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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메이저리그까지 침투한 미국 반공주의 역사
1961년 10월.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신시내티 레즈와 뉴욕 양키즈 간의 챔피언 결정전. 여기서 야구와 전혀 관계없는 ‘빨갱이’ 해프닝이 벌어졌다. 펜실베니아 주 대법원 판사 한 분이 신시내티 팀의 이름 ‘레즈(Reds)’가 ‘붉은 무리, 즉 빨갱이’를 뜻하는 것이니 바꾸라는 편지를 보낸 것. 만약 신시내티가 우승하면 ‘Reds crush Yanks!(빨갱이가 양키를 무너뜨리다!)’라는 식의 뉴스가 나갈 텐데 그게 두렵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시내티는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뉴욕이 4-1로 이기는 바람에 나온 기사는 정반대인 ‘Yanks crush Reds!’였다. 그러나 1976년 다시 맞붙은 두 팀 간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4-0으로 ‘빨갱이’ 팀이 압승했다.
신시내티 레즈는 그 이름 때문에 50년대에 이미 한차례 곤욕을 치렀다. ‘레즈’에서 ‘레드렉(Redlegs)’, 즉 ‘붉은 다리’로 팀 이름을 바꿔야 했던 것. 1953년, 반공의 기수 J. 매카시가 미국을 호령하던 시절이다. 지금이 어느 땐데 감히 ‘빨갱이’라는 이름을 대놓고 쓰느냐는 유형무형의 압력이 있던 때다. 팀은 5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다른 한편 착잡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냉전 시절 미국에는 이런 풍경이 흔했다. 요즘 장안의 관심을 끌고 있는 영화 ‘오펜하이머.’ 과학자인 그가 겪은 고행 역시 냉전 미국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사건 중 하나다.
그렇다면 냉전이 끝난 지 30여년이 넘어가고, 현실 공산주의 체제도 사실상 막을 내린 지금 상황은 달라졌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B. 샌더스의 대선 운동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있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여전히 ‘주홍글씨’다. 특히 미국의 보수·극우집단은 기존 체제의 비판과 개혁을 주창하는 개인과 조직에 지금까지도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1954년: 냉전시절 통과된 반공법(Communist Control Act)
그해 8월. 민주당의 H. 험프리 의원은 J.F. 케네디, H. 잭슨(나중에 민주당 네오콘의 대부격이 된 정치인), M. 맨스필드, S. 사이밍턴 등 소위 ‘리버럴’ 성향의 의원 20명과 함께 반공법을 공동발의 한다. 미국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음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산당을 불법조직으로 명문화하고 당원의 일부 시민권을 박탈하는(예: 공직 출마 제한) 내용이 핵심. 법안은 통상적 입법절차와 달리 청문회를 생략하고 이른 새벽 본회의에 상정, 짧은 토론 끝에 바로 통과됐다.
1950년 대 유명했던 반공구호 중 하나: ‘빨갱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자!’
이후 세 차례 정도의 상-하원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최종 표결 결과, 상원 찬성 79 반대 0. 하원에서는 시민권 제한의 우려가 있다며 2명의 의원만 반대, 찬성은 265. 법안 찬성론자들은 “공산당은 민주주의 절차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없애려는 조직이다. 그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몇몇 민권단체에서 피고의 민권을 박탈하는 이 법이 헌법을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대부분의 진보성향 시민단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버럴의 대표매체인 뉴욕 타임스는 ‘민권침해 요소가 있지만 공산당을 막는 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아이젠하워 정부의 법무부 장관과 후버 FBI 국장은 공산당이 지하로 내려갈 것이라며 반대했다. 의회에서는 문구 수정 부분 이외에 법안 자체에 대한 반대발언은 사실상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반대표를 던지거나 반대토론을 할 경우,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낙인찍힐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제안자인 험프리 의원은 “이 법은 민주당이 공산주의에 대해 유화적이라는 오해를 걷어내고, 동시에 우리 당 의원들이 반공에 있어서는 모두 한마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에둘러 강조했다.
2023년: 냉전 이후 돌아온 트럼프의 반공몰이
트럼프의 대표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내세우는 또 하나의 구호는 반공주의다. 트럼프에 의하면 민주당과 바이든은 공산주의자다. 2020년 대선에서 실제 그렇게 외치기도 했다. “유권자 여러분의 선택은 간명합니다. 공산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닌가이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이 내세우는 보편적 의료보험 정책은 과격 마르크스주의자들(wild-eyed Marxists)이 내세운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속임수입니다.” 당시 트럼프의 유튜브 채널은 반공주의 구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바마는 레닌이나 히틀러 같은 사회주의자다.” “트럼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자본주의를 지키는 투사다.” “좌파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다.” 등등등. 낙선했지만 이런 인물에게 47%의 유권자가 표를 주었다.
