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5,1-8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앞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5).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9)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루카 6,8)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저희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당신 면전으로 불러내십니다.
자비와 치유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생명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쥐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며,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는 불통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을 꼭 쥐고 있어서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묘한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이’는 죄에 물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움켜쥐는 것은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놓고서 고통과 은총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던 우리의 손을,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했던 우리의 손을 뻗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마음을 풀고 손을 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품고 구원된 자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구원과 사랑을 건네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무엇이 중헌디?>
율법 학자가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늘 무엇을 할 때나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무엇을 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 아니 저의 삶을 보면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이나 삶을 그르치지 않고 잘 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가치가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생명과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고, 심지어는 주일 미사보다도, 더 나아가서 나의 하느님보다도 중요합니다.
과거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곤 했는데, 그때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지 하늘의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하느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불가에서 부처가 집착을 하게 하면 부처를 죽이고, 법경이 집착을 하게 하면 법경을 태워버리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럴 정도로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하지만, 가치 정립이 머릿속에서만 잘 되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뼛속까지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의식화에 이어 무의식화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늘 의식하며 살다가 보면 차츰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늘 사랑을 중심으로 판단도 하고 행위도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무의식화 차원에서 저는 아직 의식하는 단계이고, 머리와 뼈 사이에서 아직 뼈까지 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제 있었던 것에 대입하면 짜증과 사랑 사이입니다.
어제는 수녀원 미사를 마치고 동포 미사를 봉헌하러 센터에 가기 전 식당을 들렀습니다.
식당 안팎이 주말 사이에 난장판 수준이었고, 센터에 올라가니 거기도 정리 정돈이 안 되어 심란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은 없고 이용하는 사람만 있다는 짜증이 올라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그래서 늘 제가 정돈해왔는데 어제는 정리하면서 짜증이 올라온 것이고, 짜증이 있는 상태에서 짜증 내지 말아야지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며 오시는 분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럴 때 저처럼 이렇게 애매한 또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지 말고 얼른 사랑과 정리 정돈 중에 ‘무엇이 중헌디’ 하며 빨리 감정 정리해야 합니다.
사실 정작 정리해야 하고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은 물건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중헌디’ 물으십니다.
'안식일이 중하냐? 사람이 중하냐?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9)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온갖 갑론을박을 중단시키십니다.
아주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쾌도난마(快刀亂麻)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굽은 마음을 퍼라>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으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 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 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 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 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 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 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평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주일은 결코 ‘노는 날’이 아닙니다>
1)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장애인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도적으로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안식일이라고 해도 모두 고쳐 주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상한 대로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시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고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생명이 위독한 응급환자가 아니면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뒤의 13장에 그들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루카 13,14-1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병의 치료’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랑과 자비’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악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랑과 자비는 안식일 규정과는 상관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군중이 모두 기뻐하였다는 말은 예수님 덕분에 율법의 억압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사실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닌데,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면 그냥 ‘악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라는 말은 그들의 ㅔ‘악한 의도’에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맞서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11절의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라는 말은 “그들은 분노와 증오심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을 서로 의논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고, 어떻게 죽일 것인지 그 방법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3)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좋은 일’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 즉 선행과 사랑 실천을 뜻합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포함해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전부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 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았으면서도(알았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따라서 그 사제와 레위인은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늘 해야 하는 일이고, 안식일에는 특히 더 많이, 특히 더 잘해야 하는 일입니다.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해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정리하면,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입니다.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입니다.
4)
오늘날의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 즉 ‘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선행과 사랑, 목숨 구하는 일’을 실천해야 하는 날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그런 일들을 꾸준히 해야 하지만, 주일에는 특히 더 잘해야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하지만, 특히 주일에는 하루 전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아름다운 삶 - '늘 새로운 시작'>
“주님,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
당신이 감싸시니, 그들은 당신 안에서 기뻐하리이다.”
(시편 5,12ㄴ)
교황님의 파푸아뉴기니 3일째 방문 소식입니다.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많이도 감동하신 교황님 같습니다.
'아름다움(beauty)' 이란 말마디가 유난히 눈에 띕니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움을 퍼뜨리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움의 전문가들이 되라.
사랑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
교황님의 귀한 말씀이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은 물론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은 물론 모든 국민들이 교황님을 '위대한 마음의 사람'이라 격찬하며, 파푸아뉴기니 백성들에 대한 교황님의 사랑은 이들을 믿음 안에서 더욱 결합시킬 것이라 말합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사랑할수록 아름답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이미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쉬뀐 공작의 입을 빌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 말한 적도 있습니다. ‘
'아름다움'하니 성가 둘이 생각납니다.
제가 세상을 떠나 장례미사를 한다면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되는 성가 402장을, 퇴장성가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부탁해 놓고 싶습니다.
