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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사 일 정 표>
≪제1일차 : 11. 19 (토)≫
07:00-11:30 240분 이 동 (서울 → 나주) 압구정역출발
11:30-12:30 60" 중식 (나주 곰탕)
12:30-13:30 60" 나주 친환경농업 시책 및 농특산품 소개
13:30-15:30 120 방울토마토 생산 체험
15:50-18:00 100" 나주 반남 고분군, 다보사, 배박물관 등 탐방
18:00-19:00 60" 석식(노안면 이슬촌)
19:00-22:00 180" 한마음어울행사 및 숙박 노안면 이슬촌
≪제2일차 : 11. 20 (일)≫
07:00- 08:00 60" 조 식
08:00-12:00 180" 나주농업기술원, 남평미곡종합처리장
불회사, 화순 운주사 탐방
12:00-13:00 60“ 중 식
13:00- 17:30 240 나주 → 서울
1)버스
이종원/신데렐라/밥줘/토끼여행/형아/향기야/데이지/지연이/이광국/박수인/포비/코난/달새/양종실/들바람/비움/곱슬미녀/helio/동행인/명수기/인어공주/하늘아래/노현순/솔봉/예소리/aheons/인덕원참새/방앗간/비상/jasmin//청한/심승현/스파이크/가바다/웃는돌/뮈토스/참소리/기쁨/아들/다크호스/총총/daisykim/안젤리카/정혜엘리사벳/누굴까/오늘만이/소양강/조은억새/오우가/samuel/조은우리/은개구리/쏘냐/영수기/유오디아/퉁가리/하늬바람/허브향/노란장미/금개구리//날씬이/어린청룡
2)개별차량
꽃님이/mono/빛고을/구경꾼/신영웅/헤라/한진/남해대교/계산/씀바귀/무시미//조아/까불이/노자/미니공주/엿장수아주매/유리성/초록바다
긴급전화:이종원 016-219-6001/배상수기사님016-9570-0500
나주개관
나주는 한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라남도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석강, 광주천, 극락강, 황룡강이 합류하는 영산강은 나주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횡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영산강을 젖줄로 넓게 분포된 평야지대를 우리는 흔히 ‘나주평야'라고 부릅니다. 나주의 동쪽은 산악지로서 화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은 고막천을 경계로 함평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남쪽은 영암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주의 면적은 603.88㎢로서 전라남도 총면적 11,990.29㎢의 5.06%에 해당합니다. 농지가 약 39%이며, 임야가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지 등은 1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주의 지세를 살펴보면, 노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나주에 이르러서야 금성산(錦城山)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또 금성산에서 흘러 내린 산자락은 다시.문평의 신걸산. 백룡산이 되었으며, 또 한자락은 다도.봉황 쪽으로 흘러 덕룡산에 맺히고 남평의 월연대까지 이어집니다. 또 영산강 가야산에서 흘러 내린 줄기는 반남의 자미산과 동강의 백련산까지 닿아 나주를 얼싸안고 있습니다. 그 산줄기들의 골짜기 골짜기마다에서 흘러내린 깨끗한 물들이 모여 영산강을 이루고, 그 물의 정기를 받아 마신 나주평야는 예부터 전국 제일의 평야로 이름을 날렸던 것입니다.
나주의 또 다른 이름
나주는 이러한 최적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기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생활해 왔던 것입니다. 영산강 유역의 구석기문화나 고인돌의 집단 분포 상태를 보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옹관고분으로 대표되는 영산강유역의 마한의 유물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수수께끼의 역사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러했기 이 땅의 이름도 수많은 변화를 거쳐 왔던 것입니다. 삼한시대에는 불미지국(不彌之國) 또는 목지국(目支國) 이라 불렸으며, 삼국시대에는 발라(發羅), 통의(通義)로 불려졌었습니다. 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금산(錦山) 또는 금성(錦城)이라 하였고, 후삼국시대에 와서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나주(羅州)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주는 어향(御鄕)이다.
고려를 건국하기 전 왕건(王建)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여 후백제 세력과 다투고 있었는데 이때 10여년간 나주에 머물게 되며, 완사천에서 오씨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오씨처녀는 나중에 장화왕후가 되고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2대왕 혜종이 되었는데, 임금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으며 고을 이름 또한 어향나주(御鄕羅州)라 하였던 것입니다.
나주는 천년고도(千年古都) 목사고을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983년(성종2년)에 전국을 12목(목)으로 설치할 때 ‘나주목(나주목)'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나주목은 1895년 나주 관찰부가 설치될 때까지 무려 1,000여년간 유지됩니다. 그러했기 나주를 ‘천년고도 목사고을'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나주는 작은 한양(漢陽) 즉, 소경(小京)이다. 조선시대 학자인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란 책을 편찬하면서, 나주를 한양과 닮았다 하여 소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양의 진산이 삼각산이라면 나주의 진산은 금성산이요, 서울의 강이 한강이라면 나주의 강은 영산강이고, 한양에 남산이 있다면 나주에도 남산이 있고, 또 한양에는 청계천이 흐른다면 나주에는 나주천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양을 가지 않고 나주에 와서 한양의 모습을 느꼈다고 전해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호남의 다른 이름인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의 全과 나주(羅州)의 羅가 합해져서 이루어졌다 함은 나주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나주의 역사
나주는 왕건과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었던 공방지역으로서 왕건이 승리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주는 왕건이 고려를 개국함에 있어 그 발판으로 삼았던 만큼 고려시대 초반 급격히 부상하게 됩니다. 장화왕후와의 만남과 아들 혜종의 즉위는 바로 나주의 위상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983년에는 전국 12목의 하나로로 나주목이 되어 5개 군과 11개 현을 다스렸으며, 그후 현종때 전국이 8목으로 축소되었을 때도 전남에서 유일하게 나주목으로 지속되어 이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거란의 2차 침입때에는 현종 임금이 이곳 나주로 몽진와 10일동안 머물러 임시 왕도의 역할도 수행해 내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도 나주의 위치는 축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라우영을 설치하여 군사적 거점도 확보해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후 1896년 나주 관찰부가 폐지될 때까지 나주목에는 지방관인 목사(牧使)가 부임하여 호남을 다렸던 호남의 웅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비화된 기축옥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주는 그 이후로도 이인좌의 난이나 서원조직을 둘러싼 남인과 노론 세력과의 경쟁은 그만큼 나주가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상인과 향리 세력의 성장이 가장 활발하였으며,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는 보수와 개혁 세력의 다양한 양상이 펼쳐지기도 한 곳입니다. 예를 들어 갑오농민전쟁동안 나주는 끝내 동학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성을 지켰으며, 단발령 사건으로 인한 나주목의 광주 이전, 한말 호남의병항쟁, 광주학생독립운동, 궁삼면 토지회수투쟁 등 역사적 사건들의 주무대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영산강을 이용한 수운의 발달은 영산포라는 새로운 도시의 발달과 지역경제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영산포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려때부터 조운제도에 의해 영산포에 진(津)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탈에 못이긴 흑산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영산현을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흑산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영산도(永山島)인데 그 이름을 따와 마을 이름을 영산현(榮山縣)이라 하였던 것이며, 그 이후로 강의 이름도 영산강, 나루의 이름도 영산포라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다시 조창제도가 부활되면서 세곡을 거둬 저장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국영창고인 영산창(榮山倉)이 지금의 택촌마을에 설치되기도 한 곳입니다. 이 영산창에서는 나주, 순천, 강진, 해남 등 전남 17개 고을의 세곡을 모아 저장하였던 곳으로서 5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영산창은 수로가 길고 험난해서 해상사고가 많이 났던 까닭에 1512년에 영광의 법성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도 영산포는 포구의 역할을 가장 활발히 수행하였던 곳으로서 소금과 생선과 젓갈을 싣고 들어오는 배, 가마니와 면화와 쌀을 싣고 떠나는 배로 선창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었습니다. 특히 목포항의 개항과 동시에 영산포는 일본인들의 진출이 가장 두드러진 곳으로 전남의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인들이 영산포를 침략 교두보로 삼고 교육시설과 상업.금융시설을 갖추게 됨으로써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에 의한 영산강 하구언 건설은 영산포의 몰락을 가져왔고 여기에 육로와 철로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1975년 영산포에 배가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영산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선창 부근은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세월의 흐름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주배
배의 고장 나주에는 다양한 품종의 배나무가 자란다. 따라서 배꽃의 개화시기도 조금씩 다른데 신고배나 황금배 같은 조생종은 4월 20일 전후로 만개하고 만삼길, 금촌추 같은 만생종은 4월 25일을 전후 해서 활짝 피어나 나주 땅을 온통 백설처럼 하얗게 뒤덮는다. 배꽃은 매화나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은 대신 은은한 기품을 풍긴다. 나주 배꽃은 광주시와 나주시의 경계를 지나자마자 들어서는 노안면에서부터 그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과수원마다 온통 새하얀 배꽃에 휩싸여 있다.나주시에서 배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가는 총 3,265호로 면적은 3,000ha에 달한다.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 바로 아래의 금천면, 그리고 영암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세지면, 봉황면 일대에 배밭이 많다. 그저 길을 가다가 배꽃이 눈앞에 보이면 차를 세우거나 발걸음을 멈추고 오직 감탄사를 연발하거 나 천천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된다. 배꽃 나들이는 나주와 남평읍을 잇는 1번 국도변에 자리한 나주배박물관 (금천면 석전리) (061-331-5038)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실내에 전시된 배꽃사진촬영대회 입상 작품들도 구경하고 과수원 모형, 다양한 배의 품종, 배로 만든 술/음식 등 전시물들을 꼼꼼히 살펴본다. 이 박물관에서 1번 국도를 타고 남평 방면으로 조금 가면 멧돼지 가든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곳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소로로 접어들면 석전리에서 금천면사무소 앞에 이르기까지 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빙 돌며 한적하게 배꽃을 감상할 수 있다. 매년 4월 중순부터 하순 사이에 배꽃 사진촬영대회가 열린다. 배꽃 개화시기는 나주배박물관이나 나주시청 배지원사업소(061-330-8389)에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1) 배의 영양
배는 수분함량이 85 ~ 88% 이며 열량은 51칼로리 정도이다. 주성분은 탄수화물이며 당분 10 ~ 15%로 품종과 재배면적에 따라 다르며, 단백질 0.3%, 지방 0.2%, 섬유소 0.5%가 함유되어 있다. 배는 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의 함량이 75% 차지하고 있는 강알카리성 식품으로 배나 배 가공품을 많이 먹는 것은 혈액을 중성으로 유지시켜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 비타민은 사과에 비하여 비타민 B₁, B₂ 함량은 다소많고, 비타민C 함량은 적으며, 유기산은 사과산이 0.08%로 주를 이루고, 그 밖의 주석산, 구연산이 함유되어 있다.
