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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0여 년 전, 그 해엔 유달리도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이었습니다.
당시 제 나이 50대 초 중반, 출가 전이었습니다.
그때 소승은 지리산에 올라 며칠 동안 머물면서 500 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던
특별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 이상 걸었을 게 틀림 없습니다.왜냐하면,소승은
때때로 무모할 정도로 미련했기 때문입니다.그 당시도 그랬습니다.
20여년 전의 일을 이처럼 뚜렷이 기억해낸다는 것은 통상적인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지난 일은 쉽게 잊는 버릇이 몸에 밴, 제가 20여년 전 일을
기억 해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습관의 노예이
기 때문입니다.(Der Mensch ist der Sklave der Gewohnheit.)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승이 그 때 일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인 즉, 소승이 지리산으로 떠난 날이, 소승의 속가 아들 놈이 군 입대를
위해, 논산 훈련소로 떠난, 바로 그 날이기 때문입니다.
꿈은 컸었지만,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살아온 저이기에,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어느덧 군대로 향하는 날을, 제 남은 인생을 설계하기 위한 특별한 날로 만들고
싶었고, 또 논산 훈련소로 향하는 아들 놈을 배웅도 해줄 겸, 소승도 같은 기차를
타고 서울역을 출발했던 것입니다.
아들은 육군 논산 훈련소로,
아비는 눈 덮힌 지리산으로....
전문적인 등산가이거나, 그렇진 않더라도 등산 애호가들이라면, 그까짓 지리산
등반 쯤이야 문제될 게 없겠지만,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면서도, 아직 높은 산에
오른 적이 없는 제가, 아무런 겨울 등산장비도 없이, 등산화만 신은 채로 겨울
지리산 행을 한다는 것은, 무모할 뿐 아니라, 위험한 짓이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식이 용감! 저는 최소한의 준비로 지리산 등반 준비를 마쳤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방수 장갑 한 켤레와 면장갑, 프로스펙스 방수 등산복 상하의,
그리고 눈 덮인 길에 대비한 선 글라스가 등반을 위한 준비의 전부였습니다.물론
겨울이니까 내복은 입고 갔습니다.
저는 아이의 논산 입대일이 가까이 오기 전,
체력단련을 위하여, 가끔 집중적으로 북한산을 올랐습니다.
서울 은평구 쪽에서 북한산을 오를 때의 최고 가파른 코스는
기차촌 뒤쪽으로부터 북한산을 오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처음부터 아주 가파르고,
가파른 길이 꽤 깁니다. 소승은 이 길을 지리산 등산길이라고 생각하고 약 1주일 동안
열심히 인수봉까지 가고 오고 했지요.왕복 하면 이 길도 상당히 먼 코스입니다.
서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이가 논산으로 향할 때, 소승은 지리산 청학동을 향했습
니다. 청학동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고, 험한
바윗 길을 더듬거리며 민박집을 찾았습니다.
겨우 청학동 꼭대기 민박집에 방 한칸을 7일 동안 있기로 예약을 하고,
늦은 저녁 밥을 먹고는 이내 잤습니다. 다음 날에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오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 듣기로는 천왕봉에 오르는 최단 코스는 중산리
코스라고 들었습니다. 최단 코스란 당연히 제일 가파른 길이라는 뜻이지요. 그
코스를 택하기 위해서는 청학동에서 진주로 가야 합니다. 그 날 밤을 청학동에서
자고, 다음 날 진주로 향했습니다.
청학동에서 하동, 하동에서 진주,진주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중산리까지 가야합니다.
지리산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영양보충을 해야겠기에, 진주 시장에 가서 돼지족
발을 샀습니다. 중산리 민밥집에 갔더니, 비수기라 그런지 모든 게 허술했습니다.
중산리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천왕봉은 다만 두렵기만 했습니다.
쏴 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먹 구름에 휩싸인 천왕봉은, 보이는가
하면, 이내 안 보이고...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민박집은 너무 엉성해서 몹시 추웠지만, 그냥 견디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틑날 아침 일어나서 꽁꽁 언 돼지족발을
입으로 녹여 먹은 후,드디어 지리산의 영봉, 천왕봉을 향해 민박집을 나섰습니다.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 송이 하나가 엄지 손가락 마디 만큼이나 컸습
니다. 민박집 주인은 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지만, 소승은 마치 산에 홀리기라도 한듯
산으로 향했습니다. 산 길로 접어들기 전에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그 옆으로 몇 개의
등산장비 가게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은, 폭설에도 불구하고 제가 막 산길로 들어서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습니다. 손에 제설도구를 들고 눈을 치우던 한 40대 중반의 남자였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이 눈 속에 어디 가십니까?”
