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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2024.4.3., 수성도서관)
현(玄)과 이분법(二分法) 극복 (1)
1. 현(玄)의 의미
1) 현(玄)과 흑(黑)
현(玄)의 반대는 현(顯)이고, 흑(黑)의 반대는 백(白)이다. 현(玄)은 불분명함이고, 현(顯)은 분명함이다. 흑과 백은 모두 분명함이다. 흑은 검은 색으로 분명히 들어나는 것이고, 백은 흰 색으로 분명히 드러남이다. 현(玄)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서 시비(是非, 이다와 아니다 또는 옳다와 옳지 않다)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비해 현(顯)은 경계가 분명해서 시비가 뚜렷이 드러난다.
2)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의 현(玄)
하늘(天)은 검을 현(玄)이고 땅(地)은 누를 황(黃)이다. 땅의 색이 누렇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늘의 색이 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땅이 누렇다고 하는 것은 흙의 색깔이 누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하늘색깔은 파란색이 아닌가, 그런데 왜 검다고 하는가? 이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흑(黑)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玄)은 색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현(玄)이 투명한 무색도 아니다. 왜냐하면 투명한 무색은 그 무색을 넘은 세계의 색깔이 보여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은 불투명한 것으로 눈을 감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두 개 이상의 사물이 구분되면 현이 아니다. 그들이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하나가 된다. 그래서 노자는 현동(玄同)이라고 했고 장자는 제물(齊物)이라고 했다.
그런데 땅은 공간적으로 한정이 되어 있어서 땅과 땅 아닌 세계가 분명히 구별된다. 이에 비해 하늘은 공간적으로 무한해서 어디까지가 하늘인지를 가늠할 경계를 나타낼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은 현(玄)이다. 현(玄)이니까 눈을 감아서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상태이다.
2. 이분법(二分法)의 의미
‘이분법’은 대상 전체를 둘로 나누는 논리적 방법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 범위에 있어서 서로 배척되는 두 개의 구분지(區分肢)로 나누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만물을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거나 [생물을 동물과 식물로 나누거나] 동물을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로 나누는 것 따위이다.”
그런데 이분법으로 인식하려면, 두 가지 작용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감성적 지각으로 감각인상(感覺印象, sense data)이 있어야 한다. 감각인상은 우리들의 감각에 주어진 자료(與件)가 우리들의 감각에 각인(刻印)된 모양이다. 다른 하나는 이성적 지각으로 이치에 따른 판단이다. 즉 시비(是非)가 분명하다. 우리는 시비를 통해 ‘인 것’과 ‘아닌 것’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감성적 지각부터 살펴보자. 시각으로는 색깔과 모양으로 이분법이 인식가능하다. 예를들어 나뭇잎이 푸른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푸른색과 푸른 색이 아닌 색을 구분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나뭇잎의 모양이 둥글다면 둥근 모양과 둥근모양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청각으로는 소리, 미각으로는 맛, 후각으로는 냄새, 촉각으로는 촉감을 통해 느껴진 것과 느껴지지 않은 것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이분법이 가능하다.
이성적 지각을 살펴보자. ‘저 나뭇잎이 푸르다’고 하는 문장은, ‘저것은 나뭇잎이다와 저것은 푸른색이다’로 분석할 수 있다. ‘저것이 나뭇잎이 맞다면, 마뭇잎이 아니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그리고 ‘저것이 푸른색이다가 맞다면, 저것이 푸른색이 아니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반대로 ‘저것이 나뭇잎이 아니라면, 나뭇잎이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그리고 ‘저것이 푸른색이 아니라면, 저것이 푸른색이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이때 ‘나뭇잎’이라는 단어와 ‘푸르다’는 단어는 저것에 대한 한정형식(限定形式)이다. 저것에 대해 다른 이름은 붙일 수 없고 오직 나뭇잎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이름 중에 나뭇잎이라는 이름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푸르다’는 ‘푸름(초록)’이라는 용어를 서술어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도 수많은 색 중에서 푸른 색으로 한정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한정형식이다.