2) 배과실 및 배나무 효능
① 배과실
담, 가래기침 담이 나오는 기침에는 배즙 100cc 무즙 100cc를 혼합한 다음 생강즙 30cc 를 타서 한꺼번에 마신다. 기침이 아주 심할 때는 배 1개를 우유와 섞어 달여서 먹는다. 가래가 심한 천식에는 큰배 1개를 쪼개어 배속을 긁어내고 그 속에 검은콩을 채워넣고 두쪽을 합한 다음 문종이를 물에 적시어 배를 싸서 불속에 넣어 충분히 익힌 후에 콩을 꺼내어 짓이겨 먹으면 효력이 있다.
어린아이 기침이나 백일해에는 큰배 1개에 젓가락으로 50개정도 구멍을 내고 그 속에 후추를 한 알씩 넣은 다음 밀까루 반죽으로 배를 싸서 불속에 넣어 익힌후 후추를 빼고 배를 먹으면 효력이 있다.
② 해열
배는 냉하나 소화에 효과가 있고 대변이나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몸에 열을내리게 한다. 동남아등 열대 아열대 국가에서는 학질 모기에 물려 심하게 열이 생기는 말라리아나 권태, 근육통, 두통 등의 증세를 보이는 텡구열 등에 배가 명약 으로 알려져 있어 이 나라 사람들은 배를 희귀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는 배가 말라리아나 탱구열에 직접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고열로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 배는 시원하게 먹을 수 있고 과실 속에는 비타민 B와 C가 함유되어 있어 해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열이 있을 때는 배즙을 내어 죽을 쑤어 먹이면 효과적이다.
③ 배변
이뇨촉진 작용에 효과가 있다.
④ 연육
배는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연육효소가 있어 배를 채로 썰어서 고기와 섞어 하룻밤 재웠다가 먹이면 고기가 연해지고 소화가 잘된다.
⑤ 종기
종기의 근(根)을 뺄 때는 생 배를 썰어서 환부에 붙이면 근이 빠진다.
3) 배나무 잎
토사락관(위로는 토하고 설사하면서 배가 절리고 아픈병)이나 갑자기 배탈이 났을 때 배나무 마른 잎 10g을 달여서 4~5회 마시면 효과가 있다. 어린아이가 갑자기 복통이 심할 때는 배나무 잎을 진하게 달여 4~5회 마신다. 요소를 소독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효과가 있다.
4) 배나무 껍질
부스럼이 생기거나 옴이 올랐을 때 달여서 마시면 효과가 있다.
나주 배박물관
우리나라 배의 시대별, 품종별 분류와 더불어 세계 여러나라의 배를 원형 그대로 제 작 전시하고 있으며, 배의 생육과정을 계절별로 보여 주는 배의 사계절 코너와 재배의 시대적 변천모습을 재현한 나주배 밭 미니어처박스는 관람객들에게 높은 교육적 효과를 주고 있다.
규 모 : 부지 1,176평, 연건평 357평, 전시실 176평, 자료실 8평
소장품현황 : 배나무 조형물등 413점 배나무, 세계 여러나라의 배, 고서, 풍속화 및 시문, 배를 이용한 음식, 배유통상자 및 바구니 , 기타(농기계) 배꽃 개화사진 (50점), 자료실 책자 500권
나주호
영산강 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만들어진 저수량 9,100만톤의 인공호수로 주변경치가 뛰어나, 나주호와 인근 사찰들을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댐의 길이 496m, 높이 31m로 1만 1,200ha의 논밭에 물을 대주고 있으며, 또한 호수에는 잉어, 자라, 향어, 붕어 등 민물고기가 풍성하여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일명 다도댐 또는 대초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주호는 다도면 판촌리, 궁원리, 방산리에 걸쳐져 있는 인공 담수호로, 197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76년 9월 준공을 보았는데 댐의 길이는 496m 이다. 저수량은 9,100만톤으로서 약11,200ha의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해 주고 있다. 대초 장터가 있던 대초리가 수몰되었다고 해서 대초댐이라고 부르는데, 공사로 인하여 다도면 면적의 30%에 해당하는 260만평의 면적과 650호의 주택이 수몰되기도 하였다. 이 나주호 인근에는 불회사, 운흥사, 화순 운주사가 인접해있고 삼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는 등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 휴양지로도 큰 각광을 받고 있다.
나주향교
나주향교에는 명륜당, 대성전, 동.서무, 동.서재, 내신문, 외신문, 교직사, 충효관, 보전각,하마비 등이 있으나, 계성사, 사마재, 충복사, 수복청 등의 건물은 1958년 훼철되었다. 1959년 동.서재 11칸으로 고쳐지었다. 배치는 명륜당, 대성전, 내신문 으로 이어진 남북 자오선 축이 전묘후학이며 거의 경사가 없는 평지 건축이다. 다른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향교와 달리 주문인 외신문과 내신문이 문묘부에 이르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대정전은 현재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나주향교는 유형문화재 제 128호로 보존, 관리하고 있다.
1407년(태종 7)에 처음 세워졌다. 동재·사마재의 상량문과 문묘 중수상량문이 있고, 1597년(선조 31)에 교복(校僕)인 김애남이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위태롭게 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성묘(聖廟)의 위패를 금성산으로 옮겼다가 일본군이 물러간 뒤 다시 안전하게 봉안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조정에서 듣고 그를 위해 사우를 건립토록 하였다는 내용의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가 있다. 인조 때에 중수 중건의 역사가 있었으며, 현종·숙종 때에도 중수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성전은 이때 중수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1900년대에 사마재·수복청·양사재 등이 헐리고 1920년대에는 서재와 충복사가, 1952년에는 동·서무와 동재 등이 헐리게 됨으로써 위축된 모습으로 남게 되었던 것을 1959년 동·서재를 중건하고 1980년 명륜당과 동·서익당을 보수하였다. 그 뒤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 및 동·서재의 보수가 있었고 1986년 관리사를 신축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기둥 사이에는 꽃모양의 받침을 만들어 위에 있는 부재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평면과 세부기법에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향교 대성전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며, 서울문묘·강릉향고·장수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향교문화재다.
//문화재청과 문화예술종합정보시스템에서
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호
나주향교의 중심건물인 대성전은 孔子를 비롯한 27위의 위패가 모셔진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 겹처마가 팔작지붕이다. 건축적으로 살펴보면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나 쇠서의 형태는 翼工이 비슷하게 변하고 昌枋위에는 익공집에서 나타나는 화반들이 배치되어 있다. 전면 1칸을 개방하여 퇴간(退間)으로 하고 안쪽에 고주(高柱)를 세워 중앙과 좌우 兩端間에 각각 문호를 달았으며 柱間에는 큼직한 살(窓)을 만들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고, 후면에 고주 4개를 한 줄로 세워 앞뒤 고주에는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동자주형(童子柱形)의 台工을 세워 宗樑을 받쳤다. 건물내부에 세운 고주(高柱)와 주위의 평주(平柱)와는 退樑으로 연결 하였으며 이것을 받는 공포의 살미첨자는 한몸으로 합쳐서 樑奉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초석 상면에 연화문을 새긴 장식이 특이하다. 대성전 건물은 공포와 개가구재의 세부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아 조선중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대성전은 국내 현존하는 대성전 건물 가운데 규모나 격식면 등에 있어서 제일이다.
나주서 ‘농업박람회’수천개 달린 고추, 100㎏ 넘는 호박--경향신문
전국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제4회 대한민국농업박람회가 10월 26일 나주시 산포면 전남농업기술원에서 막을 올렸다. ‘친환경농업과 생명의 지혜’란 주제로 30일까지 열리는 농업박람회는 친환경 농업관, 생명 예술관, 희한한 농산물관 등 22개 전시·판매관이 설치돼 볼거리와 체험의 장을 제공한다.1,000여평에 마련된 생명예술관에는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어려운 분야를 기능성식물을 이용해 치료하는 원예치료실과 국화향기관, 꽃향기 터널, 웰빙체험장과 공기정화식물을 이용한 새집증후군 예방에 효과가 큰 세계각국의 실내정원 등이 선보인다.
친환경농업 생태체험 코너에는 첨단기술을 접목해 수천개가 달린 고추와 방울토마토, 200여개의 열매가 달린 4년생 가지 등 신기한 채소류가 기술농업의 진수를 보여주며 쇠똥구리, 무당벌레 등 친환경 곤충과 기능성 누에의 일생, 천적생태 코너 및 관상곤충 등을 관찰할 수 있다.수출농산물 판촉관에는 친환경농업으로 생산한 청정농산물 41개 품목 840여점이 전시되고 46개 생산업체에서 출품한 농산가공품은 통역원을 배치해 현장에서 농가와 수출상담을 통해 수출계약도 체결한다.
