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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4,6ㄴ-1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6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가르침을 나와 아폴로에게 배워, 저마다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7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13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4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 정신>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는 단식 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곧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루카 6,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사실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노동’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오히려 '해야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혹 '해야만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아버지가 필요해>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질타하는 내용입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ㄴ)라고 질책성 질문을 하면서 자기가 벌어서 부자가 된 양 우쭐거리고 자랑하는 신자들을 질타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들 자신은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4,13ㄴ) 라고 하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신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생각하며 타이르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우리 부모들이 자신은 못 먹고 못 쓰며 자식을 서울로 보냈는데 자식들은 그 돈으로 마치 부잣집 자식처럼 행세한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아무튼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1코린 4,15ㄴ)
그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이는 신자들이 세속적으로 교만해지지 않고 영적으로 겸손해지게 하기 위함이지요.
아버지의 진정한 역할은 그저 자식들 배부르게 하고 학교에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식이 자기 인생을 겸허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인생 길잡이 하는 거지요.
그리고 세속 아버지가 자녀의 참 행복을 위해 이러해야 한다면 영적인 아버지는 더더욱 그래야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코린토 신자와 달리 영적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바오로 사도와 같은 영적인 아버지가 이 땅에서 필요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아버지를 필요로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저야말로 영적으로 교만하기에 영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컸고 그것이 어렸을 때는 작지 않은 콤플렉스였습니다.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곧 아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저는 늘 아버지를 대신할 ‘제 안의 아버지’를 두고 살았습니다.
제가 저도 되고 제가 저의 아버지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아니면 아버지의 교만 유전자가 제게도 있기 때문인지, 저는 인간적으로 교만하고 영적으로는 더 교만합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필요한데, 문제는 제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저는 여러 사람의 영적 동반이라는 것을 해주면서 영적 아버지 소리를 듣는데 저는 누구의 영적 동반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여러 말 가운데서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 유독 제 마음에 와닿았고 마음을 찌르는데,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가기 위해서는 저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 사는 동안 영적 아버지가 필요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 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 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 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가?
성체를 모셨다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영성체하는가?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인간이 만든 실정법도 존중해야 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때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 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 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갈라 2,16)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로마 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얽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 참례를 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성체를 믿음으로 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따뜻한 아버지로 다가가신 예수님이었지만, 율법 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분이 또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만 가차없이 잣대를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 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날 일이었습니다.
밀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된다.”
(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12,2)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 5-8)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입니다>
1)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도,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심심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의 기준으로는, 배가 고파서 그랬더라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탈출기와 신명기의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탈출 20,10; 신명 5,14)
밀 이삭 몇 개를 뜯어 먹은 것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리사이들은 그것도 곡식을 추수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데, “밀 이삭 몇 개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가 바리사이들의 엄격하고 철저한 율법 준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엄격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2)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좋은 예가 <마카베오기> 상권에 있습니다.
'...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
(1마카 2,36-38)
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군이 공격하는데도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죽었습니다.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
그날에 그들은 이렇게 결의하였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1마카 2,39-41)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그냥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안식일이라고 해도 전투를 해서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3)
마르코복음을 보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르 2,27).
안식일 계명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들은 전부 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서 내려 주신 것이지, 억압하고 죽이려고 내려 주신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법’보다 ‘사람’이 위에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명령의 본래 취지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해야 하는 종들을 쉬게 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신명 5,14-15)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굶을 걱정이 없는 사람도 있고,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무시하고 양쪽에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 즉 메시아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 활동이 안식일 규정 적용의 기준이라는 것, 즉 안식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마태오복음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태 12,7).
자비 없는 법, 자비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비움의 사랑, 비움의 여정 - '주님은 분별의 잣대'>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시편 145,18)
새벽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을 열어보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대략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깊게 전개되는 양상입니다.
새삼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안에 확고히 자리잡고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교황님 기사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변두리의 교황 드디어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45차 해외 사목 방문중 3일간 일정으로 두 번째로 오세아니아주 파푸아뉴기에서 여행이 시작되었다.