우리는 이 한정형식을 통해 임의의 사물을 발견해서 다른 사물과 구분한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을 안다고 한다. 이때의 ‘안다’는 것은 그 사물과 그 사물이 아닌 것으로 이분(二分)할줄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분법은 우리가 사물을 알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해야만 하는가?
<이어지는 강의>
4/17(수), 현과 이분법 극복(2),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 4/24(수), 현, 앎과 느낌의 방법으로서 시, 감상환(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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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법적 사고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인식하려면 그 사물이나 사실을 다른 사물이나 사실과 구분해야 가능하다. 이 구분의 기초가 이분법적 사고이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안 철학자는 동양에서는 맹자(B.C. 372~ 298)이며,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의 단서(端緖, 근거, 이유)로서 4단(端)을 들었다. 4단 중 지(智)에 해당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인간은 무엇이 윤리적인 행위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윤리적인지를 알기위해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함이 전제(前提)되어 있다.
이 구분하는 행위를 우리는 ‘시비(是非)를 가린다’고 말한다. 시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의 ‘이다’와 부정의 ‘아니다’이다. 어떤 행위를 보고 저것이 옳은 행위냐고 물었을 때, 시(是)라고 답하면 긍정의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 비해 비(非)라고 답하면 부정의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긍정의 시(是)와 부정의 비(非)를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맹자는 높이 평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욱 정치(精緻)하게 이러한 인식의 근저(根底)를 논리의 기초로 삼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이분법적 사고가 무엇인지, 우리가 사물이나 사실을 인식하는데 있어 이분법적 사고가 왜 필요한지,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 이분법이란?
이분법이란 “논리적 구분의 방법으로 그 범위에 있어서 서로 배척되는 두 개의 구분지(區分肢)로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물을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것이나 동물을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로 나누는 것 따위이다.”(네이버 사전) 이러한 분류방법을 체계화시킨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대상이든지 그것을 정확히 알기위해서는 정의(定義, definition)를 해야 하고, 정의하는 방법으로 ‘유종차(類種差)에 의한 정의(定義)’를 만들었다. 오늘날까지도 사전을 만들 때 사용되는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종류(種類)라는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정의가 성립되기 위한 논리적 전제조건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의 제1전제라고 불리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이 그것이다.
동일률은 A는 A이다. 모순율은 A는 A가 아닌 것이 아니다. 배중률은 A와 A 아닌 것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 이 세 가지는 결국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는 A와 A 아닌 것 두 가지뿐이라는 ‘이분법의 입장’을 세 가지 입장에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A라고 한정해서 뜻을 정(定義, Definiteness)하면, 그 A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A와 A 아닌 것으로 구분해야만 가능하다. 이것은 맹자가 지(智)를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본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 이분법적 사고의 장점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들이 어떤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확히 알았다는 것은 그 무엇에 해당하는 것과 그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들이 시험을 칠 때 정답을 찾아가는 것도 이분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나는 매미라는 곤충을 알고 있다’고 하는 말은 나는 곤충 중 매미와 매미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존경심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면, 나는 마음 중에 존경하는 마음과 존경이 아닌 마음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분법적 사고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다른 사물이나 사실과 명백히 구분해서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다른 사물이나 사실과 구분하여 분명히 인식하기 위해서 이분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분명히 분리하여 인식하고 정의(定義)할 수 있어야 대화를 통한 상호소통이 가능하다. 