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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차 文化遺産踏査: 칸의 帝國 몽골-국립중앙박물관 (4-4)
국립중앙박물관 先史∙古代館 주요문화재
(01) 나무 널[木棺]
*昌原 茶戶里 古墳群 -사적 제327호- - 경남 昌原市 義昌區 東邑 茶戶里
고대국가 형성기안 伽倻時代의 고분으로 대부분이 널 무덤(木棺墓)이며, 일부에서
독무덤(甕棺墓)이 나타났다. 널무덤은 무덤구덩이(墓壙)의 크기와 껴묻거리구덩이(附葬坑)의
유무에 따라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무덤 주인의 身分差異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1호 목관묘의 나무널은 지름 1m의 통나무를 세로로 쪼개어 속을 파서 만든 구유 모양이며,
靑銅器와 鐵器製品, 漆器와 민무늬土器가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의 거울 星雲鏡과 화폐
五銖錢이 출토되어 다호리 고분이 BC 1세기~AD 1세기 후반의 유적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양한 철기와 중국계 유물의 출토로 보아, 이 지역의 鐵 생산을 바탕으로 中國, 樂浪과
교역한 세력의 지배자 무덤으로 보여진다. (*甕: 독 옹 *棺: 널 관)
(02) 독널[甕棺] -三國時代/百濟(4~5세기)
독널은 세계 여러 지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先史時代부터 사용하였다.
특히 榮山江 流域에서는 4~5세기무렵 흙을 높게 쌓고 그 안에 커다란 독널을 매장한 거대한
고분이 유행하였다. 독널에서는 金銅冠, 금동신발, 목걸이와 고리자루칼 등이 출토되어
이 지역을 지배하던 實力者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독널[甕棺]은 고인돌[支石墓], 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돌널무덤[石棺墓]과 함께
한국 靑銅器時代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 중의 하나로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독[甕]을
사용하여 주검[屍身]이나 뼈를 묻는 무덤양식이다.
(03) 江西 大墓 (南浦 江西 大墓)
南浦市 江西區域 三墓里(舊地名: 평안남도 江西郡 우현리, 대안시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방봉토벽화고분(石室封土壁畵古墳)으로, 삼묘리에는 3기의 무덤이
삼각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가장 큰 고분이 江西 大墓이다.
강서 대묘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돌방봉토벽화고분으로 方臺形의 封土 墳丘는 한 변의
길이 51m, 높이 9m이다. 무덤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 板石으로 축조되었으며,
내부는 널길(羨道)과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진 단칸 구조이다. (*羨: 무덤길 연)
잘 다듬은 壁面에 직접 그린 벽화의 주 내용은 四神으로, 北壁에 玄武, 東壁에 靑龍,
南壁에 朱雀, 西壁에 白虎를 그렸다.
강서 대묘는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 제25대 平原王(재위: 559∼590)으로 보기도 한다. 四神의 사실적이고 율동감
넘치는 流麗한 筆致는 우리나라 古墳壁畵 중에서 극치를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되며,
동아시아 繪畵의 白眉로 꼽고 있다.
(04) 玄武 -江西 大墓 北壁 -6세기 말 -1930년경 模寫
*사신도[四神圖]
중국 古代思想에서 발생한 方位圖로 陰陽五行說에서 나왔다. 음양오행설은 戰國時代 末
宇宙의 起源을 설명하는 陰陽說과 우주의 構造와 운행원리를 설명하는 五行說이 결합되어
현실사회의 질서와 운영원리를 설명함으로써 현실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陰陽五行說은 死者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墓地를 선정하는데 風水地理를 적용하게 되었다.
특히 後漢代에 이르러 四神獸가 方位神으로 위치를 확고히 하고, 이후 四神獸는 魏晉南北朝
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繪畵와 工藝의 기본무늬가 되었다. 四神獸는 東方의 靑龍,
南方의 朱雀, 西方의 白虎, 北方의 玄武이다. 이 四神은 동, 서, 남, 북 네 방향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四季節, 하늘 사방의 28별자리와 관련 있는 想像 속의 동물이다.
