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문화사: 언어와 문화 속에 담긴 숫자의 흔적과 수의 상징성에 관하여, Weltgeschichte der Zahlen, Harald Haarmann, 전대호 옮김, 알마, 2008
구석기 시대에 시작된 추상적 사고- 초기 인류는 수를 셀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의 문화적 진화와 정신적 능력의 발전을 살펴봐야 한다. 추상적인 표현과 관념, 더불어 수 개념을 다루려면 상징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 문화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조직화는 우리가 체험하는 세계의 요소들을 상징의 망으로 연결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시대 공동체의 인간들은 번식과 도구 제작 그리고 먹을거리 마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상징체계를 창조하고 그것에 따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에 의해서도 서로 결속했다. "상징 창조는 먹기, 보기, 움직이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원초적 활동이다. 그것은 늘 있어온 근본적인 정신적 과정이다. (Langer, S. K., 1942) (11-12)
- 과거에 학자들은 상징능력들이 약 3만~4만 년 전 사이에 폭발적으로 반개했다고 믿었다. 가장 오래된 조형예술품, 장신구, 서유럽 동굴예술에 나타난 추상적 주제가 이 시기에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에 발굴된 사례들을 보면 추상적 상징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훨씬 더 위로, 7만 년 전보다 더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4)
- 요컨대 아프리카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은 대칭에 대한 감각과 추상적 형태의 윤곽에 대한 감각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아마 수도 셀 수 있었을 것이다. (15)
- 우리 조상들이 수를 표기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훨씬 더 나중에 역시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 일찍이 1930년대에 눈금 기호가 새겨진 구석기시대의 뼈가 발굴되어 감탄을 자아냈지만, 그 뼈가 가공된 시기가 무려 2만2000년 전이라는 게 정밀한 탄소연대측정법으로 밝혀진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다. (15)
- 의도적으로 흡집을 낸 동물의 뼈는 유럽의 구석기시대 동굴예술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달력의 시초를 볼 수 있다... 이 구석기 문화는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가 만들어진 3만 2000년 전에 시작되었는데, 수를 표기하는 기술은 이 시기 후반에야 발명되었다. (17)
- 이런 표기 체계들은 구석기시대 사냥채집자들의 사회에서 개발된 가장 복잡한 문화적 산물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수 개념을 새김무늬로 '표기'한다는 생각은 수천 년 동안 존속했다. 부절(tally)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근대 초기까지도 쓰였다. (18)
- 점과 선이라는 기본 요소가 수 표기에 쓰이는 방식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유사한데, 이 유사성은 선사시대에 어떤 한 곳의 생각이 아주 멀리까지 이동했음을 시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유사성은 인류의 발명정신이 여러 곳에서 자발적으로 혁신을 이뤄냈음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 나중에 문자가 세계 여러 곳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실험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19)
수와 계산의 저편: 상징, 신화, 마법- 정보시대를 사는 우리는 선사시대의 수 표기를 보면 자동으로 실용적인 수 세기 활동을 떠올린다. 그러나 까마득한 과거 이래로 우리는 수에 마법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왔다. 이에 대한 증거는 유럽의 구석기시대 동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동굴의 그림에서 홀로 있거나 무리를 지어 있는 선과 점을 볼 수 있다. (21)
- 연구자들은 무리 지어 나열된 점들을 우랄 민족들의 수신비론과 관련짓는다... 그 동굴의 그림에서 점들의 배치를 살펴보면 마법의 수들이 확인된다. (22-23)