또 강론 대신으로 제 좌우명 자작 고백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를 읽어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축제와 같은 장례미사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삶과 세상을 위해 위 두 성가를 자주 불러보시길 권합니다.
교황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교회의 아름다움이, 복음의 아름다움이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은 물론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느낌입니다.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 바오로의 말씀도 파스카의 삶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순결과 진실의 아름다운 삶을, 주님 파스카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미사보다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이자 교회 전례이자 성인들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 역시 우리를 아름다운 삶으로 이끕니다.
“주님, 당신 정의로 저를 이끄소서.”
정의의 아름다움이여 정의의 용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의 정의와 용기가 굴절됨이 없이 그대로 표현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신자들의 무지를 일깨우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감지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감시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상징하는 바, 온갖 근심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으로 위축되어 오그라든 마음의 우리들입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그대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어지는 물음이 적대자들의 정곡을 찌르며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악의와 사악의 묵은 누룩의 사람들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미 물음 안에 답이 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잣대로 보면 답은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들에 대한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한 정의와 사랑의 주님입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집니다.
우리를 향하여는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마디로 바꿔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입니다.
온갖 스트레스와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든 마음이 활짝 열리고 펴질 때 저절로 몸의 치유도 뒤따를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주시어, ‘늘 새로운 시작’에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주께서는 의인에게 복주시고, 사랑으로 방패 삼아 감싸 주시나이다.”
(시편 5,1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안식일의 의미>
미국에서 자동차는 신발과 같습니다.
이번에 자동차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자동차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일정 속도에 이르면 소리가 났습니다.
뉴욕에서 사용하던 자동차에 익숙해 있었기에 비슷한 차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중고차 르망을 사서 1년간 다녔습니다.
다음에는 현대 엑셀을 사서 7년간 다녔습니다.
경기도 적성 성당에 있을 때는 중고차 코란도를 사서 다녔습니다.
코란도는 비포장 길에도 잘 달렸고, 사륜구동이라서 눈길에서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로 연수 가면서 코란도는 동창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전자사전을 주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와서는 동창 신부의 권유로 소나타를 샀습니다.
그렇게 12년을 타던 소나타는 미국에 오면서 아는 분에게 드렸습니다.
뉴욕에서는 하이랜더를 탔었고, 댈러스에서는 제네시스를 마련했습니다.
33년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자동차의 기능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걸 보았습니다.
수동 기어는 대부분 자동 기어로 바뀌었습니다.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이 많아졌습니다.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스마트폰과 차량이 연결됩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전화를 걸 수 있고, 내비게이션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차량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시동을 걸 수도 있습니다.
차량 점검을 스스로 해서 교체해야 할 부품을 미리 알려 줍니다.
최근에 발전하는 부분은 자율 주행 기능입니다.
차선을 유지하는 기능도 있고, 차선 이탈 방지 기능도 있습니다.
속도 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일정 속도를 정해 놓으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속도를 유지합니다.
앞의 차가 속도를 줄이면 같이 속도를 줄이기에 안전한 운행이 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되면 자동차는 움직이는 사무실이 될 것입니다.
운전자가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자동차는 인공지능과 함께 목적에 도착할 것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에서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
너무 크면 움직이기 힘들고, 너무 작으면 발이 불편하다.
발에 딱 맞는 신발이라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수가 있다."
신발과 같은 자동차는 자기의 수준에 맞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차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사고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교통법규의 기본은 교통신호와 규정 속도입니다.
교통신호는 서로의 약속이기에 교통신호를 무시하면 큰 사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서면 돌발 상황에서 차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운전자에게는 안전운전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운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면 좋습니다.
화물차나, 과적 차량의 뒤는 가능하면 피하면 좋습니다.
앞의 차량과 뒤의 차량도 살펴보면 좋습니다.
결국 자동차는 운전자를 위한 도구입니다.
장미꽃을 포장한 종이에는 장미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포장한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 자동차로 가족을 돌보면, 자동차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자동차로 도박장을 다닌다면, 자동차로 남을 다치게 한다면, 자동차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고, 죄인 취급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망각하는 겁니다.
안식일이라서 선을 베푸는 행동을 단죄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망각하는 겁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도 율법과 계명에 근거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생각됩니다.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아주 낯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읽고 있던 책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 누나가 외출해서 자리에 없을 때 방에 들어가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과연 누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요?
흘리긴 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가 안 돼서 하품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떨까요?
지금도 책을 읽으며 울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에 동화될 때입니다.
책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동화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사해서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일상 속 기쁨도 주님을 알면서 더 커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원하는 것만을 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할 구실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것인지, 그냥 내버려둘지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커다란 스캔들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사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쳐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서로 논의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