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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의 저항과 죽음 25:18~21
18 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 또 성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리블라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리블라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여호야긴이 옥에서 풀려남 25:22~30
22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3 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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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간 유다 백성을 리블라에 있던 바벨론 왕이 모두 죽입니다. 그달리야는 남은 백성에게 바벨론 왕을 섬기면 평안할 것이라 하나 왕족과 부하들이 그를 죽이고 애굽으로 갑니다. 여호야긴은 잡혀간 지 37년 만에 석방돼 바벨론 왕 앞에서 양식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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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의 저항과 죽음 25:18~21
하나님 뜻에 반하는 저항은 의미가 없습니다. 바벨론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백성 60명을 잡아 리블라(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데려갑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바벨론에 끝까지 저항한 자들로, 살려 두면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에 바벨론 왕은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은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됩니다(21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두신 두 가지 길 곧 ‘복의 길과 저주의 길’ 가운데 저주의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신 28장).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는 비참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루살렘에 남아서 바벨론에 저항한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나의 의분이나 저항이 하나님 뜻을 거스른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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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야긴이 옥에서 풀려남 25:22~30
열왕기 마지막은 반바벨론파의 반란과 여호야긴의 석방을 기록합니다. 유다 총독이 된 그달리야는 남은 자들에게 바벨론의 통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24절). 하지만 반바벨론파 사람들이 암몬 왕의 사주로 그달리야를 죽이고는 바벨론의 응징을 두려워해 애굽으로 도망갑니다. 이렇게 유다의 역사는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갑자기 37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어 여호야긴이 바벨론 감옥에서 풀려난 일을 기록합니다(27절). 여호야긴의 석방은 포로 생활을 끝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열왕기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희망의 메시지로 끝난 것은,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 사랑이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열왕기 저자는 왜 여호야긴의 석방 이야기를 마지막에 기록했을까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은 어떠한가요?
한절묵상:열왕기하 25장 25절
바벨론이 유다 총독으로 세운 그달리야가 유다 왕족 이스마엘에게 죽임당합니다. 이스마엘은 다윗 왕조의 회복을 위함이라고 했겠지만, 사실 암몬 왕의 사주를 받았습니다(렘 40:14). 하나님 심판의 도구로서 바벨론 왕도, 유다 왕족 이스마엘도, 암몬 왕도 유다를 향해 심판의 칼을 휘두릅니다. 사람의 눈에 세상은 강한 자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강한 자를 움직이시는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뒤틀린 과거로 얼룩진 삶이라 해도 하나님 사랑을 믿으라. 그분은 능히 사막을 생명 샘으로 만드신다. - 팀 클린튼
오늘의 기도
하나님! 형언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하나님 사랑이 제 삶의 가장 큰 기쁨이길 원합니다.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유다의 결국을 기억하게 하소서. 깊은 고난이 이어지더라도 택하신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음의 걸음을 걷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88 이 몸의 소망 무언가)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고통과 고난, 시련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주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 맘과 정성을 다해 모든 포커스를 주님께 맞추고, 주님을 위해 드려진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더 깊은 관계 안에 거하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기꺼이 시련과 고통까지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자
항상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자녀로 바로 서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가장 큰 임무이고, 역할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유다의 마지막 20대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가
공격을 받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고
본인도 눈이 뽑혀서 1,600km 에 이르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4)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고 왕궁이 불타고 성이 완전 쑥대밭이 되었고(9)
성전의 금, 은과 놋 기구들이 모두 다~~ 빼았기게 되었다.
아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이였었던 언약궤도 이 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유다의 멸망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 마지막 시점에서
오늘 3 사람을 보게 된다.
첫번째는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이다.(22)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그달리야를 남아 있는 유다의 방백으로 삼는다.(22)
아버지 아히감은 16대 요시아 왕이 종교 개혁을 할 때에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율법책에 대하여 여선지자 훌다에게 물어 보기 위하여 찾아갔었고(22:12~14)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외치는 예레미아 선지자를 죽음에서 보호해 주었던
그런 인물이였다.(렘26:24)
그런 아버지를 모셨던 그달리야가 오늘 외치는 말씀은
너희는 바벨론의 신하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바벨론을 섬겨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24)라고 외친다.
