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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사랑방 스크랩 광주일보 100인 시인의 시
연사마 추천 0 조회 193 08.12.03 12:4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1 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 하루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2. 놀이터
            박서원
잿빛 외투 같은 구름
가볍게 쳐도 멀리 날아가기만 하는 공
박쥐로밖에는 윤회할 수 없는 박쥐
비둘기 탈 쓰고
회색바람에 민물고기처럼 뒤집히는 잎새들 너머
살짝살짝 엿보인다
아이들이 부는 오색 비눗방울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미끄럼틀
사주를 봐주면서 자신에게 무디어져버린 사주쟁이
고성방가 통기타 무명가수의 노 없는 노래
하늘아래 얽매인 것은 하나도 없다
천막을 치거나 집을 짓는 자만이
저 하늘의 외투를 못 견딜 뿐
가는 것만이 중요하다가 정처 없이 가는 것

 


     3.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김종해

사라져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 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

 


     4. 감자를 먹는 저녁
                       원무현
대처에 나간 자식들 모여서
방금 쪄낸 감자를 먹는다
둥글둥글 실한 수확물이 김을 뿜어낸다
척박한 땅이지만
올망졸망 어린것들
더우나 추우나 내 몸인 듯 건사한
흙의 뜨거운 호흡이 백열등 불빛 아래서 꿈틀거린다
어머니가 치마를 끌어내려
정맥이 불거진 여윈 종아리를 감추는 이 저녁이 지나면
우리는 어머니의 감자밭을 밟으며 돌아가야 한다
잠시 호미를 놓고 온 너와 나의 논밭으로 가야 한다

 

 

             5.왕오천축국전
                          차주일
삼보일배 걸어오르던 감이파리, 불씨 하나 뜸뜬다.
천상에 다다르기에는 아직 먼 길, 땡볕 얼려 그늘 펴던 온 몸 불태우기로 한다.
한이파리 태우는 힘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천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감이파리가 낙엽으로 내딛는 동안 허공은 온전히 탄 걸음에게만 길을 허락한다.
이윽고 이파리들이 걸음을 모두 거두고 떠났을 때,
길은 천상에 이르러 사리 같은 까치밥 하나 굽고 있었다.
길 잃은 새들이 합장하듯 내려와 길을 움켜잡고 혜초의 붉은 살을 쫀다.
길은 바람을 잡아먹고 새들보다 먼저 허공 한 장을 넘긴다.
새들 알아간 길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다

 

 

        6.파문
            권혁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7.미수(米壽)의 가을
                     박진형
백로 지나자
어머니가 기르는 텃밭은 시들하다
박넌출도 희디흰 달빛 속살도
들깻잎도 향기를 부비지 않는다
중환자실 인공심장 박동기에 몸 내어맡긴
어머니의 가을, 단물이 다 빠져나간
욕창의 세월 감고 오르는 박넌출이여
허공에 위태롭게 풍선심장 매다는 저녁
배추벌레 어린 잎사귀 갉아먹어도
더 이상 미물의 생을 간섭하지 않는 어머니
쥐 쓸다만 해바라기가 하늘 길로
어머니의 가을 전송하고 있다

 

 

           8.저수지
                   동길산
등분할 수 있다면 반으로 나누겠네. 경계에 내생의 꼭지점을 부표로 띄우고 수문을 열겠네. 잘가라 유년아 성가신 청년아 깃발처럼 팽팽하게 펄럭이던 격정아, 작별은 언제나 짧네. 기약하지 않네. 물살에 실려 하염없이 멀어져 가네. 손아귀에서 아직 파닥거리는 미끄러운 기억들아. 수위가 더 낮아지기 전 이제는 방생해야겠네. 가파른 제방에 앉아 손에 배인 비린내 오래오래 비벼 지워야겠네.

 

 

   9. 그립다 그립다 말고
                     이학영
김장 기다리는 무 밭처럼
늦가을 저녁 한 가운데 남아
기러기 떼 따라 내리는 찬바람을 맞으며
내 생은 아직도
푸른 강물에 발 담그고 있다만
그리운 것들은 벌써 건너편 산자락에 올라 있구나

 

부르면 늘 그곳에 있거니
발등만 바라보며 걸어 왔는데
그새 저만치 억새 등으로 쪼그리고 앉아
머리 흔들다가 때로 손사래 치다가
마침내 작아져서 새털처럼 가벼워져서
반짝거리는 순간으로 빛나고 있구나

 

이제 더는 그리운 것들 그립다 말 것
억새처럼 뺨 부비며 지는 햇살 쓸어 안을 것

 

 


      10. 하류
              이건청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속으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가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11. 철도원 2
               노향림
긴 골목길 끝나는 곳 돌아나오면 철도가 숨듯이 엎드려 있다. 멀리서 땅 땅 망치 두들기는 소리 들리고 어디선가 무개차(無蓋車)가 돌아 나와 텅 빈 삶을 적재하고 이마 맞댄 동네 처마 밑으로 제 힘 다해 키 낮추며 기어간다. 살아온 무게만큼 나무토막, 부서진 안테나, 사금파리, 호루라기 소리, 풍금소리 등 잡동사니를 싣고 새똥이 흐릿하게 앉은 침목 위를 느릿느릿 간다, 맘놓고 간다. 끝없이 이어진 철로 위 여름도 뒤따라서 짐 실은 당나귀처럼 터덜터덜 제 갈 길을 갈 뿐 이따금 끊기다 이어놓은 희미한 길이다. 그 길 위에서 갈 곳 없는 시간이 막혀 있다. 아직 햇볕이 따갑고 함석 지붕 한쪽이 다 삭은 건널목 초소 간수가 앉아서 졸고 있다. 탕 탕 문 두드려도 나올 생각을 않는다. 아무도 없는가.

 

 


    12.고요의 남쪽
                 강현국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나온 길은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
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
길은 또 한번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
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13.무언가를 듣는 밤
                  김경미
비천과 험담 그치지 않는 입을 만나고 왔다
사람이 사람 밖으로 나가는 길 있을까
적작약 백작약은 꽃 색깔이 아니라
뿌리 빛깔에 따라 구별된다고 한다
누구나 항상 자기 자신을 만나며 사는 법
내 입속 먼지가 그 여자의 혀가 되고
네 변심이 내 배반의 뿌리가 되어
어디 가지 못하는 것
그래도 꾹 다문 입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
나무가 나무 밖으로 불어나가는 소리에 밤마다
귀 대어본다

 

 


   14.내시경(內視鏡)
                  김만수
눈 달린 추를 몸 속에
달아내려 보자 한다
어느 울타리가 무너져 내려는지
추적해 들자 한다
료숀으로 다스린 낯짝보다
더 깊은 바람의 흔적과
군데군데 낙엽들이 지고
차가워져 지는 골목
내 영혼이 잠시 기대고 선
울타리 오십 년
헐렁한 벽과 벽, 그 밑동을
가만가만 흔들어 보자 한다
얕고 깊은 바람 속으로 굴리고 온 몸
그 매케한 냄새와 연기를 꼼꼼히
들여다보자 한다

 

 


        15달과 게
                 김옥희
내가 낳은 어미는 아직 젊어서
바닷물이 부엌까지 밀물지는 집에 살지
약 오른 게들 집게발 쳐들어 달빛 움켜지는데
어미는 머리 아프다 허리 아프다
죽은 어미 불러 놓고 거품 물며 소곤거리지
아픈 어미 낳은 나는 두 눈 굴리며
어둠을 더듬어 옆으로만 기어다니지
어미는 병이 깊어 내 다리를 똑똑 분지르지
껍질을 볏겨 물컹하게 쏟아지는
달빛 밴 허연 날, 빨아먹고 입맛 다시며
이제는 내가 어미를 낳을 차례지
저기 어미 하나가 또 파도 치며 달려드는데

 

 

       16강가에서
                    윤제림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 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 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17. 접시 안의 바다
                    조영서
남해행 직행 버스
지난 여름 훔쳐 온 바다를 돌려보내는
땡볕이 부서지곤 했다
파도가 소리치곤 했다
해질 녘,
산낙지 한 마리가
바다를 비비꼬곤 했다
하늘을 휘감곤 했다
눈알을 굴리고 했다

 

먼 수평선이 접시 안에서 꼬물거리곤 했다

 

 

     18. 거대한 세숫대야
                      김혜수

방생한 물고기를 하류에서 되잡아 파는 사람을 목격하고 할머니가 자라를 집으로 되가져왔다. 수 없는 방생과 포획의 고리에서 간신히 벗어난 자라는 지금, 세숫대야 속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고 할머니는 방에서 자라목을 움츠리고 있다.