특히 우리의 삶 중에서 국가가 개인이나 법인을 강제할 수 있는 법률용어와 문장들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의 용어들은 그 의미가 분명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이분법이 강조된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긍정(~이다)과 부정(~이 아니다)의 이분법이 기초가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분법(多分法)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다분법에는 3분법(크기 : 小.中.大., 수량 : 少.中.多), 4분법(4方 : 東.西.南.北), 5분법(5行 : 木.火,土,金,水), 10분법(10陳法) 12분법(12支) 등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하게 구분하는 이유는 유(類) 안에 종(種)이 몇 개인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다분법에는 종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 바탕에는 ‘이다’와 ‘아니다’의 이분법적 사고가 놓여 있다. 크기에 있어 小는 中과 大가 아니고, 中은 小와 大가 아니며, 大는 小와 中이 아니다. 유(類) 안에 종(種)이 몇 개인지 관계없이 어느 종(種)을 긍정인 '~이다'로 하면 그 유(類) 안에 있는 다른 종(種)들은 부정인 ‘~이 아니다’가 되기 때문에 결국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분법이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분법 범주(範疇)에 속하지만 다분법을 그대로 이분법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다분법과 이분법의 가장 큰 차이는 양극 사이에 중간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다분법은 중간을 인정하고 이분법은 중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간이 있는 다분법인데도 중간이 없는 이분법으로 오인하는 것을 흑백오류라고 한다. 흑백오류는 흑색과 백색 사이에는 회색도 있고, 여러 유색(빨강, 파랑, 노랑 등)도 있는데도 오직 흑색과 백색밖에 없는 것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 이분법적 사고의 단점
우리에게 이분법으로 인식된 사물은 사물자체는 아니다. 사물의 현상(現象, appearance, 겉모습)이다. 즉 우리에게 인식되기 위해 드러난 사실(事實, fact)일 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진정한 실재(사물자체나 참실재)를 추정할 뿐이다.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들은 여러 차이를 지닌다. 그 차이들 중 하나를 기준으로 우리는 사물을 분류한다. 생물과 무생물은 물체라는 공통성이 있으면서 생명(生命)이 있느냐(있는 것이다.) 없느냐(있는 것이 아니다)의 차이에 따라 구분된다.
여기서 다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공통성인 물체와 차이인 생명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체와 생명 자체는 우리에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물체의 현상과 생명의 현상이 우리에게 드러나 보인다. 물체의 현상은 모양과 색깔로 시각에 드러나고, 만지면 촉감으로 드러나는 등 오감(五感)에 포착된다. 생명의 현상은 조금 더 관찰이 필요하지만, 외부의 작용 없이 스스로 움직이거나, 세포분열을 통한 성장의 모습이 오감에 포착된다.
이렇게 현상은 최종적으로 오감에 의해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오감에 의해 인식되는 느낌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느낌이다. 그래서 이것을 외감(外感)이라고 한다. 여기에 비해 외부의 대상 없이 마음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을 서양의 경험론자들은 내감(內感)이라고 한다. 동양의 한문권(漢文圈)에서는 이것을 의(意)라고 한다. 앞의 예를 다시 든다면 존경심 같은 것이다. 존경심은 오감에 의해 인식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자신의 마음을 살펴봄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 증오심과 질투심도 내감이다. 우리는 옛날부터 이 여섯 가지를 합해서 육감(六感, 眼耳鼻舌身意)이라고 한다.
결국 현상은 육감에 의해 최종 확인된다. 그러나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진정한 실재는 육감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는 과학만능시대를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주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우주는 전체의 4%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96%는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 23%가 암흑물질이라 하고 나머지는 암흑에너지라 불린다고 한다. 물론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도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부분이 더욱 많이 있음도 함께 밝혀져 가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현상세계를 아는데 편리한 이분법적 사고를 진정한 실재에 확대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분법은 편리함을 위한 가정(假定)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진정한 실재가 실제로도 이분법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흑백오류보다 더욱 심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이것을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ateness)라고 불렀다. 우리들에게 인식되는 현상은 추상적(抽象的)인 것이다. 즉 진정한 실재로부터 때어 낸 것이다. 때어낸 이것은 비시간적인 영원한 대상(永遠한 對象, eternal objects)이다. 화이트헤드는 진정한 실재는 시간적인 과정을 겪고 있는 현실적 존재자(現實的 存在者, actual entity)라고 말한다. 구체성을 띈 현실적 존재자가 진정한 실재인데, 추상성을 띈 현상(영원한 대상)을 진정한 실재(實在, reality)로 본 것이 잘못이라고 화이트헤드는 지적하고 있다.
