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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8일(대림절 두 번째 주일)
요한계시록 11:1~14
교회는 이긴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초안: 2021년 7월 18일/ 수정: 2024년 12월 8일
where?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고난받는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성전을 측량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1~2).”
하나님은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시며 성전을 측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지팡이 같은 갈대’는 물건의 길이를 재는 측량 도구로 쓰였습니다. 실제로 에스겔서 40장 3절과 5절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전을 측량했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성전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오직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만 측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측량한다’라는 의미는 심판과 보호의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사야 28장 1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측량줄로 재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전과 제단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바깥마당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교회에 아무런 핍박이나 고난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성전 바깥마당으로 상징되는 세상으로부터 극심한 고난을 겪는 모습입니다.
장차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게 될 교회의 모습은 영화롭고 완전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이 땅에서 순례하는 순례객의 모습일 뿐입니다.
과연 순례 객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 세상에서 순례 객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현실의 삶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무시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1907년 5월 2일,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정빈과 김상준, 두 분이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이 무명의 전도자들은 당시 서울의 번화가였던 종로 염곡에 다 쓰러져가는 집 몇 칸을 임시로 세내어, 노방전도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가 지나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본격적으로 복음전도관을 시작할 수 있도록 건물을 얻어 주고 떠났습니다. 정식으로 복음전도관이 시작된 것은 1907년 5월 30일이었는데, 한국성결교회는 이날을 성결교회의 창립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당시 복음전도관은 노방전도를 중시했습니다. 당시 노방전도의 모습을 이명직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한 사람은 긴 등잔(장등, 長燈)을 들고 한 사람은 북을 치며 황토현(黃土峴)에 가서 “믿기만 하오. 믿기만 하오”하고 찬미를 부를 때에, 미신자(未信者)는 물론하고 신자의 안목(眼目)에도 만물의 때와 같이 보일 뿐만 아니라, ‘굿중패’나 ‘남사당패’와 같다고 조롱하였더라.
그러나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은 어떠한 방법이던지 영혼을 구원함에는 개가죽이라도 무릅쓸 경우에는 그것을 사양치 아니하겠다는 주의(主義)로 오직 충성을 다하여 역사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함께 하셨더라.
그 때에 어떠한 사람은 ‘그러한 방법은 시대가 지났다’ 또는 ‘얕고 천한 방법’(천루, 賤陋)이라고 비평하였으나 이같이 길가에서 전도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영혼이 서울과 그 주변 지역(경향간, 京鄕間)에 그 숫자(수효)가 실로 적지 아니하니라.”
-출처: 이명직,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 약사」, 51쪽; 박명수, 「초기한국성결교회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17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초창기 성결교회 전도자들이 전도할 때에, 사람들이 전도자들을 ‘굿중패’나 ‘남사당패’와 같다고 조롱하였다고 했습니다. 굿중패는 중들이 패를 지어 집집마다 다니며 꽹과리를 치며 돈이나 쌀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 남사당패란 사당패에 사내 남(男)자가 붙은 말입니다.
원래 사당패란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고, 때로는 몸도 팔며, 천하게 놀아난 여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남자들 가운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남사당패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전도관의 노방전도 방법은 당시 양반들이 많았던 서울에서 비웃음의 대상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전도관은 당시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노방전도뿐만 아니라 문서 전도에도 힘을 써서 1904년 동양선교회 「전보」에는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인쇄소에 한국어로 된 성결 책자 3만 5천 권과 전도 책자 2만 권을 주문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성결교회의 초창기 전도방법은 당시 주류사회를 이끌던 양반들에게는 천박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노방전도와 찬양전도, 문서선교를 통해서 많은 대중이 주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결실을 맺었던 것입니다(박명수, 「초기한국성결교회사」, 217~218).
여러분, 지상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도 고난을 받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당시 유대인들에게 많은 조롱과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장차 많은 조롱과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현재 여러분은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계십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who?
그렇다면 두 증인은 누구일까요? 우리 한 음성으로 3절부터 5절까지를 읽겠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과연 두 증인은 누구일까요? 성경에는 짝을 이루는 인물이나 개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와 엘리야, 베드로와 바울, 혹은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처럼 두 인물이나 개념들이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두 증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감람나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스가랴서 3장과 4장을 보아야 합니다. 스가랴서 3장과 4장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대 총독인 스룹바벨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서 있는 ‘감람나무 두 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슥 4:12).
