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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민수기의 말씀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우리의 자랑>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첫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선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보다 의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비록 죄가 없다할지라도,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받고, 곡해 받고, 누명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를 ‘위하여’ 자신이 뒤집어써 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되기를 ‘위하여 자신을 건네 주는 일’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남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이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당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의미를 제 자신이 덧붙여 본다면, ‘십자가’는 ‘벌어지는 일을 수락하는 일’이라고 여겨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는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아니, 만들지 않은 일들이 마구 벌어져 다그쳐옵니다.
오히려 만들고 조작하고 계획했던 일들은 무색하리만큼 우리를 비켜갑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이제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끌어안고 응답하는 일이 제게는 ‘십자가’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58장 7절에 나오는 ‘성소 식별’의 기준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고,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삶을 전환시키는 혁명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하여,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4-15)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이것이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며 묵상하고 제가 여러분과 나누려는 주제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은 어제의 일이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즘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한 교구 신부님과 프란치스칸 영성을 공부하는데, 어제는 프란치스코에 대한 그 신부님의 감탄에 저도 같이 감탄을 연발하면서 뭔가 허무함이랄까 공허함이랄까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대단한데 나는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저는 이렇게 저를 위안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한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비록 앞줄에서 프란치스코를 따르진 못할지라도 따르고 있다.'
사실 이렇게라도 프란치스코를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적어도 악마를 따르지 않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참 묘하다고 할까 교묘하다고 할까, 저의 겸손이기도 하지만 합리화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어떤 때는 겸손으로 기울다가 어떤 때는 합리화로 기운다는 말이고, 그래서 이런 것이 인간이지, 하다가도 이래선 안 되지, 하곤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높이 찬양하면서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길은 주님만 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따라가긴 하지만 따랄 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이런 식입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승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것이 패배이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헛수고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명백한 승리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 죽음을 이깁니까?
제 생각에 치달으면 이깁니다.
죽음 끝까지 가면 이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깁니다.
둘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능력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은 사랑으로만 견딜 수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참사랑이고, 참사랑이라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
(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을 봐야 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라는 화두로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없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네 인간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나할 것 없이 각자 등에는 저마다의 십자가 하나씩 짊어지고 때로 헐떡이며, 때로 용기를 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돌아보니 행복과 불행이 끝도 없이 교차해온 나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던 출애굽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즉시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척박한 사막과 기약 없는 대규모 공동체 생활, 배고픔과 갈증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민수 21,5)
보십시오.
우리네 지상 인생 여정은 그 누구든 어쩔 수 없습니다.
결핍과 고통 투성이입니다.
근원적 갈증과 배고픔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너그러운 마음이요, 고개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대함입니다.
가끔 기가 막힌 이웃을 만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인 인생이 다 있는지?'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 앞에 뭐라 위로의 말을 드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님께 매달리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긴 분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요 우리를 축복하는 하느님이라 믿었는데,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요, 십자가 투성이인 우리네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게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지속적인 현세 축복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추종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고난의 인간, 배척당하는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타고 나셨음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운명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때로 배척을 받고,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부활을 절대로 외쳐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시련은 거부하고 달콤함과 안락함만을 보장하는 교회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며 고통과 십자가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 앞에서 첫 번째로 할 일은 ‘회개’입니다
1)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보지만, 신앙인들은 십자가에서 부활, 생명, 구원을 봅니다.
믿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고, ‘하느님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부활신앙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이고, 신앙의 핵심이고, 신앙의 목적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장애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준 다음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0-12)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고,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마지막 목적지는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도 없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십자가라는 물건을 경배하는 날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2)
하느님의 구원 방식에 대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방법에 대해서, “왜 ‘십자가를 통해서’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히브 2,14-15.17-18)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로마 5,8-10)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또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 ‘죽음’이라는 것을 정복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물리치셨다.' 라고 흔히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부활로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요한 10,14-15.18ㄱ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양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빼앗긴 일이 아니라, 내준 일입니다.
이 말씀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는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4)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야고 4,10)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 곧 진정한 ‘십자가 현양’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성 십자가 -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시편 78,7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선물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결코 잊지 말라는 화답송 후렴 말씀입니다.
