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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35,4-7ㄴ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제2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 2,1-5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4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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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수도회 규칙에 의해 오늘 연중 제23주일 미사를 '성모성탄 대축일' 미사로 지내므로 복음이 다릅니다. (마태복음 1, 1-16, 18-23)
이에 따라 이영근 신부님의 오늘 묵상글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들어야지 말하고 들은 대로 말한다>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이 어떻게 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언하는 책이고
그래서 오늘 첫째 독서도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벌어질지 묘사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이사 35,5-6)
오늘 복음은 이런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표시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인데, 아주 짧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그 의미가 매우 풍부하고 깊습니다.
우선 오늘 치유 받은 사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라는 점입니다.
무릇 말 더듬는 이는 혀가 짧아서 더듬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말을 하지 못함은 성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줍은 성격이기에 못하거나 신학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들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른 귀는 열려서 그 말은 듣지만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아서 듣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다른 귀는 열리고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말의 홍수란 말이 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면 거기에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듯, 말의 홍수가 나도 그 말들에 의해 우리가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말들이 많습니까?
방송으로 치면 갖가지 티브이 방송이 있고, 자기 손 안의 방송인 스마트 폰 시대에 온갖 유튜브 방송이 있습니다.
이런 말의 홍수와 방송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듣고 골라서 듣습니까?
아니면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립니까?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화방이 없었고 그래서 저는 만화를 못 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엿장수가 앞뒤 뜯어진 만화를 가지고 왔는데 저는 고물을 가지고 엿을 사 먹지 않고 그 만화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만화를 보고 또 보고 그야말로 닳도록 보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제가 뭘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아실 겁니다.
말들을 끊지 않으면 그 수없는 말들에 의해 영적 감수성을 잃거나 무디어집니다.
이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귀에 이어폰을 달고 살다가 청력이 잃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데리고 온 사람들을 놔두고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아주 더러운 짓을 하십니다.
그의 귀에 당신 손을 대시고 그의 혀에 당신 침을 발라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듯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도 고쳐주실 수 있지만, 따로, 그러니까 은밀히 만나주시고, 한마디 말씀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행위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도 따로 불러내실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지금?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데, 오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마음이 무디지 않고 깨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귀에다 대고 "에파타", 열려라! 하시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가 열리겠습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는 은혜>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몸소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십니다.
이 시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당신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창세 1,27.2,7).
따라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제대로 말할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눈을 통해서 마음으로 읽어야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하려는 정성이 있을 때 어느 순간 살아있고 힘이 있는 능력의 하느님(히브4,12)을 체험케 됩니다.
신자들이 세속적인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가 많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복음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또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룹모임에 가보면 자유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한다 해도 내 바람만 얘기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말씀 나누기에도 입을 꼭 다물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했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침묵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밖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노력하지 않은 채 그냥 세상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전혀 말씀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가 귀먹고 말을 더듬는 반벙어리입니다.
세상 것을 즐기는 시간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성경을 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비판 정신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때에 문법을 따지지 않듯이,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에 영양가를 분석하지 않고 먹듯이 성경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알베리오네 신부)
일반 소설책은 밤을 새워 읽지만, 성경이나 신심 서적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시간을 내십시오.
그만큼 은혜로울 것입니다.
귀먹었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빵의 기적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알아듣지 못했고, 호숫가에서 자기들을 구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의 치유 과정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환자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따로 불러낸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배려입니다.
무엇보다 안정시킬 수 있는 곳이요,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자주 한적한 곳에 머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쉬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습니다.
손가락은 창조하는 도구입니다.
'내가 너를 치료해 주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말을 못 하는 이들은 자기의 의사 표현을 손으로 합니다.
3)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는데, 유다교에 있어서 침은 안질에 특효가 있는 치유로 여겼습니다.
당시 관습적인 치유 행위입니다.
우리도 벌레에 물렸을 때 침을 바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4)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빵을 보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오늘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기도하면 연민의 정과 측은한 생각으로 기도하겠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면 전능하신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신뢰를 갖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는데 거센 파도를 보자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걸었지만, 파도를 볼 때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5)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 숨을 얘기합니다.
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르 15,34) 절규하며 기도하는 그 아픔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숨은 절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희망입니다.
6)
열려라! 에페타!
이 말은 부활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려라’는 말씀은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귀먹은 반벙어리에게 이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은 믿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려있는 만큼 빛이 들어오고 은총이 열매 맺게 됩니다.
