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벚나무

벚나무 / 김지명       봄에는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땅에는 노루귀 엘리지 처녀치마꽃 등이 봄을 알린다. 나무에도 산수유 생강나무 매화 등이 먼저 꽃을 피우고 벚나무는 꽃봉오리 잉태하여 산고를 겪으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햇살이 벚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앉아 몽우리를 어루만지며 봄을 전한다. 올해의 봄은 이상기온으로 초여름을 방불케 한다. 갑작스러운 날씨 탓에 벚꽃 몽우리가 가지 하단에서 상단으로 시차를 두고 맺혀야 하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은 기이한 계절이다. 가지 끝에서 둥치까지 크고 작은 꽃송이가 한꺼번에 자라고 핀다. 전래적으로 벚꽃은 먼저 맺은 꽃봉오리부터 순서에 의해 피고 지는데 올해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다.   벚꽃이 동시에 개화한다. 며칠 사이에 벚나무에서 꽃봉오리가 굵어지더니 어느 날 꽃이 보인다. 여느 해와 달리 꽃송이는 대단히 굵고 탐스럽게 뭉쳐져 피어있다. 벚나무 가지나 고목에서도 팝콘이 터지듯 동시다발로 꽃봉오리가 활짝 펼쳐졌다. 통상적으로 벚나무에서 꽃이 피고 지는 기간이 열흘에서 보름 정도 걸리지만, 올해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하듯이 벚꽃의 화려함이 열흘을 못 넘기고 고작 일주일 만에 떨어지니 참으로 아쉽다. 나는 백일홍처럼 오랫동안 피어있는 품종을 누군가에 의해 개량되기를 기대해 본다.   꽃도 순서에 의해 핀다. 한 뿌리에서 자란 식물이라도 여러 꽃이 한꺼번에 피는 것은 아니다. 형과 아우처럼 차례차례로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이순을 넘게 살아도 벚꽃봉오리가 한꺼번에 개화하여 동시에 지는 광경을 처음 본다. 벚꽃을 낮에 보고 밤에도 보지만, 비 오는 날에도 본다. 낮에는 하늘이 밝아 하얀 꽃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벚꽃은 치마를 활짝 벌려 속살을 환하게 더러 내놓고 바람이나 미물을 기다리고 있다. 꽃은 수정을 도와주려고 꿀주머니를 열어놓고 유인한다. 벚꽃 속으로 속살을 간질거리며 꿀을 찾아 날아든 벌이 암수 수술을 흥분시킨다. 벌 나비가 꽃의 향연에 찾아들어 꿀에 취해 즐겁게 춤추고 있다. 벚꽃은 낮에 보는 것보다 그믐날 밤에 만개한 꽃을 보면 더욱 두드러지게 보인다. 게다가 함박눈이 흩날리듯 하얀 꽃잎이 어둠 속에서 떨어질 때 그 신비로움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벚나무는 특성이 별다르다. 벚꽃은 엷은 분홍색이며 일부분은 동시에 피고 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파리는 며칠이 지나야 연두 색깔로 돋아나지만, 산벚나무는 이파리가 파릇파릇 돋아나는 동시에 하얀 꽃을 피운다. 나무의 종류는 산벚나무와 왕벚나무 개벚나무 등 수십 종이 넘는다. 벚나무는 꺾꽂이로 번식시키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겹 벚나무와 원예품종은 접붙이기로 번식한다. 요즘은 원예작물로 아름다운 겹벚꽃을 재배하여 판매하는 꽃집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벚나무 접붙이를 한 경험이 있어 잘 알고 있다. 그뿐만은 아니다. 조류도 벚나무 종묘에 일조한다. 육칠월에 버찌(체리)가 결실을 보이면 산새들의 먹이가 된다. 배설물로 나온 씨앗이 땅에 묻히면 새싹으로 돋아나 수년이 지나면 꽃을 피운다. 내가 사는 도시 인근 산에는 산벚나무가 흔하게 보인다. 봄이 익어갈 때 부산에서는 어느 산을 보더라도 군데군데 산벚나무에서 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어떤 꽃이라도 꽃말은 있다. 꽃의 특성에 따라 의미를 부여한 말이 있다. 과꽃은 추억 안개꽃은 약속 난초는 절개를 나타내듯 벚꽃은 순결이다. 벚꽃은 다섯 개의 꽃잎이 쟁반처럼 펼쳐져 원을 그리며 그 끝마다 톱니처럼 파여 있다. 한 송이에 네다섯 개의 꿀샘에서 꿀을 분비하여 벌 나비를 유인하고 있다. 꽃 속에는 한 개의 옹녀 같은 암술이 서른 개 이상이나 되는 수술과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꽃잎을 받치고 있는 꽃받침은 다섯 개가 엇갈려 겹쳐져 있다. 꽃잎이 떨어지면 남은 꽃대와 꽃받침은 빨간색으로 멀리서 보면 나무 전체가 붉게 보일 정도다. 천리향이나 라일락의 향기는 수 킬로미터까지 번져나가지만, 벚꽃은 그렇지 않다. 벚꽃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처럼 향기가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성이 다르다. 체질이 민감한 나는 향기가 있다고 고집하지만, 무딘 체질인 사람은 향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한다.   상춘객은 벚꽃을 찾는다. 진해는 벚꽃축제와 군항제가 동시에 열렸기에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나는 젊어서 직장생활에 매여 있어도 휴일에 아가씨와 손잡고 진해 벚꽃놀이를 즐겼다. 그 당시는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어떤 꽃이든 꽃 군락지만 있으면 찾아다녔다. 상춘객이 많으면 벚꽃이나 사람이나 같이 느껴졌다. 요즘은 거리에 흔하게 보이는 꽃이지만, 그 당시에 거리는 삭막하고 꽃을 가꾸는 군락지도 없었다. 그나마 진해는 가로수가 모두 벚나무라서 동시에 피는 꽃을 볼 수 있었다. 연인과 함께 보는 벚꽃은 지금 노부부가 보는 꽃과 느낌이 다르다. 축제장에 늦게 도착하여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둠이 밀려왔다. 어둠 속에서 떨어지는 벚꽃이 함박눈처럼 흩날리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벚꽃에 대한 환상적인 감동은 아직도 남아있다.   봄은 나를 꽃밭으로 불러낸다. 전국 길거리에는 벚나무가 우거져 터널을 이루고 있는 곳도 많지만, 화개장터라는 노래를 타고 유명해진 꽃길로 간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도로는 봄마다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좁은 도로 길섶에는 벚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도로를 덮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수십 년을 이어온 벚나무가 고목이 되어도 꽃으로 뒤덮인 터널은 여전하다. 벚꽃이 만개하였을 때 터널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진다. 한꺼번에 만개해 있는 기간은 전년보다 절반도 안 된다. 벚꽃이 나에게 감동과 아쉬움을 주지만, 올해의 벚꽃은 이변적이다. 다량의 봄꽃은 숨 가쁘게 쫓기면서 기회를 놓이지 않고 꽃을 피우고 있다.   벚나무의 삶은 숱한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나간다. 나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계절의 무상함을 다시 맛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