어떻게 보면 매국노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조국을 집어 삼켜버리고 성전 마져도 철저히 파괴해 버린
원수 같은 나라 적국 바벨론을 섬기라고 하니 민족주의자적 입장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던 그달리야는 목숨을 담보로도
외쳐야 할 말, 전해야 할 말씀을 과감히 선포한다.
진정한 애국자요 참된 믿음의 사람이였다.
두번째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다.(25)
매국노 처럼 느껴졌던 그달리야를 쳐서 죽여 버린 살인자 이다.(25)
언뜻 보기에 엄청 애국자인 것 처럼 민족주의자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 해버린 불의한 행동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유다가 하나님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를 만큼
죄악이 관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였다.(렘27:17)
또한 애굽으로 도망을 가버렸다.(26)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종으로 돌아가고 싶었는가 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받아 들일수 있는 용기이다.
하나님의 뜻이 바벨론에 잡혀가는 것이라면
그 대로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민족주의적인 불타는 애국심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으면 고난 가운데서도 기꺼이 받아 들이는 용기를 주옵소서.
현실을 인정 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옵소서.
세번째 사람은 여호야긴이다.
여호야김의 아들로 유다의 19대 왕으로 18살에 왕이 되었으나
3개월 만에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 버렸던 왕이다.(24:8)
잡혀간지 37년 만에 옥에서 풀려난다. 55세가 되어서 였다.
바벨론 왕이 옥에서 내어 놓아 그 머리를 들게한다.(27)
여호야긴 왕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왕들 보다 더 높여주었다.(28)
죄수 복을 벗과 일평생 왕의 앞에서 먹게하고(29)
매일 일정량의 물품을 지급 받았다.(30)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열왕기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함께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회복 시켜 주시는 싹이라도 보여 주심에 감사한다.
아직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 날려면 33년이나 남았지만
여호야긴의 위치를 회복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옥에서 내어 주시는 하나님
그 머리를 들게 하시는 하나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회복 시키시길 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감사한다.
존 올리는 ‘고국’을 떠나는 일에 연루된 감정은
오늘날 세계의 수백만 명이 느끼며, 분쟁으로 찢어진 황폐된 지역에서 나오는 난민 행렬은 그 고뇌를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옮겨 온 이주자들도 여전히 고국을 뒤돌아보는데 이는 “땅”이 정체성과 전통의 중심이고,
개인과 가족의 기억의 중심이며,
뿌리와 소속감의 중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이미 무너진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고
그들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기억하고, 앞으로 포로로, 흩어져 남겨져 있는 자들을 향한
그분의 뜻을 기억하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쓰여진 책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셔서 막벨라 굴이라는 무덤 하나로 시작된 그들의 여정이,
놀라운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을 세우고,
다시는 꿈꾸기 힘든 화려한 성전을 지으며 무에서 유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무시하고,
온갖 우상과 죄악을 버리지 않음으로 다시 이전 이집트의 노예 시절보다 더 비참한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그들의 회개와 기다림의 글입니다.
남은 그들의 지도자들은 바벨론 왕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발본색원되어 죽임을 당했고
남겨진 그들 간에 서로 반역과 죽임의 역사가 되풀이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약속을 기억하셔서 포로로 잡혀간 요시야의 손자 여호야긴은 37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 바벨론 에윌므로닥 왕의 통치 아래서 긍휼을 얻어 그 혈통이 유지되도록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마 1:11)”라고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때 여고냐가 요시야의 손자인 여호야긴(여고니야, Jehoiachin)입니다.