- 수는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상상력을 특히 강하게 자극하고 심지어 도발해온 듯하다... 이런 부정적인 반응을 미신으로 여겨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수에 부여된 많은 상징 가치들은 오래된 종교 및 신비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24)
수를 가리키는 단어- 세계에 아주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수를 가리키는 단어, 즉 수사의 유형이 엄청나게 풍부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51)
- 수사체계의 풍부한 다양성에 대해 현재 우리가 아는 바를 응축하면, 포괄적인 수사 유형론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수 세기가른 목적을 위해 수 개념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에 관한 보편적인 모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숫자체계의 구조에 원형은 없다. 우리 언어의 기반구조를 규제할 만한 보편적 틀은 없다. (51-52)
- 세계 여러 언어의 수사체계는 오래전부터 언어학자만이 아니라 인류학자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두 분야 중 어느 쪽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수사 분류체계를 내놓지 못했다. (52)
- 추상적인 수사가 없어도 수를 세는 데 지장이 없다. 따라서 수사 없는 언어가 당연히 있다. (53)
중국 문화권- 동아시아 언어들은 유럽 언어들과 구조적으로 무척 다르다. 그러나 수사체계와 수 세기 원리만 보면 대체로 유사하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은 수와 관련해서 독특하고 유일한 곳인데, 중국의 문화와 수 표기법이 다른 언어들의 수사체계에 미친 효과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77-78)
- 중국인이 수를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상 왕조 후반인 기원전 12세기부터다. 가장 오래된 숫자들은 갑골문자에서 볼 수 있다. (78)
- 갑골문에 사용된 숫자는 특히 날짜 지정과 관련이 있었다. (78)
- 동아시아 지역의 오랜 수 표기 전통은 몇 가지 극단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79)
- 중국어에서 수 개념은 지금도 3,000여 년 전과 똑같은 기호와 원리로 기술된다. 토착 수 표기법을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유지한 언어는 중국어밖에 없다.
- 오늘날에도 아라비아숫자의 독점적 지배력에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언어는 중국어가 유일하다.
- 손가락으로 수를 셀 때 손의 모양을 본뜬 그림을 숫자로 채택한 언어는 중국어뿐이다.
- 중국에서 수학과 천문학은 근대까지도 점성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수의 마법적이고 신비적이며 또한 지속적인 작용력은 개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황제의 나라 중국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83)
- 일본어와 한국어는 오랫동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이들 언어는 토착 수사 계열과 중국어 수사 계열을 맥락에 따라 선택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85)
- 중국어가 한국어의 구조에 미친 영향은 일본어에 미친 영향과는 약간 다르다. 토착 한국어 수사들은 99까지 남아 있다. 중국식 한국어 수사는 100에서부터 비로소 등장한다. 따라서 한국어에서는 중복되는 수사가 일본어에서보다 훨씬 더 많다. (88)
고대 아메리카의 뛰어난 문화들 - 남북아메리카의 문화들은 약 1만 3000년 전에 시작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남진에 발맞춰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15세기 말에 유럽인이 들어올 때까지 그 문화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몇몇 고대 아메리카 문화, 다른 명칭으로 '콜럼버스 이전 문화'는 우리가 구세계의 문명들에서 보아 익히 아는 요소들(정착 생활, 농경, 도자기 제작, 기념비적 건축, 도시화 국가 조직, 문자 사용)을 획득했다. 이들 문명 요소는 컬럼버스 이전 공동체들에서 인간 창의력의 성취로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 (91-92)
- 고대 아메리카의 다른 문명 요소들 역시 독특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야, 사포텍,아스텍, 미스텍 문화들은 독창적이며 고도로 세분화된 계산 방식을 개발했다.마야 천문학자들은 종교적인 우주론을 위해 구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극도로 정밀한 시간 측정법을 개발했다. (92)