전국농특산물관에는 경기도의 가시가 솜털처럼 부드러운 선인장과 충남의 포도, 딸기가공품 등 8개도에서 생산한 대표브랜드 농산품이 전시돼 홍보 마케팅 경쟁을 펼친다.
별남 농산물이 총 출동하는 ‘희한한 농산물관’에는 100㎏이 넘는 호박과 뱀처럼 긴 오이 등 희한한 농산물 232종 492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개발기술 및 농특산물 전시판매관에는 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개발한 각종 농업기술과 농특산물 609종 4백34만3천여점이 전시돼 관람객들에게 저럼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고품격 친환경 EM공장-나주투데이에서 퍼옴
다가오는 미래의 농업은 씨앗을 뿌린 뒤 다른 일을 하지 안 해도 수확되는 단순 작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좋은 예가 북한이다.
북한은 1990년대 초부터, 오랜 기간 화학비료와 농약의 과다 사용으로 토양이 열악화되어 농업이 부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99년 가을 대폭적인 증산을 실현,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북한 농업의 기적적인 회생에 큰 역할을 한 것은 EM이다.
에너지부족, 농약, 화학비료, 농기계 부족 등으로 거의 괴멸 상태에 빠졌던 이 나라의 농업이 EM을 사용한지 3년 만에 완전 복구된 것.식량문제 해결에 EM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EM은 발효를 촉진하는 유용미생물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이 성질을 잘 이용하면 여러 분야에서 효과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물 등 생쓰레기를 그대로 방치하면 부패하여 악취를 풍기므로 골치 아픈 존재가 되지만 EM을 이용하면 발효하므로 발효된 것은 분명 좋은 퇴비가 되고, 토양을 개량해 농작물의 성장을 돕게된다.
더욱이 EM은 토양 가운데 본래 존재하는 유용미생물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때문에 종래의 화학비료농법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수확량의 한계돌파도 가능하다.
EM기술의 창시자인 히가 데루오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EM을 사용하면 무농약 농업이 가능해지고 농업인 자신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EM은 물이 오염되지 않고, 생태계가 복원되며, 바다가 청정화 된다.
따라서 농수산 환경 모두가 정화되며 그런 환경에서 생산되는 식품을 먹는 사람도 건강해지는 등 좋은 연쇄 현상이 일어난다.
축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축산의 악취가 소멸되고 항생물질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산된 우유, 계란, 고기 등은 품질이 좋아질 뿐 아니라, 아피토성인 사람이 먹어도 문제가 없고 건강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아울러 EM을 이용한 가축의 배설물로 농사를 하면 좋은 수확을 거두고 있다.
나주의 고인돌과 반남고분군
화려한 금관이 발굴된 마한왕국 반남고분 나주를 향해 흐르는 물줄기들은 거대한 영산강을 이룬다. 영산강은 때론 범람하여 위세를 부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기름진충적토가 쌓인 널따란 기름진 들녘을 만든다. 그러기에 나주에는 아주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농경 정착생활을 한 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남도 벼농사의 발상지인 다시면 가흥리나주에는 일찍부터 농경 정착생활을 한 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로 추정되는 다시면(多侍面) 가흥리(佳興里)의 농경 유적은 매우 주목된다. 가흥리는 영산강 중류지역의 충적지대에 위치한 습원지(濕原地)에 해당된다. 1978년 지표(地表) 밑 6m 지점의 회청색 유기질 점토층에서 검출된 ‘벼 꽃가루’를 분석한 결과 B.C 1,050년 전후에 이미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한국의 벼농사는 중국 강남에서 회하(淮河)산동반도(山東半島)를 거쳐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더구나 영산강유역 일대에서 보다 완전한 형태의 전형적인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아직 조사 발굴된 적이 없어 그 전파 경로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가흥리 습원지역의 꽃가루 검출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남부 지역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특히 노안면(老安面) 영평리(永坪里)에서도 이 지역이 유물(遺物)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여기에서 발굴된 집터는 이 지역이 금성산 산줄기가 닿은 구릉지대(丘陵地帶)이자 황토층이어서 ‘움집’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정착 농경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영평리 유적에서는 삼각형 돌칼과 가락바퀴, 간 돌검(마제석검:磨製石劍), 흠있는 자귀날 돌도끼(단도석부:單刀石斧) 등이 발굴되었다.
그러기에 나주에는 이들이 생활하면서 남긴 유적이 곳곳에 많다.바로 영산강유역에는 고인돌(지석묘;支石墓)과 ‘독널무덤(옹관묘;甕棺墓)’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집단 분포되어 있다.(사진/사적 404호/다시면 복암리고분])
이는 나주가 그 오랜 역사를 뽐내면서 전통시대에는 다른 지역보다 선진문화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고인돌은 고인돌은 100여기가 집중 분포된 기념물 제135호인 왕곡면 신포리 내동마을을 비롯하여 보산동(寶山洞)문평면(文平面) 가운리(佳雲里)남평면(南平面) 옥하리(玉下里)산포면(山浦面) 산제리(山濟里) 등 곳곳에 집단적으로 소재 하는데, 이같은 고인돌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군장의 가족묘(家族墓)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개 남도의 고인돌은 거의 매장의 주체부를 지하에 두고 그 위에 작은 돌이나 돌무지(적석;積石)로 지탱되는 ‘덮개돌(개석;蓋石)’을 올려놓은 기반식(基盤式)인 남방식을 취한다. 또한 덮개돌을 지탱하는 고임돌이 따로 없는 개석식(蓋石式)도 남도를 비롯한 남한지역에 집중 분포한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는 네 개의 판석(板石)을 네모지게 짠 위에 널따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책상 모양의 북방식(北方式)도 발견된다.
나주 만봉리,신풍리,송촌리의 고인돌은 덮개돌 아래에 4매의 판석을 세워 평면이 네모난 돌방을 이룬다. 그러나 역시 덮개돌은 마치 남방식처럼 두터워져 남도의 지역적 특성을 이룬다. 특히 1975년에 발굴된 대초댐 수몰지역(水沒地域) 고인돌은 화순군 도암면과 나주군 다도면을 합쳐 총 33기(基)에 이르른다.
이 중에서 나주 대초댐 고인돌은 대초리(大草里) 남대마을 11기 마산리 쟁기머리 3기 판촌리 9기 등 23기에 달한다. 쟁기머리의 고인돌은 돌방의 배치에서 직선 형태인 일렬(一列)이나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판촌리 6호와 11호는 ‘돌무지’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소형 판석을 세워 장방형(長方形)으로 구획한 것이 잇대어져 있는 점이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특이한 편이다. 여기에서는 고인돌 수에 비하여 매우 빈약하지만 그 옆에서 간 화살촉과 돌로 만든 석제(石製) 가락바퀴,숯돌,민무늬 토기편 등이 수습(收拾)되었다. 이러한 나주의 고인돌은 변형된 돌널형(석관형;石棺形)조잡한 돌넛널형 구덩형(토광형;土壙形) 돌방이 공존하는 등 매우 다양하다.
이들 고인돌은 상하의 장축(長軸)이 일치하고 그 하부구조는 원형(圓形)에서 장방형(長方形)으로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또한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에서 구덩이나 위석(圍石)을 가미한 무지석식(無支石式)으로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특히 시신(屍身)의 머리 방향은 이들의 생활 근거지였던 강(江)이나 태양숭배(太陽崇拜)와 관련된 동쪽을 향한다. 그러나 아직 이들 고인돌에서는 부장(副葬) 유품(遺品)이 발견되지 않고, 주변에서 약간의 석기류가 출토된 점은 보성강유역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이룬다.
자미산성 주변의 왕족,군장급이 묻힌 반남 고분군 나지막한 자미산(紫薇山) 봉우리를 에워싼 길이 740m 가량의 반남면(潘南面) 자미산성(紫薇山城)은 기념물 88호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흙과 돌로 쌓은 것으로 그 안에는 평탄한 건물 터와 샘터(龍泉) 세 개의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한 때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격전을 벌이고, 고려후기에 국왕의 개경 환도(還都)에 반대하면서 몽고(蒙古)와 끝까지 항쟁을 전개한 삼별초군(三別抄軍)이 잠시 주둔했으나 나주를 공취하지는 못했다. 그 산너머에는 우리 나라 8명당(明堂)의 하나인 봉현(蜂峴)이 있다.
이 자미산성 주변에는 고분 30여기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흔히 반남고분군(Pannam Old Complex)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고분 중에서도 현재 대안리(大安里) 고분군은 사적(史蹟) 76호로, 신촌리(新村里) 고분은 사적 77호, 대덕리 고분군은 사적 78호로 지정 보존된다.반남 고분은 이미 민족독립항쟁기인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발굴된 적 이 있었다.
당시 곡정제일(谷井濟一)을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1917~19년에 걸쳐 신촌리,대안리 등의 고분이 발굴되었다. 이들 고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형의‘독널(옹관;甕棺)’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그 매장시설로 보아 그 장법(葬法)이 특이하고, 고분 형태도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유사했을 뿐만 아니라 무덤 주위에 도랑을 갖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주목받았다. 특히 이들 일본인 학자들은 1938년에 다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석실분(石室墳)을 포함한 고분들을 발굴하고, 이듬해에는 사적(史籍)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독널무덤’ 등을 일본인들의 소산으로 보고, 일제시대에 한민족을 말살하려는 논리적인 근거였던, 일본과 한국은 같은 핏줄이며 일본인이 조상이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도 관련하여 당연히 들 떠 있었다.