 

할머니의 방생은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 자라가 할머니를 방생할 차례다. 할머니를 방생할 좀더 큰 세숫대야는 어디 있는가. 부레가 달린 자유란, 그 보다 좀더 큰 대숫대야가 필요할 뿐이다.

 

 

      19.폭풍 속으로
                             김행숙

으으으 달린 뿐이다 입에서 쇠 냄새가 난다 무엇에 대한 맹목 때문인가? 무엇에 대한 공포 때문인가?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무엇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으으으 느낀다 내 속도는 잡아끄는 머리카락의 힘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피가 힘차게 당겨진다 나는 변신(變身)을 도모한다
입에서 입에서 쇠 냄새가 난다 나는 순수해진다 나는 일점(一點)으로 수렴될 것이다.
집중은 부분적인 마비를 동반한다 심장이 뛰는 속도에 비하면 으으으 내 동작은 슬로우 모션이다 어떤것도
먼저 멈추지 않겠다 나는 지금 무엇에 대한 직전(直前)이다
아직

 

 

    20등불 곁 벌레 하나
                    김영석

옛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풀나무나 꽃만 그리지 않고
눈에 잘 뛰지 않는 어느 구석일망정
작은 벌레 하나가
그 속에서 조용히 살게 하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오늘은 내 홀로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
그 생각의 등불 곁에
작은 벌레 하나를 숨쉬게 하여
그 가느다란 더듬이로
먼 세상을 조용히 그려본다

 

 

   21 백년의 그늘
                유재영

새 한 마리가 똥을 누네 느릅나무 가지 사이로 반짝, 빛나는 지상의 얼룩. 조금 전 밀잠자리 사냥으로 배가 부른 채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즐기시던 버마재비가 순간 놀라 속옷까지 다 보이며 날아가네 며칠 전 알에서 깨어남 금빛어리표범나비 날갯짓 한참 하고 가더니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던 금강초롱이 비로소 꽃이 되었다 보는 이 없어도 그냥 이루어지는 저 아름다운 기교여 소풍 나온 어린 바람 저희끼리 치고받으며 히히대고 어느덧 개망초꽃 너머 한결 팽팽해진 햇빛들, 느릅나무는 오늘도 그냥 그 자리 백 년도 더 된 커다란 그늘을 평평하게 깔고 있었다.

 

 


        22 장선리 
                 양문규

마당 한 가운데 너럭바위 있다
댓돌 위에 검정 고무신 있다
마루 한쪽 맷돌 확독 있다
뒤뜰 크고 작은 독 있다
외양간 코뚜레한 소 있다
사랑채 흙벽 종다래끼 뒤웅박
키 호돌이 삼태기 있다
뒷간 똥장군 똥바가지 있다
정짓간 쇠솥 있다
조왕신 절구통 절굿공이 있다
헛간 벽 쇠스랑 갱이 갈쿠리 걸려 있다
도리깨 홀태,
족답기 탈곡기 있다
쟁기지게에 얹혀 있다
닭장 닭둥우리 있다
개울 나무다리 놓여 있다
뒷산 서낭당 있다
상엿집 있다
천태산 남고개 너머
더 깊은 골짝
장선리

 

 

      23. 육체는 가난하다
                       박용하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야
가령 새털구름으로 이루어진 집의 육체 같은 것 말야
모든 삶의 영광과 환희는 너무도 가벼우므로
휘발유처럼 쉽게 뭉쳐져 비로 사라진다
결국, 내 육체는
무거운 생의 나비를 발견하는 일에 다름아니니
어찌하랴,
내 마음의 푸르른 관심들 속에
공허한 진눈깨비들의 유영으로 가득차버렸으니
한없이 달콤함 가난의 내 사랑,
나는 천국의 현관이 절벽과 맞닿아 있음을 안다
이 집의 내부는 너무 황폐해버렸어
새와 나무와 여자는 이제 지구를 날지 않아
오 가여운 내 희망. 희망의 인공 도시들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야
죽음은 왜 그리 질기기만 한지
만만한 죽음은 이 지상에 왜 그리 없기만 한지

 

 

     24.웃음
               손광은

나를 밖으로 끌어내는 소리
당신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
우리들이 모여들 때에 손을 흔드는 소리
모두가 기다리는 오늘을 믿고 사는 소리
한참 내 마음에는 흰서리 날리듯 대낮을 휘젖는 소리
어제를 깔고 앉아 비밀을 터 놓는 소리
저, 파괴된 우리들 심장 사이
그들을 밀어내고 안개를 걷히듯 얼굴을 비벼가는 소리
그윽한 신성을 눈결에 저미여 새실대는 눈결 소리
얽어 놓은 내 신앙심을 고집하듯 울리는 소리
다시 와서 내 마음에 움트는 심령의 소리

 

 

      25. 피안(彼岸)
                       이은림

저 집들, 언제 강을 건너
저렇게 무덤처럼 웅크리고 앉았나
아무도 몰래 건너 가버린 저 산들은
어떻게 다시 또 데려오나
젖은 길만 골라 가는 낡은 나룻배가
산과
나무들과 꽃들,
풀밭을 다 실어 나른 건가
남아있던 불빛마저 참방참방 뛰어서
저 편으로 가는구나
환하다,
내가 없는 저쪽

 

 


      26. 가까워지면 위험하다
                           양애경


사람은 누구나 가까워진다
위험해진다
내가 그를 상처 내거나
그가 나를 상처 내거나

 

그래도 피하기 하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고
네가 몇 세기 전 어둠 같은 눈길로
내게 말했다

 

그 눈길이 나를 깊이깊이
상처 내어

 

갑자기 피가 강하게 맥박치며 넘쳐흘렀다

 

 

     27.일당쟁이
              김해화

점심때 함바 옆 공구리 바닥
안전모 베개삼아 한숨 잠을 청하는데
현장소장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휙 내던진 종이컵
내 머리맡에 또르르

 

이 일
끝나면 내던져져
추운 세상 또르르 굴러다녀야 할
나도 일회용

(노동자들의 슬픔)

 

 


      28.퍼포먼스
                      우대식
스스로 자르며 오르는 것
그것은 소나무다
바람엔 듯 꺾이고 비틀어진 가지들
실은 스스로를 자른 것이다
중심을 위하여 가지를 잘라내는 생의 퍼포먼스
하여,
중심마저도 이 땅에 맞지 않을 때
스스로 누렇게 시들어 가는 장엄
바람이여,
생 앞에 무엇이 아픈가

(인간상의 표본-실존적 조건을 극복)

 

 


       29.행복
                 양성우

하늘이 우리에게 사람의 껍질을
입혀주었을 때는,
모두가 기쁨으로 어울려 일할 권리와
일 뒤에 일보다 더 많이 배부르고
편안할 권리도 함께 나누어주었나니,
맨 처음 하늘이 우리에게 넋을 주고
사람의 껍질을 입혀주었을 때는,
죽어서 일손을 놓고 돌아가는 날까지
모두가 골고루 자유롭고
그리하여 낱낱이 넘치도록 행복할 권리도
함께 나누어주었나니.