또한, 스가랴서 4장 14절은 이 두 사람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대 총독 스룹바벨은 두 감람나무입니다. 또 이 두 사람은 기름 부음 받은 자들입니다. ‘기름 부음’은 성령의 권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나요? 사도행전 1장 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 율법에 의하면, 두 사람은 법정에서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최소단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두 촛대는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 보면, 촛대는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가 무엇인지를 정리하자면, ‘성령의 권능을 받아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두 증인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하나님은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 그들이 굵은 베 옷을 입고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이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교회가 회개의 복음을 전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두 증인이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한다는 것은 교회가 성령의 능력 가운데 복음을 전할 것을 가리킵니다. 천이백육십일을 달수로 계산하면 3년 6개월이 됩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에 능력으로 사역했던 엘리야의 사역과 일치합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그래서 6절에 보면,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했던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물을 피로 변하게 했던 사람은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에게 주셨던 권능을 말세를 살아가는 교회에게 주셔서 주님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이처럼 놀라운 권능을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을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셔서, 그들이 엘리야처럼, 또는 모세처럼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16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6~18).”
하나님은 두 증인인 교회에게 놀라운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고,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엘리야와 모세와 같은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와 선교사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 곧 교회에 주신 사명과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여러분에게 성결과 은사와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증인 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what?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하다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절 이하는 말합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무저갱은 장차 사탄이 영원히 심판받게 될 장소입니다. 그러나 무저갱으로부터 사탄이 잠시 올라와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과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탄에게 패배당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예언되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사실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장차 당하게 될 운명으로 인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곳에서 주님의 교회들이 사탄과 치열한 영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처럼, 지금도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이것은 엄연한 영적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우리보다 더 치열한 사탄의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이 완전히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창세기 3장 15절 예언의 부분적인 성취였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사탄도 교묘하게 우리의 발꿈치를 물어 우리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 10절의 예언대로, 땅에 사는 자들이 두 증인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직 낙심하지 마십시오. 너무 속단하지도 마십시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5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성도들이 알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으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사탄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깔아뭉개 버리셨습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였듯이, 교회도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맙니다. 그러나 11절과 12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여러분,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 일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교회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인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골 1:18).”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에 여러분에게는 영원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여러분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 같고, 교회가 거대한 세상의 도전 앞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비록 지상에 있는 교회가 사탄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그 모든 것을 통과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승리와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영광의 길을 다 버리고, 아무도 걷지 않으려는 외롭고 험난한 길을 홀로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결국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고통 없이 되는 것이 있던가요? 수고 없이 얻는 면류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면에서 지상의 교회는 묵묵히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외면해도 주님께서 걸으신 고난의 길, 골고다의 길을 묵묵히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how?
저는 끝으로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해 여름, 한국 교회에 수치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추문들이 많았다. 나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한국 교회는 끝이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고, 극심한 두려움과 절망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당시 내 상태는 ‘낙심’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한국 교회의 문제는 한두 교회가 발버둥 쳐서 회복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소망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이렇게 설득하셨습니다.
‘얘야, 정신 차려라. 넌 지금 과장된 낙심에 빠져 있다. 교회가 망하신 왜 망해? 십자가 진 예수가 교회의 주인인데, 이 일은 교회 안의 복음을 죽여 놓은 너희 같은 종들의 타락으로 생겨난 결과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복음을 일깨우면, 피 묻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선명히 드러나도록 정신을 차리고 일한다면 교회는 회복될 것이다. 교회는 살아난다. 한국 교회에 제2의 부흥의 때가 반드시 올 줄로 믿어라.’
그날 새벽, 나는 여전히 신실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 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곳곳에서 여전히 아름답게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외롭고 힘드십니까? 텅 빈 들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습니까? 바로 그때가 낙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때입니다.
-출처: 이찬수,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규장, 2016); 「생명의 삶」(두란노, 2021년 7월호), 41쪽에서 재인용.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 여러분을 낙심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싶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과장된 낙심에 빠지지도 마십시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더라도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잠시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을 다시 바라볼 때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우리에게 들어오고, 우리는 두 발로 낙심의 자리를 딛고 일어설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늘로부터 “이리로 오라!”는 하나님의 큰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교회의 미래를 밝히 알고, 현재의 고난을 잘 이겨나가시길 바랍니다.
교회는 이깁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비록 고난은 당해도 교회는 이깁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승리자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