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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시편들은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이숭원, 2015년 7월, 태학사)에서 추린 것들이다. 김종삼 시인(1921~1984. 12. 4, 향년 64세)이 그의 시집에 넣지 않았던 시들도 있고, 소품 같은 시들도 있다. 무엇보다 매우 밀도 있게 도약하고 때론 난해한 그의 알려진 시들 외에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시편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는 김종상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 당시 발표했던 시들을 꼼꼼하게 살펴본 결실인데, 시를 일부가 아닌 전문으로 소개하고 있어 시선집(Anthology)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맞춤법을 발표 당시의 표기대로 수록했다.
블로그에 이미 올린 시편들은 제외하고 꼽아본다.
<뜬구름>
나는 나와 같이 고아로서 자라온 여자 친구와 함께 더위가 한창이던 남해 어느 선창에서 말린 피문어 한 축을 사 들었다.
똑딱선에서 씹었다 바닷가에서 씹었다 온 종일 씹었다 소주를 많이 먹었다 그날부터 오랫동안 사귀어 왔기에 친숙한 그 여자와 헤어지는 날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살아갈 수 없이 되었다.
(월간문학, 1978년 1월)
김종삼 시인이 한 여성 시인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풍문의 근거가 되기도 했던 시라고...
시인 스스로는 자신이 폭음을 하게 된 계기를 동생의 죽음과 전쟁의 고통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시인은 발표 지면이 확인되지 않는 글에서 6.25전쟁 당시 피난 상황을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그때 나의 뇌리와 고막 속에선 바흐의 '마태 수난'과 '파사칼리아 둔주곡'이 굉음처럼 스파크 되고 있었다.
걷고 있던 7월 초순경, 지칠 대로 지친 끝에 나는 어떤 밭이랑에 쓰러지고 말았다. 살고 싶지가 않았다.
얼마나 지났던 것일까, 다시 깨어날 때는 주위가 캄캄한 심야였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돌각담'이었다.
(중략)
내 형은 현역 육군 중령이었으며 6.25가 발발하던 다음날 헤어진 뒤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반동 가족들은 모조리 참살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수원에서 조치원, 그곳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노숙을 하며 걸었다.
나의 양친이 피난을 못 떠나고 서울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는 그리스도의 말도 무색하였다.
나 는 그 뒤부터 못 먹던 술을 먹게 되었다. 무료할 때면 시작이랍시고 끄적거리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종착역 아우슈비츠>
관청 지붕엔 비둘기 떼가 한창이다 날아다니다간 앉곤 한다
문이 열리어져 있는 교회당의 형식은 푸른 뜰과 넓이를 가졌다.
정연한 포도론 다정하게
생긴 늙은 우체부가 지나간다 부드러운 낡은 벽돌의
골목길에선 아희들이
고분고분하게 놀고 있고
이 무리들은 제네바로 간다 한다
어린것과 먹을거 한 조각 쥔 채
(문학춘추, 1964년 12월)
<아우슈비츠 라게르>
밤하늘 호수가엔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평화스럽게 보이었다
가족 하나하나가 뒤로 자빠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인형 같은 시체들이다
횟가루가 묻어 있었다
언니가 동생 이름을 부르고 있다
모기 소리만 하게
아우슈비츠 라게르
(한국문학, 1977년 1월)
위 두 편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시다. 시인에겐 전쟁의 상처와 아우슈비츠의 상흔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민간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떠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현대시학, 1970년 11월)
'스무 몇 해'가 아니라 시를 발표한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 수심을 모른다.
