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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던 10월 17일 01:00경 11시간 비행 끝에 나는 체코 프라하 공항 입국심사대에 낯선 사람들의 틈에 끼어 줄을 서 있었다. 이렇게 늘 머릿속에 있던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의 여행은 기적처럼 현실로 다가왔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음에도 체코 출입국 심사 직원들은 바쁠 것이 전혀 없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과 손놀림으로 입국심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퇴근이나 교대시간이 되면 대기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하게 심사대의 불을 끄고 자기할 일에 열중했다. 1시간이 넘게 걸린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 나오자 체코시간으로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백야현상 때문인지 우리나라와는 달리 주위는 훤했다.
이렇게 「2007 선진교통문화대상」 수상자들에 대한 동유럽 여행과 개인적으로 난생 처음인 국외여행은 스메타나, 드보르작, 카프카의 나라 체코 프라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둠이 짙어감에 따라 고풍스러운 도심의 레몬빛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고 도심 전체는 레몬빛깔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트램의 괘도가 얼기설기 놓인 길을 건너 볼타바 강변을 따라가자 흡사 인형과도 같이 생긴 프라하의 청소년들이 그네를 타고 놀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곤니찌와’하자 일행 중 한사람이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인사말은 ‘안녕하세요’라고 일러주곤 해보라고 시켜본다. 도심 공원을 지나 그 공원과 잘 어울리는 식당건물은 도로와 떨어져 있어 아는 사람만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은 곳에 위치해 있어 왠지 범상치 않아보였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체코의 음식은 가이드의 사전 안내가 있었음에도 생각보다 훨씬 짠맛이 강해 입에 댈 수 없었던 버섯 스프에 마른 빵을 찍어 먹었는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행들이 빵만 대충 몇 조각 먹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완전히 어두워진 도심의 작은 공원을 지나 카를교로 향하면서 본 프라하성은 레몬빛 조명을 받아 성 바로 위 검은 하늘에 떠있는 그믐달과 성앞의 크고 작은 건물들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강물에 어리면서 백만불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명성에 걸맞게 볼타바강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날 본 그믐달 영향 탓인가 여행을 마친 지금 나는 프라하성의 야경을 떠올리면 검고 아득한 밤하늘에 하나의 조각배 속에 담겨져 몰다우 강물을 따라 흘러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중세의 어느 한 시점까지 상상되어 지곤한다. 프라하 성의 야경은 그렇게 꿈결처럼 내 가슴에 담겨져 있다.
이튿날 새벽 5시 한국시간은 오후 2시이므로 한창 활동할 시간이기 때문인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자 같은 방을 쓰게 된 김 주사가 ‘우리 마라톤 할까요’라는 제안에 운동복을 입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프라하에서의 5km 마라톤은 프라하 시 외곽과 내가 살고 있는 나라와 시차가 7시간이나 날 만큼 멀리 떨어진 이곳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궁금했었는데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른 새벽 도로에는 트램과 버스 두대를 연결한 길이가 긴 버스와 짧은 버스 등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지런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으나 체코 사람들도 부지런함에는 우리 못지않을 듯 했다. 도심 외곽의 주거형태는 비교적 아담하고 깨끗해 보이는 3층짜리 아파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창문틀에는 꽃이 피어 있는 화분이 놓여있었다.
얼마쯤 뛰다보니 길가에 숲으로 둘러싸인 텅빈 것 같은 공간에 석상들이 많이 놓여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공동묘지였다. 이번 여행에 많이 본 것이 성당과 성당 옆에는 틀림없이 있었던, 성당크기에 따라 규모를 달리했던 공동묘지였는데 심지어 프라하에서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우리가 묵었던 돈지오바니 호텔 옥상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니 바로 앞이 큰 규모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처럼 그들은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남의 것이 아니며 살아있는 동안 여유와 마음의 평화를 누리라는 메시지처럼 늘 곁에 두고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빵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뒤 프라하 도심으로 이동해 9세기에 축조하여 14세기가 되어서야 완성하여 현재 연간 1억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는다는 프라하 성 내부를 찾았다. 현재에도 체코의 대통령궁으로도 사용된다고 하는데 관광객들에게 전면개방을 하는 것을 보면 국가정책으로 관광산업을 얼마나 중요 시 하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성안 광장에서는 카메라 뷰파인더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프라하의 보석’ 성비타 성당 첨탑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 본 프라하 시내의 예의 빨간 지붕과 고딕양식을 한 고풍스러운 건물들 도심을 가로 질러 흐르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몰다우’ 강은 한 폭의 풍경화 같이 그렇게 조화로울 수 없었다.