그 남자는 “산사람의 집”이라는 가게의 주인인데, 마침 눈을 치우러 나왔다가, 엉성한
차림으로 산을 오르려는 저를 보고, 어이 없다는 듯 물었습니다.
“아저씨! 하필 이런 날에, 그런 허술한 차림으로 산에 올라 갑니까?
눈 속에 파묻힐 생각입니까?”
그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자꾸 산만 바라보는 내가 산행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자,
그는 또 말했습니다.
“그럼 이왕 나선 길이니, 올라가십시요.
그러나 조금 올라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되돌아 오셔야 합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산행 승락을 얻은 저는,보무도 당당히 쏟아지는 눈 속을 뚫고
대망의 천왕봉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폭설이었습니다.
몇 발자국 가서는 미끌어지고...
몇 번인가 되돌아 갈까를 생각했지만,
도저히 제 자존심이 허락치를 않았습니다.
꿈 많던 청년 시절, 목숨을 걸고 수백 미터 탄광 갱도를 뚫었던, 살인적인 중노동도
거뜬히 견뎌낸 내가 이까짓 눈 오는 산길에 겁을 먹어서야 되겠는가!
넘어지고 미끌어지고.....수 없이 딩굴기도 하면서
오르고 또 올랐지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만은...라고 중얼거리면서.
군데 군데 있는 작은 무덤들...
“아무개와 아무개, 산이 좋아 여기 잠들다....!”
산에 오르다 영원히 산 속으로 간,
산 사람들의 이름 없는 무덤들.....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른 오르막 길의 연속이
라는 생각입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어서 명쾌한 기억이 없지만, 오
르는 도중 평지를 걸었던 기억은 전혀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천왕봉에서 가까운 법기봉 법기사를 지났을 때는, 마치
천왕봉에 다 오른 것처럼 용기백배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신심 있는
불자가 아니었기에, 법기사 부처님은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천왕봉 오르는 마지막 난 코스와 마주 합니다. 길은 아예 없습니다.
온통 눈 뿐입니다. 천왕봉이 가까워질수록 경사는 점점 더 가파릅니다.
천왕봉 오르는 급경사 바로 밑에 섰습니다.
엄청 가파른 길에 길다란 밧줄만이 걸려 있습니다.
겨우 흔적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바로 조금 전 20대 초반의 청년들 셋이 중산리 쪽으로 내려가느라고
그 밧줄을 탔었기 때문에 밧줄이 눈에 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승 바로
곁을 지나면서 소리쳤습니다.
“아저씨, 힘내세요!”
그때 그들의 젊음이 얼마나 황홀했던가!
콧 등이 찡하면서, 진한 감동이 전신을 타고
흘렀습니다.
아, 젊음은 아름다워라...젊음은 아름다워라..!
Schoen ist die Jugend....!
고맙다, 고맙다, 젊은이들아!
Danke, Danke, Ich danke Ihnen sehr!
필사의 힘으로 밧줄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 당시, 그 젊은이들의 격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곳에 이르렀을 때에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오르면, 천왕봉에 오릅니다.
저 윗 쪽에 천왕봉으로 오르는 한 사람의 모습이 언뜻 보입니다.
그 사람은 중산리 코스를 통해 천왕봉으로 오르지 않고,
장터목 산장 길을 지나 천왕봉에 오른 사람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번개 같이 머리를 스칩니다.
“저기 보이는 저 사람을 꼭 따라잡아야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리산 등반 중에 제가 첫 번째로
만난 위난에서 그가 저를 구할 줄이야... 참으로 인연은
오묘한 것...
드디어 사나운 바람 맹렬히 휘몰아치는 천왕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 바위에서 읽은 글,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남 명 조 식 선생의 글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강풍이 심한지 정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잠시 서 있다가 바로 돌아섰습니다.
내려갈 때는 올라오던 중산리 코스가 아니라,
장터목 산장 쪽으로 방향을 잡고,아까 꼭 따라
잡으리라던 사람을 찾아 마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 없이 달려가자 저 앞에서
그 사람이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천왕봉에 오른 사람은 그때까지 그 사람과 나, 그리고 조금 전에 소승을
격려하면서 중산리 쪽으로 하산하던, 10대 말, 20대 초반의 씩씩한 청년 세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전 날밤을 장터목 산장에서 자고, 천왕봉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 날,중산리 코스로 천왕봉을 오른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저는 앞서가던 그 사람을 따라 잡은 후, 오늘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더니, 세석
산장에서 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날 안으로 청학동까지 가야 하는 먼 길이었
기에, 그 사람을 지나쳐서 마구 뛰다시피 하며 앞으로 향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시피 가고 있던 저는 그만 제 자리에 서서 꼼짝도 못할 상황
에 직면 했습니다. 폭설이 내리고 심한 강풍에 길이 아예 사라진 것입니다. 몸에는
땀이 났지만, 손발은 얼어서 감각이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길을 잃고
다른 곳으로 잘못 들어간다면, 만사 끝나는거지요.