(고용불안 불평등의 골)

 

 

       30. 광주가는 길
                     김종

희망을 섬기는 외로운 사람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기도하던 곳, 광주

 

그렇다 광주는 음악소리 아름다운 별들이 내리는 곳이다
그렇다 광주는 한나절 태양이 팔벌려 어깨동무하고
고통이나 시련도 사랑으로 곰삭아 익어가는 곳

 

이야기가 살아 있고 감동으로 물결치는 춤과 노래가 있고
대빗자루 같은 붓을 들어 시대와 풍속을 그리는 사람들

 

이름하여 광주, 광주를 보러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광주를 찾아가서 인기척을 배우고 손 내밀어 악수하고
볼부비고 얼싸안고 그리고 귀기울이면
거기 물소리처럼 지나가는 맑은 기운의 광주가
우리네 간절한 세월을 한자리 꽃밭으로 일구어 간다

 

사랑하자 사람들이여 광주를 사랑하자
눈맞추자 사람들이여 광주를 눈맞추자
보듬아 안아올려 광주의 눈썹과 배꼽과 머리와 이마를 넘어서자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돌아온 광주의 양어깨를 사랑하자
세계의 이목이 하나로 집중된 광주의 정열을 사랑하자

 

삼가 주마등처럼 아름다운 청춘의 도시를
그 모닥불같은 섬광같은 해돋이를 보러가자
산청초목 감동하는 정신을 보러가자
예술을 보러가자

 

 


       31. 다리 위에서
                 이용악

바람이 거 센 날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괴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려 무섭다고 했다

 

국숫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그리워지는 어려선 국숫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하였다

(생계전선에서 아버지 제삿날에나 겨우 힘든 노동의 둘레를 벗어나면서)

 

 


     32.무제
               허영자
돌틈에서 솟아나는
싸늘한 샘물처럼

 

눈밭에 고개드는
새파란 팟종처럼

 

그렇게
맑게

 

그렇게
매웁게

(훼손당하지 않는 생의 본성과 용기)

 

 

 33. 깊이에의 강요․2
                 전기철

달이 비친다. 한강 물 속으로 달이 비친다. 달은 한강 속으로 뛰어들면서 하늘의 높이를 깨닫고 한강은 달을 껴안으며 강바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달은 물 속으로 들어가며 회색빌딩이 숨을 집을 찾고 한강은 달을 안아 공중으로 솟구칠 수 있다.
달빛이 어린 빌딩들이 한강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강은 물 속에는 달빛 줄기를 따라 줄지어 걸어 들어가는 긴 행렬이 늘어서 있다. 깊은 강물 속에 담근 달은 허공의 깊이만큼 한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달빛처럼 솟구쳐 오를 꿈의 강바닥과 마주친다)

 

 

      34.익숙해진다는 것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가 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장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뀐다
발자국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사회생활을 지속하기위해서 그 습관이나 관행을 바꾸거나 멈추어야 한다)
 

 


       35. 짐차
                 권애숙
등뼈 휘도록
무거운 짐이라도 져
중심을 잡고 싶은 바닥

 

지고 싶지 않는 잠이
꽉 쏟아버리고 싶은 짐이
삶의 추가된다
(늘 흔들리거나 상처 받은 생의 중심은 등뼈 가 휠정도로 무거운 짐마저 감당할 때 현실)

 

 


    36.비누
             이승훈
비누는 가늘고 내리는 가랑비 가랑비 내리던 아침 그대와 길을 떠났지 비누를 가방에 넣고 떠났던가? 오늘도 가랑비가 온다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 밤이면 하얀 눈발 어둠 속에 비누가 반짝인다 비누는  마루에 있고 거실에 있고 화장실 거울 앞에 있지만 비누는 과연 어디 있는 가? 비누는 씨앗도 열매도 아니다 아마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앉아 있으리라

 

 

   37. 강과 나
             오규원
강과 나 사이 강의 물과 내 몸의 물 사이 멈추지 못하는 강의 물과 흐르지 못하는 강의 둑 사이 내가 접히는 바람과 내가 풀리는 강물 소리 사이 돌과 풀과 흙 사이 강을 향해 구불거리는 길과 나를 향해 구불거리는 길 사이 온몸으로 지상에 일어서는 돌과 지하로 내려서는 돌 사이를 돌 위의 새와 새 위의 강변 사이 물이 물에 기대고 있는 강물과 풀이 풀을 붙잡고 있는 둑 사이 내 그림자는 눕혀 놓고 나만 서 있는 길과 갈대를 불러모아 흔들리는 강 사이

 

 

       38.막창 같은, 붉은 신호등
                               고희림
사후에도
그 존재가 확실한 용도의
돼지나 소 막창 같은, 저 붉은
붉은 신호등 앞에서
멈추고 멈추어 온 나는 지금도 멈춘다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은 색은 다만
나를 잠깐 멈추는 이유는
신호등의 저 붉은 색이
질서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환상 때문인가

(타성화 된 인식에 대한 무언 경고를 담고있다)

 

 

      39.서해 2
                문동만

포구에서 잘 익은 뱃사람들이 딱 손바닥만한
우럭새끼 한 마리를 안주 삼아 두 점의 안주로 나눠
됫병 소주 반을 비우고 있다
9월이면 꽃게를 찾아 백령도로 갈 것이라 한다
나도 경계 없는 심해에 둘러친 그물을 한 코한 코
성긴 집게발로 찢고 찢으며 기어가고 싶었다
수장당한 살점들이여 이곳처럼 그곳도 그러하리라
육담과 욕지기에 절은 땀과 황혼의 포구에서
우럭들이 거므스레 늙고 있을 것이다.

 

 

     40. 고향집
              이민호

처마 끝 거미가 빛나는 이슬방울을 물고 내려왔다
냉골 찬 구들장 찢어진 장판 틈새
몸이 말간 어린 귀뚜라미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코끝이 시리다.

 

새끼들의 붉은 입이 가득한 제비집

 

이제 와
다 자라 떠도는 것들은 바람마저도 흉흉한데
(고향집의 회상)

 

 

      41. 물결 노래
                  강인한

가장 온전한 그리움으로 그대를
생각하기 위하여
이 어둠을 조용히 불렀거니
어디만큼에서 목마른 손을 나누고
우리가 헤어졌을까
오늘은 너무 멀리 떠나와
사랑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라
희미한 달무리로 번지는
내 옛날의 소중한 아픔
긁히고 부딪치는 돌 자갈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이 밤도 흘러가나니.

(소리없이 흘러가는 밤의 물결소리는 맺지 못한 인연을 아름답게 승화)

 

 

  42. 이상론(論)
                   이종암

대학1학년 전공필수 문학개론 시간
이상(李想)같이 생긴 강사 선생님은
이상은 양파다, 라고 이상한 말을 했다
껍질하나 까면 껍질 다시 까도 또 껍질
껍데기 껍데기 끝없이 벗겨내도
속은 절대 보여주지 않는 보여 줄 수 없는
밖이 안이 되고 안이 밖이 되는
그래 양파는 이상(異常)이다
이상은 삶음의 밖이다 안이다
이상하게 껍데기도 알맹이도 없는
양파는 이종암이다 너는 나다
안팎이 따로 없는 이 비밀은
이상이 죽는 나이를 지나 사십이 되면
쭈그러드는 몸이 풀어낸다
이중 삼중, 빨강과 파랑 노랑 그 모두가
하나라는 것,
이상 끝.

(나룰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우린 각자의 세계의 중심이 된다)

 

 

  43우물의 눈동자
              김수복.
폐허의 언덕 위 도시 뒷골목 집들 헐어진 담벽 사이로 빈 동공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 몇 그루 세 들어 살고 있는 빈 우물 속 저녁이면 별똥별은 떨어져 내려와 우물의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하늘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우물의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완성을 위한 응시의 거울이자 그 깊이 가늠할 수 없는 몽상으로 가는 통로)

 

 

      44.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당신의 사랑을 시치미떼지만 애절한 사랑을 하고 있다)

 

 

   45. 두악기
              이승욱


고모부는 아프다
그래서 고모도 더 아프다
대청마루 위에 불거져 나온
물기어린 뼈와 뼈
찬연했던 한때의 연주
숙연히 끝내고, 찾았던
관중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돌아설 때 가장 슬픈 소리를 내는
두 악기를 닮아간다
귀를 씻어도 금세 넘쳐나는 밀물처럼
두 악기 소리 내 귓바퀴 속에 지칠 때
고개 들어 저 빈 들에도 가득
소리 없는 가을 음악
내 슬픔을 끌고 가는
맨드라미 신음의 몸빛이
터질 듯 붉다!