중세 프라하성 주변에 모여 살았던 장인들이 주거 지역이었던 황금소로 입구에 들어서자 카프카가 살았다는 온통 파란색 칠을 한 집이 보였다. 90여년전 이곳에서 살았던 카프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역으로 묶여 내가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주변 모습들을 보며 글을 쓰며 살았을 것이다.
‘프라하의 봄’으로 유명한 바츨라프 광장근처에 있었던 한국식당인 ‘KOREA HOUSE’에서 점심으로 된장찌개와 김치가 나왔는데 너무 맛있어서 일행 모두가 허겁지겁 먹었으며 평소, 김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그날 이후 김치를 좋아하고 잘 먹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프라하 구도심 광장으로 이동했다. 구도심 마찻길은 작고 네모난 돌을 땅바닥 박아 원형의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일일이 사람 손에 의해 작업이 되었을 터임에도 그 정교함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체코의 유명한 유리공예품 등을 파는 가게가 밀집된 좁은 소로를 따라 조금 걷다보니 순간적적으로 훤해졌는데 큰 규모의 광장이 말 그대로 갑자기 나타났다.
체코의 아픈 역사의 현장인 구시가지 광장이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1415년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비판하다 콘스탄트 종교회의에 의하여 화형에 처해진 얀후스와 그의 추종세력들의 기념비와,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뾰족한 첨탑이 아득하게 보였던 고딕양식의 틴성당 이었는데 모두 보수공사 중이었으며, 1490년 한 시계공에 의해 들어졌다는 천문시계는 매시 정각이 되면 죽음의 신이 줄을 당기면서 성바울과 11사도들이 창문을 열고 모습을 나타내면서 움직였는데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가이드로부터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몇 차례 강조해서 들어야했다.
그밖에도 광장 주변엔 맥주와 커피를 파는 노천카페, 간이식당,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으며 이곳에선 모처럼 볼 것 같은 맑은 하늘과 부드러운 햇볕, 다양한 얼굴색을 한 사람들, 중세시대 이 거리에 귀족들을 태웠을 법한 마차가 따가닥 따가닥하는 소리를 내며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다양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와 한참을 앉아 있어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까를교로 이동하여 1357년 로마제국 황제였던 까를4세에 의해 건설되어 볼타바강에 놓인 다리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까를교를 건너보았다. 다리위에는 다양한 모습을 한 많은 관광객들이 넘쳐있었고. 다리 아래 강물에 작은 보트 띄워놓고 낚시를 하며 금방 무지개 송어를 낚아 올려 다시 놓아주던 사람들과 모델과 거의 똑같은 그림을 그려내던 거리의 화가들, 열정적으로 연주하던 거리악사들 특히, 트럼펫으로 엄청난 고음의 연주를 하여 내가 부러워했던, 약간 코믹하게 생겼지만 연주할 때만큼은 무척 진지한 모습으로 연주를 했던 트럼펫 주자 이러한 사람들이 주는 여유로움이 여행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구도심 어느 뒷골목에서 프라하와 어제 공항 도착에서부터 줄곧 안내를 맡았던 가이드와 헤어지면서 그녀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고국과 이렇게 멀리 떨어져 물설고 낯설었을 타국에 와서 살게 되었고 그리고 행복할까? 내심 궁금했다.