(05) 靑龍 -江西 大墓 東壁 -6세기 말 -1930년경 模寫
(06) 白虎 -江西 大墓 西壁 -6세기 말 -1930년경 模寫
*江西 大墓 南壁의 朱雀은 補修 中이다.
(07) 말 탄 사람 토기[騎馬人物形土器] -국보 제91호- -三國時代/新羅 6세기
-경북 慶州 金鈴塚 出土 (*騎: 말 탈 기 *鈴: 방울 령)
말등에 둥근 깔대기(注口)와 가슴에는 액체를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달려있다.
속이 비어있어 주전자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말갖춤이나 화살통을 매는 방법을
알 수 있다.
*높이 23.4㎝, 길이 29.4㎝의 主人像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하여 저
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呪術的인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인물상 형태의 토기는 新羅人의 靈魂觀과 당시의 服飾, 무기, 말갖춤 상태, 工藝意匠 등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문화재청 공식명칭: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陶器 騎馬人物形 明器](主人像)
(08) 말 탄 사람 토기[騎馬人物形土器](下人像) -국보 제91호- -三國時代/新羅 6세기
-경북 慶州 金鈴塚 出土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짐을 메고 있다. 오른손에는 방울을 들고 있는데, 방울을 흔드는
장면은 마치 주인의 영혼을 인도하는 下人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下人像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09) 무령왕 금제관식 (武寧王 金製冠飾) -국보 제154호- -三國時代(百濟) 6세기
-충남 公州 武寧王陵 -1971년 발굴
公州市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으로 만든 王冠 꾸미개(장식) 한 쌍으로,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武寧王陵은 백제 제25대
武寧王(재위 501∼522)과 王妃의 벽돌무덤(塼築墳)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6세기 전반
백제문화의 수준과 墓制 등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塼: 벽돌 전)
(10) 무령왕비 금제관식 (武寧王妃 金製冠飾) -국보 제155호- -三國時代(百濟) 6세기
-충남 公州 武寧王陵 -1971년 발굴
公州市 武寧王陵에서 왕의 冠飾과 함께 출토된 왕비의 金製冠 裝飾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을 발견∙조사할 때,
王妃의 널(棺)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으며, 透彫로 표현된 문양은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정돈되면서 정연한 느낌을 주며, 王의 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11) 관모 금[金製 冠飾]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金冠塚 –무게 139g
맞새김무늬가 있는 여러 장의 金板을 연결하여 만든 화려한 모자이다.
男性의 머리 위에 쓰는 것으로, 주로 관꾸미개와 한 벌로 출토되다.
(12) 관 꾸미개[金製 鳥翼形冠飾] -보물 제630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皇南大塚 출토 -무게 288g
冠帽에 끼워 장식하는 것으로, 새날개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양쪽 날개에는 수많은
달개가 달려있어 화려하게 날아갈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13) 귀걸이[金製 耳飾] -국보 제90호- -三國時代(新羅) 6세기
-경북 慶州 普門洞 夫婦塚 발굴 -무게 33.8g
귀에 닿는 부분은 속이 빈 둥근 고리로 무게를 가볍게 한 太環耳飾 귀걸이이다.
커다란 둥근 고리에는 거북등무늬와 같은 육각형으로 나누어 그 안에 4엽 혹은 3엽의
꽃을 표현했는데, 꽃 하나하나에 금실과 금 알갱이를 붙이는 鏤金細工法을 이용하여
섬세하게 장식하였다. 신라의 귀걸이 장식에는 대부분 이처럼 西域에서 傳來된
鏤金細工法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태환을 비롯한 전체에 누금세공법을 사용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화려하고 놀라운 細工技術을 보여주고 있다. (*鏤: 새길 누)
(14) 목걸이 금[金製 頸飾] -보물 제456호- -三國時代(新羅) 6세기
-慶州 路西洞 무덤 출토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慶州 路西洞 金製頸飾)는 金小環 여러 개를 연결하여
속이 빈 球形을 만들고 心葉形 금판을 금줄로 연결한 장식을 44개 연결한
목걸이로, 끝에 翡翠 曲玉 1개를 달았다. 가운데가 빈 球形의 구슬은
같은 시대 귀걸이의 중간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고 목걸이 끝에 曲玉을
다는 형식은 當代 목걸이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이 목걸이는 경주 노서동 215호 古墳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 古墳에서 출토된
일련의 유물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에 체결된 한∙일 협정으로
1966년에 반환된 문화재 중의 하나이다.