시편에서는 “너 한껏 입을 벌려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주리라”(시편 80,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시려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의 영적 감각이 열리고 건강한 영혼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치유 결과를 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음을 똑똑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코 7,37)
우리는 우리가 지닌 귀와 입을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올바르게’, ‘정확하게’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입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조용한 곳을 찾아 침묵 속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에파타!
열린 사람은 감사와 찬미로 제대로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신 다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람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고 반벙어리 고쳐주셨다는 얘기만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소리만 퍼질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는 것은 ‘보시니 참 좋더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다시 회복시키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정화하여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듣고 말해야 할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꽉 막힌 사람이 뻥 뚫린 사람이 되는 방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을 더듬는 이에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방식은 당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당신 침을 손가락에 묻혀 그의 혀에 대고는 숨을 내쉬시며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어떤 사람이 열리지 못한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섬에, 여자 주인공은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 타인에게 열려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가 갑갑하게 닫힌 사람인지 활짝 시원하게 열린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원작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거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에서 시골집으로 대피한 네 남매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루시는 우연히 그녀를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데려다 주는 옷장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남매는 모두 나니아에 입성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마녀와 아슬란이라는 사자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니아에 한 번 들어가 하얀 마녀를 만난 에드먼드는 마녀의 약속에 유혹받아 형제들을 배신합니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가장 소외당하였다고 여기고 마녀의 헛된 약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녀의 약속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녀의 손아귀에서 구해온 것은 아슬란입니다.
아슬란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에드먼드를 구합니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마녀는 군대를 이끌고 아슬란의 군사들에게 진격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자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아슬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진실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악의 세력과만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혀도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슬란의 죽음으로 그는 해방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힘센 왕이 자기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세워진 한 채의 오두막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지친 손님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도둑질하거나 그 집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으셨을 때 돈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며 살다가 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부를 자랑해 왔는데 망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겁냈습니다.
점집에도 갔다가 결국 성당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창피한 게 없어졌습니다.
성당으로 가서 바로 화장실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게 되기 때문에 더는 내가 무언가를 잃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명동성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자기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들이 열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 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손을 집어넣지? 왜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은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1)
귀를 먹었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고,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듣고 싶어도, 또 들으려고 해도, 여러 가지로 막혀 있어서 들을 수 없는 상황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이 곧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되어버린 것은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 탓입니다.
목자로서 일해야 하는 자들이 목자가 되어 주기는 커녕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전해 주지는 않고 성경과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독점하고서 사람들을 억누르는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상황입니다(마태 23,13).
2)
예수님은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 13,13)
예수님께서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일들’을(기적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상 당신의 ‘온 삶’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분이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이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고, 그 실천의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3)
“에파타!”(“열려라!”) 라는 말씀은 장애를 치유하신 말씀인데, ‘막힌 귀’와 ‘묶인 혀’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이제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전하는 일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못 듣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안 듣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을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말을 안 하는 것’은 죄입니다.
들으면 안 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하면 안 되는 말들을 하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신앙인은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말씀’을 받아서 세상에 전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 10,14-15ㄱ)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10,17)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2티모 4,2)
4)
요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물론 일부 개인의 문제이긴 하지만, 하느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하느님 말씀처럼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자들은 권력자들과 기득권층 편에 서고, 나쁜 권력과 나쁜 기득권층을 향해서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예언자 흉내를 내면서, 교회의 진짜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이라면 귀가 막혀 있고 혀가 묶여 있어서 그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러는 것은 주님께 큰 죄를 짓는 일이고,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일입니다.
5)
37절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새로운 창조자' 라는 증언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삶 - “두려워하지 마라, 열려라, 차별하지 마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시편 146,1-2)
지금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파푸아뉴기니는 흥분의 도가니속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3일간 사목방문중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도 열렬한 환대중에 꿈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어제 강론처럼 오늘도 교황님의 소식을 알림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인구 1천50만명의 파푸아뉴기는 전체 인구의 약 26%가 가톨릭 신자이며, 70%는 개신교를 믿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어제 교황님이 파푸아뉴기니 곳곳에서 나눈 연설 제목을 소개합니다.
88세 고령이지만 정신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빛나는 희망의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정의감, 친근함, 연민 그리고 부드러움을 지니십시오.”
“용기, 아름다움 그리고 희망의 증인이 되십시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시오.”
“교회의 선교는 우리의 기술이 아닌, 성령의 활동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미래를 지닙니다.”
“파푸아뉴기니 가톨릭 신자들은 멜라네시아계(96%) 파푸아인 정신으로 그들의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파푸아뉴기니 어린이들이여, 타오르는 사랑의 빛으로 사십시오.”
