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95/200224]봄이 오는 소리
* 요일曜日 개념이 없는 자유인이지만, 일요일은 역시 좋다. 전주에 살고 있는 한 친구가 주말마다 자기 고향집에 내려오니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우리집에서 불과 2∼3km 거리, 새벽 걷기 코스이기도 하니, 아침 6시 모닝커피를 함께 마시는 행운도 더불어 맛볼 수 있다. 어제는 지리산 구룡폭포를 가자는 거다. 잠시도 가만히 안있는, 엄청 다이내믹한, 야무진 친구이다. 불감청고소원.
남원 육모정六茅亭을 아시는가? 남원에서 초중학교를 다닌 친구들의 단골 소풍명소였다고 한다. 춘향의 묘가 제법 잘 꾸며져 있다. 실제로 춘향이라는 열녀가 있었을까? 언제 조성을 한 것일까? 관광 수입을 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을 기려 꾸민 듯했다. 그 아래 너럭바위는 지금껏 본 바위 중에 가장 넓다. 계곡이 무척 길고 크며 깊다. 그러니 계곡마다 아홉 마리 용龍이 살아 승천했다는 전설이 생겼을 것이다. 구름다리 옆의 국창 권삼득權三得(1771∼1841) 유적비를 읽어본다. 그는 전북 완주의 양반가문 출신이나 소리에 미쳐 쫓겨났다고 한다. 이 너럭바위에서 높고 깊은 소리인 ‘덜렁제’를 창시하여 ‘8명창’중 으뜸이 되었다. 한 가락 마칠 때마다 처가에서 얻어온 서 말의 콩에서 한 알씩을 소沼에 던지며 피나는 독공獨工 끝에 마침내 득음得音을 했다한다. 특히 ‘흥부가’의 제미 후리러 나가는 대목을 잘했다는데, 들을 수 없어 안타깝다.
우리는 육모정에서 시작하여 1곡, 2곡, 3곡으로 오르고, 운봉 친구는 정상인 구룡폭포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하산하며 중간에서 도킹, 같이 오르고, 그 차로 육모정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재밌다. 남원의 병원장 친구는 시도때도 없이 이 코스를 오른다한다. 마침 당직인 게 아쉽다. 그제는 야간산행까지 했다는, 육모정 마니아이다. 중간지점에서 친구가 준비해온 모싯잎떡이 꿀맛이다. 장마가 지고 제법 비가 많이 오는 날, 7곡인 비폭동飛瀑洞에 꼭 올라보리라 작심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의 날리는 포말泡沫이 장관일 듯하다. 9곡 근처 구룡사를 들렀는데, 진안 마이산 천지탑같은 돌탑은 멋있었으나 개들이 떼로 짖어대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했다. 무슨 놈의 절인지, 암자인지, 그렇게 그악스런 개들을 키운단 말인가. 한마디로 개판이어서 오만정이 떨어졌다. 하지만, 계곡의 나무들이 확실히 물이 올랐다. 매화도 봉오리들이 다 맺혔다. 이제 곧 활짝 펴 자태를 뽐내리라.
마침 순천의 친구가 장모님을 모시고 형수와 남원의 맛집을 드라이브 겸해서 왔다는 전화다. 광양에서 요양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언제였던가, 2008년 6월? 서울의 모호텔에서 나는 이 부부의 '가혼식佳婚式' 주례를 본 인연이 있다.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만날, 만나야할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만나게 되어 있다. 즉각, 육모정의 ‘사과꽃향기’에서 만나자 했다. 8000원짜리 쌍화차는 아주 준수했다. 음전하게 생긴 아줌마의 친절도 인상적이다. 다음에 올 때에는 ‘사과꽃 차’를 맛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꽃차’는 무슨 꽃이든 꽃잎만 말려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된다는 ‘난다니 친구’의 설명이다. 서비스로 주는 우엉차와 한과도 좋다. 제법 분위기 있는 커피샵, 이곳에 오시거든 한번쯤 시음을 해보시라.
# 오후 2시반, 귀가하니 뒷밭에서 노부老父가 작약芍藥(함박나무) 뿌리를 캐고 계신다. 뿌리는 씻어 쪼개 말릴 참이고, 뾰족뾰족 솟아나오는 예쁜 싹은 그 부분만 떼어내 심으면 잘 자란다는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함박꽃 뿌리다. 왕년에 뿌리를 모아 한약방에 갖다줘 20만원을 받았다는 거다. 큰 노력 안들이고 심어만 놓으면 된다니, 곧 만발할 함박꽃은 얼마나 보기 좋을 것인가? 대문앞 텃밭에 모두 옮겨 심으리라. 일손을 보냈다.
# 뒷밭으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부모의 ‘인간극장’ 출연으로 말미암아 전남 광주에서 일부러 찾아와 아버지의 수양딸을 자청한 여동생이다. ‘부녀父女 상봉’ 꼬막 1년만이다. 아버지가 여주 딸집에서 거주한 11개월동안은 통화만 몇 번 했지, 얼굴을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반가운 만남이다. 대저 인연이란 게 무엇인지? 전생前生은 과연 있는 것인지? 어쩌면 이런 만남과 이런 관계의 만남이 지속되는지 잘 모르겠다. 이번엔 신랑과 함께 왔다는 거다. 수줍은 신랑, 차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막무가내로 끌어내렸다. 커피 한잔을 대접하며, 통성명을 하고, 나이를 묻는 것은 나의 특기. 본채와 사랑채 집구경을 시켜주는 나는 신이 났다. 서재書齋 보려줄 때는 더욱 기분이 좋다. 눈에 띠는 책을 쥐어준다. 신문에 20회 연재해 만든 나의 소책자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을 두세 권 안겼다. “꼭 읽어보시라”는 당부와 함께. 후다닥 노지시금치 한 보따리, 약간의 수수알맹이, 무 몇 개를 싸주다. '친정오라버니'이니 당연하지 않는가. 무엇인들 못주랴. 다음에는 인근 맛집에서 밥 한끼 할 것을 계면쩍어하는 신랑과 약속했하다.
산 계곡의 버들강아지가, 우리집 뒷밭의 흙들이, 야산의 매화들이 봄마중 채비를 끝낸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수양여동생 부부와 환담도 나눈, 어제 역시 제법 바쁜 하루의 일기.
* 부기付記: 초저녁, 서울 친구의 느닷없는 전화. 낯 모르는 전화번호. 오후에 당구장에서 즐겁게 놀다가 한 친구에게 핸드폰 충전을 부탁했는데, 그 생각을 까마득히 잊고 그냥 왔다는 거다. 용케도 수첩에 내 번호를 적어놓아, 형수(친구의 부인)의 전화로 건다는 거다. 용건은 그 친구의 번호를 모르니, 내가 그 친구에게 형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라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나니 이건 너무 우스운 일이 아닌가. 자기 번호조차 모른다는 말인가? 친구가 갖고 있을 자기 전화에 전화를 하면 그 친구가 바로 받을 게 아닌가? 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수첩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친구 번호를 적어놓은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는데, 이럴 때에는 무어라 해야 할까? ‘어떻게 대기업 자회사의 대표이사까지 했을까’라며 친구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지금껏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