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한국사 강의를 듣느라 정신이 없다. 왜냐하면 검정고시 과목중 한국사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과목들은 고1과정만을 다룬다면 한국사는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사 까지 전체를 다루기에 절대 무시할수 없는 양이였다. 다행히 내가 중학교 시절 역사에 유독 빠져있었던 지라 주요 인물,사건들은 다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기 위해 요약 강의를 듣고 있는것이다.
한국사를 배우다보면 고조선 시대부터 현대사까지 항상! 등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지형적으로 가까이 있으니 어쩔수 없는 운명이라 하지만 우리가 힘이 세진다 싶으면 귀신같이 달려와 공격하고, 우리나라도 매일같이 중국의 눈치만 살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만큼이나 중국이 좋게 보이진 않았던것 같다. 특히 청이 몰락할때 ‘그래 영원한건 없어..’ 하면서 내심 통쾌했었다.
하지만 이 중국의 시점에서 역사들을 바라보니 나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의 진주라 불리는 상하이의 수난사를 보면서 결국 내가 싫어했던건 그 시대 정부들이였고 백성들은 우리나라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힘들었다는것을 알게되었다. 또 한국사 공부의 영향인지 상하이와 우리나라의 유사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하이의 수난사를 보며 들었던 생각들을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해 말해보려 한다.
1.나라 뺏는 수법은 다 비슷하구나
상하이 수난사의 첫 번째 장이자 그 시작인 19세기, 사실 상하이는 청나라에 아주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편의 확산과 그걸 막기 위해 했던 아편 금지령이 결국 아편의 수출국이였던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청은 패배 후 ‘난징조약'을 맺게 된다. 그렇게 청나라는 상하이를 포함한 다섯개의 항구를 영국에게 개항하게 되고 영국이 상하이에 가장 먼저 자신들의 구역인 ‘조계’를 만들면서 우리가 아는 그 상하이가 시작되게 된다.
이걸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 ‘강화도 조약'이였다. 이 조약 역시 아편전쟁과 같이 일본에서 일으킨 운요호 사건으로 인해 맺게된 조약인데 우리 또한 이 조약 때문에 부산,인천,원산 3개의 항구를 개항하게 된다.
패턴이 비슷하지 않은가. 시비를 걸고 이겨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뒤 강제개항 하는것.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 둘다 통상에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일본과 영국 둘다 개항을 할수 밖에 없는 수를 둔것이다.
2. 치외법권은 정말 무서운 조항이구나
상하이에 외국인들이 거주할 조계를 설치한 영국, 그리고 이 뒤를 따라 들어온 미국와 프랑스 또한 조계를 설치하게 된다. 근데 이 조계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였다. 왜냐하면 조계가 엄연히 청나라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법과 질서가 통하지 않았던 ‘치외법권'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이 치외법권은 나중에 중국인들이 조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더 심해졌다.
그들은 회심공단이라는 재판소를 세워 중국인이라도 영국법에 따라 처벌했는데
그 처벌은 중국인에게는 너무나 엄격했고 서양인에게는 너무나 자비로웠기에 많은 조계지의 중국인들은 차별을 받았고 청나라 정부 또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반식민지 상태인것이다.
이 ‘치외법권' 조항은 다른 곳에서도 볼수 있었는데.. 바로 우리가 일본과 체결했던 ‘강화도 조약'에서 였다. 이 얼마나 불평등한 조약인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질러도 그 일본인은 일본법에 처벌 되기에 우리땅에서 일어난것임에도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없었다.
솔직히 치외법권 이란걸 처음알았을때 그 위력을 잘 알지 못했었는데 상하이의 조계에서 이렇게 까지 사용될수 있다는 사실에 치외법권이 얼마나 무서운 조항인지를 제대로 알게되었다.
3. 전쟁나면 다 끝이구나
19세기 후반 상하이가 발전했다는 입소문을 타고 더 많은 외국인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열강들의 침략에 청나라는 긴장하면서도 도시의 외형만은 빠르게 발전해나갔다.
가장 먼저 조계가 형성되었던 와이탄 지역에는 인구와 자본이 몰리면서 엄청난 부동산붐이 일어났고,
회중호텔에 엘리베이터라는 신기술이 도입될 정도로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백화점과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은 헤어스타일,옷 심지어 누드화 같은 미술문화까지 상하이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국을 노리고 있던 일본에 의해 중일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상하이의 도시와 인근지역에 발생한 끔찍한 폭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도시가 파괴되었다.
다른 나라의 소유지였기에 공격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조계 또한 나중에 공격받게 되면서 상하이는 또다시 수난을 맞았다.
나중에 다시 덩샤오핑에 의해 중국 경제의 모델로 상하이를 선택하게 되면서 지금의 최고의 도시로 성장하게 되지만 그때의 중일 전쟁이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근대화의 바람으로 인해 상하이는 경제부분에서나 문화부분에서나 지금과도 뒤처지지 않을만큼 성장해있었다. 하지만 전쟁 앞에서는 모두 무쓸모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고 전쟁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앗아가는지 다시 한번 느껴던것 같다. 또 그러면서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상하이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성장을 보인 우리나라가 생각났다.
상하이가 작은 어촌이였다면 우리나라 또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아주 작은 나라였는데 지금은 남포동에 가도 관광객들을 흔히 볼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된것같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이는 열강 사이에서 수난을 겪으며 여러 차례 전쟁으로 침탈도 당했지만 중국 전통과 서구의 근대가 섞인 문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책 <벌거벗은 세계사> 중
나는 이런 상하이의 수난사를 보며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린 이 상하이의 역사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에는 ‘과거의 사실을 반성으로 삼아 미래의 거울로 삼기 위함’이 있기에
이 상하이의 역사 속 반성해야할 점들을 찾아 미래의 거울 삼아 잘 활용한다면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잘 써내려갈수 있지 않을까?
이게 우리가 상하이 수난사를 기억하며 지켜봐야할 이유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