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을 보면 ‘박스컵’이 생각납니다
독일에서 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태극전사들을 볼 때마다, 박정희 유신독재시절의 선수들과 비교가 되면서 20대 시절의 추억들이 시나브로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박정희의 무력통치시절이 그립다는 게 아니라, 70년대에 축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친구들과 이런저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일인독재 체제’로 가기 위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박스컵’(박정희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에 무료로 입장, 벤치(감독 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던 적이 있습니다. 축구에는 무지렁이라서 그런지 관중석에서 보는 것보다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래도 조카에게 “TV에서 멋있게 나오는 삼촌을 봤다”라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은 나쁘지 않더라고요.
민주와 인권을 말살한 유신독재의 칼날이 시퍼렇던 70년대에, 저 같은 서민이 어떻게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선수를 지낸 친구와 선배가 있다는 자체가 특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벤치에서 경기를 관람한 저를 부러워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자랑스럽지도 못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온갖 비리와 부정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유신독재시절의 단면을 경험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박정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휘하의 ‘양지팀’이 국민의 지탄을 받으며 1970년 해체되자 이듬해인 71년 대통령 당선과 함께 장기집권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박스컵’을 개최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박스컵’을 세계대회라고 홍보했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지요.
69년 가을 3선 개헌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박정희는 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농, 어촌에는 막걸리와 밀가루를 도시에는 돈 봉투를, 군(軍)부대에서는 공개투표를 자행하고도 겨우 승리하자 72년 유신을 선포했는데 ‘박스컵’ 역시 유신독재를 홍보하기 위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밀가루 대통령’과 ‘체육관 대통령’이라는 말도 그때 생겨났지요.
축구선수 친구가 여럿인 저도 국제대회라고는, ‘메르데카컵’과 ‘킹스컵’을 귀동냥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고, 한·일전 라디오중계가 고작이었던 71년 박정희는 우민화 정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박스컵’을 개최하는 것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했습니다. 반면 ‘박임금님 사발 따먹기 대회’라는 풍자는, 국민의 혈세를 헛되이 쓰고 허풍을 떨며 ‘박스컵’을 개최하는 독재자 박정희에게 보내는 민중의 원망이자 야유였다고 하겠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있던 저는 임기 4년의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개최하는 축구대회 명칭에 대통령 이름을 넣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군주국가인 태국의 ‘킹스컵’과 달리 박정희가 대통령에 낙선하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72년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을 선포하더군요.
아무리 정권을 홍보하고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박스컵’이라고 하지만 비용을 적절히 사용하고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면 훗날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국민을 속이고 우롱했던 것입니다.
국제대회라는 명칭과 어울리지 않게 버마,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 팀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6-8개 팀이 참가해오다 박정희가 죽던 해인 79년에는 한국의 화랑, 충무팀 포함 10개 팀이 참가했습니다. 그 후 ‘대통령배’와 ‘코리아컵’으로 이어져 오다 1997년을 마지막으로 개최되지 않고 있지요. 참고로 한국이 국제대회인 ‘박스컵’ 최다 우승국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지요.
1달러도 구경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박정희는 참가하는 팀의 경비제공은 물론 참가사례금까지 지급했습니다. 특히 체코와 이집트, 브라질 등의 소도시 클럽팀을 모셔?다 국가대표팀이라며 국민을 속였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당시의 홍보만 믿고 박정희를 영웅시하는 분들이 지금도 상당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주최국인 한국이 화랑, 충무, 청룡 등의 이름으로 2팀이 출전하여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으니까요.
76년으로 기억합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무승부로 끝나는 바람에 공동우승을 하게 되었는데 나라에 큰 경사라도 난 것처럼 시가행진을 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기도 했습니다. 알량한 애국심을 북돋워주는 방식의 일종의 세뇌였던 것입니다.
당시 군사 유신독재의 세뇌공작은 계층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빨간색만 봐도 악다구니를 쓰는 먹물들과 냉전 수구세력들의 광기가 유신독재의 세뇌공작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칭 애국자이고 자유 민주세력이라고 하는 그들이 21세기 디지털 정보화 시대의 동반자인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지 않는 미국과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마음을 하나로 뭉쳐도 어려운 이때 태극전사들의 빨간 유니폼을 북한의 인공기에 비약하고 김일성을 상징한다며 억지를 부리는 가하면 그에 부화뇌동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찌 마음이 펀하겠습니까.
추억여행을 하다가도, 미친 황소는 도살장으로,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속언이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첫댓글 시가행진 모습은 그리 낮설지았답니다......종아니님의 추억여행속에 꼽사리끼어 저도 훵하니 다녀왔습니다^^*
하긴 그때 박스컵이 무슨엄청난 국제대회인줄 알았습니다..웃기는 일이었습니다.
참 재미있는내용이네요 이런일이 있었다니 저는 시골에서 살아서 박스컵에서 브라질과 공동우승했다는 내용을 여기서 처음 보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 장교였던 다카키마사오가 개최하는 '박스컵'에 일본이 참가하지 않은 걸 보면 일본이 박정희를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