- 중앙아메리카 언어들의 구조에서 다양한 수 세기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93)
- 모든 컬럼버스 이전 문명들 가운데 핵심 역할을 한 것은 마야 문화다. 왜냐하면 마야 문화가 이룬 가장 중요한 혁신들이 이웃 문화들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 혁신들 중에는 계산법, 수 표기 방식, 이중 달력체계도 있다. (95)
- 문자를 다루는 기술과 달력을 다루는 기술은 본래 관련이 있다. 마야의 성직자와 천문학자는 복잡한 상형문자체계를 개발해 수, 날짜, 천문학적 계산을 기록하는 데 썼다. (97)
- 수를 상형문자로 표기하는 방식은 신비적인 상징체계로 둘러싸여 있다. (99)
- 마야문명은 기원후 8세기 후반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106)
- 스페인 식민시대 이후 마야인들은 스페인의 문화와 언어에 동화했으며 그만큼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들여온 시간 계측 방식이나 관련 개념들에 익숙해졌다. (108)
- 정보를 문자에 의존하기 않고 기록하기 위해 인류는 단단한 물체가 아니면서 가시적이고 운반 가능한 표시를 남기는 기법들을 발명했다. 한 예로 '키푸(khipu)'라는 매듭이 있다. 키푸는 주요 기능이 수를 표시하는 것이었지만 수백 개의 언어적인 개념도 표현할 수 있었다. (108)
- 매듭지은 끈을 수 세기와 계산을 돕는 기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안데스 지역 고대 아메리카인의 독창적인 기법이 아니다. 기원전 1000년까지 거슬러 오르는 중국의 자료들은 중국에서 문자의 도입 이전에 매듭 기법이 쓰였음을 말해준다. 서아시아에서는 로마 지배기, 즉 기원후 1~2세기에 세무공무원들이 세금 목록을 작성하고 영수증을 발급하는 데 매듭지은 끈을 사용했다. (109)
- 카푸 끈 다발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잉카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거리 통신 방법이었다. (109)
-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문명의 필기사와 유사하게 키푸카마요크는 매듭 기법 전문가로서 잉카제국의 재정, 상업, 지배자 가문을 위한 재화 비축량의 통계를 담당했다. (113)
고대 구세계 문화의 흔적들- 고대 문명에 대한 전통적 서술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적 발전, 더 정확히 말하면 기원전 3000년을 앞두고 고대 수메르 도시국가들이 형성되던 시기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117)
- 일반적으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가르는 본질적인 기준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자 사용과 역사 기록이다.이 전통은 우루크 유적 제4층에서 발굴된 점토판들의 제작 시기인 기원전 3150년경에 시작되었다. (117-118)
- 그러나 지금은 이것 역시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다. 더 오래된 문자 사용과 수 표기의 흔적들이 존재한다. (118)
- 그리스인과 기타 인도 유럽 종족들인 트라키아인, 마케도니아인, 일리리아인 등이 발칸반도를 거주지로 삼기 훨씬 전부터, 그곳의 토착 종족은 농경생활을 채택하고 활발한 교역을 하면서 통합된 공동체를 형성했다. (119)
- 도나우문명의 존속 기간은 기원전 약 3200~5500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인류의 문화사에서 최초로 숫자체계가 문자체계와 함께 등장한 곳은 도나우문명이 발생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체계적인 수 표기와 계산 그리고 기본적인 수학의 시초는 전통적인 문화사에서 말하는 '수학의 역사 6,000년'보다 휠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즉 수학은 7,000년 전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탄생했다. (120)
- 도나우문명의 문자 전통은 기원전 3000년경에 인도유럽인의 발칸반도 진입으로 촉발된 혼란 속에서 소멸한다. (121)
- 메소포타미아보다 확실히 이집트에서 먼저 문자가 개발되었고 수 개념과 양의 단위를 나타내는 특수기호들도 고안되었다. (122)
- 즉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정치적으로 통일되기 전에 비록 초라하게나마 문자가 등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와의 시간 격차는 적어도 150년에 달한다. 아비도스의 왕들의 무덤에서 발굴된 부장품에 찍힌 도장 문양들은 최고 기원전 3310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122)