(15) 유리병[鳳首形 琉璃甁] -국보 제193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皇南大塚 출토
地中海 沿岸으로부터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수입된 제품으로 보인다.
손잡이에는 금실이 감겨 있는 수리한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매우 귀한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병과 더불어 잔 3점이 한 벌로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 명칭은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慶州 九十八號 南墳 琉璃甁 및 盞)이다.
(16) 팔찌 금∙옥[象嵌 金製釧] -보물 623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皇南大塚 출토 (*釧: 팔찌 천)
표면에 파란색의 터키石과 회색, 흑색의 보석을 박아 넣고 금 알갱이를 붙여 꾸민 팔찌이다.
형태나 裝飾技法으로 보아 西아시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新羅의 팔찌 중에서
유일한 형태의 팔찌이다.
(17) 은잔[銀製 打出文杯] -보물 627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皇南大塚 출토
거북등무늬 안에 새, 노루, 뱀, 말, 사람 등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겼다.
특히 사람은 큰 눈, 높은 코의 西域人의 모습이다.
(18) 합 은[銀製盒] -보물 628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皇南大塚 출토
(*盒: 합 합)
3종류의 용기류 중 은제 합은 높이 8㎝, 아가리 지름 10㎝로, 아래에 낮은 굽이 붙어있고
아가리는 밖으로 말려있다. 뚜껑도 반원형으로 중앙에 3장의 나뭇잎 받침이 있고,
그 위에 고리 모양의 꼭지가 있다.
(19) 황남대총 북분 금관[皇南大塚 北墳 金冠] -국보 제191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1973년 慶州市 皇南洞 皇南大塚 北墳 발굴
慶州市 皇南洞 味鄒王陵 地區에 있는 皇南大塚에서 발견된 금관으로,
新羅 金冠을 대표하는 것으로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垂飾)의 길이는 13∼30.3㎝이다. (*鄒: 추 나라 추 *飾: 꾸밀 식)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字形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 올린
장식을 3곳에 두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山字形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굽은 玉을 많이 달아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20) 황남대총 북분 금관[皇南大塚 北墳 金冠]
-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皇南大塚 北墳 金製銙帶]
-三國時代(新羅) 5세기 -1973년 慶州市 皇南洞 皇南大塚 北墳 발굴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皇南大塚 北墳 金製銙帶] -국보 192호-
남북으로 2개의 봉분이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있는 皇南大塚에서 발굴된
金製銙帶(금 허리띠)와 腰佩(띠드리개)이다. [*銙: 대구帶(鉤) 과 *佩: 찰 패]
과대는 織物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 길이 120㎝,
띠드리개 길이 22.5∼77.5㎝이다.
28장의 板으로 만든 이 허리띠는 주위에 있는 작은 구멍들로 미루어 가
죽 같은 것에 꿰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허리띠 아래에 매달려 있는 13개의
띠드리개는 경첩으로 허리띠와 연결하였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완벽한 상태로 출토되어 신라 당시의 着用法과 띠
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21) 토우 붙은 항아리[土偶附 長頸壺] -국보 195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路東洞 墓 출토 (*頸: 목 경)
항아리의 목 부분에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 性器를 드러낸
男子 등의 土偶가 붙어있다. 뱀과 성기를 드러낸 남자는 강인한
生命力을 상징한다. (*偶: 짝 우)
*土偶: 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像.
(22) 등잔모양 토기[燈盞形 土器] -三國時代(新羅) 6세기 –경북 慶州 金鈴塚 출토
심지를 꽂을 수 있는 다섯 개의 작은 접시가 속이 빈 管으로 연결되었다.