그렇게 프라하에 내발자국을 남겨두고 이제는 폴란드로 향하기 위해 체코의 제2의 도시 브르노로 이동하며 고속도로 곁으로 1년 농사를 끝내고 파헤쳐진 기름져 보이는 농토, 수확을 끝낸 옥수수밭, 끝없이 펼쳐진 넓고 푸른 초지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 멀리 보이는 알맞게 높고 낮은 구릉, 미루나무 가운데 몇 가구 모여 있는 빨간 지붕을 한 체코의 농가들의 모습이 만추의 가을 속에 더 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유럽 특유의 짙은 회색빛 하늘에선 비를 뿌리고 브르노를 떠난 우리가 탄 버스는 3시간을 달려 체코와 폴란드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이라고 하여 거창하고 무장한 경비병에 검문도 삼엄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흡사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톨케이트와도 같았다. 하나의 유럽을 표방하면서 유로로 통화도 단일화를 시도하고 국가 간 출입국에 있어서도 통상적으로 여권에 도장만 찍는 것으로 입국절차를 마무리 한다는데 우리의 경우, 한 시간이 넘게 걸리자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폴란드가 우리나라에게 패하여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일부러 지연 시키는 것이라고 운전기사였던 죠셉의 이야기를 일행 중 누군가 통역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정확한 통역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폴란드로 들어서면서 주변에 낮은 구릉들은 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높아졌고 국경 마을 농가들의 낮은 창문에는 주로 제라늄이 심겨져 있는 화분이 놓여 있었고 하얀 레이스로 된 커튼이 처져 있었으며 굴뚝에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배출한 가톨릭 국가답게 성당이 자주 보였으며, 성당 옆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공동묘지가 있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대 비극의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했다. 1942년부터 히틀러의 본격적인 유대인 말살정책에 의해 매일 전 유럽에서 기차로 실려 오는 2,000명의 유대인 중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곧바로 가스실로 이동시켜 질식사시킨 유대인이 150만명 정도 된다고 하니 정상적인 뇌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히틀러는 왜 유대인을 그렇게 증오했을까? 라는 의구심이 관람 내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짰다고 하는 천과 죽은 시체를 이용하여 비누를 만든 것을 보면서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유대인을 상징하는 킵파를 머리에 얹고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를 몸에 두른 심각한 표정을 한 청소년들이 군데군데 모여앉아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충혈된 눈에 눈물을 흘리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빨간 벽돌로 된 수용소 건물 양편에는 키 큰 미루나무가 특유의 냄새를 발산하며 서있었는데 저 미루나무는 65여 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가스실을 관람하고 나오니 폴란드에 들어서면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ARBEIT MACHT FRE'(노동이 자유롭게 한다)라고 쓰여진 정문을 나오면서 내마음속에도, 크라쿠프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도 침묵의 비가 내렸다.
그러는 동안 우리를 실은 버스는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폴란드 제2의 도시이며 지금의 바르샤바로 수도가 옮겨가지 전까지 폴란드 수도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였으며 2차 세계대전에 많은 역사적 건축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아 중세유럽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크라쿠프에서 가장먼저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시대의 광장인 시장광장으로 갔다.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둡던 광장주변에 꽃을 팔던 노점상들이 철수를 하면서 상인들이 바쁜 손놀림을 놀리고 있었고 1220년에 건축되었다는 성마리아 성당의 양쪽 첨탑이 높이와 생김새가 다름에 지친 여행자의 눈길을 끌었다.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식당으로 가는 시가지를 걸으면서 본 도심과 사람들의 모습은 어두운 도심의 불빛만큼이나 무거웠고 전반적으로 프라하의 그것보다 세련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프라하 역시도 이후에 둘러 본 오스트리아 비엔나나 짤즈부르크와 또 다른 차이가 있어 보였다. 소련의 위성국가로 공산화의 길을 걷었던 시대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하여 본 그들은 체제의 변화에 대해 어떠한 생각들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도로를 몇 블록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경북(京北)반점이라는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내놓은 안남미로 지은 밥과 해물잡탕은 저녁 늦은 시간이라 시장했을 터인데도 쉽사리 내키지 않았다. 누군가 내놓은 김치와 볶음고추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저녁 먹는 것을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저녁을 먹으면서 마신 투명하고 걸쭉한 시럽과도 같았던, 마치 목을 태워버릴 듯 독한 보드카 한잔에 종일 추위에 얼었던 몸이 녹일 만큼 취기가 올랐다.
다음 날 그러니까 10월 19일 아침 09시경에 우리 일행은 크라쿠프에서 40분가량 떨어진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에 도착해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세에서 현재까지도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광산으로 광산 내부로 들어가는 378개의 나무계단에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낙서를 해놓았는데 한글도 어느 나라 문자 못지않게 많이 보였다. 광산의 총길이는 300km에 달하고 가장 깊은 곳이 지하 327m라고 한다. 광부들의 깊은 신앙심에서 암염을 재료로 조각해 놓은 조각상들과 가로 57m 세로 17m 높이 12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로 조성된 킹카 성당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 성당을 짓는데 30년이 걸렸으며 2만톤의 암염을 치우고 조성되었다고 한다.