-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일찍부터 수를 세거나 계산을 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단서는 기원전 7000~8000년 사이의 것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24)
- 오늘날 유럽인이 지신 시간 계산과 측정에 관한 다양한 정보는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문화 교류에서 유래한 것이다. (138)
유대인의 수 표기와 수 신비주의- 문자와 수 신비주의는 세계의 많은 문화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가 유대 문화에서만큼 1,000년 넘는 세월에 걸쳐 다면적이고 완벽하게 발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141)
- 히브리어는 기원전 9세기에 고유의 선형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고대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불리는 그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에서 직접 유래했다. 기원전 6세기에 히브리어 문화는 아람어의 영향을 갈수록 더 많이 받았다. 결국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아람어 문자의 변양태가 고대 히브리어 문자를 밀어냈다. (141-142)
- 히브리어 문자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스물두 개의 철자가 이중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철자는 소릿값과 더불어 숫값을 갖는다. (142)
고대 유럽에 영향을 미친 다양한 전통- 고대 유럽에서는 수 표기에 관한 두 가지 원리가 발생했다. 하나는 철자로 수를 나타내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독립적인 기호체계 두 개를 채택해 한 체계는 언어를 표기하는 데 쓰고, 다른 쳬계는 수를 표기하는 데 쓰는 원리다. (159)
- 그리스인은 수를 나타내는 철자, 즉 수 철자를 사용함으로써 고대 후기와 중세에 여러 다른 민족들이 계승한 전통을 창시했다.
- 반면 에트루리아인과 로마인은 문자와 별개로 숫자체계를 사용했다. 이 전통은 서유럽에 계승되었다.
- 로마가 이탈리아 너머로 확장하면서 라틴어도 공식 언어로서 로마제국 곳곳으로 펴져 다른 민족이 사는 수많은 지역에서 교양어로 자리 잡았다. (173)
- 로마인은 처음엔 에트루리아인에게, 나중엔 그리스인에게 숫자를 성실하게 배웠을 뿐 아니라 계산을 위한 도구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켰다. 이미 까마득한 옛날부터 중국에서 막대기를 가지고 계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다양한 형태의 주판을 만들어낸 것은 고대 유럽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주판들이 제작되었다.
- 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 로마인이 알고 있었고 유럽에서 18세기까지 사용한 동전 주판
- 그리스 로마 세계를 벗어나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까지 확산된 모래 주판
- 인기 있는 구슬 판의 일종인 휴대용 주판
- 주판의 역사는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려진 가장 오래된 계산용 판은 살라미스 판이다. (174)
- 로마식 계산 판은 당시에 매우 성공적인 발명품이었다. (174)
- 주판의 전성기는 르네상스시대였다. 당시 특히 이탈리아 수학자들이 주판을 이용한 계산에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174)
인도 - 아라비아 숫자의 유럽 진입- 유럽인이 아라비아 세계에서 받아들인 것들 중 다수는 실제로 더 이른 시기에 외부에서 아랍 문화권으로 유입된 것들이 있다. (175-176)
- 632년부터 약 750년까지 이루어진 세 차례의 대규모 정복과 확장의 결과로 급격히 부상한 아랍-이슬람문명은 새로운 기술과 사상을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확산시켰다. (176)
- 아랍 지식인이 인도 지식인에게서 신속하게 수용해 일찌감치 아랍 세계에 퍼뜨린 기초적인 혁신 하나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숫자체계로 수를 표기하는 것이었다. '아라비아숫자'라고 하지 않고 '인도-아라비아' 숫자라고 하는 수학사 학자들의 어법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178)
- 고대 세계에서 0의 개념이 어떻게 기원했는지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179)
- 바빌로니아 수학은 0은 알았지만 자릿수 체계에서 구조적 요소로 기능하는 0을 숫자열의 중간에만 집어넣고 끝자리에는 집어넣지 않았다. 기원후 1세기 초에 쐐기 문자가 사용되지 않게 되자 바빌로니아의 수 표기법은 잊혀졌다.