파푸아뉴기니는 바티칸으로부터 19,047km 떨어진 곳이다.
비행기로 가장 멀리 여행중인 교황 프란치스코이다.
참으로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얼마나 많이 배려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세계 중심부의 바티칸에서 변두리 파푸아뉴기니까지 미치는 교황님의 넓고 깊은 시야가 경탄스럽습니다.
교황님의 비움의 사랑, 사랑의 절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보는 듯 합니다.
날로 자신을 비워가면서 내면을 넓혀 주님을 닮아감이 겸손이자 지혜이니 이 또한 은총입니다.
비움의 사랑, 사랑의 절정은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집없이 떠돌아 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된 비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요, 파푸아뉴기니 사목여행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케노시스 즉 하느님의 비움의 절정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움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고난과 시련, 고통을 비움의 계기로 삼아 날로 겸손해지면서 주님을 닮아감이 지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눈과 귀가 끌리는 곳보다 마음의 중심이 원하는 바를 잘 살펴보라.”
<다산>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
<논어>
마음의 중심이 원하는 바 하느님이요, 덕을 사랑하는 자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가로 질러 지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자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법으로 분별하는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잣대로 보면 배고픈 현실에서 밀이삭을 뜯어 비며 먹은 제자들은 무죄입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가면서 제자들을 옹호하는 예수님입니다.
다윗 또한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기에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이런 제사 빵을 나눕니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이었기에 이런 용기와 분별의 지혜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되었기에 이런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을까?” 물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비움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해 주며 올바른 분별의 지혜를 지니게 합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시편 31,20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으로 사랑을 완성해 나갑시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안식일 법의 진정한 의미를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간주한 것이지요.
아마도 장정인 제자들이 긴 선교 여행 동안 허기가 져서 그랬을 것 같습니다.
남의 밀밭 사이를 이동 중이었으니 곡식을 거두어 이득을 취하거나 음식을 장만하는 노동의 의도도 아니었을 터이고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사람 보호와 존중의 가치로 법을 활용하기보다 트집을 잡으려고 들이대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루카 6,3)
예수님은 대답 대신, 유다인이 자랑으로 여기는 성왕 다윗의 일화를 상기시키십니다.
다윗 역시 굶주렸을 때 사제들만 먹게 되어 있는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이 있으니까요(1사무 21,2-7 참조).
사실 모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과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정교한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법의 정신이 대부분의 상황을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당시 유다 사회에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을 듯합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나름 삶의 이득을 취하는 부류, 안식일이나 평일이나 생활을 유지하는데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부류, 그리고 안식일의 정지와 멈춤이 쉼은 커녕 생계에 큰 위협이 되는 부류입니다.
사사건건 안식일 규정을 들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전자에 속할 것이고, 그들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가난한 이들이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득권자라는 이유로 사회 종교 지도층을 소외시키지 않으셨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사실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이미 많은 관심과 위로와 이득을 충분히 받아 누리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근본도 모르는 가난뱅이 예언자 설교가의 애정이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다릅니다.
율법도 포기한 죄인이라는 손가락질과 멍에를 치우고 다가오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인격을 존중하고 존재 자체를 받아들여 주시는 아버지 같고 엄마 같고 친구 같은 스승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이에게 법을 들이대기보다 "저런, 배가 많이 고팠구나." 하고 연민하는 분이시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전히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1코린 4,8)
사도는 그토록 열성을 다해 지도한 코린토 신자들이 자기들을 이끌어 준 사도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스스로 이미 하늘 나라를 차지하여 하느님의 통치권을 함께 행사한다는 망상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1코린 4,11)
사도는 주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현실에서 겪어내고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술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명예나 호의호식, 분파나 교만이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닮고자 따르는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동안 배고픔과 피로에 지칠 때까지 양떼를 찾아 먼 길을 오가셨고, 결국 죄인까지 끌어 안는 사랑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으니까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1코린 4, 15)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도록 도운 영적 '아버지'가 이처럼 고군분투하며 하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데, 그 자녀들이 그토록 쉽사리 자기 주제와 복음의 정신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참 가슴 아픈 일이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언젠가 후회를 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따끔한 말로 코린토 신자들을 일깨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예수님 역시 바리사이들에게 단호히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그들에게 어쩌면 선전포고일 수도 있고,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돌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람의 생명과 인격과 존엄성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자의로 또는 타의로 법의 해석을 그르치는 오류가 있을 따름이지요.