그 후 반남고분은 광복(光復)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직접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독널을 비롯 나무널,나무덧널이 병존하고, 대부분의 고분에 외부시설인 도랑이 파져있음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반남 고분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가운데 그 보존관리의 필요에 의해 정화되어 오늘에 이르른다.반남 고분은 대게 원형이거나 윗부분이 잘린 피라미드 형태인 절두방대형(截頭方坮形)을 취한다. 그러나 신촌리 6호분과 덕산리 2호분처럼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근 형태인 전방후원분도 있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땅위에 거대한 봉분(封墳)을 쌓은 후 그 안에 여러 개의 독널을 묻은 일종의 가족 공동묘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독널무덤과는 달리 아주 커다란 대형의 독널에 해당하여 그 자체의 크기는 물론 봉토(封土)의 규모에서도 경주(慶州)의 대형 봉토분(封土墳)과 비교될 만큼 매우 큰 것도 있다. 덕산리 3호분은 백제시대로 추정되지만 직경이 23m이고, 높이가 9m 가량이 되는 둥근 형태의 대규모 무덤에 해당한다. 그래서 한 무덤에는 보통 5~6구가 매장되었는데, 신촌리 9호분에서 위아래 2층의 독널 12기가 발굴된 것처럼 이를 통해 무려 12구가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독’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시체나 뼈, 뼛가루를 묻은 토기를 말한다.
이 ‘독널무덤(옹관묘;甕棺묘)’은 ‘독’의 형태를 갖추고 있거나 흙으로 빚어 구운 것에 시체 등을 묻는 장법(葬法)을 뜻하지만 보통 일상용이나 관(棺)으로 사용하는 토기(土器)에 시체나 뼈를 묻는 형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반남의 독널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독널 전용(專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남고분은 대개 두 개의 독을 이은 합구(合口) 독널이 주류를 이루지만 길이가 1.7m나 되고, 입지름이 1.1m 가량이나 되는 큰 독 하나를 사용한 단식(單式) 독널도 있다.
독이 두 개인 경우의 매장법은 머리 쪽에 큰 독을 씌었고, 이음새에는 진흙을 발랐으며
그 안과 옆에는 장신구(裝身具)나 무기, 단지 등을 함께 묻었다.이러한 반남 고분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실상 이같은 형태의 무덤은 영산강 하류유역에 집중 분포되어 발견된다. 다도면 마산리(馬山里)에서는 1975년 대초댐 수몰지구 발굴 때 고인돌과 함께 독널무덤 1기와 토광묘 3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반남면 시종(始終)학교(鶴橋),월야(月也),다시(多侍),동강면(同江面) 등지에 밀집 분포된 20~30기의 독널무덤은 청동기시대 후기이자 초기 철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대형 토기(土器)를 생산했던 중심지이며, 도작문화(稻作文化)의 발상지였음이 짐작된다. 이들은 반남 등지에서 일찍부터 집단적 정착 농경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일정한 지배형태를 갖추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신촌리 9호 고분에서는 칠성판 위에 삼베로 싼 시신(屍身)을 올려놓은 독널에서 화려한 금동관(金銅冠/사진/국보 295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함께 팔찌,봉황무늬를 한 고리가 있는 환두대도(環頭大刀),창,화살촉,금동 신발 등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금동관과 같은 부장품으로 보아 여기에 묻힌 인물이 국왕이나 군장급에 해당하는 지배자였으며, 이는 이 지역에 아주 강력한 군장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반남 고분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여 북방 고구려(高句麗) 고분과도 연결되고 있으며, 고대 일본과의 밀접한 관계도 시사해 준다.
신촌리와 덕산리의 전방후원분은 고대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던 무덤 형태였다. 또한 덕산리 3호분과 대안리 9호분 둘레에 도랑이 파여져 있는 것도 일본의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일제시대 때 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고대 일본인의 소산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선사시대(先史時代)는 물론 가야(伽倻)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 등은 당시 가야가 일본보다 선진 문화국가였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더구나 백제는 고대 일본이 아스카문화(비조문화;飛鳥文化)를 형성하는데 단순히 중국문화를 전달하는 가교(架橋) 역할이 아니라 직접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 월야면 만가촌(萬家村)의 고분은 일본의 조형(祖型)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또한 무덤 둘레의 도랑도 일본에서는 호수로까지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반남 고분은 당시 이 지역에 아주 강력한 토착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3~5세기경에도 이 지역에서는 백제 지배계층의 주된 무덤이었던 ‘돌방무덤(석실분;石室分)’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독널무덤을 쓰면서 왕릉(王陵)처럼 거대한 봉분을 축조한 것은 반남 고분을 비롯한 함평촵나주촵영암으로 이어지는 영산강유역의 독특한 고분뿐인 것이다.사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도 백제의 중앙 통치력은 근초고왕(346~374) 때까지 남도에 미치지 못했으며, 실제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동성왕(479~500)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반남 고분은 서로 시기를 두고 축조되었던 만큼 대부분의 독널무덤과는 달리 대안리 5호분은 돌방두덤의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이 고분은 6세기말에서 7세기초에 이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종래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이 백제의 중앙 통치력에 흡수 편제 되어간 것을 뜻한다. 이로써 이 지역의 독널무덤은 백제 돌방무덤의 출현과 함께 점차 소멸되어 갔는데, 이는 이 무렵 이들 토착세력이 중앙의 세력권에 포괄되어간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남도의 강인했던 토착문화(土着文化)도 점차 세련되고 중앙화되면서 백제화되기에 이르렀다.
나주신촌리고분출토 금동관(국보 295호)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금동관이다. 나주 신촌리 9호 무덤은 1917∼1918년에 일본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금동관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 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내관인 모자는 전북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와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할 뿐만 아니라,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된 백제 관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예로 중요한 유물이다.
나주 다보사-오마이뉴스
절은 661년(문무왕 1)에 원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뒤 고려 후기인 1184년(명종 14)에 보조 지눌이 중건했으며, 조선시대인 1568년(선조 1)에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이 중창했습니다. 그리고 1878~1881년 사이에 대웅전·명부전·영산전·칠성각이 중수되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구암·금오·도원 스님 등이 해방 이후 이곳에 주석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초발심 자경문에 이르기를…
“사음수(巳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니라”하는 말씀이 있다. 이는 ‘같은 물이라도 뱀이 마시면 독을 이루지만,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는 말이다.
나주 금성산 자락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다보사(多寶寺)는 나주시내에서 자동차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지만 계곡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범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치 않으면서도 찾아가면 다정다감한 사찰이다. 다보사를 가는 길은 차라리 오르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국도 1호선에서 약 1킬로미터 위치해 있지만 걸어가는데 땀이 비오듯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찰에 오르는 길가에 피어난 벚꽃과 주변의 저수지와 금성산 풍경들과 산새들의 노래가 힘겨움을 감소시켜 주었다. 어쩌면, 다보사를 봐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힘들 것 같다.
다보사에 다다르면 처음에 일주문이 보이지 않고 바로 금강문이 보인다. 아마도 이 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금강문 불교 사찰 입구에의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으로,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한다. 흔히 인왕상이라 불리는 두 명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어 인왕문이라고도 한다. 천왕문과 마찬가지로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정면 3칸 중 가운데 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쪽 1칸은 바깥 쪽 3면을 벽으로 처리하여 안에 금강역사상을 세워 둔다. 금강문안의 금강역사와 문수보현이 있다. 다른 사찰과는 또 다른 모습이며, 이것은 금강문이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이 있다는 주지스님의 말씀, 또 하나를 배우는 발걸음 이였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좋고, 만져보면 차가운 느낌이 너무나 좋았던 범종이 눈앞에 위치해 있는 종각이다. 일반적으로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의 불전 4물(物)을 배치해 두는 범종루는 누각 양식으로 세워진다. 따라서 그 이름도 범종루 또는 범종각(梵種閣)이라고 불린다. 예불 의식에 필수적인 법구들이 비치되는 범종루이기에, 가람 건물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배치되기 마련이다.
사찰에 가면 항상 중심에 있는 대웅전이 종각 옆에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87호로써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에 맞배지붕을 한 주심포계 가람이다. 1184년 보조 지눌이 중창, 1596년(선조 29) 서산 휴정 대사가 삼창하고 다시 1884년(고종 21)에 중수한 바 있는 이 대웅전 건물은 본래 나주시 문평면의 신로사(薪老寺)에 있었던 것인데, 신로사가 폐사되자 이곳을 옮겼다고 한다. 안에는 여래형의 삼존불좌상을 비롯해 아미타후불탱화와 신중탱화, 중종과 1884년의 대웅전 단청에 관한 현판이 있다.
아미타후불탱화는 송광사에서 처음 봉안되었다 언제인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써 1901년에 제작되었다. 또한 신중탱화는 처음 보림사에서 봉안되었다가 옮겨진 것으로 1884년(고종 21)에 제작된 것이다.
그 옆으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해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명부전이 있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으로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신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명부란 염마왕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대웅전 바로 뒤에 칠성각이 있다. 사찰의 전각을 그 중요도에 따라 상단·중단·하단으로 나눌 때 하단에 속하는 전각이다.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면 1~2칸, 측면 1칸으로 대부분 규모가 작지만, 삼성각이라고 해서 칠성신을 산신·독성과 함께 모실 때는 칠성만을 모시는 전각보다 크게 짓기도 한다.
내부에는 칠성삼존불과 칠여래 등을 한데 그려넣은 칠성탱화를 모신다.그 뒤로 자리잡고 있는 영산전, 석가모니가 영취산(영축산)에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묘법연화경을 설했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인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봉안해 둔 곳이다.
그리고 현재 요사채와 선방으로 사용할 공간인 하선당이 거의 준공단계에 이르렀다한다. 사월초파일이후에는 일반인에게도 요사채가 제공된다고 한다. 물론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정신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프로그램도 마련하신다는 주지스님의 말씀도 있었다.
나주시향토문화회관에 보관돼 있다는 다보사 괘불을 보았다. 너무나 커서 완전하게 펼쳐져 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이 괘불은 화기를 보면 ‘신조괘불안우금성산보흥사(新造掛佛安于錦城山普興寺)’라는 기록이 있어 처음 금성산 보흥사에서 조성된 괘불임을 알 수 있다. 이 괘불은 삼존도로써 모두가 입상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이 위치해 좌우 협시의 두광 위에 각 2분의 불보살이 조그맣게 배치되는 구도이다.