이제 갈데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에 포로로 잡혀있는 여호야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고 그 한 사람을 통해 영원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가운데 이르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소망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되는 것, 그것이 구원의 역사이며 은혜의 증거가 됩니다. 날마다 그 놀라운 일에 증인으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본토에서 떠났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을 자신의 본토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을 본토로 삼아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워 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태생적 본토를 이제는 영적인 본토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유다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처참한 상태가 되어서 그 본토를 떠나 바벨론으로 끌려 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유다백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 알려 주셨지만 지도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함으로 결국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주신 땅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태초의 한 장면을 새롭게 보는 기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계 하시고 우리 삶에 공의로 판단하심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떠나지 말아야 하는 영적 본토를 나의 범죄함으로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화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선 믿음의 본토들을 끝까지 잘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내게 주어진 영적 본토를 바르게 지키고 있는가?
2.37년간을 옥에서 지낸 여호야긴
바벨론에 잡혀온 여호야긴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자신이 유다의 왕이 되었을때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앞에 온전히 엎드려서 행하였다면 이 37년은 자신을 더욱 더 영광스럽게 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야긴과 같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리에 떨어지기가 쉽습니다. 눈에 편한대로 생각에 편한대로 그 길을 쫓아 행해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37년을 어차피 옥에서 지낼 것 같으면 왕이 되었을때 진정 살길이 무엇인지 살펴서 하나님편에 섰다면 37년은 복의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리석게 여호야긴처럼 무언가에 붙들려 자유하지 못하며 보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기회가 있을때 하나님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내게 주어진 기회를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 3차 바벨론 포로(18-21)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스라엘 역시 당시에는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남유다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면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주변 강대국에 의지했습니다.
애굽, 바벨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북이스라엘 멸망 후 150년이 지난 시점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살라버렸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파괴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유다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을 립나로 데리고 가서 처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3차 바벨론 포로로서 사로잡은 유다 사람들을 바벨론의 각처로 끌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다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인도해주신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었습니다.
이 심판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어떠했을까요? 사
람의 심정으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비통하셨을까요!
* 유다 지도자 그달리야(22-26)
이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 22-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은 점령지를 본국에서 관리나 자국민을 보내서 직접 통치한 것이 아니라, 점령지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자치제를 실시해서 세금과 조공을 받아갔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운동을 도운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바벨론의 신용을 얻어 유다의 남은 자를 관할하는 지도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달리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 따라 바벨론을 섬기는 길만이 살 길임을 굳게 믿고 있었고, 이러한 충고를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해주었는데, 이것이 바벨론의 신임을 받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그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그달리야를 몰아내려는 시도를 합니다.
주동자는 왕족인 이스마엘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당시에는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 피하여 있다가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유다를 그달리야가 통치하자,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그달리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마엘이 예루살렘과 성전의 철저한 파괴와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어떤 행동을 했어야 할까요? 물론 그가 유다를 다시 세우려는 애국심에서 이러한 시도를 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국심으로 유다를 다시 세우려 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진정으로 유다를 다시 세우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본문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행동을 했다고 증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기록한 본문 어디에도 그의 신앙심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몰두한 사람은 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권력을 취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을 향하신 심판은 엄중했습니다.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군사들에 의해 죽어갔고, 타국에 강제로 이주되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파괴 속에서 유다의 역사는 결국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비참한 최후를 마감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끝자락에 묻어둔 소망의 씨가 싹을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열왕기하를 비롯한 성경은 단순히 역사적 자료를 정리, 나열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절망의 나락의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 여호야긴의 석방(25:27~30)
