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3/21-고구려당나라 최후승부>
高·唐 最後의 勝負
고·당 최후의 승부
☯ 대호 연개소문 뒤를 이어 연남생도 당에 연전연승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실라와 남부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안 북방의 패자 가우리의 대호(大虎)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깊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서기 655년 2월. 당(唐)의 고종은 그 동안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다가 대호(大虎)가 기력을 잃자, 즉각 군을 동원하여 또 다시 가우리에 도전해 왔다.
이에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淵男生): 또는 천남생(泉男生)]이 병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치[莫離支(막리지)]에 올라 가우리와 중국의 제9차 대전을 맞게 되었다. 남생 말치는 용맹한 가우리군을 잘 이끌어서 당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 군을 귀단수(貴湍水)에서 격멸하고, 아홉 번째의 대승을 기록하였다.
서기 657년. 소위 중화(中華)라고 부르며 지상의 최강국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노리던 화산족(華山族)의 중국(中國)과 아홉 번에 걸친 대 전쟁을 연전연승하여 동부 대호(大虎: 큰 호랑이)의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저들의 목을 짓밟고 기를 죽여 동이족의 우위를 확인시켰던 연개소문(淵蓋蘇文) 신크말치[大大莫離支(대대막리지)]도 오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신크말치의 죽음으로 가우리는 깊은 충격 속에 헤매게 되었다. 국장이 끝난 후, 그 동안 말치[莫離支]로 있던 남생(南生)은 불과 24살의 나이에 크말치[大莫離支]에 올랐고, 가우리의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직도 겸임하여 가우리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 연개소문의 벼슬 大大莫離支(대대막리지)의 종래 발음은 신크말치이다.
大=신, 大=크, 莫=마, 離=ㄹ, 支=치
大는 ‘아주 크다’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신’이라고 하니, ‘지상 최대의 나라’ 라는 뜻의 신쥬신[辰朝鮮]을 기억하기 바란다. 한문 辰(진)의 또 다른 발음은 ‘신’이다. 大는 우리말로 크· 키· 큰· 한 등이다, 莫은 ‘마’라 발음하고, 離의 ‘ㄹ’을 합쳐 ‘말’로 읽고, 支는 ‘치’이니 직업이나 지위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大大莫離支는 ‘신크말치’라고 읽는 것이 올바른 우리말이다.
그렇게도 두렵고 무서웠던 동북의 호랑이가 숨을 거두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당 고종은 즉각 출병을 명령하였다.
서기 658년 6월. 대장군 정명진(程名振)과 설인귀(薛仁貴)는 제3차 대전에서 남생(男生)에게 빼앗겼던 요서(遼西)의 땅을 되찾고 동진(東進)을 계속하였으나, 이번에도 크말치[大莫離支] 남생의 새로운 방위선을 뚫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크말치 남생으로선 아버지 연개소문의 후광 없이 단독으로 승리한 회심의 일전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남생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졌고, 정권의 최고 권력자로서 명실 공히 인정을 받게 되었다.
천하를 정복하여 기고만장했던 당나라였지만, 가우리와 무려 10번에 걸친 전쟁에서, 연전연패의 치욕을 당하니, 이제는 나라의 체면과 운명을 걸고서라도 기어코 가우리와 승부를 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10차 대전의 패전이 있은 지 불과 15개월 후인 659년 9월, 당은 또다시 온 국력을 모아 제11차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번에는 제10차전 참패의 책임을 물어 정명진을 파면하고, 설인귀를 총대장으로 하여 침략해 오니, 크말치 남생은 온사문(溫沙門)을 장군으로 하여 당군과 횡산(橫山)에서 결사전을 벌여 또다시 이를 물리쳐 가우리의 기세를 천하에 드높였다.
그 후, 당나라는 가우리에 대한 작전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제11차 대전(大戰)에서 참패한 당나라에 마침 행운의 손길이 뻗어 왔으니, 가우리의 숙적인 실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가우리의 후원국인 백제를 공략하자는 것이다.
당나라는 이 행운을 놓치지 않고 즉시 출병하여 서기 660년 6월. 설필하력(契苾何力) 장군에게 가우리의 요동을 공격하게 하여 가우리군이 백제를 도울 수 없도록 북방 전선에 묶어 놓았다.
나·당(羅唐) 연합군의 기습적 대 부여 작전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개전 3개월 만에 부여의 왕성(王城)을 격파하고, 그 왕을 잡는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고 개선하였다.
소정방이 이끄는 남방군의 대승리와는 달리, 설필하력의 북방군은 또다시 가우리의 역습을 받아 고전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가우리 정벌이 목표였던 당은, 대 부여전에서 승리한 소정방의 남방군을 빼돌려 요수(遼水)전선(戰線)에서 허덕이는 북방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가우리 남부의 요충인 남펴라[南平壤(남평양)]를 기습하니, 가우리는 남북으로 전선이 벌어져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크말치 남생이 집권한 이후 가우리는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거의 매년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대 전쟁에 가우리의 경제는 극도로 피폐하였으나, 젊은 남생은 그 나름대로 두터운 방위 체제를 조직하여 당군의 침입에 결사적인 항전을 하고 있었다.