 

 

     46. 상유가(想儒歌)
                     조경석

서해안 고속 타고 유달산 일등 바위 오르니
압해도 연육교 다도해 고운 노을 가슴 트이네
고하도 용머리 휘감고 들어오는 두둥실 황포돛배
삼백의 목포는 개항 10년 위 역사 속에 사라지고
수심 깊은 허사도 신 외항에 무역선 줄지어 있고
제주가는 카페리 홍도 가는 관광 쾌속정 푸른 물 가르네
새 천년 새 전남 정 많고 인심 좋은 목포는 항구다

 

백두산 뻗은 북악에 맺어 경복궁에 태극기 휘날리고
관악산 기슭에 정부2청사 나라 살림꾸리네
목포행 고속 열차 기적 울어 무안 반도 남악에 이르니
영산강 하구언 잔잔한 호수 안고 전남 도청 우뚝 섰네
북악산 관악산 남악산 삼 형제는 애국가 봉창하고 상유가 합창하네
예향의 목포 관광의 목포 세계 속의 수출항으로 번영하리라
시 천년 새 전남 정 많고 인심 좋은 목포는 항구다

 

 

    47. 우물승천
                   정우영

오랜만에 고향집 뒤꼍으로 가서
한 이십 년 족히 갇혀 있던 우물 뚜껑을 열었더니
늙은 개구리 한 마리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반쯤 쥐에 뜯긴 붕어도 한 마리 슬슬 헤엄쳐 나온다.
꽃다운 나이 열둘에 우물 속으로 사라진 누이도 나올까 싶어
한참 동안 쭈글치고 앉아 기다린다
영 기미가 없어 윗몸 우물에 거꾸로 들이밀고 소리친다.
우리 누이는 언제 나온다냐?
내 말 메아리 되어 우물 속을 웅웅 떠다니더니
마술인 듯 우에서 하늘길 열리고
누이 닮은 하얀 연꽃 하나 다소곳이 걸어나온다.
아하, 나는 불현듯 깨닫는다
누이는 선녀처럼 두레박 타고 내려가 승천했음을.
우리 집 우물이 하늘로 되돌라가는 자궁이었음을.

 

 

       48. 새말, 낡은 집4
                      홍은택

나를 따라 집 오래 떠났다가 길들이
돌아와 핍니다 봉당 화단에
꽃으로 핍니다
채송화 과꽃 봉숭아 분꽃
능소화 수국 해바라기 나팔꽃의 길
울안 가득 희고 붉은 참 많은
길들이 피었다 집니다

 

나 아예 집 떠나는 꿈 꿀 때마다
생각의 힘만큼 힘껏 가보는 길
끝 아슴아슴한 벼랑에서는
추락이 두렵지 않는 꽃숭어리들
넝쿨장미로 피었다 빨갛게 집니다

 

 


 49.미륵반가사유(彌勒半跏思惟)
                         조진태

박형!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인 채로 밤이 새고 대낮이 지나는 날들을 본적이 있을까10일간의 축제에 생의 목표가 맞춰져버린 사내의 눈망울을 본적이 있을까
눈물이 말라버린 채로, 내가 보기에는 극단의 슬픔으로 영롱해져 눈물처럼 맑은 하늘을 담고있는 그 투명한 얼굴
손가락사이에 끼워진 담배 연기의 자취에서 인간의 잔혹함과 동시에 또 다른 인간의 순결함의 경계를 이미 보아버린 영혼
세상을 뜨지 못하고 생의 언저리에서 무엇인가를 붙들고서는 끝끝내 견디고 있는,
메마른 은행나무 우듬지 그림자 누워있는 시멘트 블록에 걸터앉아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서는 상원이와 용준이 들을 가끔은 호명하며 앉아있는
그래서, 그대들 순결한 기억 속에 태초의 세계가 머물고 있는 게야, 라고 말하려 했던 것일까

 

박형!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어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 사내 웃는 듯 조는 듯 허공에 새 한 마리 길게 날고
담배연기가 마치 천년을 건너 파란 하늘을 새털처럼 나는 듯이,
그렇게 문득 오월의 뒤끝을 생각하는 중인데 말일세

(5.18 이후 상원이와 용준이 죽었는데 현대판 미륵과 같다)

 

 

      50.어둠공부
                  고성만

왜 갈수록 공부라는 말이
좋은지 몰라 아이들
환히 불 켜 놓은 창가
우네 저녁 새 우네
자지러질 듯 짹짹거리는 것은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일거야
누굴 애절하게 부르는 것은
이제 막 해산한 어미거나
눈가에 잔주름이 하나 더 늘어난
아비일거야 나 배고픔 같기도 하고
서글픔 같기도 한 눈으로
푸르게 일렁이는 숲 바라보네
의자 갖다 놓고 앉아
모르는 사이 깊어 가는 어둠
들여다보네 아직 덜 된 공부
마저 하기 위해

 

 

    51. 반달곰
                심호택

녀석이 옹달샘에 나타나
석간수를 맛보고
찔레꽃 봉오리를 톡톡 건드리면
숲은 서서히 요동하는 것이었다
그럴라치면
웬 변성기의 뻐꾸기 한 마리
퍼들껑 깃을 치며 깨어나
죽겠네 살겠네
볼멘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다
저 새가 벙어리뻐꾸기라고
계룡산 처사와 모악산 거사는
서로들 우기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워워! 혀짜른 네 음절로
아무렇게나 우는 것을
녀석은 숲을 깨운 일만이 대견해
그 벙어린지 검은등인지
큰일이 났다고 자지러지건 말건
유유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성이를 오르는 것이었다

 

 

     52.달개비
              신대철

아이들이 놀다 간 들판 초입에
보랏빛이 남아 있다
달개비, 달개비

 

나는
흘러온 길을 다시 흘러온다

 

대처에서 온 아이
자전거 타고 앞서가고
웃자란 풀 쓸리는 소리

 

풀내 배어들기 무섭게
하늘에서 폭격기 내리쏟고
둑길 휘감으며 달려가는 아저씨
말문 막혀 머릿수건 휘젖는 아주머니
허공을 향해 돌아가는 헛바퀴 소리
숨을 새도 없이 엎드린 개울창에
산산이 흩어진 대처 아일 감싸 안고
초롱초롱 피어 있던 꽃

 

달개비는 여름 내내
대처 아일 불러내어
그 혼으로 피고 또 핀다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은 폭력을 지워가기 위한 몸부림이자 아무 죄 없이 사라져간 그 아이를 위한 진혼을 위해서)

 

 


   53 허송
              임강빈

등기 소포나
택배로 보낼까 했습니다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보낼 것 것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세월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일입니다
슬픔 자체가 세월입니다
외로움도 매한가지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지만
짐이 점점 커져서
보내기 쉽지 않습니다
너무 섭섭하다가나
야속타 하지 마십시오
뼈아픈 허송 세월은
빼기로 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

 

   54. 짚가리
            윤임수

가을일 모두 끝나고
서릿바람 검실거리는 들판에
낮게 허리 엮은
짚가리마저 없다면
세상 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아직 수줍은 살얼음은
그 여린 등을 어디에 기댈 것이며
팔십 평생  땅 한 평 갖지 못한
우리 아버지 그 질긴 눈물은
또 어디에 훠이 훠이 뿌려댈 것이냐

 

 


