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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건축과 봉헌
"어느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 : 12절 이하).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면 저의 말은 저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지난 달 총회장님께서 “성당의 재정에 관한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재정분과장이 교우여러분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월말보고서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별로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회장님, 재정현황보고정도만 하면 되나요?” “분과장님, 현재 본당의 교무금책정율이 낮습니다. 성당을 교무금으로 지으려면 책정율이 올라가야 합니다. 그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같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우리는 성당을 지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무금책정율도 작년에 비해서 낮습니다. 성당을 지으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교무금책정율이 올라가야 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할까?
저의 말에 대하여 “돈 많이 내라는 말이네”하실 분도 있을 것이며, 성전을 나서는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는 분도 있을 것이며,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말의 취지는 교무금을 많이 내자, 건축헌금을 많이 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지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에 헌금을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번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제 말을 듣고 한분만이라도 공감하신다면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1. 식사동 성당의 재정현황
가. 교회법상, 그리고 전통적으로 우리가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나 교무금은 동일한 것입니다. 헌금과 교무금은 교회의 유지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과 사제의 생활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됩니다.
(1)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성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교무금을 내든, 헌금을 내든, 건축헌금을 자발적으로 봉헌하든, 사실성 배정 형태로 봉헌을 받든, 신자들의 힘으로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원칙에 의하면 본질은 같습니다.
신자들이 내는 헌금에는 교무금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교무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일반 주일헌금등의 액수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의 초점은 교무금에 맞춰져 있습니다.
㉮ 2012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식사동성당의 전체 세대는 488세대이며 이 가운데 교무금책정을 한 세대는 349세대로 그 비율은 71.5%입니다. 2011년 12월 31일 기준으로 교무금책정을 한 세대는 전체 342세대 중에서 220세대로 책정율은 64.3%였습니다.
2012년 2월 26일 기준으로 책정율은 55.8%인데, 2013년 2월 24일 기준으로 책정율은 215세대로서 책정율은 42.5%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성당에 들어온 교무금의 총액수를 세대별로 나눈 1세대가 1년동안 납부한 교무금의 평균액수는 559,850원입니다. 이는 월 평균 5만원도 안되는 액수입니다.
게다가 올해의 교무금 책정율을 작년과 비교하면 13%이상이나 낮습니다.
㉯ 식사동 성당의 작년 1년동안 주일헌금, 감사헌금의 액수를 조사해보았습니다. 2012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신자는 1,441명으로 이 가운데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는 평균 30%에 해당하는 432명이었습니다. 1년동안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낸 헌금의 액수는 평균330,443원입니다.
2013년도의 교무금책정율이 2012년의 같은 기간동안에 비해 저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교무금과 성전봉헌금을 내느냐’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교적만 식사동에 등재한 후 주일미사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냉담인 상태에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무금책정율이 오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전국의 각 성당별 교무금책정율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의정부교구의 평균에 비례하면 오히려 우리성당의 책정율은 높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작년과 비교할 때 올해의 책정율이 현격하게 낮아진 것 역시 현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러 가지 이유가 나름대로 있으니까 우리는 손놓고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 방법이 어떠한 것이든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법이 생각나지 않을 때에는 처음의 기본으로 돌아가면 그 해법이 보이며,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너 없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머리가 계획한 것을 실행하는 것은 지체입니다. 지체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세례를 받은지 20년이 넘었지만 교리교육시간이나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어느 누구도 성전이나 헌금에 대하여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타성적으로 따라왔습니다. 이 말씀은 제가 고민을 하고 생각한 내용이지만,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 우리는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주임신부님께서는 늘 성전건축은 교무금으로 충당하겠다, 그러므로 교무금책정율을 높이자고 역설하셨습니다. 지금도 이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올해 성전착공을 하고 완성을 하더라도 향후 그 건축자금은 몇 년동안 우리의 힘으로 마련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성전건축이 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하여 공감을 해야 여러분께서는 기꺼이 교무금으로 성전을 짓겠다는 취지에 동참하실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교무금으로 성전을 짓겠다고 했으면서 성전봉헌약정을 하였고, 그리고 나서 교무금책정을 독려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무금으로 성전을 짓던, 아니면 다른 성당과 마찬가지로 교무금은 교무금대로하고 별도로 성전봉헌금을 약정받아 짓던 신자들은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다른 점이라면, 우리성당에서는 성전봉헌약정을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며 다른 성당처럼 강제적인 성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님께서 교무금으로 성전을 짓겠다는 입장을 견지하시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근본적인 물음은 과연 우리에게 성전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성전을 지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야 우리의 힘으로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성전건축문제에 접근했는가, 나는 성전봉헌약정을 할 때 얼마나 생각을 했는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혹시 봉헌약정을 한 것은 아닌가? 봉헌약정서에 별 고민없이 기재한 것은 아닌가, 나에게 성전은 무엇인가? 땅이 있으니까 건축자금 빌려서 짓고 몇 년동안 신자들에게 돈 걷어서 반 강제로 건축헌금 배당하고, 다른 본당의 신부님들처럼 다른 본당에 가서 앵벌이하고, 건설업체 선정하여 상가건물 짓는 것처럼 지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잠시후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성체를 받아모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봅시다.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삼위의 관계성 안에서 완전한 친교를 나누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분의 위격이 완전하게 한 본체로서 나누고 계시는 친교를 나눠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성체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백성을 이끌어내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탈출기의 모세와 파라오가 주고받은 수많은 대화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지정한 사람들과, 주님께서 지정하신 예물을 가지고, 주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주님께서 지정한 방법으로 지은 성전에서, 제사를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성전‘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헌금으로 마련한 누룩없는 빵과 포도주은 하느님께서 지정하신 예물입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곳은 하느님께서 지정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처음에 요셉의 후손들이 살던 이집트의 고센지역에서 제사를 지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제사를 지내라고 지정한 성전에서 하느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제사를 지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 제사를 받으십니다. 그 제사에 참여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친교(communion)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지정하신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전을 지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순 제2주일 교중미사시간에 앞자리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앞면의 판 크라토르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하나의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에제키엘서 47장입니다.
