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묘(宗廟)
13년 만에 찾아간 종묘다.
종로3가 전철역에서 모여 일행들이 종묘 매표소 앞에 도착하니 해설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묘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자연환경도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다양한 공원과 녹지 공간이 넓다.
특히 종묘를 둘러싼 숲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종묘 주변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 연인들의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유산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휴식과 문화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종묘는 대한민국 수도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새나 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짓기 시작하여 1395년에 경복궁과 함께 완공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 그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시는 곳이다.
종묘의 건축물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뉘어 있다.
정전은 19 칸으로 태조를 비롯한 조선왕조 임금과 왕비 49위가 모셔져있다.
당초 다섯 칸의 정전 건물은 왕조가 계속 이어지며, 봉안해야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의 건물 증축을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정전에만 모시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늘어나 또 다른 건물을 지은 게 영령전이다.
정전은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웅장하여, 조선시대의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다. 박공(牔工)지붕에 처마가 매우 긴 목조 건물이다.
영령전은 정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영령전의 신실 16칸에는 태조의 4대조와 추존임금, 정전에서 옮겨온 신주 34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공적이 뛰어난 임금들의 신주가 있다는 해설사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공적이 뛰어나고 권세가 막강했던 왕들은 사후에도 영녕전으로 가지 않고 정전에 머물러 있다. 살아서의 권세가 죽은 후에도 유지되고 있는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정전을 돌아보기 위해 입구에 도착하니 건물을 보수 중이라 입장을 금지하고 있었다.
정전의 17칸 철종 임금을 모신 신실을 답사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아쉽고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 묘년 종묘대제 추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13년 전 종묘대제 때 나는 철종 황제의 초헌관을 한 적이 있다.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나와 여행과 취미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대동종약원에서 종묘대제 헌관 위촉장을 받았다.
종묘대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된다. 토요일 오후 전국 각지에서 온
행사 요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예행연습을 하였다.
5월 첫 주 일요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종묘의 나무 잎을 싱그럽게 했다.
행사 시간이 되니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제사가 시작되니 참석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례와 함께 전통적인 음악과 춤이 이어지고 종묘 제례악이 연주 되었다.
종묘대제 초헌관을 했던 경험은 나에게 큰 감격과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철종 임금 신주를 모시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술잔을 올리던 추억은 평생 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종묘에서 열리는 제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대표하는 중요 문화행사 중 하나다.
제사에서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관 역할은, 그 순간의 무게와 책임감이 크게 느껴졌다. 전통 의상을 입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제사를 진행하는 경험은 나에게 큰 자부심과 긍지를 안겨 주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첫댓글 제사에서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관 역할은, 그 순간의 무게와 책임감이 크게 느껴졌다. 전통 의상을 입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제사를 진행하는 경험은 나에게 큰 자부심과 긍지를 안겨 주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