 55.탐석(探石)
            윤석주

가벼운 것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몸이 무거워 뭉그적대는 것들만 남아
버둥대고 있구나 한세월,
선택되지 못한 생들
달동네를 이루고 있는 강바닥
나도 하나의 잡석(雜石)으로 쪼그리고 앉아
뜨거워서 뒤척이고 추워서 돌아 눕다보면
내 모난 삶도 닳고 깎여
모양 좋은 수석이 될까

 

세워보고 눕혀보고
맘에 들지 않는 생을 종일 뒤적거려 본다

(모양좋은 수석을 찾겠다는 제 잇속과 욕망에  몸이 무거운 나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56.엉겅퀴
            테드 휴즈(Ted  Hughes)

젖소의 무고한 혓바닥과 사람의 괭이질하는 손에 대항하여
엉겅퀴들이 여름공기를 찌르거나
검푸른 압력에 못이겨 딱딱소리 내며 터진다

 

모두 각기 복수심에 부활의 파열, 한 움큼 움켜진
산산조각난 무기, 부패한 바이킹 땅 속 오점에서

 

밀고 올라온 아이슬랜드의 서리,
엉겅퀴는 창백한 머리칼 같고 방언의 후음(喉音)같다
모두가 핏빛 깃털을 쓴다

 

그리고는 백발이 된다, 사람처럼
베어버리면, 대를 두고 풀리지 않는 숙원이 된다, 엉겅퀴 자손들이
나타나,
무기로 빳빳해져, 같은 전쟁터에서 반격한다

(불의에 모욕당한 자를 자기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순수한 연민의 대상을 투쟁의 주체로 뒤바꿔가는 끈질긴 생의 의지를 나타낸다)

 

 

  57. 가시집
            오봉옥

난 세상의 상처, 가시집을 짓고 산다
여긴 풀꽃 하나 피어날 틈이 없다
어제도 노랑나비가 무심코 날아와선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바람이 먼 길을 돌아 슬그머니 사라질 때
먼 길을 비로소 돌아본다 한동안 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는 밀물이었다 벅찬 요동이었다
하지만 난 한순간의 썰물인지조차 몰랐다
누가 있어 세상을 바꿔가는 것일까
처음 본 황혼이 또 우루루 우루루 무너져내린다
난 지금 눈물을 가만히 뉘어놓고 세상의 한 끝을 응시하고 있다.

(혁명이 지난 다음 변혁되어 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지켜야 할 이념 또는 바꿔가야 항 가치가 남아 있다)

 

 

  58.수종사 풍경
              공광규


양수강이 봄물을 산으로 퍼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풍령소리에 생노병사에서 벗어난 자신의 실상)

 

 

     59. 나의새
                    유승도

 내가 인간세계에서 승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듯이
새의 세계에서 새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알고 싶다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더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불겠지.........승도야

 

(인간이 아닌 새의 눈높이에서 새와 만나고 그 이름을 부를 때, 세상 만물은 인간과 진정한 교감의 친구가 되리라)

 

 

    60. 마술
              장철문


우리 어머니 요술쟁이 없는 마술을 낳으셨네
우리 어머니 무엇을 낳으셨나?
껍데기도 없이 텅 비었네
우리 어머니 어떻게 아들을 부르시나?
당신의 아들을 찾을 수 없네
아들 없는 어머니 어디에 계시나?

(모성애)

 

 

    62. 슬픈 소
                  김왕노

풀이 입안에서 일어서려 합니다
되새김질합니다.
풀 속에 스민 햇살이 자꾸 일어서려 합니다
되새김질합니다.
풀은 일어서야 한다고 소리 칩니다
되새김질합니다
밤이 와 별이 양철지붕 같은 하늘을 두드려도
되새김질합니다.
풀이 입천장을 뚫고 나올까
끊임없이 돼새김질합니다

(지루하도록 반복되는 엄격한 반성과 성찰 속에서만이 지식은 나의 성숙과 변혁을 약속해 준다)

 

 

63. 엄마가 싸 준 떡
                정영

속에 엄마 머리카락
곱슬고 검은 엄마 머리카락

 

먹장구름 아래서
곱씹는
꿀떡 삼키면 뱃속이 든든한
엄마

(꿀떡을 곱씹는 행위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날들에 대한 즐겁고 또 서글픈 반추임)

 

 

   64.목숨
         박진성


새로 비탈에 선 느티나무, 차갑다, 편서풍이 몰고 오는 모래바람 속 수령 사백 년의 목숨은 타클라마칸이거나 산둥반도, 스물 입곱의 내 발이 디디고 있는 경기내륙지방 하천의 지류를 품고 흔들린다, 흔들린다, 소리를 내느라 잔뜩 긴장한 물결은 바람의 몸을 받아내겠지 목으로 숨쉬면서, 황사라는데, 여자야....... 새로 비탈을 깎고 있는 느티나무 뿌리가 목, 숨, 목, 숨 여자야 여자야 쉼 쉬러 가자 황사바람이 불어오는 곳에는 무서운 짐승이 산단다 병(炳)이 숨을 끊으려는가 실핏줄처럼 물에 길 내는 물고기 한 마리는 온 몸이 목이어서 온 몸이어서 오오 목숨

 

 

65.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다
                           이지엽


그 아무도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다.
세상이 나 혼자만을 택한 것이 아니므로
누가 저 어둠 속에서 오는가 그를 위해 나는 울지 않는다.
천일(千日)같은 하루가 가고 창밖으로 손을 흔들지만
사람들은 흘러가고 흘러오고 물건값을 흥정하고
으레 거래 뒤는 허전하다
광장은 비어 있었다.
새벽종소리도 남을 위해 울지 않는다.
자신의 침묵에 금을 그으며 울 뿐, 희망과 꿈을 갖지 말자.
내일은 내일은.... 이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는 예수를 다시 죽게 할 것이므로
중요한 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고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 것이고
오늘 내가 여기 있는 것이고
그래서 희망이라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
눈물겹도록 껴안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상에서 벗어나 오늘 여기에 존재하는 나의 유한성에 대한 눈물겨운 긍정으로 승화된다)

 

 

   66.머리카락
          김명수

치렁치렁한 미역 혹은 다시마를
상상한 게 아니고요
돌돔 한 마리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파릇파릇한 청태 혹은 파래를
상상한 게 아니고요
검은 줄무늬 고기
돌돔 한 마리를 떠올렸던 겁니다

 

아마도 지난여름 백사장에서 내 머리카락 하나가
바다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나와 나의 존재가 섬광처럼 짧은 순간이나마 완벽하게 만날 때, 나의 깊은 무의식은 일견 무관 한 듯 보이는 머리칼을 흑돔 한 마리로 변형시키는 연금술을  선보인다)

 

 

  67. 치사한 밥상
                      이중기

치열했던 우리들 어린 밥상을 기억합니다.
그 날 저녁에도 여섯 형제는 빙 둘러앉았었지요
삼복더위에 어머니는 국수를 삶았군요
나를 둘째, 그러나 느긋합니다
어머니가 셋째 아들 그릇을 채우는 사이
국수한 그릇뱃속에 엎어버렸는지
더 줘! 장자는 잽싸게 빈 그릇을 내미네요
셋째 몫은 장자에게 넘어가구요
넷째가 기다리는 사이 나도 빈 그릇을 내밉니다
더쥐! 다줘! 나도 나도 나도.....
국수는 동이 나고 막내가 으앙 울음을 터뜨립니다
다시 국수를 삶은 동안 막내는 캄캄했겠지요
더러는 어머니처럼 깜박 굶은 적도 있었지만
우리의 밥상은 늘 그렇게 치사했습니다.

 

올 봄에도 막내아우에게 이자 없는 농자금을 갖다 씁니다.