- 0에 대한 지식은 복잡한 경로를 통해 아람인에게 전해져 그들의 숫자체계에 반영되었다. 결국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천문학자 겸 수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수 세기 방식은 아람인의 수 표기 전통을 거쳐서 인도 수학자들에게 전해졌다. 인도에서 아라비아로 전해진 숫자체계는 인도와 아라비아의 문화 교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도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다. (180)
- 아람어의 전성기는 대략 기원전 200 ~ 700년 사이였다. 당시에 아람어는 서아시아의 왕국들에서 공식 언어, 행정 언어, 외교 언어였으며 공통어이자 교양어이기도 했다. (182-183)
- 아람어 문자 문화는 인접한 다른 문화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183)
- 아람어 문자를 모범으로 삽아 인도에서 고안한 문자 두 가지가 기원전 3세기부터 토착어들, 예컨대 중세의 프라크리트어를 기록하는 데 쓰였다. 그것들은 카로스티 문자와 브라미 문자이다. (184)
- 인도-아라비아에서 융합된 수학은 아랍-이슬람 문화권의 동쪽 변방에서 만개했다... 아랍-이슬람 세계는 8세기에 서유럽까지 팽창했다. (185)
- 아라비아숫자의 형태는 오랫동안 지역마다 달랐다. 그 형태의 통일은 12~16세기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중세 아라비아수자 형태의 지역적 특수성에서 아라비아숫자가 필기 문건보다는 신형 주판을 이용한 실용적 계산을 매개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9-190)
- 주판을 이용한 계산에서는 0이 필요하지 않다. 이 때문에 한편으로 신형 주판을 이용한 실용적 계산을 통해 아라비아숫자가 보급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실용적인 0은 모든 숫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12세기에야 비로소 유럽 수학에 진입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191)
- 종교와 세계관 논쟁에 매달린 중세 세계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것들이 흔히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191-192)
- 회계 장부에 0을 비롯한 아라비아숫자가 도입된 것은 휠씬 더 나중이었다. (192)
- 1299년에 피렌체 시의회는 조례를 제정해 회계 장부의 금액을 아라비아숫자로 표기하는 것을 금지했다. 대신 금액을 단어들로 적어 넣어야 했다. (192)
- 15세기 말에 프랑크프르트 시장은 자신의 회계사에게 아라비아숫자를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93)
- 16세기 말에 안트베르펜 시는 상인들이 매매나 물물교환 계약서에 금액을 기입할 때 아라비아숫자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193)
- 아마도 실생활에서 아라비아숫자를 써본 사람들이 동방의 수 표기법을 다른 전통들보다 더 선호하게 되었을 것이다. (193)
현대 숫자체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2진법- 수학의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중세 유럽인은 아라비아숫자를, 특히 0을 실용적으로 다루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0은 자릿값 체계에서 그것이 하는 특별한 기능 때문에, 아주 신속하게 우리 세계의 필수 요소가 되어버린 현대적인 숫자체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운명있다. 그 체계는 모든 수의 토대인 0과 1을 기초로 삼는다. (197)
- 역사적으로 '단위'를 뜻하는 1과 '무'를 뜻하는 0의 대립은 컴퓨터 기술의 2진 코드에서 '자극'과 '자극 없음'의 대립, '예'와 '아니오'의 대립으로 변환된다. 과거 천공카드를 사용하던 시절에 이 대립은 눈에 빤히 보이는 '구멍'과 '구멍 없음'의 대립이기도 했다. 2진법에서는 0과 1을 조합해 다른 모든 수를 나타낸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수도 어렵지 않게 표현할 수 있다. 디지털 시스템('digit'는 라틴어 'digitus' [손가락]에서 유래했다)은 2진법의 산술 원리를 따른다. (197-198)
- 컴퓨터의 잠재력은 급속도로 커지는 중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컴퓨터는 계산 기계, 최신형 수펴 주판일 뿐이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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