주인공이 무덤 속에서도 現世와 같은 밝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 바라는 念願이 깃들어 있다.
(23) 목 항아리[臺附 長頸壺](왼쪽) – 굽다리 접시[高杯]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출토 (*頸: 목 경 *杯: 잔 배)
(24) 동물을 새긴 항아리[動物文臺附長頸壺]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皇城洞 출토
(25) 청동 자루 솥[靑銅 鐎斗] -三國時代(新羅) 5세기 –경북 慶州 飾履塚 출토
액체를 데우는 그릇으로 손잡이는 龍, 발은 말발굽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대부분 王陵 級 무덤에서 出土되며, 뚜껑이 있는 것도 있다.
(26)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국보 제3호- -三國時代(新羅) 眞興王 16년(555)
-서울 北漢山 碑峰 - 높이 154㎝ 너비 71㎝ 두께 16㎝.
新羅 제24代 眞興王(재위; 540~576)이 漢江 流域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眞興王의 領土擴張 활약과 강력한
王權, 당시의 官職制度와 人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비석은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져 존재가 희미해졌으며, 심지어는
無學大師 혹은 道詵國師의 비라고 잘못 전해 내려오기까지 했으나, 이것을
바로잡은 것은 秋史 金正喜였다. 그는 純祖 16년(1816)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碑峰에 올라 이것이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발견된 眞興王 巡狩碑는 (慶南)昌寧 新羅眞興王 拓境碑(국보 33),
北漢山 新羅眞興王巡狩碑(국보 3), (咸南)摩雲嶺 眞興王巡狩碑(북한 국보 111),
(咸南) 黃草嶺 眞興王巡狩碑(북한 국보 110) 등 4基이다.
(27)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뒷면
6∙25전쟁 때 뒷면에 많은 총탄 자국이 생기는 피해를 입었다.
또 언제인지는 모르나 碑의 위쪽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절단된 상태이며, 오른쪽 하단 귀퉁이는 크게 떨어져나갔다.
이런 상태로 높은 산꼭대기에서 거센 풍우의 風化作用에 磨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景福宮 勤政殿 回廊으로 옮겨 보존하다가
1986년 8월 國立中央博物館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28)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왼쪽 金正喜 刻字
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차신라진흥왕순수지비
병자칠월 김정희김경연래독) /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또 隸字로 새기기를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정축육월팔일 김정희조인영래 심정잔자육십팔자)/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라고 하였다.
(29)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 -三國時代(新羅) 501년
-경북 浦項 中城里 (複製品)
新羅 支配層이 浦項 中城里 지역 豪族에게 명령하여 ‘宮’ 즉 토지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조정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맨 앞에 나오는
‘辛巳’는 碑의 건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로, 이제까지 알려진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비석임을 알 수 있다.
不定型의 自然石(화강암 최대길이 104cm, 최대너비 49cm, 두께 12~13cm,
무게 115kg)으로 한쪽 面에만 陰刻하였다.
이 碑가 발견된 지점은 浦項 冷水里 新羅碑(국보 264호)가 발견된 지점에서
東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다.
(30)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 -국보 제264호- -三國時代(新羅) 503년
-경북 浦項 冷水里 (複製品) -1989년 발견
신라 지배층이 浦項 冷水里 지역의 豪族 節居利에게 財物의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지배귀족이 의논하여 명령을 결정하고, 이후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뒤 비석을
세웠다.
*이 비는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으로 높이 67cm, 너비 72cm, 두께 25∼30cm이며,
앞면과 뒷면,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으며 비문은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로 書體는 楷書體로 보이나, 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忠州 高句麗碑(국보 205호), 蔚珍 鳳坪里 新羅碑(국보 242호)와
비슷하다.
내용 중 ‘癸未’라는 干支와 ‘至都盧葛文王(지도로갈문왕)'이라는 智證王의 卽位 前 칭호가
있어 신라 智證王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王命을 다룬 초기 律令格式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신라역사 연구와 金石學
연구에도 중요한 遺物이다.
