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광주 교회에서 베트남에 단기선교를 간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바로 신청을 했습니다 저를 감당할 사람이 없으니 나를 저를 양육해주시는 권사님께 알아서 감당하라며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왜 나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인가하는 잠시 의문스러움이 들면서도 그 말에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는데 양육권사님 혼자 많이 속상해 하시면서 저에게 고자질을 했습니다. 사실 몰라도 되는 내용을 저에게 전하신 권사님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많은 분들이 시누이, 시어머니 노릇을 하며 저를 잡고 누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저를 컨트럴 할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기질이 드러날 때에는 저를 누르려고 하고 압력을 행사하려는 이들에게 한정적으로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영적으로 초 예민하게 열려 있었던 시기라 그들의 죄성이 보이고 어떤 분들은 음란.시기.질투.물욕.탐욕.허세 등 원래 사람을 연구하던 직업이있기에 읽어지던 기질이 영적으로도 함께 보여지며 ‘니들이나 잘해라’ 하는 마음이 컸던 저이기에 그들과 함께 차량에 있고 음식을 먹는 것조차 힘들었고 교회에서 제일 영적으로 더러운 사람들 모임인가 할 정도로 영적인 큰 현타가 왔습니다. 라면을 먹고 잠을 자도 부기가 없고 아이를 낳고도 붓지 않는 제가 베트남에서는 종일 손발이 부어 있고 배가 복수가 찬 것처럼 부어서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저는 영적공격을 받으면 손발이 퉁퉁 붓는 증상이 있습니다. 영적전쟁터인 베트남 선교지에서 저는 쌍겹의 영적전쟁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교회 중직자들인데 왜 영적으로는 더럽지 구토가 나고 쏠리지 하며 어디다 말은 못하고 끙끙댔습니다.
거기에 있던 모두가 저에게 주로 하던 말씀들이 하나님 처음 만나면 좋지만 고생 시작이고 한번 작살낸다, 크게 뒤집어진다 고생 엄청 할 것이다 라며 축복이 아닌 악담들을 한 마디씩 했습니다. 작전이라도 짠 듯이 돌아가면서 저에게 다들 지금 너무 좋아하지 마라 이제 고생 시작이다 이런 말들로 자꾸 저의 심경을 건드렸고 저녁식사 이후 숙소 제 방으로 권사님 한 분이 오셔서 또 그런 말들을 하길래 저는 하나님 만나서 얼마나 좋으냐 축하한다 축복한다 정말 복이다 이런 말들로 마무리가 절대 되지 않는 냐며 따져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목사님들 어려운 줄 알아야 한다고 낮에 그러시던데 본인들이나 잘하시면 좋겠어요. 제가 얼굴이 발그스레할 정도로 너무 민망한 모습들을 많이 봤어요. 사모님 옆에 계시는데 애인인지 동네오빠인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 가벼운 조크와 행동거지가 제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라고 하며 언성을 높이자 룸메이트였던 채영순 권사님이 뜯어 말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의 행실은 어디를 가나 완전하고 조심성이 있습니다. 이미 첫 직업이 CS강사로 많은 기업과 학교과 시설에서 매너와 서비스에 대해 가르쳤고 또 저보다 한창 나이가 많은 학생들에게 강사양성과정을 진행하고 교육의뢰 업체 와도 일찍이 거래를 하며 굿네이버스에서 봉사자의 마인드로 아이들에게 학교폭력예방과 성교육 강의를 하고 노인시설에서 식사봉사와 지역아동센터에서 벌점을 누적되어 학교에서 보내 온 남학생들을 상담하며 인상학에 대해 가르치고 기업강의를 하고 글을 쓰며 사회적인 시스템 안에서 상당한 수준의 매너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업의 총무이사는 대표이사의 아내이기에 주어진 자리가 아니라 그만큼 사회적으로 많은 경험과 실력이 다져져 있기에 저에게 주어진 자리였고 5년이상 대표이사의 비서로 뒷 처리 앞 처리 옆 처리에 일명 노가다도 마다하지 않으면 대외협력을 위해 수많은 업체와도 미팅을 하고 거래를 하며 다져진 기본이상의 매너가 있는 사람입니다. 눈치는 백단 천단 만단입니다. 못 본 적 하고 안본 적 하고 못들은 척 하는 것 뿐입니다. 사람의 인상을 거의 20년 가까이 연구했던 사람이라면 오감 육감이 모두 열려 있고 일반인들보다 몇 배는 민감하여 빠르게 같은 초록색의 질감까지도 구분할 정도로 예리한 육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는 중에도 영상을 보면서도 상대방의 냄새를 맡습니다.
