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7-혁명 평가와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조직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중심의 민중항쟁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다.
즉 반봉건, 반외세를 주창한 농민이 주축이 되는 혁명으로 조선시대 지배계층에 대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민중항쟁이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혁명의 물줄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가지 말 할 수 있으나 가장 큰 원인은 무능하고 자기들 정권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던 고종과 민씨정권의 청에 도움요청으로 청과 일본군대에 개입때문이었다.
명성황후와 민씨정권은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때는 청나라군을 끌어 들였고, 3차 봉기 때는 텐진조약으로 자동 참전한 일본군을 끌어 들여 농민군과 교전케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청일의 개입으로 동학농민군이 자진해산하고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3차 봉기 때는 일본군과 조선 관군 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수많은 농민군이 희생을 당했다.
일본은 앞으로 조선을 통채로 먹기위해서 이번 기회에 반대세력을 뿌리채 뽑기위해 동학농민군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외에도 당시 역사적조건 하에서 동학농민군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왕실을 보호하고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동학농민군 내부의 분열이 문제였다.
동학에는 북접, 서포(또는 호서남접), 남접 세 갈래의 파벌이 있었다.
남접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이다. 남접의 최고 지도자는 손화중이었으나, 손화중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파벌, 전봉준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파벌, 김개남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든다. 서포는 다른 이름으로 호서남접으로 불렸다. 충청북도 청주와 충청남도 지역에 위력을 떨쳤다.
동학교의 교주 최제우의 정통 후계자 최시형과 북접지도부는 정부와 무력투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별 관심이 없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다. 흥선대원군과의 연결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최시형은 남접의 전봉준이나 김개남을 공개적으로 나라의 역적이며 사문난적이라고 칭하며
동학군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3차 봉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남접과 서포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북접의 비협조 역시 농민군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또한 남접중에서도 온건파인 전봉준은 정권 전복을 원치 않고 왕실을 보호하고 흥선대원군과도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남접 강경파인 김개남은 달랐다. 그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농민들을 위한 나라를 건국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전투 후반으로 갈 수록 남원의 김개남 부대는 전봉준 일파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행동을 하였다.
김개남은 남쪽에 새로운 왕조를 열겠다는 신념으로 이름도 김개남 으로 개명까지 했을 정도로 새로운 나라 건설에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 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 ”
— 전봉준,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김개남은 전봉준에게 호응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올리는 것과, 근왕주의적인 사상을 가졌던 점을 못마땅히 여겼다. 그리고 전봉준과 수시로 충돌하였다. 이는 전봉준이 체포된 뒤 일본 영사관 형문장에서 진술한 공소장에도 일부 언급되고 있다.
일본이 주축이 된 재판부는 전봉준 외 체포된 동학농민군 지도부에게 참시를 선고했다.
이때 전봉준은 무릎을 치고 일어나면서 외쳤다.
“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
훈장출신 전봉준의 성리학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사실, 동학농민혁명하면 대부분 전봉준만 위대한 농민혁명가로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전봉준보다 훨씬 더 혁신적이고 더 진정한 혁명가였던 김개남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남접 농민군을 이끈 대표 인물은 전봉준만이 아니라 김개남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실,이 둘은 전라도 태인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죽마고우 였다. 김개남이 전봉준보다 두 살 많았지만 둘은 친구처럼 지냈다.
그러나 전봉준은 집이 가난하여 태인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고부로 이사한다.
그러나 둘은 계속 연락을 하였고 김개남이 먼저 동학에 입교한 후에 전봉준을 동학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전봉준이 주도하여 고부민란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민중이 잘사는 세상을 꿈꾸며 반정부 투쟁을 함께 이끌었다.
그러나 전주화약이 맺어질 무렵 두 사람은 농민군의 진로를 두고 심각하게 대립했다.
당시 농민군을 총지휘했던 전봉준은 전주화약을 맺어 일단 전쟁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김개남은 ‘지금 그만두면 영영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면서, 한양까지 신속히 진격해 갈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김개남의 뜻과 달리 지도부 다수가 전봉준을 지지했다. 그리고 동학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했다.
김개남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자신에게 동조하는 무리를 이끌고 전주성을 빠져나와 남원 땅에서 별도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을 상대로 제2차 봉기를 일으켰을 때 전봉준이 남원에 사람을 보내 부대 합류를 권했음에도 김개남은 차일피일 미루다 단독으로 청주에 가서 독자적인 싸움을 전개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동학농민군 전체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쳤다. 화력이 막강한 일본군을 상대로 힘을 합쳐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한 상황에서 대표 지도자 둘이 대립했으니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와 청주에서 대패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전봉준은 순창에서, 김개남은 태인에서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개남이 붙잡혀 가자 농민들은 노래를 지어 불렀어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김개남이 추구한 민중 세상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이 노래 속에 담겨 있다.
동학농민군을 총지휘했던 전봉준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안타깝고 애통한 마음을 구구절절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어쩌지를 못하는구나.
백성을 사랑하는 올바른 의리,
나는 실수가 없었노라.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을 그 누가 알아주리."
아직도 우리에게는 왕조에 대한 성리학적 맹목적인 군신관계 의리가 남아있어서 일까?
민중들에 의한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김개남은 없고 그래도 이씨왕조를 보호하려 했던 전봉준만 남아 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김개남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동학농민군의 내분 또한 혁명 실패의 큰 원인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민족 역사상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로도 볼 수 있다.
이어서 을미사변이 이어집니다.





첫댓글 좋은글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