소금광산의 관광은 반드시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하며 야박하게도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3유로의 요금을 지불하여야 했고 스티커를 받아 사진기에 부착하여야 했으며 중간에 스티커 검사도 했다.
13세기에 아주 우연히 헝가리에서 폴란드로 시집을 오게 된 킹카공주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소금덩어리가 발견당시에는 소금으로 현대에 이르러는 세계 12대 관광자원으로 수백 년에 걸쳐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복덩어리가 되었다.
크라쿠프 관광에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바벨성으로 가는 동안 주택가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인 듯한 폴란드 시민들을 보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벗어놓고 이 골목 어딘가로 훌쩍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을 하면서 붉은 벽돌로 된 담을 끼고 경사진 계단을 오르던, 책이 든 것 같은 가방을 옆에 끼고 지나가던 대학생들로 보이던 청년들 때문인가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는 유서 깊은 대학 캠퍼스와 같은 느낌이 드는 바벨성을 둘러보고 비스와 강으로 갔다.
맑은 강물에는 오리들이 헤엄쳐 놀았고 강변도로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으며, 마냥 앉아있어도 좋은 것 같았다. 주변에는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있었는데 여행이 주는 공통된 즐거움 때문인지 말도 잘 통하지 않으면서도 사진도 함께 찍는 등 금방 친해진 듯 시끌벅적 했다.
그리고 우리는 크라쿠프를 떠나 동구의 알프스라고 부르는 슬로바키아 타트라로 가기위해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접경지역을 지났다. 평원을 달리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산림이 울창했으며 주로 스프루스라는 가문비나무가 많이 보였으며 산 중턱 부분까지 우리의 방갈로와 같은 집들이 보였으며 집과 집을 연결하는 도로가 아득하게 보였다.
잠시 후 도착한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사진촬영도 엄격하게 금했으며, 화장실 부근에서 담배를 피우던 일행들이 슬로바키아 출입국 직원들에게 혼쭐이 나는 긴장된 분위기였다.
국경을 통과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을 슬로바키아에서 보게 된 셈이다. 깊은 산중에 드문드문 보이는 농가는 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에 주로 2-3층 높이의 급한 경사를 이룬 지붕을 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몇 가구가 모여 작은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고 온통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마도 내년 4월 까지는 이러한 모습으로 겨울의 고요함을 누릴 것이다.
어느 덧 내리던 눈이 그쳤고 그 많던 사람들이 묵게 될 호텔이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숲속의 작은 도로를 버스는 잘도 달렸다. 그리고는 날이 어두워져서야 그 숲속 어디엔가 있던 그랜드 호텔에 도착했다.
방을 배정받고 식당으로 가서 만나 본 슬로바키아 사람들은 같은 서슬라브 계통의 체코나 폴란드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김이나 표정이 날카로워 보였으며 서비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부드러움을 찾아볼 수 없고 무뚝뚝해서 누군가 산적 같다고 수근 되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창문의 커튼을 젖히니 하얀 눈을 뒤집어쓴 스푸르스가 빼곡하게 들어선 골짜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문득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
그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라는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슬로바키아 타트라에서 보낸 2007년 10월 19일의 밤은 아마도 내 생애 오랫동안 기억될 더 이상 좋은 수 없는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숲으로 난 도로를 따라 산책을 나갔는데 이곳이 유럽에서도 유명한 스키장들이 많아 스키 슬로프와 리프트 설치 공사가 한창이었으며, 곳곳에 슬로프들이 눈에 들어왔으며, 코끝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더 할 수 없이 신선하고 향긋했다.
여행하는 내내 아침식사는 묵었던 호텔의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하였는데 다행히 평소 빵을 좋아했던 식습관으로 식사에 크게 불편함이 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잘 먹는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일행 중에는 식사 때마다 컵라면으로 해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했던 나도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어본 현지 전통음식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입에 맞지 않았다.
식사 때 마다 궁금했던 것은 뷔페에는 다양한 과일들이 나왔는데 한결같이 껍질을 벗기지 않고 씻어만 놓았으며, 우리나라의 과일들처럼 크진 않았으나 당도가 높았고 생긴 것 답지 않게 맛있었다. 이토록 기름진 땅에 종자의 품종개량을 하면 더 좋은 과일들을 생산 할 수 있을 것이고 더불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는데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나름대로 이러한 해답을 얻었다.