2015년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하면서부터 트럼프에게 반공은 단골 메뉴 중 하나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B. 샌더스 의원을 일러 “사회/공산주의자로, 앞으로 90%의 세금을 매겨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갈 자”라고 헐뜯는가 하면, 2019년 9월 UN 총회에서는,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은 정의, 평등, 빈곤해결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지배를 위한 권력쟁취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장광설을 이어갔었다. 그는 올 2023년 4월과 8월 서로 다른 죄목으로 연방 법무부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빨갱이 선동(red-baiting)’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기소가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잡으려는 것이며, 내가 잡혀가면 그 다음은 여러분이 될 것”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를 추종하는 공화당의 한 의원은 트럼프 기소는 “부패한 공산주의 민주당의 법무부가 법을 무기로 벌이는 행패”라며 비난의 열을 올리는 중이다. 트럼프는 지금 다른 모든 후보자들을 압도적 지지율로 제치면서 2024 공화당 대선후보 1순위에 올라 있다.
180여 년 간 피를 부른 미국 반공주의
70년의 간격을 두고 있지만 두 사안은 매카시즘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 실체는 적과 동지를 나누는 이분법의 정치다. 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적을 만들고 편을 가르는 분열의 정치가 돌출사태가 아니라, 건국 이래 미국 정치사의 핵심 줄기이고 매카시즘은 그 중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기실 미국 반공주의의 시작은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0여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농업국가 미국이 산업화의 첫발을 떼면서 협동조합 수준의 노동자 단결운동이 시작될 무렵이다. 그 즈음 불황을 맞이하면서 보스톤과 뉴욕 등에서 파업과 식량폭동이 일어난다.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민생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정부기관, 언론, 기업이나 사회단체 등에서는 이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외부에서 온 급진주의자들(foreign socialists, ultra communistic radicals)이 이끄는 난동’이라고 설파한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제 막 시작단계에 불과했던 당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미국의 적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심지어 이것이 ‘미국 정부와 인민의 재산을 뒤엎으려 영국에서 시작한 국제적 음모의 일부’라고까지 비난한다.
19세기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규모와 속도의 산업화를 이룩한다. 우리도 잘 아는 록펠러, 모건, 밴더빌트, 카네기 같은 사람들의 시대다. 거대 자본과 기업의 시대, 노동운동도 성장, 조직화된다. 노동자 정당, 사회당 등도 초보적 수준에서 만들어진다. 그 즈음부터 경제정의를 외치는 노동과 자유방임의 자본, 그리고 자본과 한패인 정부 간에 도처에서 유혈 투쟁이 벌어진다. 정부와 기업은 공산주의 혁명의 폭풍이 불어온다면서 강력한 탄압의 고삐를 죄었다. 구사대는 물론 군과 경찰이 동원되어 노동자와 피를 흘리는 전투(?)를 이어갔다. 당시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지금은 국가와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벌이는 상태”라고 분개했고, 뉴욕타임스는 “시카고는 공산주의자에게 넘어갔다”고 제목을 뽑았다. 미국 정부 스스로도 인정한 가장 잔혹한 노동탄압 국가라는 오명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5-60년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비디오 게임 ‘Fallout 76’에 삽입된 포스터. ‘당신은 우리 편인가 적인가. 공산 간첩만이 미국에 등을 돌린다.’라고 쓰여 있다.
사실, 진실, 자유가 의미 잃은 분열의 정치
19세기 미국 반공주의의 역사는 노동자, 노동조합,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가 오래 전부터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적, 즉 체제 전복세력과 그를 뒷받침하는 공포의 이데올로기로 설정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적 만들기는 더욱 조직화된다.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의 ‘간첩법(Espionage act)’, 그즈음 설립한 FBI의 공안몰이, 2차대전 시기인 1940년의 ‘이주민 등록법(Alien registration act), 2차대전 직후 의회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활동, 1947년 트루먼의 공무원 충성서약 정책, 50년의 ’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과 앞서 말한 54년의 ’반공법(Communist control act)‘ 등은 그런 편 가르기 정치전술의 대표적 산물들이다.
매카시즘은 공포와 폭력의 분위기를 낳았다. 애국의 이름으로 정부나 의회는 물론 보통사람들까지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색출에 뛰어들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라는 혐의 앞에서 상식과 사실, 진실은 의미가 없었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한쪽에만 허용되는 권리였다. 관료사회를 포함, 대학, 할리우드,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은 적으로 몰리면서 큰 희생을 치렀다.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지만 반공주의자들에게 그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1980년대가 지나면서 냉전은 종식됐고 21세기 들어 사회주의에 대한 미국민의 태도도 조금은 달라졌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를 적이라 몰아붙였던 반공 이데올로기도 설득력이 약해졌다. ‘악마의 적’이라 불렀던 외부의 적, 소련은 해체됐다. 이 무렵 일부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넘어 반미국적인 것을 무찌르겠다는 적대적 전선을 지구촌 전체로—최근에는 러시아에 이어 중국까지—확대한다. 이름하여 네오콘,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다. 한편 트럼프 같은 부류의 수구우파들은 실재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공산주의를 여론동원을 위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한다. 미국 사회에 길고 오래 뿌리를 내린 반공주의와 그에 기초한 이분법적 편 가르기의 선전효과를 믿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태를 두고 ‘공산주의 없는 반공주의(anti-communism without communism)’라고 부르는 까닭이 그것이다.
이 같은 미국 반공주의의 역사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실체가 적과 동지로 사회, 나아가 세계를 편 가르는 분열의 정치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출처 : 미국 반공 이데올로기의 실체 ‘편 가르기 분열의 정치’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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