현상은 추상된 것으로 비시간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A는 A이다’는 제1전제가 성립된다. 만약에 진정한 실재가 시간적인 과정을 겪는다면 A는 A가 아니다. 왜냐하면 ‘A는~’ 이라고 말하는 동안 이미 시간이 흘러 ‘~A이다’라고 말할 때는 벌써 다른 존재(Aʹ)로 변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萬物)은 유전(流轉)한다’고 하면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전제가 참인식의 근거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진정한 실재를 부동(不動)의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실재를 부동(不動)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실체(實體, substance)라 하였다.
진정한 실재가 부동(不動)인지 유동(流動)인지는 우리의 감관에 포착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상이 비시간적으로 우리 감관에 포착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현상에 대해서는 이분법으로 지칭해서 언급할 수 있다. 문제는 현상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이분법을 진정한 실재에 적용했을 때 오류가 일어난다는 점에 있다.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문제의식을 지니고 극복해 온 이론들이 있다. 그것들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 그 중 하나인 도덕경의 극복이론에 대해서는 오늘의 주제이기 때문에 좀 더 상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이론들
∎ 서양사상은 고대로부터 이분법에 입각한 이론이 주류(主流)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흑백논리(黑白論理), 변증법(辨證法), 유동철학(流動哲學)이 있다.
‣ 흑백논리(黑白論理) : 흑백논리는 ‘흑백오류’라고도 한다. 흑백오류는 흑색과 백색의 중간에 회색이나 유색(有色 : 빨강, 파랑, 노랑 등)이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인식하는 오류이다. 흑백오류를 확대하면 3분법 이상으로 분류 가능한 것을 2분법으로만 분류하는 경우를 모두 포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2분하고 있다. 그러나 중성(中性)이 있다. 중성이 엄연히 있는데도 사회가 인정하지 않으면 이들은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전제는 중간을 인정하지 않는 모순(矛盾)개념이다. 그래서 그 학파에서도 중간을 인정하는 반대(反對)개념을 모순개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흑백논리로 표현했다. 즉 논리 안에서 모순개념과 반대개념을 구분함으로써 이분법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 중에서도 이분법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 변증법(辨證法) : 변증법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S는 A다’라고 누가 주장했을 때 이 주장에 대해 ‘S는 A가 아니다’고 말하면 토론이 된다. 이 토론에서 ‘S는 A다’와 ‘S는 A가 아니다’ 사이에는 중간이 없다. 따라서 진리 추구에는 타협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토론 결과는 ‘S는 A다’와 ‘S는 A가 아니다’의 두 주장 모두가 아니면서 둘 다를 포함하는 ‘S는 B다’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때의 ‘S는 B다’의 주장은 앞의 두 주장 모두가 아니면서 둘 다를 포함하는 새로운 개념이거나 이론이다.
‘S는 B다’에 이르게 된 이후에는 다시 ‘S는 B다’와 ‘S는 B가 아니다’ 사이에 토론이 일어나고 다시 이번에는 ‘S는 C다’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때의 ‘S는 C다’의 주장도 바로 앞의 두 주장 모두가 아니면서 둘 다를 포함하는 새로운 개념이거나 이론이다. 이렇게 진리를 인식하는 수준을 높이는 방법이 변증법이다. 현대에 이르러 정상과학이론(正常科學理論, theory of normal science)을 주장한 토마스 쿤의 이론도 변증법의 정신을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유동철학(流動哲學) : 이분법은 ‘A는 A다’는 부동철학(不動哲學)의 논리이다. 즉 진정한 실재를 부동의 실체로 보는 입장이다. 거기에 비해 유동철학은 진정한 실재를 흐름 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부동의 실체를 부정한다. 현대에 와서는 유동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을 진정한 실재로 보기 때문에 유동의 철학을 과정철학(過程哲學)이라고도 한다. 과정철학을 가장 잘 전개시킨 철학자는 화이트헤드이다. 부동의 철학도 변화과정을 인정은 한다. 그러나 변화과정을 겪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부동의 것을 궁극자로 본다. 거기에 비해 과정철학은 반대다. 부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과정을 궁극자로 본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과정을 궁극자로 본 그의 논점 때문에 그의 학파에서는 과정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동양사상은 고대로부터 이분법을 극복한 이론들이 사상계의 주류(主流)를 형성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역논리(周易論理), 공이론(空理論), 현동론(玄同論) 등이 있다.