다보사는 각 전각들이 오밀조밀하게 2~3미터 간격을 두고 배치돼 있고, 계곡 안에 푸근하게 안치돼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인 사찰이였다. 더불어 높이 11.5미터, 가로 8미터로 사람을 압도하는 다보사 괘불은 눈을 휘둥글게 했고, 월드컵 때 대한민국 태극기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나주 답보사 우화..천진한 도인…“모기도 잡지 마라” 한겨레 신문
전남 나주 금성산에 이르니 하늘 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과 땅과 계곡이 비로 인하여 함께 춤춘다. 우화(雨華)도인(1903~1976)의 환영식인가.
우화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수박을 들고 경내에 들어섰다. “아따 무겁게 뭔 이런 것을 사오시요. 글씨.”
적막한 경내에서 주지 일륜 스님(63)이 맞는다. 우화도인을 평생 시봉했고, 스승의 열반 뒤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수행하다 다시 스승의 자취를 쫓아 돌아온 그다. 마치 수줍음을 타는 여성 같은 표정이나 꾸밀 줄 모르는 진솔함은 스승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의 스승 우화는 한국의 선객들이 선사나 스님이라고 부르기보다 도인이라고 칭하기를 즐겨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전남 나주 다보사 선방에서 한철을 보낸 선객들은 티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같은 우화의 ‘천진’을 평생 잊지 못해 했고, 선원의 사랑방 격인 지대방에선 그의 일화가 늘 화제의 일미였다.
우화는 전남 담양의 성도(成道)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과 셋이서 살아가는데 아버지는 늘 우화를 못난이라며 미워했다. 그래서 소학교를 글씨도 깨우치기도 전인 3학년에 그만두어야 했다.
우화는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14살에 집을 나왔다. 발길 닿은 곳이 경남 함양 영각사였다. 그는 밥을 얻어먹으며 행자 노릇을 시작했다. 우화는 고달픈 행자생활 중에도 틈만 나면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못나고, 부모 복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 달라”고. 어느 날 꿈에 한 노승으로부터 “참선을 하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그는 참선 길에 나섰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배짱마저 없는 그의 삶은 수행처에서도 고달프기만 했다. 토굴에서 수행하다 병이 든 채 누더기를 입고 통도사를 찾아갔지만 걸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 변변한 은사도, 내놓을 문중도 없는 그는 선방에서도 문전 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공 선사를 찾아간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도 3번이나 방부(안거에 살겠다고 신청)를 거절당했다. 많은 식량을 탁발해 가서야 정혜사 선방에 들어간 우화는 한 번 온 공부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만공은 석 달간 한 철 안거를 마친 뒤 선방 납자들이 쓴 게송(깨달음의 시) 가운데 우화와 성철 선사의 것, 둘만을 인정했다고 한다. 우화가 부산 내원사에 이르자 경허-혜월의 법을 이은 운봉 선사가 그의 견처(깨달음)를 단박에 알아보고 법제자로 삼았다. 법(깨달음 또는 진리)을 전하고 받는 것 또한 꿈 속의 일이던가. 일륜 스님이 내보인 운봉의 친필 인가장엔 ’전법게’(법을 전함)가 아닌 ‘전몽게’(꿈을 전함)라고 쓰여 있었다.
소학교 3년 중퇴 뒤 14살 때 출가평생 짚신신고 짚방석에서 좌선 새벽 2시 일어난 뒤 눕는 일 없어 고양이에게도 “화두 잘 챙기거라”
그 뒤 우화는 불교세가 미약해 ‘앉아서 굶어죽기 딱 좋은’ 나주에서 다보사를 30여년이나 지켰다. 아예 돈을 쓸 줄도 몰랐던 우화는 꼬깃꼬깃한 돈을 한장씩 두장씩 모았지만, 승려들이 “여비 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꾸어달라고 하면 두 말 없이 주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빌려간 것은 후생에서라도 부처님과 대중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철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우화는 절에 아무도 없어도 혼자 죽비를 치고 참선을 시작했고, 공양시간이 되면 발우를 폈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았다. 우화는 잘 때도 반드시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으로 누웠고, 요를 방석 크기의 4분의 1로 개어 위쪽만을 덮었다. 황소바람이 노승의 몸에 몰아치는 것이 안타까워 제자 일륜이 방에 들어가 요를 펴서 온몸을 덮어드리고 방을 나와 문틈으로 방을 들여다보면 스승은 얼른 요를 다시 4분의1로 접어 위쪽만 덮었다. 안락함을 멀리함으로서 경책을 삼은 것이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면 온종일 다시 눕는 일이 없었다. 또 평생 천방석을 두고 짚방석을 깔고 좌선을 하고, 짚신만을 신었다. 여름이면 모기약을 뿌리지도, 모기를 잡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름철 그의 모시옷은 우화의 피를 포식해 배가 터져 죽은 모기들의 피로 시뻘겠다.
이처럼 미물에게도 그는 평등하게 대했다. 이곳에서 키우던 고양이에게도 늘 “화두를 잘 챙기라”고 일렀는데, 고양이는 이를 알아듣는 듯 좌선 중인 우화의 무릎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이 고양이도 발정기가 되면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한번은 비구니 스님이 절에 오자 그에게 “고양이를 붙잡고 있으라”고 한 뒤, 초를 아기 고추처럼 만들어 암고양이의 ‘그것’에 넣어 문질렀다. 비구니 스님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지만 우화는 오히려 “왜 그렇게 놀란다요?”하고 의아해 했다.
발정이 나 발광하기 직전인 고양이에겐 그런 자비를 베풀면서도 우화는 정작 ‘여성’을 몰랐다. 짓궂은 도반들이 “정말 여자 맛을 한 번도 못 봤소?”하면 “여자를 어떻게 맛본다요?”하고 물었다. 또 짓궂은 비구니 스님들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그의 손을 잡으면 “어찌 비구니가 비구의 몸에 손을 대느냐”며 마치 성폭행당하기 직전의 여성처럼 놀라서 고함을 치곤 했다.
“때도 한참 넘었는디, 공양도 대접을 못하고 어쩔거나.”
공양주 보살 한 명 없이 손수 끼니를 해결하는 안빈한 수행자 일륜 스님은 안타까워하지만 우화의 ‘천진’이 허기를 때워준다. 우화는 세속 음식은 일체 입에 대지 않아 멀리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일주문을 부여잡고 “아이고, 배 고파 나 죽겄다”고 했다. 우화의 천진 법어인가. 일주문을 돌아 나서니 드디어 배가 꿈 깬 소식을 들려준다. “꼬르륵, 꼬르륵” 금정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나주 이슬촌-경향신문
전남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노령산맥의 정기가 이슬로 내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이슬촌’으로 불린다. 68가구 157명이 사는 이슬마을의 어메니티 프로그램은 어린이농촌체험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나주노안성당. 나주지역 대표적인 근대문화유적으로 보호되고 있다. 어린이들이 흥미를 갖는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어린이 입맛에 맞는 식단을 제공해 준다. 마을을 홍보하는 인터넷 홈페이지도 뛰어나다.
체험마을의 먹거리는 매우 중요하다. 사업의 성패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체험마을이 신경쓰지 않는다. 이슬촌은 김천 솜씨마을, 경주 세심마을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먹거리 테마마을을 방문해 나름의 노하우를 개발했다. 예컨대 맵지 않고 달게 만든 떡볶이와 바싹 구워 바삭바삭한 맛을 낸 돼지불고기, 튀겨 소스를 바른 닭꼬치 등이다. 입맛 까다로운 어린이도 이곳에서는 반찬투정을 하지 않는다. 이 마을 총무인 이기선씨는 “계절에 따라 옥수수, 감자, 수박, 나주배 등을 간식으로 낸다”며 “미생물농법으로 생산한 이슬촌 쌀로 만든 밥이 도시민에게 인기”라고 설명했다. 미생물농법은 발효시킨 퇴비로 지력을 향상시켜 쌀 맛을 좋게 하는 농법이다.
어린이 체험프로그램도 특화돼 있다. 농사와 농촌생활, 생태, 건강, 요리 등 분야별 체험마당을 운영한다. 나아가 야생화 표본 만들기, 천연염색, 한지공예, 풍선아트, 세계의상 종이접기, 수영장 물놀이, 원두막 짓기 등은 농촌문화에 익숙지 못한 어린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을의 홍보 홈페이지(www.eslfarm.com)는 전국 최고라는 평가다. 쉽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게 특징. 방문객들 가운데 무심코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이슬촌을 찾은 경우가 많다. 지난달엔 농림부 주최 제5회 농업인 홈페이지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농림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이슬촌 녹색체험마을 김성님 추진위원장은 “각종 체험소개와 사진을 보면서 간접체험도 할 수 있다”면서 “민박이나 직거래도 쉽게 찾고 예약할 수 있도록 했다”고 자랑했다.
색다른 어메니티자원도 있다. 100년된 성당과 대동계가 그것이다. 성당은 지방등록문화재 44호로 지정돼 있다. 붉은 벽돌 건물로, 붉은 아스팔트지붕을 씌워 맞배형식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평이다. 마을 대동계는 올해로 111주년을 맞았다. 100주년 때 기념비도 세우고 기념책자를 발간했다. 2003년엔 농림부로부터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슬촌은 1일 부산 해운대구 상록아파트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나주배와 미생물농법으로 지은 쌀을 아파트측과 직거래하고, 아파트 어린이들이 이슬촌에 와 체험을 하는 것이 주요한 결연내용이다.