(31) 연꽃무늬 수막새[蓮花紋 圓瓦當] -三國時代(新羅)
慶州 皇龍寺 터(왼쪽부터) - 慶州 興輪寺 터 - 慶州 靈廟寺 터 - 慶州 月城
新羅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高句麗와 百濟의 영향을 받았다.
(32) 항아리[直口壺] -三國時代(新羅) -경북 慶州 東川洞 瓦塚 출토
(33) 뼈 단지
佛敎의 영향으로 火葬하는 풍습이 유행하고 화장한 후 뼈가루를 담는 뼈단지도 함께
유행하였다.
二重으로 만든 뼈단지로 뚜껑꼭지에서 짧은 굽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도장무늬를
빼곡하게 찍었다.
(34) 향로[香爐] -平壤 石巖里 9號墳 -1916년 발굴
(35) 세발 솥[銅鼎] -平壤 石巖里 9號墳 -1916년 발굴 (*鼎: 솥 정)
(36) 솥[銅釜](왼쪽부터) – 항아리[金銅 壺] – 술을 데우는 그릇[銅鋞] -平壤 石巖里 9號墳
-1916년 발굴 (*鋞: 냄비 형)
(37) 곰 모양 상다리 장식[金銅 熊足] -平壤 石巖里 9號墳 -1916년 발굴
(38) 거울[連弧紋鏡] -平壤 石巖里 9號墳 -1916년 발굴 (*弧: 활 호)
(39) 철불[鐵佛] -南北國時代/統一新羅 8~9세기 -충남 瑞山 傳 普願寺址
(40) 아미타불[鐵造 阿彌陀佛 坐像] -高麗時代 -江原 原州市 출토
江原 原州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鐵佛이며 原州에서 발굴된 5具의
鐵佛 중에서 조금 늦은 시기의 철불로 조금 투박하나 現實感 있는
얼굴이다. 法衣는 通肩式이며 좌우대칭의 넓은 띠주름 형태나 매듭 모양의
속옷 등은 고려시대 地方佛像의 典型을 보여주고 있다.
手印은 上品上生印을 하고 있어 阿彌陀佛로 추정된다. 아미타불은
西方淨土에 머물면서 衆生을 極樂으로 인도하는 부처로 무한한 壽命을
가지고 있다고 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 (*肩: 어깨 견)
龍興寺 三佛會 掛佛幀
龍興寺 三佛會 掛佛幀는 이번 답사에 관람하지 않았으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지난 06.21(木)에 찍은 사진을 올린다.
(41) 용흥사 삼불회 괘불탱[龍興寺 三佛會 掛佛幀] -보물 제1374호-
-朝鮮 肅宗 10년(1684) –크기 10.03m×6.20m -경북 尙州市 龍興寺
길이 10미터를 넘는 대형 掛佛畵로 중앙의 釋迦牟尼佛, 左側(向右)에
藥師佛, 右側(向左)에 阿彌陀佛을 배치하여 三世佛 성격을 띠고 있다.
17세기 이후 유행한 群集圖 형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화면을
상·중·하 3단으로 구분하여 중단에 3佛, 하단에는 각 脇侍菩薩像들과
東·南方天王, 상단에는 西·北方天王 및 他方佛과 十大弟子, 龍王·龍女, 聲聞衆,
化佛 등을 배치하였다.
이 탱화는 조성시기가 이르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화사한 색채의 사용과
세련된 筆線의 구사, 독특한 화면구성 등에 있어 기타 17세기 괘불탱들과는
다른 특징으로 17세기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幀畫(幀): 부처, 보살, 성현들을 그려 벽에 거는 그림. (*幀: 그림 족자 탱)
(42) 용흥사 삼불회 괘불탱[龍興寺 三佛會 掛佛幀], 中∙上段
(43) 용흥사 삼불회 괘불탱[龍興寺 三佛會 掛佛幀], 下段
(44) 세 부처 모임의 參與者
(45) 세 부처 모임의 參與者 명단
(46) 국립중앙박물관을 떠나면서…. 展示館 앞 거울못과 靑瓷亭
뒤풀이
(47) 南營洞 [미성회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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