<그리운 안니·로·리>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도 돋아
보았고
머리 위로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는
'맥웰'이라는
老醫(노의)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 가에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치 하면 좋으리마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 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 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ㄹ 하였습니다
그리운
안니·로·리라고 이야기ㄹ
하였습니다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 1957년 4월)
참고로 스코틀랜드 민요 애니 로리(Annie Laurie)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저 새벽 이슬 내려 빛나는 언덕은 / 그대 함께 언약 맺은 내 사랑의 고향 / 참 사랑의 언약 나 잊지 못하리 / 사랑하는 애니 로리 내 맘 속에 살겠네 // 샛별 같은 그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 이 세상의 아무것도 비할 수 없도다 / 어여쁜 네 모양 다 잊지 못하리 / 사랑하는 애니 로리 길이 길이 살겠네'
그런데 이 노래는 찬송가이기도 하다. 493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시인은 얼마 못 가 죽는다는 아이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게 아닐까 싶다.
<올페>
햇살이 눈부신
어느 날 아침
하늘에 닿은 쇠사슬이
팽팽하였다
올라오라는 것이다.
친구여, 말해 다오.
(시와 의식, 1975년 9월)
올페/올훼/오르페우스는 독사에 물려 죽은 아내를 자신의 뛰어난 음악으로 명계에서 구출해 나오다 끝까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지키지 못해 다시 아내를 잃었다. 올페는 이후 구혼을 거절당한 여자들에 몸이 찢겨 죽었고, 사후 천국(엘리시움/엘리시온)에서 아내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도 한다.
시는 '친구여, 말해 다오.'로 급전 도약하며 시의 여백을 확 늘려버렸다.
<그날이 오며는>
머지않아 나는 죽을 거야
산에서건
고원지대에서건
어디메에서건
모차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되어
죽을 거야
나는 이 세상에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않아 죽을 거야
끝없는 평야가 되어
뭉게구름이 되어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
죽을 거야
(시문학, 1980년 1월)
위 두 시는 문학/예술과 삶/죽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죽음을 예견하는 작가의 고통을 얘기하고 있다. 아래 시는 그러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시의 풍경은 이 땅의 풍경과 조금 다르다.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은 다소 기독교적이기도 하고. 아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노래한 시들이 다수 있는 반면 유신 종말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고통에 대한 시를 보지 못하겠는 것도 아마 시인의 시 세계가 아마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을 추구했던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
망가져 가는 저질 플라스틱 임시 인간
(심상, 1980년 5월)
단 한 줄의 짧은 시이지만 '플라스틱'이라는 시구가 강렬하다.
<여수(女囚)>
다섯 살인가 되던 해
보모를 따라가고 있었다.
자혜병원이라는 앞문이
멀어 보이었다.
며칠 전에 자동차가 이 길을
어디론가 지나갔다 한다.
길이 꼬부라지는 담장 옆에
높다랗고 네모진 자동차가
서 있었다.
얼굴이 가려씨워진 팽가지들을 본 것은
그날이 아닌 것처럼 여수(女囚)라고 하였던
들은 말도 그 전이 아니면 그 후였다.
느린 박자 올갠이 빤 하였다
소학교 교정이 말끔하게 비어 있었다
길 끝으로 어린 아해가 어린 아해를
업고 가는 모습이었다.
보모가 간 집은 얕은 울타리
나무가 많은 벽돌집이었다
가늘고 오뚝한 창문이 낯설었다
해가 들지 않는 아뜨리에 같은 데서
두 여인이 만났다. 커다란 두 손과
두 손이 연거퍼 쥐어졌다
두부 파는 종이 땡가당거렸다
돌아올 때엔 작은 손에
커다란 배 한 알이 쥐어졌다.
맞이한 여인의 손이
커다란 손이었다.
모호한 시다. 팽가지는 죄수에게 씌워 얼굴을 가리는 용수갓이라고 한다. 다섯 살에 보모가 있었다는 건 돈이 많은 집안이었다는 것이고, '보모'라는 말 자체가 낯설고 서구적이다. 아마 시적 화자인 아이는 보모를 따라 병원을 가는 길이었던 것 같고, 숱한 자동차 중에 이 길을 지나간 자동차는 이 아이와 연관된 누군가일 것 같고, 길이 꼬부라지는 담장 옆 높다랗고 네모진 자동차는 죄수 호송차일 것 같다. 그런데 팽가지를 본 것은 그날이 아니란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여수라는 말을 들은 것도 팽가지를 본 전이 아니면 후라는 것이다.