저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제가 지나쳐 온 그 사람(20대 말의 청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청년은 지리산에 여러 번 온 경헙이 있고,
만약 다치기라도 한다면, 다친 자리에서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다고 합니다.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그 청년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약 10여분 동안 여기 저기를
주의깊게 살피더니, “이것이 바른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리하여 소승은 그와 함
께 장터목 산장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손이 곱아 등산화 끈도 못푸는 것을 그 청년
이 모두 도와주었습니다.
장터목 산장에서 손발을 녹인 후, 곧 세석 산장으로 향했습니다. 다행이 세석 산장까지
는 길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석산장(세석고원 산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였습니다. 그 청년은 세석 산장에서 자고, 이튿날 하산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울산
청년이었습니다.그는 여러 번 저를 위기에서 구출해 주었습니다.
시간상으로는 제가 그날 안으로 세석 산장에서 청학동까지 가기는 너무 먼 거리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리를 모두 알고 있었고, 수첩에 적어 놓았었지만, 그 수첩을 잃어버려서
아쉽습니다. 저는 세석고원에서 잠잘 준비가 안 되었었기에, 그 청년에게 청학동 가서 함께
자자고 청했습니다.
청학동을 향해 얼마쯤 갔을 때,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에겐 여러 개의 플랫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추운 날씨라 금새 금새 밧데리가 닳았습니다. 이젠 흰 눈, 하늘의 별빛 만이 길 안내자입니다.
그날 밤! 얼마나 많이 미끌어지고 넘어졌는지!
사실 말 그대로, 한 발짝 옮길 때마다, 한 번씩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습니다.
제가 평생 넘어져야 할 걸 그때 모두 실행했기에
요사이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미리 조심을 많이 하고 삽니다.
그날 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는데, 달 빛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아마 그믐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최 현대사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아픔과 서러움의 땅, 지이산(智異山)!
형제가 형제를 죽여야 했든 동족상잔의 땅, 아 비극의 땅 지이산이여!
그 때 죽어간 빨치산도, 그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사람들도, 모두 내 형제가 아니었던가!
넘어지고, 엎어지고, 미끄러지며 걷는 소승의 귀에는 지리산에서 서럽게 죽어간
동포들의 통곡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물론 함께 가는 청년이 어찌
제 마음을 알았겠습니까...
환청으로 들리는 총성 소리가 탕! 탕!하며, 계속 귓전을 맴도는 듯 했습니다.
심야의 지리산 골짜기에서 짙게 느꼈던 그 밤의 감회 어찌 잊을 수 있으리...!
드디어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삼신봉에 도달했습니다.
아직도 청학동까지는 많이 가야 합니다.
청학동 민박집에 들어가니 새벽 2시였습니다. 그때까지 주인은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저를 보자 반색을 하며 맞아들였습니다.
주인이 내 놓은 지리산 둥글래 차, 한 주전자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틑 날 그 청년을 보낸 저는 그날부터
매일 지리산 능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청학동에서 삼신봉, 삼신봉에서 세석 고원, 세석 고원에서 장터목 산장
장터목에서 통천문을 거쳐 천왕봉...다시 청학동으로...피아골로, 노고단으로
매일 매일을 이렇게 마구 걷기만 했습니다.
매일 제가 걸은 길을 수첩에 기록했었는데, 어떤 날은 100 킬로가
넘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피아골 산장에 갔더니, 산장지기가 하는 말이,
“아저씨 용기 대단하시네요. 나는 지리산 골짜기들을 손바닥 보듯 환히
알고 있지만, 절대로 혼자서는 지리산을 타지 않습니다. 혼자 가면 위험
하니까요...”
저는 청학동에 꼬박 7일 머물렀고, 당시 제가 걸은 지리산 등반길은
모두 500 킬로미터가 훨씬 넘습니다.
아슬 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한 경우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정말 사투를 벌여 그 위기를 탈출했습니다.
지리산 등반 중 최대의 위기는, 마지막으로 택한
삼신봉 - 쌍계사 길 12 킬로미터에서 였습니다.
그날 아침 청학동 민박집을 떠날 때,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가져갔던, 방수 장갑이 결국 저를 동사(凍死)에서 구해주었
습니다!
그 장감을 볼 때마다 지리산을 떠 올립니다.
이 방수장갑이 저를 살린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
소승은 가끔 세계적인 등산가들이 하는 말 중,
다음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몇 미터 히말라야 봉을 드디어 정복하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만 산의 품에 안길 뿐입니다!
개심정사 기산지은 합장
첫댓글 항상 배움의 깨달음을 주는 철학적인 선배님들의 글!