 

 

 

68. 국수
          강대실

고향 찾아 갈 때는
관방제 초입 포장친 집에 들러
국수 한 대접 하고 간다
처마 밑 비집고 들어서
틈서리 목로에 자리잡고 앉으면
“국수 한 그릇 꼬옥 먹고 잡더라만,
그냥 왔다”시며
허리춤에 묻어온 박하사탕
몰려든 새끼들에게 물리는 어머니,
흔흔한 미소 뒤에 갈앉친
허기진 모습
원추리 새순처럼 솟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배고픔 대신 채우고 간다.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국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69.염소의 반란
                 김연종

염소가 뿔을 세운다
두 눈 치켜뜨고
앞다리 쳐들고
두 뿔로 벽을 받는다
어미를 들이받는다
굉음을 지르며
사정없이 물어뜯기도 한다
놀란 풀들이 따라서 기절한다
어미염소도 따라서 기절한다
풀밭 위로 말없는 평화가 지나가고
염소가 다시 풀을 뜯는다
더없이 순한 염소가 되어 꼬리를 흔들어댄다
갈기를 세우고 초지를 뛰어가기도 한다
바람의 갈기가 다투어 지나간 다음
풀들이 일제히 일어나 노래한다
풀들이 춤추고
염소도 춤춘다

 

 

  70.풀약
            박태일

뼈마디 곳곳 통마늘 든 나날
앉아도 저리고 누워도 시려 용하다는 그 비약도 얻으려면 두렁길 지푸랭이처럼 흔하지만 댈 돈이나 있으면 쌀됫박을 깨지 날로나 데치나 파랗기로야 홀잎나물 홀잎같이 내 몸 생생하기를 어찌 바라겠느냐마는 약을 먹어 살아가는 일보다 약을 먹어 죽어 나가는 일 많이 본 억장 세월 시집온 날부터 이날 이때꺼정 가슴에 앉은 숯검정은 두고라도 서른 해 이른 이 지랄 같은 병에는 돌미나리에 쓴 고사리 앙가시에 호라지좆
산에 들에 저 풀나물
어떤 놈이 내 약 될꼬

 

 

71. 지난 주말에 들르겠다던 친구를 기다리며
                                    이창기

돌이킬 수 없이 깜깜한
그런 시골 밤이 싫어
이른 저녁 먹고
개밥주다
그냥저냥 손해 보듯
잠시 별 보고
느지막이
불 밝힌 다락방 앉아
버리지 못한 책의 성긴 글 몇 줄 뒤적이다
 별 수 없이 창 밖을 바라보네
풍진(風塵)이 가뜩 낀 창가엔
어느새 생각의 날벌레들
수북이 쌓이고
그 어둠의 코앞에
지금은
머리 깎고 입 다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네
특히 지난 주말에 들르겠다던 친구를 기다리는
이런 밤에는
그런 별 하나가 또렷이 보이네

(고립감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참된 친구의 초상이라)

 

 


  72. 첫사랑
               여상현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는
첫사랑은 예쁘디 예쁜 못된 놈이여

 

아아 격(格)에 울음이 웃음이 어느 게 맞느냐

 

사랑은 일요일의 구수한 한화(閑話)
입덧난 색시가 먹다둔 신살구인가


(첫사랑이 입덧난 새색시가 먹다 남은 신살구처럼 잊어버리자니 웬지 서운하고 오래 붙들고 있자니 마음만 괴로운 게 첫사랑의 역설)

 

 

 

    73.그늘
               조현석

누구일까, 이곳에 숨 가쁜 토악질
해대고 가는 사람은
또 누구일까, 이곳에 앉아
지친 마음 풀어놓고 가는 그 사람은

 

사이드카를 몰던 그가
긴 장화 벗고 유행가 한 곡을 부르다 가고,
높다란 담벽의 건물 멀거니 지키던 그가
긴 담배 한 대 피우다 가래침 뱉고 가고,
가방 속의 화염병 어쩌지 못하는 그가
망설이다 내팽개치고 사라지는

 

누구나 오고 있는 곳이라면
와서 굵은 종지부(終止符)가 아닌
마음 넉넉한 휴지부(休止符)를 마련하는
어둠 한 켠이라면


(일시적인 세상의 의무와 책임감등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적 영토)

 

 

 

   74.저녁별
             전동균

산비탈 아래
마당없는 집 문간방에서
쌀 씻는 소리 들린다

 

온종일 혼자 지낸 뇌성마비 아이가
몸을 비틀며 간신히
울음을 참듯이

 

이 세상 모든 근심을 제 품에 들여
입 꼭 다물고
떨고 있는 별,

 

그 빛에 기대어
간고등어 한 손 사들고 귀가하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파란만장
하수구 물소리 쏟아져 내린다

 

 

   75. 어떤 날
               최민

거대한 우주선 군단이
하늘을 낮게 지나가듯
구름떼가 일제히 이동한다
대책없는 사물들 죄다
비명 지르고 빛을 잃다

 

네 말처럼
이 세상은 죄가 없다
청둥벌거숭이 하나
두 팔 벌리고
사방 뛰어다닌다


(모든 생명체는 흠도 손댈 것도 없이 진실한 모습 그 자체일 뿐이다)

 

 

76. 실 종
         이창수

마루에 모여 저녁을 먹는데
늙은 무당이 찾아왔다
콩밭에 매 놓은 염소가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호박국 그릇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아버지의 이런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무당이
아까 낮에 분명히 우리 밭 콩잎을 먹고 있던
염소를 보았다고 했다, 겹친 깻잎을 뜯던 나는
이장을 찾아 가보라고 했다,
김치를 찢어 동생에게 먹이던 어머니가
정 못 찾겠으면 점을 보라고 하자
무당이 실성한 염소처럼 사립문을 뛰쳐나갔다
성황당 뒤 당산나무에 재갈물린 염소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만 깜박거리는 여름밤이었다

 

 

   77.노란 알 하얀 알
                  윤주일

하얀 암탉 한 마리.
이웃집엔 이웃집엔
노란 암탉 한 마리

 

하루는 우리 집 둥우리에
노란 알 하얀알
나란히 놓여겠지.

 

“아하
웃집 닭이 넘어와
 낳았구나”

 

노란 알을 나는 곧
옆집 할머니께
갖다 드렸지요.

(나이가 들수록 더욱되돌아가고 싶은 순진무구한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완벽한 통로가 된다. 하얀닭은 하얀알을 노란 닭은 노란알을 낳을거라는 어린시절 추억)

 

 

   78. 대숲을 보며
               유하

시푸른 청개 가실 날 없네
잘 날 없는 바람매질
분주히 등 굽혀가며
등 굽혀가며
시푸른 청개 가실 날 없네

 

그러나 그 어떤 삶이 있어
저리도 옹골차게 울창하리
구부러짐으로 온전할 줄 아는
청개든 지혜여

 

나도 대숲으로 가 대숲처럼
온몸으로 구부러지는 법 배우고 싶네
청개들도록 울창하고 싶네


청개: 멍
(바람잘 날 없는  세상과 어울려 사는 법과 더불어 난세 속에서도 옹골찬 진리를 함께구하고자 하는 자임)

 

 


    79.  소금쟁이
                김영래

저놈은 완전 방수된 몸을 가졌다,
코를 틀어쥐고 물 먹이는 세상에서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수면 위를 산책한다.
떠 다니는 가벼움을 위해 먹고
싸는 일을 포기한 신선 같다
유연한 몸짓, 빙원을 활강하듯 유창한 행보.
보라, 유쾌한 정신의 물구슬 유희!
잡식으로 뛰똥거리며 마음 물밑이 두려운 우리에겐
신약(新約)의 기적 같은 현신.
저놈의 아랫배 아래서 사타구니 밑에서
가려운 파문이 이는 물은 감히 그를 묻들일 수도,
수생(水生)으로 전향시킬 수도 없다.
정말이지 저놈은 무들이지 않는 소금이다.