4연과 5연에서는 마침표를 거의 찍지 않았다. 올갠이 빤 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소학교 교정은 텅 비었고 아이가 아이를 업고 가는 것은 전쟁 당시 자신의 경험이 아닌가 싶다. 보모가 찾아간 집은 서양식 건물이거나 교회가 아닐지. 두 여인이 손을 쥐었다는 것은 무얼까? 어쩌면 이 시에서의 보모는 개인집 보모가 아닌 전쟁 후 아이들을 수용하는 시설과 관련된 보모가 아닐지, 이 보모가 시설로 아이를 인계하는 것은 아닐지, 두부는 끼니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지... 하지만 마지막 연에서 시설에 머물지 않고 배 한 알을 쥐고 돌아왔다는 것이고 화자를 또 다른 여인이 맞이하였고, 그 손이 커다랬다는 것은 아닐지... 추정해본다. ^^;
<아뜨리에 환상>
아뜨리에서 흘러나오던
루드비히의
주명곡(奏鳴曲)
소묘(素描)의 보석(寶石)길
한가하였던 창가(娼家)의 한낮
옹기장수가 불던
단조(單調)
(문학춘추, 1964년 12월)
루드비히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을 말하며, 주명곡은 소나타를 말한다. 여기 쓰인 단조는 '단조롭다'할 때의 뜻으로 가락이나 장단히 변화없이 단일한 것을 말한다. 옹기장수와 창가의 창녀와는 어떤 사이였을까? 이 상황은 어디서 본 일화인 것 같은데 인터넷 검색에서 찾을 수 없다. 보통 창가는 낮이 한가로울 것이고 옹기장수는 단조로운 음악을 분다. 옹기는 그 모양새가 남성을 상징할 수도, 여성을 상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옹기 자체도 소리를 낼 수 있고... 1연과 2연이 극명히 대비되는 형태이고 제목을 '아뜨리에 환상'이라고 했다. 시인에게 아뜨리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회화가 만나는 곳이다. 소나타와 단조가 사실은 모두 시인에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동시>
오빤 슈사인
난 껌장수
난 방송국 어린이 시간에 나갑니다.
시간 맞추어 나갑니다.
꿰맨 옷도 자주 빨아 입고 나갑니다.
크리스마스
선물 주는 이가 없어도
서운해선 안 돼요.
언제나 안 돼요.
슬퍼해선 안 돼요.
―― 모두 안 되는 것뿐입니다.
난 껌장수
오빤 슈사인
(현대시 6집, 1964년 11월)
화자인 여자 아이는 방송에 출연하는 게 아니라 방송국 앞에서 어린이 시간에 출연하기 위해 들어가는 부모와 아이들을 대상으로 껌을 판다. 가능한 복장이 깔끔해야 쫓겨나지 않을 것이고, 껌도 잘 팔릴 것이다. 슬퍼해선 안 된다... 최민식 사진가의 전쟁 직후 사진들이 떠오르는 시다. 짧은 시지만 강렬하고 '난 껌장수/오빤 슈사인'이 반복되되 행을 바꾸어 '오빤 슈사인'으로 끝나며 벗어날 수 현실에 갇힌 이미지이면서도 긴 메아리를 울린다...
<소공동 지하상가>
두 소녀가 가지런히
쇼 윈도우 안에 든 여자용
손목시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키가 작다
먼발치에서 돌아다보았을 때에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쇼 윈도우 안을 정답게 들여다보던
두 소녀의 가난한 모습이
며칠째 심심할 때면
떠오른다
하나같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작은.
어쩌면 이 시는 물질적 가난을 노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얼굴이 동그란 것은 시계의 형상을 빗댄 것이 아닐까 싶고, 가난한 모습이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그 가난에 가깝지 않을까?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난한 마음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계들로서의 연약한 인간...
<5학년 1반>
5학년 1반입니다.
저는 교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의 학교도 교외에 있습니다.