《당과 가우리의 격전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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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가우리와의 패권 전쟁은 두 나라를 모두 지치게 만들었다. 만약 이번 전쟁에 가우리를 이기지 못하면 당나라도 망하고 말 것이다.
최후의 결심을 한 장안(長安) 정부는 국가의 운명을 걸고 사력을 다하기로 각오하였다.
서기 661년 4월. 하남북(河南北), 회남(淮南) 등 67주(州)에 걸친 총동원령을 내려 35만 명의 추가 병력을 징집하여, 76세의 노장 소정방이 이끄는 남펴라[南平壤] 공략군에 무려 27만 명의 지원군을 보냈다.
가우리가 제아무리 강국이라 하여도 이번만은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다.
역전의 노장군 소정방은 이미 남부여 멸망이라는 전공을 세운 명장이다. 27만의 당군은 남펴라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항복이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연개소문 시절의 작전 참모장인 선도해를 중심으로 맹수 같은 가우리의 장수들이 남펴라 작전에 투입되어, 성을 중심으로 안팎으로 진을 치고,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가며 가우리군에 대한 공포심이 충만한 중국 시골 출신의 허수아비 군사들을 쉴 새 없이 괴롭혀 대니, 실라의 도움을 받아 남부여를 공략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벌어졌다.
27만이라는 대군으로 성을 포위한 기세는 좋았으나, 가우리군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며, 당군은 대군임에도 불구하고 가우리 땅에 들어가면 귀신이 되어야 돌아온다는 소문에 기가 죽고, 또 강제 징집당한 오합지졸들이어서 제 목숨 보존하기에 정신이 없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소정방 군의 남펴라성 공략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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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 지문 설명]:
선도해(先道解)의 남펴라 방위군
연남건(淵男建)의 남펴라 방위군
서기 661년 8월. 크말치 남생(男生)이 이끄는 요수(遼水)방위군(防衛軍)은 오랜 소강 상태를 깨뜨리고, 드디어 설필하력의 북방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허겁지겁 패주하였으나, 남생군은 추격할 수가 없었다.
서울인 펴라의 방위가 비어 있었고, 남부 전선의 최대 요충인 남펴라가 소정방군에게 포위당해 있기 때문이었다.
남생(男生)이 겨우 전선을 정리하여 주력군을 펴라성 방위에 다시 배치할 무렵, 즉 서기 662념 정월, 예상했던 대로 당은 방효태 장군을 선두로 10만 명의 수군을 편성하여 펴라를 직접 공격해 왔다.
때마침 마의 삼각주인 남대황의 방위선 구축을 끝마친 남생군은 패수로 쳐들어오는 방효태군을 가우리 수군의 전통적인 작전을 그대로 연출하여 궤멸시켰다.
이 때, 방효태와 그의 13명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10만 명의 당군을 전멸시키는 대첩을 거두었다. 이른바 제2의 살수 대첩이다.
요수의 설필하력군을 격파한데 이어 살수에서 방효태군을 몰살시킨 가우리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남생은 이제야 주력군을 이끌고 남펴라로 향하니, 남펴라를 공략한 후 펴라로 진공하려던 소정방군은 오히려 남생군에게 역 포위당하여 고립되고 말았다.
살수에서 대승을 거둔 가우리 수군은 당과 남펴라 간의 수로(水路)를 완전히 봉쇄하니, 소정방의 27만 군은 심각한 식량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자, 소정방은 남쪽 웅진 도독부의 유인원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유인원 역시 복신의 부여 다물군에게 부여성이 포위당하여
실라에게 도움을 애걸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제 마지막 방법은 실라에게 동맹국의 명분을 내세워 군량미를 구걸하는 것뿐이었다. 소정방의 요청을 받은 실라는 마지못해 최소한도의 식량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 가우리 ,실라를 포함한 당시의 전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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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이었던 당(唐)과 실라는 서로의 숨은 목적을 의심하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라로서는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정방의 27만 명 외에도 1만7천 명의 웅진 도독부도 있어서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때 김춘추[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가 죽고, 신왕으로 법민(法敏)이 즉위하여, 거대한 부여를 삼킨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부여 정벌에 큰 도움을 준 당군에 대하여 빚을 갚아야 한다는 국론에 따라 김인문, 김양도(金良圖) 등 아홉 장수를 동원하여 대거[大車] 20량을 만들어 쌀 4천섬, 벼 2천섬을 남펴라 전선으로 보냈다.
실라의 양곡 수송 작전에 크게 고무된 소정방도 별동군을 파견하여 군량미를 인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라군의 수송 작전은 가우리의 첩보망에 낱낱이 탐지되어 가우리 측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펴라로 향하는 실라의 수송부대가 겨우 칠중하(七重河)에 도착하였을 때,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가우리의 복병을 만나 풍비박산으로 깨어지고, 수송 중이던 식량을 모조리 가우리군에 탈취 당하였다.
결국 굶주림에 지친 소정방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겨우 수천 명의 결사대만이 대장 소정방을 호위하여 바다로 빠져나와 장안으로 도망쳐 가고 말았다.§
《가우리의 실라 군량수송대 습격 상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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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우리군, 당군의 별동대를 요격하여 펴라로 도망치게 함.
2020.6.26.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