굳이 사람과 식물들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주면서 품종 개량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비옥한 땅에서 뿌리고 심은 대로 걷어도 부족하지 않았으며 대충 씻어 먹어도 될 만큼 농약 등 갖은 약제를 살포하지 않아도 이정도의 수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잠시 와서 본 여행객의 눈에도 확연히 보이는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움의 원천이 아닐까 마치 전쟁을 치루 듯 살아야 살아지는 우리네 삶과 다르게
집을 떠나온 지 닷새째 되는 날 우리를 실은 버스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향하고 있었고 지친 여행객들은 잠에 빠져있었다. 타트라를 출발한지 5시간이 지나 가이드를 만나기 위해 헝가리 건국천년을 기념해서 세운 36m 높이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조각되어 있는 기념비가 아름다워 보였던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에 도착했다. 가이드를 만나 부다페스트 오래된 듯한 주택가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는데 특이하게도 사장은 한국인이었으며, 서빙은 인도네시아, 주방에는 중국사람 인 듯 한, 동․남․북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다국적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듯 했다.
식사를 마친 뒤 겔레르트 언덕으로 가기위해 시내를 통과하면서 본 고풍스러운 건물옥상에 ‘SAMSUNG LCD TV Moniter’라고 쓰인 간판을 보고 가슴 뿌듯했다. 외국에 나가봐야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이번 동유럽 5개국을 다니면서 고속도로나 일반도로를 달리거나, 도심에 주차되어 있는 ’산타페‘, ’티코‘, ’마티즈‘ 같은 우리나라 차량들을 심심치 않게 보면서 모두들 그렇게 반가워 할 수 없었다. 안에서는 이러저러한 일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민족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본 아름다운 다뉴브 강과 세체니 다리와 그 다리 아래를 통과하는 유람선, 국회 의사당을 포함한 부다페스트 시가지의 모습과 멀리 숲속언덕에 위치한 그림 같은 빨간 지붕을 한, 결코 높은 법이 없는 크고 작은 건물들 마챠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 등의 아름다운 모습은 ‘두나의 진주’, 동유럽의 장미‘라는 별칭에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부다페스트 교외에 있는 전통있고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이곳에서 헝가리 전통식인 굴라쉬 스프를 맛보면서 40년 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저자인 내 젊은 날의 우상이었던 전혜린씨가 그 책에서 독일 뮨헨대학에서 유학하면서 헝가리로 여행 와서 먹어보고 엄청나게 매운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굴라쉬 스프를 혹시 이 음식점에서 내가 앉았던 창가자리에 앉아서 먹었던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을, 고사리가 빠진 육개장 맛과 흡사했던 굴라쉬 스프를 먹으면서 내내 했었다. 호텔로 이동하면서 본 밤하늘엔 별들이 하나 둘 초롱초롱 빛났었다.
다음 날,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춥고 음울한 회색빛 하늘을 하고 있다는 유럽의 겨울날씨 답지않게 맑고 푸른 하늘이다. 다음 여행국인 오스트리아로 가기 위해 달리는 버스 창가엔 비옥해 보이는 너른 농토에 수확을 끝낸 옥수수 밭과 푸른 초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 펼쳐진다. 이러한 풍부한 농토들이 전통적인 농업국가를 형성하게 된 주된 요인인 것 같았고 손에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푸근하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고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으며, 벤치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왠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 한 정감이 가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를 떠나 두 시간을 달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선 여권검사도 하지 않고 그냥통과 시켰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며 음악의 도시라고 일컫는 비엔나에 도착했다. 그리고 베르사이유 궁전과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쉔브룬 궁전으로 갔다.
쉔브룬 궁전은 이번 여행 중 가이드들로부터 동유럽의 역사이야기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브르크 왕가의 여제 마라아 테레지아 여왕의 여름 별궁으로 궁전내 1441개 방이 있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합스브르크가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불릴 만큼 정치, 외교, 문화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당대의 최고 미남자였으며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여 16명의 자녀를 두었고 남편이 죽은 이후 내내 상복을 입고 살았으며 남편을 추억하는 방까지 쉔브룬 궁전에 두었을 만큼 부부간에 금슬이 좋은 양처였으며 자식들의 교육도 잘 시켰던 현모로 모든 면에 완벽하여 오스트리아의 국모로 추앙받고 있는 여인 마리아 테레지아. 나는 웬일인지 그녀의 삶에 관심이 부쩍갔다.
