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앞에서
정명숙
봄의 아침은 옷깃을 여미고 걸어도 바람이 차다.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황사 때문에 하늘과 땅이 희뿌연 하지만 매화꽃과 산수유는
만개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하고 목련과 개나리도 겨우내 보듬어 안고 있던 꽃망
울을 터트려 놓아 완연한 봄이 온 것을 알려준다.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 나는 시간만 나면 근처에 있는 산을 오른다. 오늘도 집을 나
서 횡단보도 앞에 서니 파란불이 깜빡거리고 있다. 뛰어 건널까 말까 망설이다, 다음 신
호에 건너기로 마음먹고 서 있기로 했다. 잠시의 여유를 갖고 질주하는 차와 정지선에
머물고 있는 차들을 바라본다. 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들, 가는 방향도 서로 다르고 목적
지도 다르고 달리는 속도도 다르다. 신호가 빨간색에서 황색으로 바뀌자 무엇이 그리
급한지 출발하는 차도 있고 파란불이 들어오자 출발하는 예의바른 차도 있다. 법규를
제대로 지켜가며 차를 운행한다면 사고의 위험도 줄겠지만 나 혼자 열심히 지킨다고 모
두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차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항상 내안에 머
물러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다정했던 친구가 그리워진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연둣빛
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산등성을 바라본다.
여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우리는 빨간불의 정지된 상태였다, 마음은 부풀어 어서 파
란불이 들어와 인생의 출발점에서 씽씽 달리고 싶어 안달들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파란- 58
불은 들어왔고 우리는 금방 출고된 차와 같이 반짝거리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훤
한 고속도로로 아기자기한 국도로, 아름다운 산길로 제 각각 희망과 꿈을 안고 인생을
운전하기 시작했고 목적지인 노년까지 무사고로, 또한 자랑스러운 얼굴로 다다를 줄만
알았다. 그러나 겨우 운전대를 잡고 앞으로 전진할 줄만 알았을 때 친구 하나가 온달 같
은 남자를 만나 군 생활 삼년, 대학 사년을 뒷바라지하며 사랑을 키우고 꿈을 키우더니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결국은 헤어지고 말았다. 여자 쪽 부모님들의 반대가 너무 완강
했기 때문에 친구는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도 돌아서는 남자를 차마 붙잡지 못했다고 통
곡을 했다. 친구는 아이를 낳아 남자에게 보내고 오랫동안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우리
는 그녀가 삶의 의욕을 갖고 다시 일어서기를 기도했고 우리 모두 결혼 한 후에 늦은 나
이로 친구도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 결혼마저도 몇 년 만에 실패로 끝이 났을 때, 그
참담함은 뭐라 말할까. 인생이라는 차로 죽음직전까지 가는 사고가 두 번이나 났던 친
구는 소식조차 없으니 마음만 아프다. 나 또한 때로는 접촉사고도 났었고 어느 때는 목
적지를 잃고 방황하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덜컹거리며 달려왔다. 지난 길을 뒤돌아보면,
좀더 신중하고 지혜롭게 세상 흐름에 순응하면서 길을 따라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인생여정은 질주하는 차와 같다. 출발 지점에서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차가 있
는가 하면 가벼운 충돌로도 서로 옥신각신 하는 다툼도 있고 생각지 않던 곳에서 대형사
고가 날 수도 있으며 이정표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다른 길로 달려가다 때늦은 후회를
하기도 한다. 삶이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간다. 유한한 인생이지만 견딜 수 없는
슬픔,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과 아팠던 사랑의 상처도 창밖의 풍경이 스쳐 지나듯 잠
시 내안에 머물다 지나갈 뿐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남의 탓만 하지 말고 잠시 쉬어 왔
던 길을 되돌아보고 주위도 살피면서 지금부터라도 조금 느리게 가리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회생하는 봄날의 아침이다. 고달픈 질곡의 삶이지만 소식
없는 친구에게도 새로운 봄이 찾아와 작은 미소라도 짓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2005/21집
첫댓글 유한한 인생이지만 견딜 수 없는
슬픔,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과 아팠던 사랑의 상처도 창밖의 풍경이 스쳐 지나듯 잠
시 내안에 머물다 지나갈 뿐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남의 탓만 하지 말고 잠시 쉬어 왔
던 길을 되돌아보고 주위도 살피면서 지금부터라도 조금 느리게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