 

 

  80.화남풍경
             박판식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 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바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81. 죽음은 항상 남의 죽음이다
                            민용태

 

죽음은 항상 남의 죽음이다
인류의 마지막 사람에게까지
나는 조문을 가고 싶다
뉴스를 보면 사람은 너무 쉽게 죽는다
버스가 전복되고 불이 나고 죽는다
사람들은 너무 조심성이 없다

 

슬프다. 죽음 앞에서 슬픔은 늘 혼자다
남의 죽음에 에워싸여 나는
안경테까지 고독한다

 

나는 나의 죽음을 보지 못한다
어떤 형태로든 나는 현재다.영원한 현재
내가 과거의 사람일 때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과거의 나를 나는 만질 수가 없어
나의 죽음 또한 남의 죽음이다


(나는 죽음에 대한 체험은 늘 남의 죽음에서나 할 수 있다. )

 

 

  82. 무등산 보리밥
               김희수

사는 일 심드렁하여 팍팍한 날이면
배고픈 다리 건너 지선 스님 선방 지나
땀 씻으며 꽁보리 밥집 찾아들지
늙은 당산나무 아래 칙칙한 솔바람 안고
사투리의 어깨 실한 머스마들이
된장국에 시커먼 보리밥을 고봉으로 날아오면
조선말 정다산의 애절양도 생각나지
허기야 요즘 애들이 어찌 보리고개를 얄랴
아이들은 까끌하다 컵라면을 주문하지만
고추장에 비벼 풋쌈해서 한 입 먹으면
달착지근한 슬픔 한 줌 아리도록 치밀어 오지
사금파리 골목에 장구통배를 움켜쥐고
보리방구 지독하던 옛 친구의 소화불량과
쉽게 눈물이되고 분노가 되었던
아픔 날의 보리밥알과 상추쌈괴 풋고추를
떠올리지, 옛 군인들이 거듭 대통령이 된 후
서산발치 아래 피흘렸던 뜨겁던 자유를
지금은 밥걱정이 없어 좋아졌지야
아니야, 상대적 빈곤이 더 무서운 거야
흡수통일 외치는 반도의 빈익빈을.

 

 

83. 나무와 날개
      장광옥


며칠전 환하게 연등을 밝히던
살구나무 속가지에 어느새 열매가 맺혔습니다.
이파리 뒤집어 보니 파란 정맥이 도드라져 있군요
무르고 연한 목질 탓인가요,
도심의 나무는 그예 벌레집이 되어 있습니다.
다닥다닥 빈 곳이 없이 온 통 진딧물이군요
쥐똥나무 이파리 위에 뱉어내는 단물이 실비처럼 내립니다.
그래요, 살구나무가 부지런히 지금 손발을 만들고 있습니다.
씨앗 떨군 자리에 제 무덤 만드는 나무는
벌레들의 몸 빌려 움직임을 얻지요.
대로 푸른 수액을 말매미의 날개로 바꾸기도 합니다.
잎맥만 남은 이파리는
칼금 긋는 비명의 불꽃으로 타오릅니다
하여 내 여름날의 태양은
늘 이글이글 타오를 수밖에 없었던 게지요.
그 소리 받아먹는 귓바퀴 둥글게 나이테 그렸으니
나는 이미 살구나무, 가는 잎맥 닮은 손금을 들여다봅니다.
숨죽인 울음소리 새어나옵니다.
잎새잎새 깊은 강물소리 들립니다
아하, 마침내 날개를 달아도 좋겠습니다. 

(잎맥만남은 이파리와 벌레는 적대적이아닌 상호간의 사랑과 베풂을 나누며 나란히 동거하는 관계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문득 살구나무가 된다)

 

 

     84. 창조적 파괴
                  김영현

부서는지는 게 어디 나뿐이랴.
부서지고 나면 어디 상처만 남으랴.
흔들리는게 어디 하늘 뿐이랴.
흔들리고 나면 어디 그림자만 남으랴.
부서져라! 흔들려라!
별아, 다리야, 플라터너스야, 몸둥이야,
멍든 육신아, 상처받은 영혼아, 깨어지는 믿음아,
부서지고 나면 우리가 남아 새살 돋고
흔들리고 나면 땅이 남아 나무가 자라고
한숨도 흩어지고 자유도 흩어지고
천천히 때로는 급작스럽게 변화가 오고
그렇다, 변화가 오고
진저리쳐지는 억압의 사슬도 끊어터진다.
나무도 돌도 무진무진 자라서
반도 가득히 자라서
더러운 것들은 비행기로 떠나고
허겁지겁 보트를 타고 떠나고
(더러는 바다 속에 빠지고)
부서져라!  흔들려라! 두려워하지말라.

(창조적인 파괴 없이 그 어떤 변화나 새로움을 얻지 못할지니)

 

 

     85. 순례기
                신달자

사도(使徒)처럼
일상의 비늘을 툭툭 털고
너를 향해 달려가면
모든 길들은 모두 성지(聖地)다
어둠이 뱀처럼 몰려와
내 발목을 휘감아 당겨도
내 두 발은 이미 너의 것
내 사랑의 복음 전하기 위해
사도처럼 나 오직 한 길을 간다
걸어걸어 날마다 스물네 시간
하루를 남은 전 생애처럼
경건히 널 향해 가노라면
어둠이 낳아 기르는 짐승도 무섭지 않아
지상에 가질 것은 너 하나다
오늘은
물위에 걸어도 빠지지 않는다
널 향해 가는 길은 어디라도 성지다

 

 

  86. 쇠풍경을 실은 달구지․15
                        진헌성

얘야, 너 하느님 위할 것 없어
네 양심이나 위하거라
하느님은  창조준데 부족할 것 있겠느냐
네가 너 잘 대접하면 은혜가 된다
주인집 신주 위하는 종과 다름 없다면
저 개와 다름 없다 아니하냐

 

하느님은 하느님 위해 있고
새는 하늘 위해 나는 게 아니라
새 위해 난다
시어머니 걱정 늙듯 말고
널 위해 살거라
 


굶은 종이 공양 올린다면 착하다마는
짐승이 공양을 드린다 해도
스님이 지장경 외워 주랴
하느님이 혹연 둘릴라디야

(신성하고 거룩한 하느님은 다름아닌 네 자신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87 작은 꽃
            이기철

작고 슬프게
바람에 불리우는 풀꽃들
이 세상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른 적 없어
마을 아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하이얗고 순한 작은 꽃.

 

바람이 분다. 별이 뜬다
조약돌이 물에 씻긴다.
밤이 가고 싸늘한 이마의
아침이 온다.

 

소리쳐도 들어줄 이 없어
안타까움으로 혼자 서 있는
언젠가 가 본 듯한 시골 역(驛) 부근의
이슬에 젖어 있는 작은 꽃.

(세상의 소음과 소란 사이에 깃들어 있는 말하는 침묵의 소리에 귀기울일 때 지금껏 소리쳐도 들어 줄 이 없었던 이슬 젖은 작은 꽃들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온다)

 

 


    88. 저수지
               박세현

쩍, 갈라져
미치도록 갈증스런
저수지 밑바닥
넘실대던 물 몽땅 증발하고
한 방울의 물도 채울 길이 없어
바닥에 바닥을 대고 있는 풍경이
차라리 정직하고 편해 보인다
둑방을 흘러넘치던
물의 압력 벗어버리고
부질없는 출렁임도 놓아버린
저수량 제로의 순간
슬픈 유물처럼 떠오른 시신 한 구
눈이 덜 감겨 있다

(죽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은 끓임ᄋ벗이 주어진 대상이나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반복없이 진정한 삶이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89 가시1
             김신용

가시에
얼굴이 비쳐 보일 때가 있다

 

핏방울이 묻어날 듯 날카롭게 돋아 있는 가시가
거울처럼 얼굴을 비쳐 보여 줄때가 있다

 

내가 가시가 되었을 때다
내가 가시가 되어 가시를 바라 볼 때이다

 

그때 가시는 드므가 된다
가시가 된  내 얼굴을 맑게 떠올려 주는 물거울이 된다

 

가시가
가시를 겨누는 그 전율!

 

내가 또 하나의 적의(敵意) 앞에 섰을 때의 삶이
덫과 같은 맑은 물거울에 파동치는 순간!