본문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25년, 2차 포로가 된 지 37년이 되는 BC 561년 바벨론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즉위 원년에 대사면령에 의해 여호야긴은 옥에서 풀려납니다. 그리고 ‘머리를 들게 하고’, ‘좋게 말하고’, ‘지위를 높이고’,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왕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고’, 그가 쓸 것이 ‘종신 끊이지 않게 하였습니다“(27-30). 이것은 그가 유다의 왕으로 복권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해서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 어느 시점에는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이 지난 후 바사왕 고레스의 명에 의해 이스라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절망에 빠트렸지만, 이스라엘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절망의 나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깨어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누적되었고, 하나님의 때가 되자 이들의 희망은 현실에서 실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보다는 기독교가 타락했다고 지탄받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위한 도구로 택하신 존재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역시 내가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즉 아무리 우리의 주변 상황이 암울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이러한 바른 삶이 누적되어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결실이 맺어질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오늘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때는 겉으로는 전혀 희망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점차 음지에서 활약했던 인물들로 인해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니엘과 같은 대 인물이 나와 절망적인 분위기는 급히 반전되어 마침내 여호야긴이 비록 포로 신세였지만 상당한 지위를 회복함으로 민족 회복의 희망도 구체화됩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절망 중에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 빠져나오지 못할 터널은 없습니다. 터널을 통과하면 실제로는 산을 넘은 것입니다. 그처럼 절망은 언젠가는 끝나고 소망의 새 아침이 다가옵니다. 큰일을 이루려면 절망적인 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더욱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는 것이 진짜 복된 믿음입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주신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망적인 상황도 꼭 필요한 상황이었음을 인정하고 절망까지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질 때 마음의 용량이 커지면서 내일의 축복을 담을 용량이 큰 그릇이 됩니다. 진주조개는 자기 몸을 파고들어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는 이물질을 품어서 진주로 빚어냅니다. 그처럼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진주와 같은 인생을 만들어내십시오.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희망이 넘치는 생각을 많이 하고 희망이 넘치는 언어를 많이 사용하십시오. 말은 씨가 되고 열매가 되고 결국 말한 대로 거두게 됩니다. 절망적인 말은 절망을 키우고 희망적인 말은 희망을 키웁니다. 그러므로 희망적인 말로 절망을 극복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어냄으로 축복의 대로를 닦으십시오. 말은 희망의 나라로 가는 큰 배의 키와 같고 희망의 트랙을 닦는 트랙터와 같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부족해도 인물이 될 수 있고 인물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준비하십시오. 미리 포기하지 마십시오. 인생 최대의 실수는 미리 포기하는 것이고 인생 최대의 실패는 미리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역전 인생이 가능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순간적인 절망은 있어도 지속적인 절망은 없습니다. 그처럼 늘 희망을 품고 삶 자체를 감사하면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유다 땅에 남은 자들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22절).
본 절 이후로부터는 느부사라단에 의해 유다 땅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앗수르와는 달리 바벨론은 정복지에 자국민의 이민정책을 펴지 않고 그 현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자치제를 실시해 세금과 조공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명문 출신인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우고 새로운 형태의 행정을 유다에 도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처사에 대해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불만을 품어 그달리야를 몰아내고 다른 유다인으로 총독을 삼기 위한 시도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유다에 계속 남아 있던 백성들은 어떤 특정한 기술도 없고 바벨론에 전혀 유익하지 않다고 판명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외에도 상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유다 각지에 숨어 있던 사람들로서 예레미야와 바룩, 그리고 몇몇 왕족이 있었습니다. <그달리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 따라 바벨론을 섬기는 길만이 살 길임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러한 충고를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도 보호해주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실시한 정책은 남아 있는 유다인들의 감정과 정서를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는 온건한 방식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바로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로 총독을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달리야의 조부인 사반은 서기관 출신으로 요시야 왕 때에 큰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며 그의 부친 아히감도 왕의 사절단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상당한 명문가 출신으로 유다 백성들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러한 사람을 총독으로 내세워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회유했던 것입니다. 그달리야도 그러한 바벨론의 유화정책에 순응하여 그 땅 백성들을 잘 화합시켜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후환이 두려워 국수주의자들은 암몬으로, 그리고 또 다른 무리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다 신명기에서 예언한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언한 말씀이 성취된
<그달리야>의 할아버지 <사반>에 대해 22:3절과 예레미야 26:24을 참고해 소개해보십시오.
당시 식민지를 관리하는 바벨론의 정책에 대해 당신의 견해를 간략히 적어보십시오.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의 수를 예레미야 52:28-30을 참고하여 확정해보십시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끝없는 긍휼의 손길로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회복과 새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평생에 그 선하신 여정 가운데 동참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게 하시고,
날마다 동행하시고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굳게 붙드는 믿음의 용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위에 기름 부어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전능자의 그늘아래 늘 겸손과 순종으로 거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