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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6,1-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2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3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하물며 일상의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습니까?
4 그런데 이런 일상의 송사가 일어날 경우에도, 여러분은 교회에서 업신여기는 자들을 재판관으로 앉힌다는 말입니까?
5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 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
6 그래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7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8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9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도 비역하는 자도,
10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11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뽑혔기에 거룩하게 된 이들>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힘을 듬뿍 얻으려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제가 잘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에 비해, 그 가운데서도 마태오 복음과 비교하여, 평지를 강조하거나 산 위와 평지를 대조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 유명한 행복 선언을 비롯하여 중요 가르침들을 주님께서 산 위에서 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기에, 그것을 특별히 일컬어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산상수훈과 병행하는 루카 복음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루카 6,17)
그러니까 기도와 제자들을 뽑으시는 것은 산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평지에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산에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지에서도 만날 수 있어야지요.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떠나고 오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제 주님께서 귀먹은 이를 데리고 나가 따로 만나주셨듯이, 하느님과 나만을 위한 배타적인 시간과 은밀한 만남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주님과의 이런 배타적이고 은밀한 시간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데 늘 누가 껴있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배타적이고 은밀한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밀애를 나누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방해 없이 안식을 취하고 힘을 듬뿍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평지에 와서 지치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한 말을 묵상합니다.
이것을 조금 바꾸면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잃지 말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또 일하다 보면 정신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요즘 정신이 없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또는 생각 없이 내뱉습니다.
정신없이 살면 안 되잖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면 되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하는데, 먼저 차려야 할 정신이 기도의 정신/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랑이 올 때 등불을 들고 마중 나가는 것, 곧 깨어 있음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헌신의 정신도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정신으로 주님의 영/성령만 제대로 모시면 헌신의 정신은 따로 차리려고 들지 않아도 차리게 되고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의 정신으로 주님의 영만 모시게 되면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루카 복음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는 루카복음 6장을 읽는데 4장 공생활 시작 부분을 이렇게 묘사하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우리는 헌신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오늘 주님처럼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이웃에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쉬지 못해 지친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고 잘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쉬는 것이 잘 쉬는 것입니까?
하느님 안에서 쉬어야 잘 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쉬지 않아서 지친 것이고,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아 지치는 것임을 묵상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르심은 자격이고, 응답은 능력이다>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와 허물이 많은,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한편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카 6,12)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해질 것입니다.
겁이 많은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우울하고 회의적인 토마스도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에도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뽑힌 이들 조차도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기에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십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품이 커서 스승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특별히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뽑은 이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제들도 다양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제들을 일치하게 하는 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거기에서 기적의 힘이 나왔습니다.
기적의 힘은 사람의 유능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 온전한 의탁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은 곧 능력입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마태 10,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미래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만 현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 능력을 지니고 계셨지만, 제자들을 뽑으실 때는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이 되셔야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뽑을 때는 자기 생각으로 뽑지 말고 기도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를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도는 겸손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교만합니다.
대부분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합니다.
모든 죄는 다 이 교만에서 비롯되고 모든 고통도 그것 때문에 생겨납니다.
겸손해지려면 결정이나 계획을 내가 하지 말고 미래를 아시는 분께 물어보는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할 줄 알지만, 어른이 되면 신이 되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미래가 현재이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마지노’ 방어선은 1930년대에 프랑스가 독일과의 동쪽 국경을 따라 건설한 거대한 요새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당시 프랑스 국방 책임자였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이 방어선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프랑스가 겪은 파괴, 특히 독일의 침략에 대한 대응책이었으며, 앞으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노 방어선 건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진행된 기념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콘크리트 벙커, 중포병 진지, 전차 장애물, 지하 막사, 다양한 요새를 연결하는 터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정교한 군사 방어 시스템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 방위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마지노 방어선은 강력한 방어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노 방어선은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정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을 위해 설계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빠르고 기동적인 전쟁 형태인 전격전이 부상했습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아르덴 숲을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여 방어선을 우회했습니다.
이 숲은 대규모 군대가 통과할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당신의 전차는 그 숲을 통과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전차는 그만큼 강력해졌던 것입니다.