상록아파트 장명숙 부녀회장은 “중국산 기생충 김치 파동 등에 따라 주부들이 친환경농산물 구입에 관심이 많다”면서 “믿을 수 있는 이슬촌의 농산물을 직거래하겠다”며 흐뭇해했다.
이슬촌은 앞으로 도시민들과의 자매결연을 늘리는 쪽으로 활동목표를 정하고 있다. 전남대 전태갑 교수는 “이슬촌과 같이 어메니티자원이 풍부한 마을은 다양한 주체와 교류하는 것이 선진유럽의 추세”라고 말했다.
〈나주|유상오 전문위원 3996359@kyunghyang.com〉
노안천주교회
이 교회는 나주지역 최초의 천주교회로 단층의 붉은벽돌의 단층건물이다. 1894년 서울에서 피신온 정락(요안)이 나산에서 약방을 운영하면서 노안면 양천리 이민숙(바오로)·이진서(토마스)·이학서(바오로)에게 전도하여 1900년 무안에서 요양중이던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계량공소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1903년 목포 산정동본당의 두뇌(한국명 전학준) 신부가 노안면을 왕래하면서 신도수가 1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런데 1900년 나주부근을 중심으로 한 인근에 본당을 설립하여 이주할 것을 결심하고 드애신부와 뚜르뇌 신부와 현지를 답사하고 여러가지 조건이 맞는 노안 용산리 남산마을에 성당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1906년 8월 남산에 1.5헥타르 땅을 350냥에 매입하고 1907년 6월 뚜르뇌 신부의 주거지를 사내에서 남산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토지 전소유주가 묘를 이장할려고 땅을 파보니 시신이 그대로 있어 교회와의 매매계약을 파기하였다. 또한 마을사람들도 크게 반대하여 할 수 없이 다시 계량으로 계획을 바꾸어 "계량천주교회"라는 본당을 건립하였다.
까다르 신부가 1909년 5월 부임하여 1910년 1월 6일자 서울의 뮈텔주교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31명의 신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까다르 신부는 성당부지 3,000평을 매입하여 십자형의 40평 규모의 초가성당을 마련하고 손수 벽돌을 찍어 2층 양옥의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군입대하자 5년간 목포 산정동본당의 도움을 받았다. 1926년 박재수 신부가 부임하여 까다르 신부가 신축했던 벽돌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 신축하여 1927년 준공하였다.
이후 1936년 김창현 신부는 논밭 수천평을 매입하여 학교 건물 2동을 건축하여 "신성학술강습원"이라는 4년제 보통학교를 신설 수백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해방이후 노안초등학교의 설립 등으로 자연스럽게 폐교되었다. 1957년에는 밀려드는 신도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십자모양으로 성당을 확장 증축하고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또한 성모중학원을 설립하여 증등교육을 실시했으며 1961년 "성 골롬반 중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노안 문평 광산 삼도 등지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었다. 이 학교는 1984년 2월 29일 폐교되었다.
노안천주교회 건물은 1927년 건립하여 신도수가 늘어남에 따라 1957년 십자형 건물로 새롭게 증축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근대건축물이다.
이별재
이별재는 금성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병풍산에 위치하여 동쪽의 노안면과 서쪽의 문평면을 가로 지르는 해발 230m의 험준한 고개이다.옛날부터 이 고개는 문평면 학교리, 국동리, 청정리(현재는 다시면)에 살던 사람들이 노안면 송정리를 갈때나 노안면 오정리, 안산리, 양천리 사람들이 함평장, 나산장에 갈때에 이길을 넘어다였던 유일한 고개로 이곳 주민 마을 사람들의 추억이 서려있는 금성산의 대표적인 전설의 고개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고개에는 "연못"이 잇었다고 하며 가마타고 신행하던 신부가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신랑과 이별 했던 일이 있는 후로 이별재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1996 ~ 1998년까지 나주시 명산 가꾸기 사업 일환으로 복원되었다.
불회사
나주시에서 27㎞ 떨어진 덕룡산 중턱에 위치한 불회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가운데 하나로 백제 침류왕때 인도승 마라난타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불회사는 가장 이른시기에 불교가 전래된 도량이며, 4계절 모두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하는 곳이다. 종이로 만든 부처가 모셔진 대웅전과 절입구에 세워져 호법상의 역할을 하는 석장승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이어서 친근감이 넘친다. 불회사 뒷편으로는 오래된 동백나무숲에서 아름다운 겨울정취를 느끼기도 하며, 단풍은 색색으로 물들어 가을 정취를 한껏 맛볼수 있게 한다.
다도면 마산리 덕룡산 산자락에 터잡은 불회사(佛會寺),
역시 백암산 백양사에 소속된 조계종(曹溪宗) 사찰이다. 굽이굽이 고개를 휘돌아 바로 저 멀리 아래엔 대초댐 호수가 꿈틀거린다. 그 고갯길 아래로 불회사는 아늑하게 자리하지만 그 산자락일랑 자그마하지는 않다. 오래도록 손길이 가지않은 산자락일랑 온갖 넝쿨과 함께 우람한 나무들이 서로 한가로이 소곤거린다. 더구나 덕룡산 깊숙한 골짝은 계곡을 만들어내고, 비자숲 속 가을단풍은 멋들어진다. 그런 중에도 덕룡산에는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이자라 오랜 세월 이 지역은 다도로 불리워졌다.
불회사의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아마 너무 오랜 고찰인지라 그 내력을 잊었을성 싶다.
그렇지 않다면 불타의 자비만을 생각한 나머지 그 내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성 싶다.
어떤 사람들은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한 인도 스님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84년(침류왕 1)에 창건하고, 통일신라시기인 681년에 신문왕이 중창했다고 말한다.
또는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조사가 창건한 후 713년(성덕왕 12)에 연기조사가 중창했다고 말한다. 이어 고려초기에 도선이 다시 한 차례 일으킨 후 조선시대인 1403년(태종 3)에 원진국사(元?國師)가 거듭 삼창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원진국사의 부도가 고려후기인 1317년(충숙왕 4)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좀은 당황스럽지만 그가 불회사를 거듭 크게 열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불회사는 원진국사의 불사(佛事)에 관련된 이야기를 오래도록 간직한다. 이 큰스님은 호랑이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다. 이 호랑이도 부처의 자비를 깨쳤던 듯 원진국사를 도와 안동에서 시주(施主)를 얻어 대웅전(大雄殿) 중건을 서둘렀다고 한다.
상량식을 열어 부처께 이 중생구원의 도량(道場)을 드리려고 아주 좋은 날을 택한다.
그러나 일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해가 저물고, 해가 저물면 부처가 그리 기뻐할 그 좋은 날은 지나가 버리는 셈이다.
그러기에 원진스님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간절한 기도를 올려 끝내 그 저무는 해를 붙잡아 상량했다고 한다. 이 때 그가 기도했던 자리가 일봉암(日封巖)이라고 전한다.
그러기에 불회사에는 원진국사 부도(浮屠)가 전한다. 탑신의 앞면에는 ‘원진국사통조지탑(元?國師通照之塔)’이란 명문이 있고, 옆면에는 연우 4년(1317, 충숙왕 4)이라고 쓰여있다.
이 부도는 원형이지만 탑신과 지붕덮개돌인 옥개석(屋蓋石)이 팔각의 형태를 취한다.
이 부도는 유형문화재 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것처럼 한때 불호사(佛護寺)로 불리워지다가 1808년(순조 8) 무렵에 불회사로 개칭되엇던 듯 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같은 전화(戰禍)를 모면했으나 그 후 거듭 소실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 때마다 전각을 다시 건립하고, 소실된 괘불(掛佛)등을 다시 마련하였다. 1798년(정조 22)에도 불탄 것을 1808년에 복구하였다.
이렇게 온갖 정성이 그치지 않았으나 원진국사 당시의 온전한 형태를 찾을 수 없다.
더더욱 한국전쟁 때에도 전각을 비롯하여 원진국사 영정이 소실되는 등 일부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불회사는 옛 규모를 되찾으려는 몇 년 불사중창에 따라 이제 규모 있는 자태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불회사의 오랜 전통을 입증해주듯 그 주변에서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초기에 조성된 오백나한상(羅漢像)의 일부인 200여개의 석조(石造) 불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이 돌로 된 오백나한상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보존한다.민머리가 대부분이지만 고깔모자 같은 것을 쓴 나한도 있고, 더러는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갖추어 입은 것도 있으며, 이들 나한들의 손모양이나 자세도 다양하다.
이들은 공양(供養) 받을 자격을 갖춘 성자로서 그 진리를 깨닫는 방편도 다양하다는 듯
불상과는 달리 일정한 틀【?벗어나 제작되었기에 갖가지 표정과 모습을 하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물씬 풍긴다.
먼저 불회사는 사찰 입구의 측백나무들을 뒤로 젖히면서 서로 마주보는 돌장승으로 유명하여 국가에서 중요민속자료 11호로 지정하였다. 이 할아버지 돌장승은 3.15m로서
가슴에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고 쓰여있다.
보통 남자 장승이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노릇을 하는데 웬일인지 뒤바뀌어 흥미로움을 더해준다.그 모습은 정수리 부분이 처음 상투를 표현하려고 했던 듯 뭉퉁하고
눈은 남도 특유의 장승을 자부하는 듯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에 주먹코이며,야래 입술을 무는 듯 하면서도 송곳니를 드러낸다.세 갈래의 수염이 왼쪽 가슴까지 흘러 내렸지만 전체의 얼굴 표정이 잔뜩 이맛살을 찌푸려 그 무언가에 단단히 화를 내는 듯한 모습이다.
