는데 프리랜서 아나운서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지상파 방송사 경력 아나운서를 채용하는데 전체 아나운서보다 더 많은 아나운서들이 지원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아나운서가 의사나 변호사처럼 국가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니 주식, 경제 채널, 게임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이 아나운서라는 명칭을 스스로 쓰는 것을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나운서라는 직업적 소명을 지키며 공들여 쌓아 올린 소중한 이미지가 종종 훼손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남성 잡지에 등장하는 스포츠채널의 방송 진행자들에게 아나운서 호칭을 쓰는 것을 보면 불편합니다. 그런데 여러 매체에서 그들에게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아낌없이 쓰고 있습니다. 기사 제목도 ‘XXX 아나운서 아찔한 몸매’ 등등을 써가며 낚시질을 합니다.
또 하나 차이점은 아나운서는 공익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외부 행사의 사회를 보지 못합니다. 공익적인 행사는 정부의 부처나 산하기관 또는 지자체가 주관하는 행사 정도입니다. 이외의 상업적인 행사의 사회를 본 것이 알려지면 회사는 인사위원회를 열어 징계를 합니다. 취업규칙 위반이기 때문입니다. 상업적인 행사의 사회는 적게는 회당 사례금이 오백만 원에서 많게는 천만 원이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인기를 얻은 아나운서들이 종종 프리를 선언하고 회사를 나가는데, 이런 행사의 유혹이 큽니다. 한 해에 전국적으로 3,000여 개의 행사가 열리는데 이중에 20~30개 정도만 해도 방송사에서 받는 연봉을 상회합니다.
프리랜서가 된 후에도 계속 아나운서 호칭을 쓰는 방송인들에 대해 필자가 호감을 갖지 않는 이유는 철저하게 상업성을 배제하며 정도를 걷고 있는 한때는 동료였던 아나운서들에 대한 예의를 그들이 지키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아나운서가 모두 예능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는 뉴스를 진행하고 일부는 교양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꽤 많은 아나운서들이 인기보다 직업적 완성을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이런 대다수가 만들어놓은 아나운서라는 이미지에 편승해 일부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이 금전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아나운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다른 직종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최근에 시사IN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1위부터 3위까지가 언론인이 아니었습니다. 십 년이 넘게 1위를 하고 있는 손석희 JTBC 사장은 지금은 언론인이 아니라 전문 경영인입니다. 2위를 한 유재석 씨는 본인도 의아해한다고 얘기할 정도로 의외의 결과에 당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장면이 방송된 영향이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은 스스로 개그맨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만, 유재석 씨는 앵커를 해도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초에 타계한 래리 킹(Larry King)도 마이애미 방송국의 라디오 DJ에서 시작해서 미국을 대표하는 언론인이 됐듯이 말입니다.
3위를 한 김어준 씨를 언론인이라고 판단하지 않는 근거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론인을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에 포함한 공직선거법이 위헌이라는 판단이 2016년에 있었습니다만, 공직선거법 8조에 따르면 ‘언론인이 선거운동의 목적 등으로 편파 보도나 논평을 하면 선거방송심의위원회 등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대중매체를 이용한 정치적 지지 표현은 불법이지만, 개인적으로 어떤 정당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다수 현직 언론인들을 개인적으로도 정치적 의사표현을 삼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나 진행하는 방송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의심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은 언제나 최소한의 방어막이기 때문에 바른 언론인이라면 그 판단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들을 언론인 순위의 최상단에 올려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대로 보여주는 것을 게을리하는 것은 나쁘다는 생각입니다. 제 입사동기인 모 아나운서는 호감형의 외모로 큰 인기가 있었습니다. 성격도 좋고 방송도 잘하는 그 친구가 하루는 “내 앞니 두 개가 의치야. 내 발음이 느린 편인데. 앞니 두 개가 의치여서 그런 것 같아. 가끔 악몽을 꾸는데 큰 행사의 사회를 보는데 의치가 빠지는 꿈을 꾸곤 해.”라며 자신의 고민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던 친구가 어느 해인가 대한치과협회가 선정한 ‘건치연예인’ 상을 받았습니다. 동료가 수상을 했으니 축하를 하긴 했지만, ‘도대체 수상기준이 뭐였을까? 치과 진료를 성실히 받아서? 치과에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등등 아리송하기만 했습니다. 정작 당사자도 신뢰하는 언론인 2위를 한 유재석 씨처럼, “나도 잘 모르겠어. 고맙긴 한데, 왜 받았는지…”라고 얘기한 걸로 봐서 건치연예인 선발에 간단한 치과진료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조차도 실체보다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TV나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사실의 일부일 뿐입니다. 필자는 언론인이 아닌 사람이 신뢰받는 언론인 1, 2, 3위를 한 사실과 아나운서가 아닌 사람을 대중이 아나운서로 부르는 현상은 대중매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오류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제 생각이 조심스러운 이유는 이러한 주장이 제 편협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커다란 변화의 흐름에 시대적으로 역행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스스로 염려하는 부분이 조금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불리하다고 해서 입을 다무는 것은 옳지 않기에 용기를 내어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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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BECA 석사
현재 S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