하느님께서도 사랑이라는 기반 위에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당당히 선언하십니다.
당신이 율법의 정신을 바로 세워 완성하실 것이니까요.
안타까워서 하는 사족 같은 말씀입니다만, 바리사이들이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약자들을 보듬는 율법의 정신을 수호하는 데 자기들에게 부여된 지식과 특권을 집중했다면, 그들은 더욱 겸손하고 포용력 넓은 현자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듭니다.
그러했다면 예수님께 대한 불필요한 저항과 소모적인 선동, 무고와 무죄한 사형 따윈 없었을 테니까요.
오늘날의 기득권층의 행태가 이들의 모습과 겹쳐 떠오르는군요.
무엇이 진리인지 헷갈릴 때는 본질로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삶의 곳곳에서 밀려드는 다양한 요구와 도전들 속에서 자신이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면, 잠시 멈추어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일부러 말씀을 거스르거나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지요.
앞질러 단죄하지 않고 스스로를 심판자라 착각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니 아직 사랑하고 있다면 괜찮은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돌판에 새긴 법을 넘어서 우리 심장에 새겨 주신 사랑의 법이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그 사랑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연민하며 나아갑시다.
사랑으로 사랑을 완성해 나갑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바둑에서 중요한 부분은 ‘형세판단’입니다.
형세판단을 잘 하는 사람은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은 ‘맥락’입니다.
맥락을 잘 아는 사람은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형세판단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자성어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견지망월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까막눈임에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혜능은 어느 날 한 비구니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안다는 말씀인지요?’
그러자 혜능은 ‘진리는 저 하늘의 달과 같고,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답했습니다.”
깨달음은 능력의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배움의 순서대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직책에 따라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햇빛이 비추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본과 물질의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익과 풍요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폭력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태계의 파괴와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원리에는 인간의 생명과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요의 나라,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에서 매년 총기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부유한 나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된 물을 바다로 방출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되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물질과 자본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새 부대는 욕망과 탐욕이 아닙니다.
새 부대는 십자가와 나눔입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통제가 필요한 유일한 시간은 지금 바로 ‘현재’>
<예언자>라는 책의 작가로 유명한 칼릴 지브란은 "우리의 불안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통제하는 데서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크게 공감되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통제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공부만이 아니라 취미 등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합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제할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자기의 통제로 아이가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더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큰 질병 중 하나가 마음의 병입니다.
이 마음의 병 한 가운데에는 늘 불안이 있습니다.
단순히 미래에 관한 생각, 걱정 때문이 아니라, 나와 가족과 또 만나는 이웃을 통제하려는 욕심에서 마음의 병이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보다 잠도 줄이는 등 더 나 자신을 채찍질했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시간입니다.
결국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을 더 의미 있게 사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저절로 미래의 ‘나’가 바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하려고 해서 굳이 불안 속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통제가 필요한 유일한 시간은 지금 바로 ‘현재’ 뿐입니다.
바리사이 몇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를 비롯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불안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미래가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했던 로마는 군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봐야 할 것은 ‘지금’이었습니다.
지금 자기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알아야 했고, 지금 예수님 뜻에 맞춰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불안으로 통제를 계속해서 합니다.
자기를 통제하고, 가족을 통제하고, 이웃을 통제하고….
이렇게 불안으로 통제하려고 할 때, 지금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분명히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지금에 충실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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