그것을 감하고 싶으셨던지 하나님께서 마지막논문을 집필할 당시에 눈시력을 빠르게 떨어지게 하시어 현재는 사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깊이 볼 수 없으며 의도적으로 안경을 쓰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잘 읽을 수 있는 별도의 은헤를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고나서 1년정도는 사람의 상을 읽지 않게 하시도록 눈을 닫아 주셨고 다시 눈이 열렸을 때에는 이전과는 다른 각도로 사람의 인상을 읽을 수 있는 하나님 방식으로 사람을 읽어낼 수 있는 은혜를 또 주셨습니다.
제주생활을 주로 했던 저에게 다시 회사로 복귀를 명령하셔서 울며불며 6개월을 바닥을 긁고 제자리에서 점프를 하며 울며불며 저 광주가기 싫어요 하며 해도 안되는 반항을 했습니다, 순종을 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저를 모두 벗겨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허접쓰레기 벌레라는 자책감만 주시는 하나님께서 엄한 훈계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6월부터 억지로 회사로 복귀를 했습니다. 예전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나 열정이 없어 제 방에서 계속 기도만 했습니다. 광주에 있는 교회에 기도시간에 계속 울고 또 울고 하니 저를 양육하시는 권사님이 왜 그렇게 울어대는지 물으시길래 “제주에 가고 싶어요 여기는 지옥 같아요 여기에 있으면 내가 다시 드러나고 제 본성이 드러나서 너무 힘들어요 권사님. . .” 지금 생각하면 그땐 왜 그리도 광주에 오기 싫었나 이유를 정확히 알 것 같습니다. 제주에 있으면 영적인 생활이 유지가 되는데 광주에 오면 특히나 회사에 출근하면 현실을 직시하고 일을 해야 하기에 광주에 올 때마다 가끔 출근했던 회사에 퇴근하여 집에 가면 예전 모습이 드러나는 제 자신이 매우 괴로웠습니다. 엄청난 피로감가 감동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적으로 요동치며 밀려들어오는 짜증감은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으로 다시 회사생활에 적응을 해가면서 업무를 파악하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중 전 직원들을 한 명씩 방에서 면담을 진행하며 그 동안 너무 미안하고 잘못했다고 사과하게 하셨고 그러면서 서로 울고 또 영접기도도 하며 기도도 해주고 안아주고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하나씩 붙여 주시기 시작했고 남편과 저는 신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도를 하고 일부러 전도를 하기 위해 그 식당을 가기도 하면서 첫해에는 전도상 3등 작년에는 2등상을 받아가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영혼구원과 복음전파를 남편과 함께 하니 기가 펄펄 살고 도움이 되고 든든하고 시댁 부모님 두 분도 어버이주간에 가서 사전에 교회에 전화를 드려서 저의 상황을 말씀 드리고 부모님을 전도하고 싶은데 도림교회 바로 앞에 사신다며 목사님께 심방 요청을 했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어려운 영적전쟁을 치루며 감동의 심방은 이루어졌고 목사님들께서 돌아가시고나서 아버님과 어머님께 일대일로 "철 없던 며느리 때문에 두 분 너무 고생 많이 하셨죠. 정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하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저의 잘못을 깨닳았어요. " 하며 용서를 구하며 교회에 함께 나가자며 권유하자 아버님께서 "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 하나님을 만났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이 어버이 주간이라 카네이션도 달아드리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 등록을 했습니다, 그 때에도 전도할 때마다 항상 막타게 강한 남편의 굉장히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멀리 사는 대학원 동기가 거주하는 일산과 가평에 가서도 그 영혼을 재건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서 ‘너는 새것 아닌 헌것들을 살릴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정말 새신자보다는 신앙을 잃어버린 자들, 무너진 자들 일명 탕자들을 많이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회사임원 중 장00 이사의 부부내외를 교회로 온전하게 전도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교회를 사모하며 예배를 사모하는 매일 김명희 이사와 회사에서 줄기차게 기도하는 기도자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저를 제주대정교회로 인도하신 김성심 권사님은 저에게 얼굴을 볼때마다 또는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면 방문하게 하여서 십일조를 해야 하는 이유와 사람 눈치보지 않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하게 하시고 전도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게 하시고 보이지 않게 쌍방 간에 끌어올려 주시며 서로를 새롭게 해 주셨고 김성심 집사님은 십일조를 시작하시며 하나님께 부어 주신 은혜를 저에게 간증해 주셨고 그 당시 집사였는데 3년간의 제주생활을 마치고 광주에 오면서 드디어 권사로 임직을 받으며 임직식 날도 권사님 댁에서 처음으로 함께 자며 권사님 댁에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게 하시고 제주를 정리하고 온전하게 떠나 광주에 완전하게 정착하게 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