“그가 다시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 쪽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 물은 강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강가 이쪽 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되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 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에제 47: 1이하, 가톨릭 성가 67번).
솔로몬 사후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 이스라엘백성은 바빌론으로 노예로 끌려 갔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제 에제키엘은 환시중에 유배에서 풀려나 새로이 이스라엘백성이 바로서는 날에 세워지는 성전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보여주신 성전은 바로 구원의 근원입니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당시 죽음의 상징이었던 이스라엘의 사해로 흘러들면 그 죽은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그 강가의 양쪽에 늘어선 나무에서는 끊임없이 잎이 푸르고 과일이 난다는 그것은 바로 죽음의 상태가 새로운 생명으로 바뀌는 시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염원하는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삶으로의 구원이 성전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와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도무스 데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주엽동 성당에 가보신 분들 중에 눈여겨 보신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대성전 입구에 'Domus Dei'라고 쓰여 있습니다. 즉,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에제키엘이 환시중에 본 성전은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전이 그런 곳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교무금이든, 헌금이든, 아니면 성전 봉헌금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의 출발인 성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며,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하느님나라의 완성과 복음의 완성을 위한 시작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3. 헌금은 미사의 희생제물에의 참여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에 따르면 교무금을 많이 받아서 모두 성전짓는데 사용하는 것처럼 생각될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덧붙여 헌금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헌금은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의 표시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바치는 희생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헌금은 순수하게 사랑과 일치의 표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예루살렘 공동체로부터 이교인들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에 이 헌금은 예루살렘 공동체와 유대와의 일치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갈라 2:9, 6:6, 필립4:5).
초기 교회 공동체의 헌금을 통해서 헌금과 교회의 자기 인식 사이의 상관관계가 드러납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전례중에서 헌금이 실시된 것은 초기부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첫째로는 교회와 자신과의 유대감, 둘째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지금은 로마의 교황청으로 상징되는 ‘보편교회’)와의 유대감입니다.
이러한 초기교회의 헌금에 관한 입장의 요지는 헌금봉헌이 바로 미사의 참여라는 것입니다. 헌금은 자기 희생의 상징이며 희생 제물입니다. 즉 신자들이 헌금을 하는 것은 희망과 절망, 일과 여가 그리고 일상 생활전체를 포함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내적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이 헌금을 통해서 교회는 성찬 예식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고 사제와 함께 희생제물을 봉헌함으로써 봉헌자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4.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조차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왕궁에서 호화롭고 평화롭게 지내는데 주님이 거하시는 궤는 천막에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여 주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다윗의 하느님에 대한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기시어 ‘다윗의 자손을 손수 일으켜 세우시고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해주겠으며,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비록 죄를 지어 징벌을 하더라도 그에 대한 당신의 자애는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2사무 7장).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치자 하느님께서는 “나는 네가 내 앞에서 한 기도와 간청을 들었다. 네가 세운 이 집을 성별하여 이곳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두리니, 내 눈과 내 마음이 언제나 이곳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1열왕9:3 이하). 그러면서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비록 자신의 손으로 성전을 짓지는 못하지만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의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제가 무엇이며 제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 같은 예물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오기에, 저희가 당신 손에서 받아 당신께 바쳤을 따름입니다. 당신 앞에서 저희는 저희의 모든 조상처럼 이방인이고 거류민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집을 지어 드리려고 저희가 준비한 이 많은 것은 다 당신 손에서 받은 것으로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께서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정직함을 좋아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예물을 바쳤습니다. 주님, 당신 백성이 마음에 품은 이 같은 생각을 그들이 언제까지나 지니게 해주시고 당신을 향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해 주십시오.(1역대29:14이하).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사때에 바치는 헌금이나 교무금등 모든 재물은 내 힘으로 벌어서 하느님 제단에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며 거류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류민이기에 우리가 하느님 제단에 바치는 모든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서 다시 하느님제단에 바치는 것입니다. 이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비록 과부의 헌금에 불과할지라도 교회의 헌금에, 그리고 성전을 짓는데 기꺼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솔로몬에게 한 말을 대신함으로써 마칩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 일을 해 나가라. 두려워하지도 말고 당황하지도 마라. 주 하느님이신 나의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1역대 28:20).
아멘.
첫댓글 성전에 관한 의미를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주신 글은 처음 읽었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는 곳(Communion),곧 친교를 이루는 곳이 성전이었군요. 하느님의 집에 대한 사랑이 공동체 안에 불타 오르기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