마지노선은 그렇게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교만함은 이렇듯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렇게 지금까지도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보다는 적어도 바리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
영국이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강력한 하나는 항해술의 발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능을 믿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1707년 클라우즈리 쇼벨 제독이 영국 해안에서 실리 제도 근처의 함대 위치를 잘못 판단하여 4척의 배와 거의 2,000명의 병력을 잃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있었지만, 경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1714년 경도법을 통과시켜 바다에서 경도를 반도의 정확도로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최대 20,000파운드의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1714년 £20,000의 추정 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4~£5백만이 되고 원화로 환산하면 현재 환율 기준으로 약 70~80억 원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독학으로 시계를 만든 영국의 존 해리슨이었습니다.
해리슨은 경도를 결정하는 열쇠가 바다에 있는 동안 알려진 기준점(예: 그리니치)에서 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정확한 시계를 갖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원들이 자신의 위치와 그리니치 사이의 시차를 알고 있다면 경도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크로노미터를 사용해 영국은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나라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나아가 무역과 군사, 식민지 확장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나의 2만 파운드를 미래를 아는 지식을 위해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겸손의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끝까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주님께서 알려주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지상에서도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의 책>
1)
사도들의 명단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10,20)
복음서에 사도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뒤의 8장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과 의미가 같은데, 하느님 나라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생명의 책’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묵시 20,12-15)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묵시 21,27)
심판 때에 펼쳐지는 책은 두 권입니다.
첫 번째 책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고, 두 번째 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2)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도 생명의 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는 에우오디아에게 권고하고 신티케에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뜻을 같이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나의 진실한 동지여, 이 여자들을 도와주도록 그대에게도 당부합니다.
이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나의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
(필리 4,2-3)
구약성경 시편에도 생명의 책이 나옵니다.
"그들이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시편 69,29)
‘생명의 책’ 자체가 ‘구원’을 상징하는데,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고,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님께서 이름을 미리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기록되기도
하고, 기록된 이름이 지워지기도 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책에 내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는 것은 사실상 ‘나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의 명단이 ‘생명의 책’을 상징한다면, 왜 배반자 유다의 이름이 들어 있는가?
배반자 유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서 지워진 이름이지만, 처음에는 이름이 있었다가 나중에 지워지면서 지워졌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지운다고 해서 흔적도 없이 지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이름이 기록되어서 영원히 보존되는 ‘세례대장’의 경우에, 중간에 다른 종교로 개종한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냉담자가 된다고 해도, 이름 자체를 지워 없애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위대한 사도이며 순교자로 영원히 그 이름이 남아 있겠지만, 배반자 유다는 배반자로 영원히 그 이름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 자신이 자기 이름을 배반자로 적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자신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4)
복음서 저자는 열두 사도 명단 다음에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든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확성기나 앰프 같은 것도 없이 예수님의 설교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상황에서는 군중 사이에 전달자들이 있어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다음 전달자가 그것을 듣고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다시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사도들이 그 전달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면, 그것을 들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역할.
그것은 교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사람들의 간청을 모아서 주님께 전해 드리는 일...
그 일은 성직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녀다운 삶, 제자다운 삶, 사도다운 삶 - “기도가 답이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시편 149,4)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열정, 피곤하거나 지친 모습이 전혀 없는 영원한 청춘, 교황님의 활약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어제는 동티모로 국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믿음의 토착화를 강조하신 연설 한 대목이 참 신선했습니다.
“날마다 자기들의 믿음을 살아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문화가 되도록 하십시오.”
오늘은 주로 기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순교자성월 10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은 명실공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수확의 계절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생명줄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들의 삶은 살아있는 듯 하나 실상은 죽은 삶입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참으로 믿는 사람 모두에 대한 정의입니다.
자녀다운 삶에, 제자다운 삶에, 사도다운 삶에 기도가 답입니다.
여전히 날마다 만세칠창 기도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시작하여 “아멘” 하느님 감사로 끝나는 하느님 중심의 하루요 일생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날게 하는 영혼의 양날개가 찬미와 감사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 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기도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기도와 회개, 깨어있는 삶은 늘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오르막길은 어렵지만 끈기로 성취할 수 있고, 내리막길은 쉽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
<다산>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듯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담이 무너지듯 순간이다.”