쉔브룬 궁전에서 마지막으로 들렀던 방에는 여왕의 침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16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며 그곳에는 가족들과 함께한 그림이 놓여 있는데 그중 막내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이 되어 프랑스 혁명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려져가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궁전앞 너른 정원 너머 멀리 보이는 언덕에는 18세기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글로리에테가 궁전과 정원수를 세로로 반을 잘라 놓은 듯 한 절묘하게 전지를 해놓은 나무들이 조화로웠으며 너른 궁전 뜰에는 운동복을 입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부러워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비엔나 시내로 이동하여 온화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앉아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이 있는 미술사 박물관을 거쳐 비엔나의 최대 번화가중 하나로 보행자들의 천국이라고 일컫는 케른트너 거리로 갔다. 온 거리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과 특별한 추억이라도 만들고 싶어하고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겠지만 거리에 서서 포옹하고 입맞춤을 하는 젊은 연인들이 멀리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여행객의 눈에도 자연스럽다 못해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마력이 존재했고 화려한 동작을 선보이는 비보이들의 거리공연으로 활기가 넘쳐 있었으며, 이번 여행에 선물로 가장 많이 사왔던 모차르트 쵸코릿 산 곳도 이 거리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타난 슈테판 성당은 그곳 고건축 재료로 많이 사용했던 석회는 공기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검게 변하는 성질이 있어 외벽은 흡사 불에 그을린 듯 검게 변해 있었는데 그것이 성당의 규모와 맞물려 강한 카리스마를 주었고 성당 지하에는 중세 최고권위의 상징이었던 대주교의 무덤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내장을 보관해 놓은 항아리와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을 모아 놓은 카타콤베가 있다는 설명에 모두 압도당한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찾은 곳은 비엔나를 음악의 도시로 불리는데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무대인 국립오페라 극장을 보았는데 이 극장에서의 오페라의 상영은 매년 9월 1일부터 다음해 6월 30일까지 이 기간 동안 300여회의 크고 작은 공연이 있다고 한다. 위아래 층에 5개의 둥근 아치형으로 된 건물정면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곳에서 심오한 표정으로 지휘에 몰입하고 있는 카라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린찡 마을로 가서 이곳의 호이리게 한잔을 곁들인 전통음식에 맘껏 즐거울 수 있었던 어느 도시 보다도 세련되어 보였던 비엔나에서의 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러니까 여행 칠일째 되는 날, 우리를 태운 버스는 강원도 평창과 동계 올림픽 유치하기 위해 경쟁했던 도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 무대였던 짤즈부르크로 가기 위해 비엔나와 짤즈부르크간 고속도로를 달린다.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전조등을 밝히며 달리고 있었는데 흐린 날씨가 아니더라도 고속도로에서는 모든 차들이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고 하고 모든 고속도로에는 하이패스가 설치가 되어있는 듯 요금을 받는 톨게이트가 별도로 없었다.
이동하면서 본 예의 농촌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들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 휴게소에 들른 사이 사진도 찍고 그렇게 비옥해 보이는 농토를 확인하기 위해 흙을 밟았더니 운전기사 조셉이 손짓을 하며 신발의 흙을 잘 털고 차에 오를 것을 명했다.
체코인 운전기사 조셉,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늘 싱글벙글이다. 아침이면 호텔 정문에 버스를 대고 여행 가방을 받아 차에 실으면서 체코말로 ‘안녕하세요’에 해당한다는 ‘아호이’를 외치며 따라 해보라고 하고 운전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차분해 보일 수 없었으며, 저녁에 호텔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면서 와인이나 맥주라도 한잔 권할라치면 언제나 손사래를 친다. 술을 못하냐고 물어 보면 술을 좋아하지만 일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 좋아 보이던 죠셉도 가이드가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하니 사용료를 줄 것을 약속받고 빌려주었고 이에 가이드가 한국말로 체코 남자들이 이렇게 쫀쫀하다고 투덜거렸다.