오늘은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므로 오랜만에 즐거운 날입니다.
북치는 날입니다.
우리 학굔
높은 포를라 나무줄기로 반쯤 가리어져 있습니다.
아까부터 남의 밭에서 품팔이하던 제 어머니가 가물가물하게 바라다 보입니다.
운동 경기가 한창입니다.
구경 온 제 또래의 장님이 하늘을 향해 웃음 지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져 온 보자기 속엔 신문지에 싼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 몇 개와 사과 몇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옮겨 놓는 어머니의 손은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품팔이하던
밭이랑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고구마 이삭 몇 개를 주워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잠시나마 하나님보다도 숭고하게 이 땅위에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어제 구경 왔던 제 또래의 장님은 따뜻한 이웃처럼 여겨졌습니다.
(현대시학, 1966년 7월)
어머니의 손이 '남들과 같이' 떨린 것은 남들보다 형편없이 초라한 음식을 내어놓는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떨린 것인데 이를 어머니도 즐거워 떨리는 것으로 보는 아이의 천진난만에 기대어 묘사한 것이라는 이숭원 저자의 말이 정확하다.
<이 사람을>
할아버지 하나가 나어린 손자 하나를 다리고 살고 있었다.
할아버진 아침마다 손때묻은 작은 냄비 아침을 자미 있게 끌이고 있었다.
날마다 신명께 감사를 들일줄 아는 이들은 그들만인것처럼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이들은
그들만인것처럼
때로는 하늘 끝머리 벌판에서
아지 못할 곳에서
흘러오고 흘러가는 이들처럼
나는 며칠밤에 한번씩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들에 십원 하나 던저주고가는 취미를 가젔었다.
기동차가 다니는 철뚝길을 넘어가던 취미를 가젔었다.
이 들은 이 부근 외채 가마뙤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현대시 5집, 1963년 12월)
시 속 풍경에 잘 개입하지 않는 시인의 다른 시들에 비해 이 시에서 화자(시인)가 며칠에 한 번씩 일부러 철둑길을 지나가며 가마뙤기 십원을 던져주고 간다.
<엄마>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할 줄 모르는 행상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산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 거랑 입을 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현대시학, 1971년 9월)
'엄만 죽지 않는 계단'... 이숭원 저자의 말대로 짧은 명구(名區)다.
<장님>
장님들은 언제나 착하게 보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지팡이와 함께 하늘을 향해 웃음 짓는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서도 지팡이와 함께
하늘을 향해 웃음 짓는다.
(문예중앙, 1982년 여름호)
실제 웃음이었다기보다는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기 위해 얼굴의 표정이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는 것이 김춘수 시인과 비슷하면서 다른 김종삼 시인의 세계인 것 같다.
<올페>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
(심상, 1973년 12월)
<제작>
그렇다
비시(非詩)일지라도 나의 직장은 詩이다.
나는 진눈깨비 날리는 질짝한 주변이고
가동 중인
夜間(야간) 鍛造(단조) 工廠(공창).
깊어가리만치 깊어가는 欠谷(흠곡).
깊이 파인 계곡
시인은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고 했다가, 나의 직장은 시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 직장은 깊이 파인 계곡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화자는 서울 일대를 걷고 걸어 저녁에 남대문 시장에서 빈대떡을 먹는다. 물론 술도 마셨으리라. 시장 사람들을 모두 아름답고 착한 모습으로만 그리는 것은 편향일 수도 있겠으나, 때론 이렇게 보아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꼽는 시는 그가 1984년 12월 사망하기 전 해에 발표한 <어머니>다.
<어머니>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아들 넷을 낳았다
그것들 때문에 모진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아우는 비명에 죽었고
형은 64세 때 죽었다
나는 불치의 지병으로 여러 번 중태에 빠지곤 했다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세상에 남길 만한
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그러나
아직도 못 썼다고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
(문예중앙, 1983년 가을호)
[출처] 김종삼 시인의 여러 시편들...|작성자 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