오늘은 순교자 성월 9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8월 6일 주님 변모 축일 후 40일만에 맞이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바라볼 유일한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이겠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이 있습니다.
피정집 제의방에서 미사전례 입당전 절을 하려는데 십자가가 없어 당황했던 추억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어디에 절할 수 있겠는지요?
우주 인류 역사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주와 인류는 어둠의 블랙홀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우주와 인류의 빛이자 중심이요 의미가 되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기도 역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은혜를 요약합니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이미 성 십자가의 은총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텅빈 허무를 사랑의 충만으로 바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이,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이 되는 성 십자가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 복음의 예수님의 고백은 당신의 성 십자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되었으니,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표지가 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성 십자가의 은총만이 우리를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가장 짧고 중요한 기도 역시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참 자랑스런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바쳐온 참 좋은 기도, 성호경인지요!
알게 모르게 십자가의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는, 그리하여 각자 고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역사도 참 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기념성당을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9월 14일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함으로 시작된 축일입니다.
후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합니다만, 62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수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됩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잡게 됩니다.
성주간 성 금요일 수난 예식중 십자가 경배시 노래했던 내용들은 얼마나 은혜로웠던지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주의 십자가를 경배하오며 주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십자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아무 숲도 이런 잎과 이런 꽃을 못내리라.”
이 모두를 요약한,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은혜를 노래한 오늘 감사송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주님의 성 십자가는 영적승리의 표징도 됩니다.
잃었던 에덴동산을 찾아주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생명나무에서 생명나무 열매인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고맙습니다.
축일의 유래는 제1독서 민수기에서 보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유랑시 모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바로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불평으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한 모세의 간청에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은 모세가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가 되고 구리뱀은 성 십자가의 예표가 됩니다.
말 그대로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을 상징하는 주님의 성 십자가이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친히 확인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고 바라볼 사랑의 대상은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인 파스카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샤워기의 밸브가 헛돌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밸브에 틈이 벌어졌습니다.
틈이 벌어졌으니 조이는 힘이 약해졌고, 그래서 헛돌았습니다.
더 벌어지기 전에 새로운 밸브를 구매해서 교체했습니다.
새롭게 밸브를 교체하니 잘 열리고 잠겼습니다.
요즘은 자동차도 자동차의 상태를 화면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엔진오일의 교체 시기도 알려주고, 타이어 압력 상태도 알려주고, 자동차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1년에 한 번은 ‘건강검진’을 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위내시경과 장내시경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모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미국에 와서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보려고 합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혹시 모를 몸의 이상을 점검하는 겁니다.
이상이 있다면 더 나빠지기 전에 조처하는 겁니다.
이상이 없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 일 년을 기다리는 겁니다.
신앙인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지, 선행은 하고 있는지, 영적 독서는 하고 있는지, 말씀은 가까이하고 있는지, 미사 참례는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40일 전에 있었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과 함께 묵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빛났고, 예수님의 옷도 하얗게 빛났습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여기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주님, 다른 두 개는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만들겠습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영광과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람의 일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 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기준으로 들어 올리려는 삶>
아는 지인들과 함께 어느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낯선 자매님 한 분이 지인 중의 한 분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십니다.
지인은 갑작스러운 인사에 깜짝 놀란 뒤에, 잠시 밖으로 나가서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오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본당 신자인데요. 되게 잘 살아요. 그런데 요즘 냉담 중이세요.”
혼란이 왔습니다.
‘냉담 중인데 왜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지인의 기준은 부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자매님은 큰 부자인가 봅니다.
건물도 몇 채 가지고 있고, 지금 하는 사업도 잘 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면 잘 사는 것일까요?
현재 냉담 중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형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아주 안 좋아서 이혼을 이야기하고 있고, 자녀들도 각종 문제를 일으켜서 복잡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부자라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되게 잘 살아요.”
돈, 명예, 권력이 잘 사는 기준이 되는 세상입니다.
돈, 명예, 권력이 세상의 꼭대기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들을 아무리 높여도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들어 올려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신 것은 우리처럼 자기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들어 올리려는 삶만 산다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기준, 즉 사랑의 기준으로 들어 올리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 희생, 봉사, 나눔 등으로만 진정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모습을 가지고서 잘 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있는 모든 이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저 사람, 되게 잘 살아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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