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나무(自歸南無)
이 재 부
질주하는 계절은 벌써 여름의 한 복판을 달린다. 밀려가는 봄을 안타까워하며 5월 달
력을 넘긴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다 가고 6월의 끝자락이 7월에 밀리고 있다. 올 1년도
절반의 고개를 넘었는데 찾아내고,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부르지 않아도 올 것은
오고, 가라고 하지 않아도 갈 것은 다 가는 자연의 순리 앞에 끝없이 차이고 밟히는 것
은 부질없는 내 마음뿐일까.
산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기어오르고, 또 기어올라 화려하게 꽃피운 정점에 올라 환
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순간순간 달콤한 즐거움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날
아다니는 것일까? 나는 밀려난 후보선수 같이 준비운동만 하면서 세월을 보내니 안타깝
다. 이해(利害)와 시비(是非)가 떠난 청정한 마음으로 가볍게 살지 못함은 늙어서 변색
하는 또 다른 욕심인가, 늙는 병인가.
늙어 가는 병이 한 둘 일까만 추억에 대한 반사작용도 늙는 병일 것이다. 잊지 못하는
그리움! 그것도 늙는 병이 아닐까? 그러나 그리움은 인생의 친구 같고, 연인 같은 동행
자이기도하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삭막할까. 그리운 추억이 많은 사람을 멋
있게 산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움에 젖어 사랑했던 사람을 불렀다. 삶에 지쳐 계산서만 남겨놓고 떠난 줄 알았
는데 그것은 나 혼자만의 독백이었다. 차를 몰고 달려와 따뜻한 가슴을 내민다. 그리움
만큼 익어있는 가슴, 연분홍 얼굴에서 풍기는 포근한 향기… 내 관심과 시선이 옛 사랑
의 충동질을 치지만 달려가는 차안의 흔들림은 엉뚱한 송사만 늘어놓는다. 차는 벌써
시내를 벗어나 탁 트인 외곽도로를 달린다.
녹색으로 꽉 채워진 들판은 검은 아스팔트길만 비워 놓았다. 나무를 기어오르는 벌레
같이 그 길을 달려간다. 벌레는 먹고 번식한다는 본능 따라 기어오르고 행동하지만 사
람은 그것도 아니다. 복잡한 사유(思惟)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바삐 달려가는 것이다.
어디로 달려가는 행복인가 벌써 충북을 벗어나 강원도에 접어들고 있었다. 차가 정차
한 곳은 물 맑은 청령포 주차장이다.
이곳이 서강인지, 동강인지는 모르지만 맑은 강물이 휘돌아 가는 사행천(蛇行川) 모
습은 옛 초옥(草屋)의 문고리같이 강이 둥글게 굽이쳐 흐르고, 땅으로 연결된 유일한
곳은 절벽의 바위산이 칼날 같아서 사람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천혜의 유배지였
다.
왜? 나를 이런 곳으로 안내하는가? 꽤 많은 관광객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지상 제일의 권력! 왕권을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박탈당하고 17세 꽃다운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을 때까지 외로움과 회한을 되씹었던 슬픈 역사의 현장으로,
죽은 자는 말하고 있다. 역사의 입을 통해서. 강은 굽어 흐르지만 정의는 곧게 흐른다
고 기구한 운명 앞에 흔들렸던 낙락장송을 바라보며 연인의 손을 꼭 잡았다. 자연인으
로 돌아간 노산군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세상만사 다 버린 홀가분한 마음
으로 우리같이 진한 사랑을 경험하지는 못했으리라. 소나무 숲길을 따라 촉각을 늘어뜨
리고 비운의 역사의 길을 더듬어 걸었다. 시녀의 통곡소리인 듯 강바람 한 줄기가 청솔
을 흔들며 지나간다. 노산대에 오르니 한양 쪽을 바라보며 왕비를 그리워하는 단종을
만난 듯 슬픈 사연의 아픈 역사가 몸에 감긴다. 가기 싫다 떠나기 싫다. 저 강줄기 바
라보며 질긴 욕심 끊어내고 더운 가슴 비워내며 강물에 발 담그고 한 세상 살고 싶다.
그러나 목표지점이 여기가 아닌 듯 차에 오르기를 재촉한다. 구불구불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천국으로 향하는 용의 승천 길 같다. 계곡이 장관이다. 푸른 하늘을 받쳐든
청산이며, 그 사이를 흐르는 물소리, 흔들리는 들꽃향기, 산매미 소리…….
물가에서 소주 한 잔을 나누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내 인생 역정이 계곡 물 속
에 잠겨 흘러가는 듯 혈관으로 스며드는 술기운은 환희에 젖어 물길 따라 흐른다. 정신
을 가다듬고 물에 비친 하늘을 본다. 뭉게구름이 운향(雲鄕)을 만들지만 차는 또 달리
려 시동을 건다.
무더기 지워 만든 돌탑을 바라보며 계곡 따라 한참 더 올라가 청산에 잠든 시선(詩仙)
김삿갓(김병연)을 만났다. 많은 관광객들이 꽃에 모여드는 벌같이 문학관을 들락거린
다. 천대와 괄시 속에서 힘들게 살아오면서도 영원히 시들지 않는 풍자와 해학의 문학
을 꽃피운 님! 그는 여름 태양 아래 곱게 피기 시작하는 자귀나무 솜털 꽃잎 같이 부드
럽고 아름답게 세상을 그리고 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자귀나무꽃은 나무등걸 끝가지마다 천심을 보듬듯 연분홍 솜
털을 자랑한다. 그 꽃을 바라보며 늙은 자벌레 한 마리와 예쁜 무당벌레가 사랑을 속삭
이는 듯 함께 기어오른다. 꽃 가까이 기어오르던 무당벌레는 꽃으로 날아가고 늙은 자
벌레만 죽은 듯 멈춰있다. 김삿갓이 그 광경을 보면 붓을 휘두르리라. 世上萬事 自歸南
無,人間萬物 自業自得이라고. 오늘 나는 무슨 업을 지을까? 늙은 자벌레인 듯 연분홍
솜털 꽃에 앉아 있는 무당벌레를 바라본다. 또 어디로 날아갈까…… 내가 만든 스스로
의 길로 돌아가는 자화상을 본다.
*自歸南無(자귀나무) 자기한테로 귀의한다는 뜻으로 만든 造語
2005. 21집
첫댓글 꽃 가까이 기어오르던 무당벌레는 꽃으로 날아가고 늙은 자
벌레만 죽은 듯 멈춰있다. 김삿갓이 그 광경을 보면 붓을 휘두르리라. 世上萬事 自歸南
無,人間萬物 自業自得이라고. 오늘 나는 무슨 업을 지을까? 늙은 자벌레인 듯 연분홍
솜털 꽃에 앉아 있는 무당벌레를 바라본다. 또 어디로 날아갈까…… 내가 만든 스스로
의 길로 돌아가는 자화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