‣ 주역논리(周易論理) : 주역논리는 천지자연의 변화의 상징이며 우리에게 지혜의 눈을 갖게 하여 취길피흉(取吉避凶)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는 원리와 이치를 체계화시켜 놓은 것이다. 주역은 음과 양의 조화를 천지만물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에, 음(陰)과 양(陽)이라는 이분법이 전제(前提)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음과 양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진정한 실재를 변화로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분법에서는 분리된 영역 간에는 상호간 중복될 수 없는데도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
음인 밤이 한창 깊을 때 이미 양인 낮이 시작되고, 낮이 한창일 때 이미 음이 시작된다. 양인 여름 속에 음인 겨울이 있고, 겨울 속에 여름이 있다. 그래서 음양을 합친 태극문양이 직선이 아니라 영역의 중복을 나타내기 위해서 굽어 있다. 우리나라의 국기가 태극기라는 것은 이분법을 극복한 논리가 우리나라 사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이분법에 의한 휴전선으로 갈라져 있는 것은 묘한 일이다. 이것은 분리에 따른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조화의 기운을 키워서 세계평화에 기여하라는 사명이 우리나라에게 있음으로 이해하고 싶다.
‣ 공이론(空理論) : 불교의 공이론은 연기설(緣起說)과 연결되어 있다. 연기설은 인연생기설(因緣生起說)의 약자(略字)이다. 이 이론은 이분법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강력한 주장이다. 이분법은 A와 A가 아닌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인데 비해 연기설은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A와 A 아닌 것이 함께 일어난 것이 진정한 실재라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면 어리석은 관점인 무명(無明)이 된다. 깨달은 법성(法性)의 관점에서 보면 연기(緣起)가 된다.
불교에서의 공(空)은 바로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며’, ‘A가 아니면서 A가 아닌 것도 아닌’ 존재의 모습이다. 이것은 불이론(不二論)과도 연결된다. 불교에서는 생사불이(生死不二)라고 한다. 생(生)과 사(死)는 양립불가능(兩立不可能)한 모순관계로서 이분법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둘을 둘이 아니라고 한다. 생과 사를 깨어난 상태와 잠자는 상태에 비유한다. 잠을 자는 것과 깨어난 것은 의식이 작동하느냐 의식이 작동하지 않느냐의 차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다르게 비유하면 옷을 입은 나와 옷을 입지 않은 나를 둘로 보는 것은 현상의 모습만 본 것이며, 진정한 실재를 보면 그 둘은 둘이 아니라 같다는 입장이다.
‣ 현동론(玄同論) : 필자가 이번 글에서 처음 제시한 이론이다. 현동(玄同)은 검을 현(玄)과 같을 동(同)자가 합쳐진 글로서 ‘검어서 같다.’는 말이다. 조금 더 풀이하면 ‘진정한 실재는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분별되지 않으며 모두 같다’는 의미이다. 이 현동론은 상이이론(相已理論)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이론도 필자가 붙인 이름이다. 이 이론은 이분법에 의해 구분된 두 항은 이미 서로 깊이 (존재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밝은 곳에 있어도 눈을 감으면 세상이 검게 보인다. 세상이 검게 보인다는 것은 눈을 떴을 때 드러난 많은 사물이나 사실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물이나 사실의 구별은 우리들 감각에 드러날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들 감각에 포착되는 것은 현상(現象)에 불과하다. 그 현상의 이면(裏面)에 있는 ‘진정한 실재는 동일’한데 우리들은 육감(六感)으로 사물이나 사실들을 인식하니 구별이 되고, 그렇게 구별되는 데로 세상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도덕경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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