이에 비하여 할머니 돌장승은 1.8m인데, 역시 넓은 얼굴에 눈이 동그랗고 툭 튀어 나왔으며 코도 커다랗다. 얼굴 곳곳의 주름과 함께 살짝 웃는 입술 사이의 어설퍼 보이는 이빨이 흥미롭다.부근의 나주 운흥사터 돌장승과 마찬가지로 18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고 있다.특히 운흥사의 돌장승이 자연미가 있다면 불회사 돌장승은 손질을 많이 가했으면서도 토속적인 맛이 그대로 풍기는 것으로 평가된다.
불회사는 석축을 계단식으로 쌓아 오래된 전각들은 모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아마 옛날엔 온갖 정성으로 전각들을 건립하면서 그 건물들이 언덕배기 곳곳에서 더욱 자연스러웠을성 싶다. 그래서 계곡을 건너는 곳에 홍예(虹猊)를 만들어 그 위에 진여문(眞如門)을 세운 것도 옛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러기에 우둔한 중생이 생멸문(生滅門)을 지나고 어느덧 계곡물을건너 진여문에 이르면 벌써 자비의 손길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대웅전 앞뜰에 있는 3개의 괘불대가 저 멀리에 있는 중생들에게도 괘불에 그려진 부처의 자비스런 모습을 훤히 비추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불회사는 화려하지는 앉지만 산중턱 고갯길 아래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호젓한 모습을 취한다.
대웅전은 앞면과 옆면이 모두 3간으로 팔작(八作) 지붕을 하면서 마치 새가 막 날을
채비를 하는 모습을 취한다.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보물 13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전각은 기둥과 창방(昌枋) 위에 폭이 넓고 두꺼운 부재로 된 평방(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包)를 짜올린 화려한 다포(多包)집에 해당된다. 이 대웅전의 대들보 위에 놓이는 충량(衝樑)의 끝에는 용머리를 장식하였고, 곳곳에 제법 흥미로운 동물상 조각이 눈에 띈다.
마치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것을 잊지 않은 듯 대웅전의 한 쪽의,눈썹이 덥수룩한 오른쪽의 용은 여의주 대신에 인도에서 많이 등장하는 물고기를 물었다.
아직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불회사 사적기(史蹟記)>는 마라난타가 중국의 동진을 거쳐 서해를 건너 영광 법성포로 들어온 후 불갑사를 창건한데 이어 이 곳 불회사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선지 대웅전은 기둥의 배흘림이나 처마 끝의 반전에 나타난 아름다운 곡선미 등이 불갑사 대웅전과 비슷하기만 하다.
특히 대웅전은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 형태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좌상(坐像)을 모셨고,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배치하였다.
이 지불은 종이로 만든 후 옻칠을 하고 그 위에 다시 금물을 입힌 건칠불(乾漆佛)로 경주 기림사의 좌상과 함께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고 한다. 이처럼 불회사의 대웅전은 1808년에 중건되어 곳곳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우물자 천정엔 연꽃과 학이 자리하고 그 둘레엔 연꽃 줄기가 너무 무성하여 그 아래 무릎 꿇은 중생은 곧바로 고통에서 벗어나 힘을 얻을성 싶다. 천정 주위에도 온갖 벽화를 더욱 장엄미를 느끼게 한다.
어느덧 명부전(冥府殿)의 지장(地藏)보살이 10왕을 거느리며 지독한 죄인에게도 부처의 대자비를 베푸는 광경을 본다. 그리고 아주 작은 삼성각(三聖閣)에서는 예로부터 우리 한국인들과 친밀했던, 어린이 이야기책에 많이 등장하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용왕을 볼 수 있어 더욱 동심으로 돌아간다. 또한 영산전(靈山殿)에서는 나한과 함께
이 사찰을 크게 연 원진국사의 영정도 영정도 한 눈에 들어온다.
아마 국사전에 모셨어야할 원진국사 영정, 그나마 복사본의 영정임에도 불구하고
이 큰스님은 석가, 16나한과 함께 한 전각에 모셔진 것을 마음 기쁘게 생각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 불단 아래에 놓여져 있는 불경(佛經) 서가(書架)는 아마 장경각(藏經閣)도 으젖하게 터잡았을 그 옛날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名詩 불회사(佛會寺) - 박노정
사람들이 모여야 이바구를 헐 틴디
오늘따라 한 사람도 안 뵈는구마잉
산문 밖 할배 장승이 벌써 다 시부렁거리부렸나
그래 선 자리서 댕기가셨구만이라
동백 꽃망울 더는 참지 못하고
시방 막 터질 참인디
댕그랑 풍경 소리 가슴을 적실 참인디
법문은 무슨 법문, 그게 다 잡소리제
오늘은 입 다물고 있는 기 상수랑께
요로코롬 돌팍에 주저앉아
뜬구름이나 쳐다볼 텐께
운주사-주간한국에서 퍼옴
전남 화순 운주사는 천불천탑의 신화를 간직한 절이다. 이 땅에 살다간 민초들의 정령(精靈)같은 석불들이 천불산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한가로이 햇살을 즐기고 있다.
햇살은 땅을 베고 누운 와불의 정수리에 내리쬔다. 키만 훌쩍 큰 석탑의 행렬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햇살은 바위에 기댄, 풍화로 씻긴 석불의 얼굴에도 미소를 띄게 한다.
운주사는 가람 배치가 빼어난 절이 아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산세가 절경이거나 깊고 그윽한 계곡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질어질 아지랑이 피는 봄날이면 꽃에 나비 날아들 듯 운주사를 찾는다. 운주사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운주사의 저력은 무수한 석불과 석탑에 깃든 설화에서 나온다. 운주사를 창건한 이는 풍수지리의 뼈대를 세운 신라 말의 선승 도선국사로 알려졌다. 도선은 한반도를 ‘떠 가는 배’의 형국으로 여겼다. 도선은 산세가 크게 형성된 동쪽으로 배가 기울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운주사가 간직한 설화의 백미는 와불에 있다. 천불산 왼쪽 기슭에 자리한 와불은 높이 12m, 폭 10m에 이른다. 좌상과 입상을 한 석불 2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 이 와불은 소설가 황석영의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
용화세상 이끌 메시아 ‘와블’
황석영은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와불을 용화세상으로 이끌 메시아로 등장시킨다.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내용이다. 와불은 도선국사가 신통력을부려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에 싫증을 느낀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이 울었다고 고해 미처 일으키지 못했다는 전설도 있다.
‘장길산’이 나온 때는 1980년대 초. 광주항쟁 이후 절망한 지식인들은‘장길산’에 묘사된 와불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 채 운주사로 몰려들었다. 이루지 못한 꿈을 간직한 와불을 보며 그들은 울분을 달랬다. 이들로 인해 이름도 없는 시골의 궁벽한 절, 운주사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운주사는 미궁의 한 가운데 있다. 운주사를 방문한 이들은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많은 석불과 탑을 조성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당시의 기술로는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와불을 비롯해 형식과 틀을 무시한 탑과석불의 파격미는 궁금증을 넘어 당혹감을 안겨준다.
전남대 학술조사단의 발굴 조사결과 석불이 조성된 시기는 창건주로 알려진 도선국사가 활약한 연대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초기 나주평야를 지배하던 지방호족의 도움으로 천불천탑이 조성되었다는 것만 추정될 뿐이다.
운주사에는 탑 19기, 석불 93구가 전해진다. 일제시대만 해도 지금보다 2배나 많았다. 한국전쟁 후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자 묘석상이나 주춧돌, 더러는 밭두렁을 쌓는 석축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민초들의 자화상이 그곳에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을 향해 탑들이 창처럼 도열해 있다. 돌로 집을 지어 석불을 안치한 것도 있고, 기단을 원형으로 깎아 만든 탑도 있다. 황톳길 오른편에는 모양이 제각각인 석불이 바위에 기대어 있다. 얼굴 윤곽은 비바람에 씻겨 대부분 지워졌다. 빙긋이 미소 띈 석불의 얼굴. 이 땅에 살다간 민초들의 자화상이다.
절 왼쪽 산비탈을 오르면 와불이 누워 있다. 사람들은 와불을 돌아보며‘일어설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보다 자리를 뜬다. 와불 밑에는 원형으로 깎은 7개의 바위가 놓여 있다. 큰 것은 지름이 3m 가까이 된다. 칠성바위라 불리는 이 돌들은 북두칠성을 본 떠 만든 것이라 한다.
대웅전에서 뒷길로 오르는 길에도 몇 기의 석불이 서 있다. 4월 중순이면 산벚나무가 만개해 석불에게 하얀 지붕을 선사한다. 뒷길 끝은 공사바위에 닿는다. 운주사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공사바위는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를 감독하던 자리라고 한다. 공사바위에 서면 봄햇살이 어깨를 눌러 주저앉힌다. 눈을 들면 아지랑이 탓에 운주사 경내가 흐릿해진다. 나른한 꿈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운주사의 미스테리-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경향신문)
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 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운주사에 흐르는 전설 -경향신문
운주사는 이야기가 많은 절. 못난이 돌부처 하나, 찌그러진 불탑 하나에도 전설이 어려있다. 천불천탑이 제각각 들려주는 전설과 사연이 흥미진진하다.
▲명당탑=대웅전 뒤에 있는 명당탑은 군왕이 날 자리라는 명당터에 세워졌다. 개성은 왕씨의 땅, 한양은 이씨의 땅, 계룡산은 정씨의 땅, 그리고 운주사 명당터는 범씨의 땅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군왕감이 아닌 사람이 묘를 쓰면 큰 가뭄을 부르게 된다. 운주사 앞에 살던 조리댁이라는 여인이 용강지방에 사는 양반으로부터 돈 1,000냥을 받고 몰래 명당탑 아래 유골을 묻어주었다. 그랬더니 그해 큰 가뭄이 들었다. 주민들이 유골을 수습했더니 이튿날 비가 내렸다.