짤즈부르크 교외에 위치한 일본식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 송’을 불렀던 미라벨 정원을 둘러보고 제법 큰 도심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짤자흐 강을 건너 해발 542m 산 위에 위치한 방어용 성으로 중부유럽의 성채중 완벽한 규모로 현존하는 최대의 성이라고 하는 호엔 짤즈부르크 성에 올라 본 짤즈부르크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리 크지 않은 분지에 인구 15만 명이 모여 살기에는 조금은 좁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산등성이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호엔 짤즈부르크성을 내려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던 군밤을 먹으며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게트라이데 거리를 걸으면서 본 고급스러워 보였던 간판들은 도심의 수준을 한 차원 높여놓은 것 같았다. 이번 여행했던 동유럽 국가 모두 상가의 간판이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지 않았다. 적당하고 알맞았으며 돌출되어 있는 입간판들은 그다지 볼 수 없었고 도심의 전선들이 모두 지중화가 되어 있어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으며 격조 있어보였다.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펼쳐진,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큰 간판, 경쟁이라도 하듯 크게 돌출되어 있고 인도까지 가로막고 있는 입간판에 그것도 모자라 현란한 현수막까지 어지러운 전선과 어울려 거의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우린 너무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도심과 그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싸구려 같아 보이게 하는지를.........
그리고 우리는 짤즈감머굿의 가장 큰 호수이며 모차르트 어머니가 태어난 마을인 볼프강호 주변마을 장크트 길겐으로 갔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첫 장면을 촬영했다는 마을 입구, ‘어떤 나무가 어떤 구름이 나를 부를 것 같은’ 언덕에 서서 내려다 본 호수와 어우러진 눈 덮인 마을의 풍경은 평화와 고요함과 조화로움 그 자체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어린 모차르트의 동상이 있고 기념품을 파는 크고 작은 가게들과 테라스에는 어김없이 꽃으로 장식해 둔 일반 가정집들을 둘러보고 다시 마을 입구 호숫가로 왔을 땐 주위는 시나브로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갈색등불을 밝힌 거리 가로등이 비친 호수를 한동안 바라보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함이 호수에 가득한 물처럼 가슴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굳이 정체를 밝히자면 그것은 아마도 ‘가벼운 존재’에 대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이번 동유럽 여행의 마지막 둘러볼 곳인 체코의 체스키 크롬로프를 찾았다. 체스키 크롬로프 성에서 내려다본 구도심은 13세기에 건설된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중세유럽 봉건사회 때 건축된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활처럼 휘어져 흐르는 볼타바강의 만곡부에 위치해 있는 도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볼타바강의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면서 본 강물은 흘러온 세월을 말해주듯 검고 깊어 보였다. 그리고 지붕이 낮은 토굴과도 같았던 중세식당으로 가서 체코의 전통식인 ‘스비코바’를 먹고 다시 프라하로 향했다.
그로부터 약 3시간 후, 10월 23일 오후 6시 39분에 비가 내리는 ‘PRAHA'라는 선명하게 쓰여진 프라하 공항에 도착하여 검색대를 통과하여 인천공항으로 가는 KE 936편을 타기위해 탑승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그날의 내 여행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 먼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두고두고 기억하고픈 2007년 10월의 프라하여 안녕”이라고
첫댓글 거 참.. 낯선 사람의 글이라면 훌쩍 건너 뛰었을 빽빽한 글인데 동창 글이라고 꼼꼼히 읽었네 그랴.. 음울한 동유럽 이미지가 말끔히 씻겨지네~
너무 길고 지루했지.. 끝까지 읽어주어서 고맙고 내가 본 동유럽의 국가들은 공산화 길을 걷던 예전의 모습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무거움도 느낄 수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세련된 모습도 혼재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조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비슷비슷한 모양에 높게만 솟아있는 성냥곽같은 시멘트 콘크리트의 아파트, 현란하고 혼란스러운 거리의 간판들, 그속에서 마치 전쟁을 치루듯 살아야 살아지는 우리의 모습들이 나를 더 움울하게 했었지
그래!!참으로 수고하셨네.읽느라~~?우리보라 글올리느라고..................이왕이면 얼굴 박힌 사진도 첨부하지 아쉽다!...
앞으로 더많은 해외여행 다니시길바래... 명희야! 잘지내? 너아님 카페 어찌됐을거같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