<다산>
젊을 때나 노년이나 한결같은 기도의 삶이 제일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않는’,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는’ 지혜도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수도원 입회 후 사십년이 지났어도, 하루하루 날마다 기도해 왔어도 여전히 초보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배우고 공부해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삶만 봐도 언제나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기도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음도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의 배치도 의미심장합니다.
어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 중 열두 사도를 뽑아 사도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개인의 한계를 절감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명실공히 ‘안으로는 제자로’, ‘밖으로는 사도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샘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온통 집중하셨을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께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일치의 기도는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열두 사도들은 그대로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열두 사도들은 자녀다운 삶에, 제자다운 삶에, 사도다운 삶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두 사도의 면면이 다양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제자들이자 사도들의 한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예수님 중심의 다양성의 일치라는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서로 좋아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인 주님께 맞춰감으로 이뤄지는 다양성의 일치요, 이것은 우리 수도공동생활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어 열두 사도를 뽑으신 주님은 함께 내려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 모두를 낫게 하시니, 그대로 기도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예수님 중심으로 커다란 치유 공동체를 형성된 모습이 흡사 미사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주목되는 대목이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이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다시피 코린토교회 신자들 중 일부는 다양한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고 있음을 봅니다.
교우들 간의 송사 문제에 이어 불의한 자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우상숭배자와 간음하는 자들 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 자들, 즉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기도의 삶을 잊음으로 자초한 결과가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삶을 살게 하시고 온갖 더러운 영들을 퇴치해 주시어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미사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1코린 6,1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은 참된 내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
판관기 9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나쁜 지도자를 선택하면 피해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솝우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때 연못에 사는 개구리들은 그들 자신을 다스릴 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에게 왕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우스는 개구리들의 요청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통나무 하나를 던져 주었습니다.
통나무는 연못에 떨어져서 큰 소리를 냈고, 개구리들은 처음에 겁에 질려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통나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개구리들은 그것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개구리들은 곧 통나무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너무나도 무기력하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우스에게 더 강력한 왕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우스가 그들에게 황새를 왕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황새는 개구리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먹기 시작했고, 개구리들은 다시 제우스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제우스는 개구리들의 요청을 더 이상 들어주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나쁜 지도자를 선택하면 피해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의 역사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말기에 백성들은 ‘동학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동학은 잘못된 조정의 폭압과 폭정을 바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많은 백성은 동학의 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탐관오리와 부패한 관리들의 부정과 불의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가 동학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부패한 관리들을 엄벌하였다면 조선은 국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학의 기세에 눌린 조선 정부는 외세의 힘에 의존하였습니다.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일본에 원병을 청하였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와 패권 전쟁에서 이긴 후에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었습니다.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삼켜버리듯이, 황새가 개구리를 잡아먹듯이, 일본은 조선을 삼켜버렸습니다.
2024년 대한민국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습니다.
우리가 단결하고, 힘을 키우지 않으면 또 다른 가시나무와 황새가 우리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사제와 율법 학자들에게 잡혔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코스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칼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칼로는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만이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12명의 사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나의 신앙은 온전히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참된 내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콩깍지가 씌어야 나의 변화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사랑하는 상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좋게만 본다는 의미입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이렇게 콩깍지가 씌어서 결혼한 친구가 기억납니다.
자기 여자 친구라며 저와의 만남에 데리고 왔는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친구는 제게 물었습니다.
“정말 예쁘지 않니?”
솔직히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그래.”라고 말했다가는 이 친구에게 맞거나 의절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인데?”라고 말했더니, 너무 좋아서 웃던 이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생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의 전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자기를 바꿔놓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원하는 모습, 좋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를 싫어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연관된 모든 것이 좋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됩니다.
여기에 자기 욕심이나 이기심이 자리 잡지 못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건이 붙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니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진짜 사랑도 아니고, 자기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진짜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콩깍지가 씌어야 나의 진정한 변화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뽑아서,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 사랑을 직접 보고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지만, 주님의 사랑을 보고 또 마찬가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은 제자들이지만,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지도 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사랑하지 못하니, 세속적인 이익만을 챙기게 됩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을 통해 변화되지 못하면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 콩깍지가 씌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 역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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