▲상좌불=도선국사를 도와 천불천탑을 세우던 상좌승은 엄청난 피로에 못이겨 잔꾀를 냈다. 새벽닭이 울면 공사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짓으로 닭울음 소리를 낸 것이다. 돌덩이를 나르던 마고할미는 닭울음 소리에 돌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끝내 와불을 세우지 못해 화가 난 도선국사는 상좌승을 돌부처로 만들어버렸다. 상좌불은 산비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효자가 임진왜란 때 쓰러진 부처를 세워준 다음 장님 부모가 눈을 떴다는 전설도 있다.
▲마당바위와 칠성바위=칠성바위는 운주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 7개의 타원형 돌이다. 북두칠성을 상징한다 해서 칠성바위란 이름이 붙었다. 칠성바위의 위치각이 북두칠성의 각도와 똑같아지는 날, 미륵세상이 온다고 한다. 어느 방송사가 칠성각의 위치각을 북두칠성과 맞춰보기도 했다. 마당바위는 칠성바위 아래에 있는 널따란 암반이다. 마당바위 아래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장군의 갑옷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코없는 불상=옛날 임대감집에 윤씨부인이 살았다. 부부 사랑이 두터웠으나 결혼 15년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소박 놓았다. 눈물을 흘리던 며느리는 문득 자신이 지었던 업을 깨달았다. 아이를 갖고 좋아하는 노비 부부를 보고 ‘종놈이 애를 낳으면 그 역시 종놈인데 뭘 그리 좋아하느냐’고 했던 것. 윤씨부인이 잘못을 빌던 어느날 운주사 돌부처의 코를 갈아먹으면 아이를 갖게 된다는 꿈을 꾸었다. 남편이 찾아왔고 그후 아들을 9명이나 낳았다. 이런 전설 때문에 아들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돌부처의 코를 갈아 운주사 돌부처는 대부분 코가 없다.
▲정맞은 부처상=임진왜란 때 전쟁에 나갔던 병사가 한 팔을 잃었다. 고향인 화순에 돌아온 병사는 운주사에 머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밤새 정으로 돌을 쪼으며 자살하려 했다. 새벽녘 가지런하게 파인 정자국을 보고 병사는 한 팔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목숨을 버리려 했던 것을 후회하고 외팔이 석공이 됐다. 운주사에 머물며 수많은 부처상과 불탑을 조각했다고 한다.
풍경 달다- 시 인 정 호 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화순고인돌의 특징
최대 밀집 분포권
화순지역에는 사적 제410호인 화순 고인돌유적을 중심으로 한 반경 5km 주변일대에 50개군 400여기의 고인돌이 밀집분포하고 있다. 화순군에는 160개군에 1,323기가 분포하고 있다. 전남 내륙지역에서 가장 밀집도가 높으며 또 많은 분포수를 보인다. 이의 분포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숫자이다. 즉 전북 고창지역이 약 1200여기, 인천 강화가 80여기인 점과 비교해 볼 때 단위면적에서의 밀집도가 가장 높다.
초대형 고인돌 분포
화순에는 100톤 이상의 커다란 기반식 고인돌 수십기가 존재한다. 크게는 280여톤 규모의 국내 최대 규모(무게)의 상석이 있다. 춘양면 대신리에 있는 길이 7.3m, 폭 5.0m, 두께 4.0m의 고인돌은 280여톤에 이르며, 도곡면 효산리에는 길이 5.3m, 폭 3.6m, 두께 3.0m로 약 100톤 이상의 고인돌이 있다. 도곡면 대곡리에는 길이 7.1m, 폭 3.0m와 도암 도장리에 길이 6.1m, 폭 5.2m, 두께 3.9m인 고인돌군이 있다.
이와 같은 규모는 전북 고창군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지만 화순 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를 가지고 있다.
채석장의 발견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덮개돌이다. 이 덮개돌은 자연 암석을 이용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암반에서 떼어내야 한다. 춘양면 대신리, 도곡면 효산리 고인돌 유적지에서는 고인돌의 덮개돌을 채석하는 장소가 고인돌군 위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 채석장에서 채석하다 만 석재 등이 남아 있어 고인돌의 상석 채석과정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채석장 아래에 지석이 고인 기반식 고인돌, 석실이 노출된 고인돌, 덮개돌이 없는 석실 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 공존
화순에는 확실한 탁자식 고인돌이 없지만 그와 비슷한 형식이 효산리와 대신리 고인돌에서 발견되고 있다. 남한에서 최대의 탁자식이 있는 인천 강화나 이 탁자식의 변형 또는 기반식화 되는 덮개돌을 가진 탁자식이 전북 고창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화순에서는 개석식화 되는 양상을 보인 탁자식만 발견된다. 기반식 고인돌은 효산리에 군집을 이루고 있고, 대신리에서는 군집안에 1기 또는 독립되어 발견된다. 발굴된 고인돌 중에 무덤방 위를 바로 덮개돌로 덮은 즉 개석식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화순의 고인돌은 숫자의 방대함과 함께 여러개의 받침돌을 지상위에서 짜 맞춘 지상석곽형, 바둑판 형태의 기반식, 받침돌이 보이지 않는 무지석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부장풍습과 축조연대 확인
춘양면 대신리 고인돌의 발굴로 화순에서는 시신이 안치된 무덤방이 확인되었고 각종 석기와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편 등이 발견되었고 대곡리 적석목관묘에서는 국보 제143호인 처동검, 팔주령, 청동거울 등 청동기 일괄유물 출토되어 고인돌 다음 시기에도 중요한 지역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화순 대신리 고인돌에서는 고인돌의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였다. 대신리 고인돌에서 나온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가 기원전 2500±80년(27호, 중심연대 555년, 보정연대 720∼390년)으로 측정되었다. 이는 2500년경에 고인돌이 축조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채석장 아래에서 출토된 아가리부분에 삼각문과 점열문이 있는 토기는 전기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기원전 9∼10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유물이다. 이로 보면 화순 고인돌은 약 3000년 무렵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존상태 양호
화순의 고인돌군은 비교적 최근(1996년)에 발견된 데다 개발이 안된 지역이어서 주변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일부는 개간으로 고인돌의 주변이 훼손된 상태이지만 약 10km에 걸친 계곡의 산기슭을 따라 띄엄띄엄 군집되어 있고 산기슭의 소나무 숲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 고창이나 강화 등의 다른 유적보다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지역 통치자 무덤 발견
화순 고인돌군에서 2km 떨어진 곳에 국보 제143호인 청동기 일괄유물이 출토된 화순 대곡리 적석목관묘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이 지역에서 제사와 정치를 관장하였던 지배자의 무덤인 것이다. 이 무덤의 발견은 고인돌 사회 이후에도 중요한 지역임이 밝혀지게 되었고, 문헌상의 여래비리국이라는 마한 소국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에 소국을 다스리던 무덤일 가능성이 많다
고인돌의 구조
▶덮개돌 : 상석이라고도 하며 지상에 노출한 한 개의 큰돌
▶받침돌 : 지석이라고도 하며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면서 하부구조가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덮개돌을 더 웅장하게 보이도록 한다. 이는 기반식 고인돌의 기본 요소이다.
▶묘역시설 : 무덤방 주위에 돌무지 등으로 직사각형이나 타원형 또는 원형으로 깔거나 쌓는 것이다. 이는 무덤의 영역을 표시하여 묘역역할을 하고 무덤방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모든 고인돌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일부에서만 보이고 있다.
▶ 뚜껑돌 : 직사각형의 무덤방 위를 덮은 시설인데, 현재 확인되는 것은 모두 판상석 같은 돌뿐이다. 이는 매장 공간을 확보하고 피장자의 시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무덤방 위에 뚜껑을 덮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나무뚜껑 등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 무덤방 : 무덤방은 고인돌 하부구조 중에서 죽은 이가 직접 안치되는 매장주체부를 이루기 때문에 가장 정성 들여 만들었으며 고인돌의 형식을 세분할 때 기본이 되고 있다.
▶ 바닥시설 : 바닥시설은 죽은 이의 주검을 올려놓은 시설이다. 바닥을 나무 등으로 고르게 한 것도 추정해 볼 수 있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판석, 납작한 자연석, 작은 깬돌이나 잔 자갈을 깐 것 등이 있다.
출토유물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적석목관묘 유적에서 청동기 일괄유물이 출토되었다.
1971년 영산강의 상류를 끼고 있는 낮은 구릉 위에 있는 민가의 담 밑에서 발견되었으며 주민이 이곳에서 도랑을 파다가 유물들을 캐내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동검 3점, 다뉴세문경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 동사 1점, 동부 1점 등이 있었으며 특색있는 이형동령 등이 동검, 동경 등과 함께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청동방울들이 전라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사실이 주목되었다.
이렇게 도곡면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일괄유물은 한국 청동기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화순일대가 선사시대 문화적인 중심지역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첫댓글 아구....대장님, 언제나 그렇지만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처음으로 버스 투어를 하게 되어....정말 신납니다.
개별 차량들의 만남은 어디인가여, 나주 곰탕집 위치가요, 나주시 송월동 나주우체국 앞에 있는 곳인가여! 자세히 좀 일려주세여! ^^
어깨 아팠을 우리 대장님...몸조심하고 ...잘 댕겨 오세여..대장님 성의를 봐서..모두들 열씨미 공부 하세여~~~^^*
대장님,정말 수고 하셨네요..매번 그렇지만,,이 많은 자료들...몇번에 걸쳐 읽어봐야 할듯...고창에서 본 고인돌 유적지도 큰 인상을 받았는데 화순에도 그렇게나 많이 있군요..
답사 때마다 이리도 신경을 쓰시고... 국내 답사는 자료집을 나누어주지 않는가요? 그럼 향기야언니 말대로 몇 번에 걸쳐 읽어봐야겠군요..귀중한 자료이니까요...^^*
대장님,귀한 자료 욜심히 공부할께요~~ㅇ 수고많으세요~~ㅇ^^*
자료집은 답사때 배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