“교황님의 방문은 학생들에게는 큰 꿈을 꾸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목 하나하나마다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꼭 10년전 2014년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이 기적처럼 10년 후 이맘때쯤 동남아시아 3개국과 오세아니아의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것입니다.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향력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고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늘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삶, 희망의 삶, 사랑의 삶, 즉 신망애의 삶입니다.
진짜 힘은 믿음의 힘, 희망의 힘, 사랑의 힘, 바로 신망애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나눕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초적 정서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서에 365회 나온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바위판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향과 행복을 노래하며 이들의 희망과 믿음을 북돋웁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며 믿음의 삶을 살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이런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살 때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둘째, “열려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열려라의 아람어 “에파타!” 어감도 힘차 좋습니다.
닫힘에서 희망의 열림입니다.
닫힌 우리를 열어주시어 희망의 기쁨을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닫혀 불통일 때 온갖 죄요 병입니다.
마음도, 귀도, 입도 열려야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오늘 복음을 통해,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실낙원은 복락원이 되고 새로운 창조의 구원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희망의 그때를 노래하는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인 이사야 예언자요, 그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가 상징하는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복음의 귀먹고 말못하는 이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의 치유기적을 목격한 이들과 함께 더할 나위없이 놀라서 고백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그대로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매번 되뇌던 말씀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 마지막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이요 우리들인지,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희망의 삶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셋째, “차별하지 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편애하지 않는 사랑이 하느님 다운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잘 반영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선생님은 여기 좋으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생각을 지닌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을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결코 차별하지 않으며 자발적 가난으로 믿음의 부자가 되는 길을,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제가 신약성서 중 좋아하는 아람어 둘은 오늘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활짝 열어 듣고 말하게 하신 ‘에파타’와 또 죽은 소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살리신 ‘탈리타 쿰’입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에파타!” 외치며 하늘 향해 활짝 마음을 여시고, 좌절하여 주저 앉아 있을 때, “탈리타 쿰!”하며 즉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길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삶, 하느님께 이웃에 활짝 열린 희망의 삶, 차별하지 않는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랑의 삶”을, 바로 참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시편 146,8-9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에파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파흠은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어느 날 아주 싼 값에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파흠은 그 소문을 따라서 원주민이 사는 동네를 찾았습니다.
정말 원주민들은 단돈 1,000원에 원하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면 그만큼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지고 싶었던 파흠은 해가 뜨면서 걸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려했습니다.
파흠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더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방향을 돌려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해가 지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뛰고 또 뛰다 파흠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많은 땅을 원했지만 결국 파흠이 묻힌 땅은 ‘반평’에 불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시애틀’ 추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에게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애틀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우리 땅을 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땅을 팔수는 없다.
땅은 우리 어머니이며, 우리는 그 어머니의 일부분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우리에게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잠든 곳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백인들은 땅을 소유물로 여기지만,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모든 나무와 바위, 강물, 숲의 소리조차 우리 민족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이 땅은 우리의 영혼을 품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도 우리 영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신성한 유산이다.
백인들은 자연을 파괴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돌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 대가로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달라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백인들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의 신성함을 존중하며, 그곳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하늘과 땅, 나무와 물이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이 땅 위에 우리의 영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땅을 사려했던 주지사는 원주민 추장의 깊은 성찰을 존중하며 도시 이름을 ‘시애틀’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파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뜻은 ‘열려라’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년 넘게 전쟁 중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땅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와야 하는데 러시아는 2년이 넘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는 반대로 러시아의 땅으로 진격했습니다.
1,000킬로가 넘게 진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의 땅에서 종살이 했던 민족입니다.
나라 없이 2,000년을 방황하던 민족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은 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착촌을 만들고, 이웃 사람을 내쫓고 있습니다.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민병대는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사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도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에도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향한 관심이 필요한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나이 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탄식이 실제 우리 삶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돈과 연관된 세상의 것만 더 크게 부각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이 많은 세상인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는 사랑의 반대편을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관심은 자기가 아닌 국가가 또 교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 속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허름한 마구간에서 시작해서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하셨고, 또 공생활 중에도 늘 가난 속에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제자들이 자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은 지극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했던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 역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창녀 등과 같은 소외된 사람에게도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 뒤의 행적을 이렇게 복음은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7,33.34)
손만 얹어주셔도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하셨을 텐데,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발라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지저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면 전혀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갓난아기의 아빠 엄마는 아기의 똥을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늘 사랑으로 다가가셨던 주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과 행동을 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었을까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향한 관심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이런 관심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또 함께 하는 유일한 끈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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