육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땀내음이 든 스님의 글을 대하니 마치 제가 쓴 글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스님의 이 회고록은 제가 등산전문가가 되기 전에 저질렀던 여러가지 무모한 산행의 한 편과 똑같아 요샛말로 '극공감'하며 웃었습니다.
저에겐 무지 어려운 Schoen ist die Jugend....! 란 멋진 독일어... 뇌에 입력을 하려해도 미련해선지 거부를 합니다그려... -,.-
아뭏튼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
泰山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자연을 신격화하는 동양인이면서도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양사언의 명시!
스님이 말씀하셨듯, 인간 혹은 자연을 신이 창조한 피조물로 밖에 안여기는 서양인들은 자연을 신성시하는 동양인들의 사고방식을 비웃지만 이해는 못합니다.
그래서 알피니즘이 나온 것이고, 우리가 사는 지구뿐만 아니라 머나먼 우주까지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지요.
그런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우리 인류가 神까지 무시하며 잘 살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나, 소중한 지구환경까지 망치는 산업문명을 이룬 것은 부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 참, 한가지 빠뜨릴뻔 했습니다.
지리산만 가면 왜 하필 스님처럼 꼭 피비린내 나는 파르티잔이 생각나야 하는건지... -,.-
저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기 전에 이병주의 '지리산'을 먼저 읽어선지 지리산에 대해선 남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주가 배경인 소설 '지리산'은, 벌교가 배경인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리산에 관한한 태백산맥보다는 지리산이 훨씬 문학성이 높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모르긴해도 단현님은 완전무장으로 지리산엔 한 열번 이상 올랐지 싶습니다.
그렇지요, 단현 선배님? ^^
소승에게 늘 관심을 보여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병주의 지리산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소승도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스님
_()_
늘 애정을 가지고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 하십시요 ... 저가 아는 지식으로는 그렇게 산을 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무엇인가 절박 하셨겠죠..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이 삶을 느끼 셨 겠지요 .. 성불 하십시요...
아마 절박한 무엇인가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환갑을 넘긴 나이에 출가했을 지도
모르겠군요.
지금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승이 바라는 바는, 이 같은 소승의 마음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기를 기원하면서 삽니다.
@기산스님 함 뵙고 시~~~포요.^^
@미운오리 대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소승을 한 번 보고 싶다고요?
댓글의 모양을 보니, 젊은 분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노인을
싫어 하는데, 늙은 소승을 만났으면 좋겠다니, 고맙습니다.
소승의 전화번호를 남깁니다.
010- 5934 - 8867 입니다.
만날 인연이 있으면, 만나게 되겠지요.
늘 평안하시기를, 제불보살 화엄성중께
빕니다.
힌두교에서는 세상일을 다하고 숲으로 들어가 도를 닦고 도가 익으면 다시 환속 하여 그들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구성 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남방에는 정년 퇴직후 스님의 길을 가시는 분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일을 알고 출가 하면 더빨리 마음의 집착을 버릴 수 있겠지요 .. 반대일 수도 있지만 ... 성불 하십시요
라빅 님!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합니다. 소승은 가끔
제 자신을, 빈 수레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
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수행자는 법담 아니면, 침묵
이라고 하는데, 소승은 늘 안 해도 될 말을 하니까 말
입니다. 소승이 님보다 앞선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정말 양심적으로 말씀
드리지만, 제가 님보다 나은 점은 이 나이 밖엔 없습
니다. 제게 보내신 사색의 글은 앞으로 잘 읽어보겠
습니다. 좀 대답이 늦더라도 용서하십시요.
항상 몸 조심하시기를 빕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게
뭐 있겠습니까? Es ist nicht Neues unter der Sonne.
@기산스님 감사 합니다.
물론 저는 밖에서 잠자고 맛있는 거 해먹고 술 실컷 마셔도 자유로운 산이 좋아서 일찍 산을 다녔습니다.
등산캠핑의 원조비슷하지요.
아직도 신제품이 나오면 거의 구입할 정도로 등산장비 매니아를 자처합니다.
그러나 이 글을 보고 지리산 등반을 쉽게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스님 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문 등산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헤엄 못 치는 사람이 익사하지 않지만 잘 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물귀신이 되지요.
스님 역시 조금만 더 어려운 기상조건이었다면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지리산 혹은 한국의 겨우 2000m도 못 되는 산입니다.
피곤해서 내일 답글 올릴께요.
소승은 지리산을 오르기 전까지는 산에가면 늘 야호 하고
소리를 쳤었는데, 지리산 등반 이후로는 그런 습관이 많이
줄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불필요하게 큰 소리를 내는 것
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겸허는 인간 최대의 덕목이고 미덕이지만,
그 미덕은 세상에 존재하는 만상들에게 똑 같이
품어야 할 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에 오를 때,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겸허함을 간직
한다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산에 오른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