 

 

   90. 새 점을 치며
                주창윤

새 점을 따라 모래네에 갔다.
모래도 없고
내(川)도 없다
그것이 있으리라 믿는 곳으로
닥가면 있지 않았다.
길 잃은 낙타 한 마리가
낮은 콜타르먹인 종이지붕 위를 걷는다.
예나 지금이나 빗나가는 새의 예언
멀리 모래내를 벗어나면
김 잠처럼 사천(沙川)이 보이고
빈 새장을 든 노인이 혼자 걸어온다

(그 알수 없는 자연과 운명의 힘에 대결하기보다 적응하고 순응하려는 몸부림의 일종이자 어쩔수 없이 내미는 화해의 요청이다)

 


       91. 물들이 빛나네
                          박형준

비바람에 창밖 토란이
코끼리 귀 같은 잎을 퍼럭이네
토란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꿈속까지 미끄러져 오네
창을 열어두고 잠이 든 어는 여름이었네
방바닥에 하얗게 빛나는 것이 있었네
토란 뿌리가까지 내리는 비가
방바닥에 스며 솟구친 것이었네
장판을 걷자 점점 더 많은 빗물이
시멘트 위로 뿜어져 올라오네
토란이 쉴 새 없이 창을 턱턱 치네

 

그 거리에서도 바닥에 바다가 살았네
부글부글 솟아오른 물들이 빛나네
 

 


   92. 사춘기
             오소후

찔레향 나던 십칠 세
그 해 겨울 마지막 밤
성에 낀 내 방 유리창을 깨뜨릴 듯
날아든 종이 비행기
낮은 담 너머 집 야간 고등학생의
기타 소리가 동동 더 크게 울리고
내 가슴에서는 북 치는 소리
도적질하듯 집어들며 한속 솟던
그리운 첫 연서
오촉 화장실 전구 불빛 속에서
어룽더룽 읽히던
그리운 첫 약속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강물을
송어의 꼬리질로 거스르며
흰 머리 몇 올 솟기 시작한 요즈음에도
그 종이 비행기가
소리없이 뜨는 날은
찔레향 가득한 산길로 간다
나는

 

 

93 목뼈
       김종길

도대체 목뼈는
몇 개로 되어 있길래,

 

아침 일찍 뜰에 나가
목을 굽혔다 돌렸다 하면
목에서 빠드득 빠드득 소리가 나는 것일까

 

험한 세상 한평생,
머리 숙이지 않고
빳빳이 고개를 곧추세우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고나, 목뼈야.
이젠 윤활유가 말라버린
녹슨 기계의 부품처럼

 

작동할 때마다 안쓰러운 소리를 내지만
당분간은 참고 버티어다오.
아직도 받쳐야 할것이 있으니.

(혼탁하고 거친 세상에서 자신이 다해야할 임무와 지켜 내야할 소중한 가치가 있건만, 목뼈를 곧추 세울 때마다 안쓰러운 소리가 들린다)

 

 

94.장날 장터에서
               유안진


볼 장 다 본 사람이
왠지 볼 장 덜 본 것만 같아
기웃거린 병원 대기실
아직도 내게 팔아야 할것과 사야 할게 있는가
왜 그만 발길 돌이키지 못하느냐고 자책하다가
실려가는 중환자와 마주쳤다

 

아직도 모르느냐
장터 아닌 세상이 어디 있으며
장날 아닌 날이 있느냐
가는 날이 장날이고 가는 곳마다 장터인데
아무리 오래 살아도 볼장 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외마디 그의 비명이 고막을 때린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거나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게 평범한 인간들이다. 죽음을 차라리 피하기 보다 맞부딪치는 게 더 정직할 지도 모를 일이다)

 

 

95.경력으로 안 되는 일
                반칠환

남산 산책로, 오래된 나무들이 자꾸만 제 이름을 까먹는지 사람들이 이름표를 달아주고 있었다
 


방년여섯 살, 걷기 경력 5년차안인 손주 뒤를 걷기 경력 70년차인 할아버지가 숨가쁘게 두둠두둠 뒤따르고 있다.


(마치 거울이 다른 것이 비추듯이 할아버지가 순진무구 한 손주 뒤를 따르며 제 걷기 경력을 반추할 수 있을 때 상호 친교의 연대적 묶음니 일어난다)

 

 

     96. 길동무
                김규성

이제 등이 보인다, 됐다

 

저 낡은, 시간의 수절(守節)이
나를 향해 돌아서는 건
내 허망의 토사곽란이 그친 후일 것이다

 

안다

 

이제 등이 보인다

(그 무엇을 향한 나의 오랜 시간이 수절이 다름아닌 나를 향해 돌아서는 존재론적 회향의 길이었음을 깨달으면서)

 

 

   97. 텃밭에 그리다
               김정용

어머니의 삼우제를 지내고 돌아와서
한동안 돌보지 못한
텃밭머리 나가본다

 

이따금 밭고랑에 엎드리는 나를
지켜 서 계시던 어머니의 텃밭머리
아직은 유월 초승인데 어느새 풋고추가
둑새마다 그렁그렁하다

 

그런데
무슨 이슬방울들이
또 그렇게 크게 매달렸는지

( 죽은 어머니가 이슬방울로 환생한 것은 아닌지 돌려 생각 해보려눈 동안 필시 모든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

 

 

    98. 개미
                 우영창

방바닥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간다
너무 가늘어서 잘보이지도 않은 다리로
내가 보기엔 그저 목적없이
방바닥을 돌아다닌다

 

저녁먹었는지 나는 묻지만
내 귀는 너무 커서 개미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
너는  너무 조그맣고 가벼워서
죽여도 내게도 네게도 고통조차 없을 것 같다

 

너는 대체 인간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대체 인간은 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길을 잃고 헤매는
개미의 핏발선 두 눈이 묻고 있다.


(내 눈에 비친 개미는 아주 작지만 신에게 나도 작게 보일 것이다, 개미처럼 길을 잃고 헤메는 자신의 존재감을 찾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자임)

 

 

   99.아우라지
            김혜옥

아우라지 오십천은 너무 애돌아
어라리 사람들 발걸음이 느리다
옥수수를 이고 가는 여인의 그림자를
노란 택시가 먼저 채어가도
저 여울목에서가  아니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라리 마을엔 물이 마을 어귀로 달려가
사람들 머리에 얹은 무게를 내려놓는다
가만가만 숨을 고르는 것도  언제나
느티나무 둥치에서 잠시 쉬다가는
저 한가한 강물이 먼저다
멀리 산을 닮고 싶은 것도 게으름이어서
내 두통 언저리를 내낸 출렁이다가
하체를 적시며 올라오는 물안개에
몸을 슬쩍 섞은 산은 어디로 가고
아라리 마을엔 이내 물소리만 남았다

 

 

   100. 낮은 굴뚝
               황명길

섬진강 따라 구례땅 문화 유씨 종가
운조루에는 별난 굴뚝‘낮은 굴뚝’이 있네
규모는 양반 댁인데 품위와는 달리
죽담 아래 엉성하게 가랫굴이 뚫려 연기를 내는
굴뚝없는  굴뚝‘낮은 굴뚝’이
연기를 바닥으로 얕게 까네
끼니때 잇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에게 송구스러워
밥 짓는  연기를 집 밖으로 피워내지 못하고
잔뜩 몸을 낮추어 바닥을 기네
염치를 알아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운조루 주인의 민본정신
안주인도 바깥주인 좇아 조신하게
바람쏘이고 싶으면 안채 다락에 올라
바랑지창 열어 풍광을 맞았다네
그러므로 구례를 찾는 관광객은 무릇
사대부가 고택의 품격 높은 모양새보다는
운조루의 귀한 인의를 배워 갈 일
망칠의 나야 그 깨우침을 놓쳐서는 아니 되리


(운조루 주인의 민본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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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2.03 18:44

    첫댓글 그대가 예 와계시는구랴

  • 08.12.04 10:04

    69번, 좋은 번호 탔네 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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