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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발생한 대전 초등학생 사망 사건은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심리적 질환을 앓는 교원에 의해 사회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서 어린 제자가 희생된 것이다. 자녀가 초등학교 저학년인 학부모들의 충격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컸을 것이다. 사건이 대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 학부모들은 남의 일로 여기기 쉽다.
사건 이후 관계 기관은 신속한 조사로 긴급 대응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과 제도 개선에 나섰다. 국회는 ‘하늘이 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학생·학부모·교직원의 심리·정서 안정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법 추진에 나섰지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그동안 교육부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2023년 4월에 ‘학교폭력 근절 종합 대책’을 발표하였다. 또한,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도입(2,217명), 학교전담 경찰관 확대(1,127명) 및 전국 176개 교육지원청에 ‘학교폭력 제로 센터’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올해 상반기에는 ‘제5차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그러나 허점은 또 드러났고 피해자가 또 생겼다.
거듭된 사고 발생의 근본 원인은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할 우리의 일을 남의 일로 여겨 사안을 가볍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남이 아니며, 남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한때 선거운동 중 일부 정치인이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지연을 강조하면서 외쳤던 구호다. 그런데 우리와 남을 구분하는 내막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생각과 남의 생각을 판단하는 기준이 극단으로 치우쳐져 있다. 심지어 폭력성을 유발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계급이나 계층의 갈등보다는 생각이나 이념의 갈등이 더욱 심각하다. 무엇보다 우리와 남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문제이다. 한국이 갖는 지정학적 위치와 동족 간의 전쟁과 분단이라는 독특한 경험,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보인 상처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는 탓이다.
이제 우리는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하여 우리와 남이라는 이분법적 자세가 아니라 공존공영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는 ‘공존공영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지도해야 한다. 나와 다른 남의 이야기에도 경청하는 겸허한 자세와 함께 변증법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세상은 달라졌고 날로 달라지고 있다. 첨단 기술이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의 교류로 말미암아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대적 가치는 더욱 확대되면서 사회 구석구석에 골고루 정착하고 있는 세상이다. 이때, 우리를 우리일 수 있게 하는 기본적 덕목은 서로 간의 믿음에 있다.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실천했던 두레나 품앗이의 공동체 정신 즉, 더불어 일하고 더불어 즐기는 식의 인간관계 개선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나아가 우리는 실생활에서 다양한 부분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하고 이바지하며 종횡무진인 정보 접촉으로 남을 이해해야 한다. 마치 인체에서 혈액이 쉴 새 없이 심장에서 실핏줄까지 전신을 돌고, 신경망이 중추에서 말초 구석까지 뻗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전 초등학생 사망 사건에서는 학생은 교원을 믿었다. 그러나 교원은 학부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였고, 반윤리적인 행동으로 제자를 대하였다. 학부모는 학교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교육현장에서 교육의 성공은 학생이 교원을 믿고, 교원이 학부모를 믿고, 학부모가 학교를 서로 믿고 의존하는 그러한 믿음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때 가능하다. 나와 남이 따로 겉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일관되게 나아갈 때 가능하다.
교육부에서 대책으로 제시하는 ‘하늘이법’은 진지하게 의논하고 숙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을까? 졸속으로 그치지 않을까? 실효성은 어느 정도일까? 불현듯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뭔가 씁쓸하고 개운하지 못하다. 규제를 목적으로 하는 법은 최소한으로 그쳐야 한다. 법 이전에 윤리와 도덕, 양심이 우선 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우리와 남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적대시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못 믿는 불신사회에서 무슨 일인들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