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고쟁이
전영순
남촌에서 불어온 산들바람은 봄결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내 가슴에 살포시 안기
는가 싶더니, 감색 속치마를 휘감으며 살그머니 페티코트에 머물다 휭 하니 사라진다.
알싸한 봄바람 속에 동화속의 이야기 같은 할머니 속옷에 대한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피
어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아마도 할머니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밭고랑같이 반듯하게
가르마를 곱게 타시고 기뻐했을 것이다. 유년의 기억을 더듬더듬 짚어보니, 발끝을 살
짝 덮은 옥빛치마 속에 감추어진 헐렁한 속옷이 떠오른다.
할머니가 동네 잔칫날에 가시는 날이면, 아침에 활짝 피었던 꽃이 힘없이 처져있는
무궁화나무 밑을 서성거리며 할머니의 속옷에 숨겨울 먹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
앞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내가 지칠 때쯤이면 기와지붕의 그림자가 이미 마당에 길게 들
어 누어있었다. 지붕의 그림자만큼이나 목을 길게 늘어뜨려 할머니가 오시는 길을 뚫어
지게 쳐다보니, 저 멀리서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할머니가 오신다. 할머니는 손을 흔드
시며 가까이 다가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어루만진다. 나는 폴짝폴짝 할머니 손을 잡
고 대청마루에 걸터앉는다. 할머니는 맨 먼저 코 달린 버선뒤꿈치를 잡아당겨 벗어 놓
으시고 뒤 돌아앉아 치마를 주섬주섬 걷어 올리신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잔칫
상 차리듯, 온갖 맛있는 음식과 과일을 마루위에 맛깔스럽게도 차려놓으신다. 어린 나
이에 할머니가 뒤 돌아앉아 치마를 걷어 올리시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온갖 맛있는
것들이 나오는 줄만 알았다.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할머니의 머리맡에는 뇌신(두통약)이 봉지
봉지마다 가득했고, 그것은 할머니의 만병통치 약이였다. 그리고 머리에는 항상 분신인
양 당목수건을 쓰고 계셨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모습이여서 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랫목에 누우셔서 머리가 욱신욱신 쑤시고, 팔 다리가 저린
다며 전신을 자근자근 밟아 달라 하셨다. 내가 벽을 의지해서 밟으면 “아~시원하다”
하시며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신다. 내 발은 할머니의 아픔을 해소하는 마약이었나 보다.
할머니의 앙상히 드러난 뼈들이 내 발아래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난 친구들과 바깥에 나가 뛰어 놀고 싶었지만 두 사람사이에 묵계(默契)가 있었기에 꾹
참았다. 쨍그랑 쨍그랑 엿장수 가위질소리만 나면 달콤한 엿가락이 내입을 즐겁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싫다고 꽁무니를 빼면 어느새 고물장사가 가지고 다니는 꽃신이
내 손에 쥐어지고 그날은 꼬박 할머니 곁에서 안마사가 되어야했다.
엿장수가 쨍그랑거릴 때도, 목청 큰 아저씨 우렁차게 '아이스 깨기' 부르짖을 때도,
보따리 아지매 꼬까옷 이고 오실 때도 할머니는 뒤돌아 앉아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셨
다. 고쟁이에 손만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내 것이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산후병과 맘고생으로 평생을 앓고 계셨나보다. 어느 날 다락
방을 뒤지는데 군청색 수첩이 눈에 띄어 넘겨보니 공무원증에 할아버지 이름이 적혀있
었다. 면장이었던 할아버지는 막내삼촌이 임신 3개월이었을 때 월북하셨다 한다. 막내
삼촌도 할아버지 얼굴을 모르는데 손녀인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할머니는 빨갱이 서방
뒀다고 소문날까봐, 할아버지를 애틋하게 기다리거나, 원망하는 등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으셨다.
평생을 말썽 많은 5형제를 키우면서도 그늘 한점 없이 곱디곱게 늙으셨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삶의 힘겨움이 다른 여인들의 고쟁이 속주머니보다 더
깊게 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의 고쟁이 속
주머니를 보니 큼직막히 무릎 가까이까지 탄탄하게 꿰매어져 있었다. 할머니를 떠나보
내는 슬픔보다 고쟁이 속주머니가 두 번 다시 열려지지 않을 것이 더 슬펐다.
나도 오랜만에 한복을 입고 뽐낼 일이 생겼다. 외국생활이 길었던 우리 가족은 파티
복으로 한복을 언제나 단정히 준비해 두었다. 짙은 장밋빛 치마에 늦가을 강가에 드리
워진 옥빛 같은 운치 있는 저고리를 입고 하얀색 고쟁이로 뽀얀 다리를 감추고 폼을 잡
아본다. 무도회 같은 화려한 파티라서 그런지 요리 또한 다양했다 맛있는 요리를 접하
는 순간,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어떻게 이 맛있는 요리 좀 싸가지고 갈
수 없나’하며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어릴 적 할머니의 고쟁이 속에 숨겨온 손
때 묻은 음식 맛을 생각한다면 체면 불구하고 챙겨야 할 텐데, 선뜻 못하는 것을 보면
할머니가 손주 생각했던 마음보다 자식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훨씬 못 미치는가보다.
나도 할머니처럼 뒤돌아서서 치마를 걷어 올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고쟁이는 어릴 적 할머니 고쟁이보다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곱게 빗
어 넘긴 머리위에 당목수건을 쓰시고 뒤돌아 앉아 고쟁이 속에 손을 넣으시며 아직도 저
승에서 마술을 부리시고 계실까.
2005/21집
첫댓글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삶의 힘겨움이 다른 여인들의 고쟁이 속주머니보다 더
깊게 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의 고쟁이 속
주머니를 보니 큼직막히 무릎 가까이까지 탄탄하게 꿰매어져 있었다. 할머니를 떠나보
내는 슬픔보다 고쟁이 속주머니가 두 번 다시 열려지지 않을 것이 더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