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로 추억여행
이상미
오랫동안 상자 속에서 잠자던 피터(Peter)가 사준 지도를 꺼내 보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는다. 회사 주소와 집 주소를 적어준 마티아스(Matthias)의 연필 글씨가 반갑다. 그 주소를 구글(Google) 창에 쓰고 추억여행을 떠난다.
슐터블라트(Schulter blatt) 35, 사진의 모습이 우리가 살던 25년 전 그대로다. 6층 내 방의 창 안에는 마티아스가 나를 위해 갖다 놓은 봉숭아 화분과 벽에 붙여 놓은 그림들이 있다. 옆방 창안에는 키 크고 호리호리한 마티아스가 작고 폭 좁은 얼굴에 빨간 안경을 높은 코에 걸고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동그란 옥탑방 창 안쪽에는 놀러 온 데스몬드(Desmond)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갈 거라며 ‘라이온 킹(Lion King)’ 음악을 틀고 있는데 그 방 벽에는 데스몬드가 스프레이페인트를 뿌려 그린 그림이 있다. 내가 오기 전에 내 방은 데스몬드가 여자친구 미헤일라(Michaela)와 쓰고 있었고 그 옥탑방은 데스몬드의 또 다른 공간이었다. 옥탑방에서 사다리를 타고 쪽문으로 올라간 지붕 꼭대기에는 나와 피터와 샤샤(Shasha)가 함부르크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피터는 언젠가 데스몬드와 술을 마시고 올라와서 위험했었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집을 나와 육면체 돌덩이를 박아 만든 찻길을 따라 슈텐산쉐(Sternschanze)역으로 가는 길에는 건물과 건물 사이 중앙에 ‘대우(DAEWOO)’ 발음기호와 그 말하는 입술 모양의 휘장이 높이 커다랗게 붙어있다. 우리나라의 위상에 자부심을 느끼며 걷다가 굴다리를 지날 때 안 벽을 보니 오래 덕지덕지 붙은 광고 포스터가 비에 젖어 축 늘어져 괴물 혓바닥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옆은 전날 밤에 토비(Toby)가 친구들과 잘 붙지 않는 자기네 하드 롹(Hard Rock) 공연 포스터를 열심히 붙이던 곳이다.
슈텐산쉐역에서 알토나(Altona)행 기차를 타고 호헨에쉬(Hohenesch) 13번지 회사로 향하는데, 차창 너머 위를 바라보니 기찻길 가의 건물 위층 창가에 벌거벗은 남녀가 갑자기 나타나 큰 젖가슴을 드러낸 채 테라스 난간을 잡고 머리칼을 날리니 언뜻 놀랍다가 웃음이 번졌다. 이국이라서 괜찮은 것인가!
도착한 알토나역의 광장 주변의 사진도 역시 예전과 똑같다. 25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13년 전이나. 그 광장 앞 그 꽃가게에서 꽃을 샀고 높은 통굽 구두를 샀던 구둣가게를 지나서 회사로 가는 길목은 예쁜 색색의 유리병 가게도 있고 마리화나를 합법적으로 판다는 마 이파리 무늬가 그려진 집을 지나간다. 회사에 들어서자 요(Jo)가 커다란 냉장고처럼 생긴 자판기 커피기계를 새로 놨다고 자랑을 한다.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카페라떼 원하는 대로 마시라 하며 새로 설치한 천정의 창은 자동으로 열 수 있다고 자랑도 한다. 프로덕션 매니저인 아일랜드인(Irish) 이마(Eimer)가 나타나서 새로 인테리어를 한 화장실에 한국어 이름도 적어넣자며 가져왔다. 나는 16번째로 ‘화장실’이라고 적어 넣었다. PD인 우도(Udo)와 우테(Ute) 사이에는 작은 인공 연못이 있다. 반갑게 하이(Hi)!를 외치고 레이아웃(Layout)실에 가니, 토비가 익살을 부리며 콘서트가 성공하면 밥을 사겠다고 한다. 그러자 마티아스가 “잘못되면 내가 그 밥 살게” 하고 냉큼 말해 서로 옥신각신한다. 나는 그 방을 지나 우리 배경실(Back Ground)에 와서 피트라(Petra)와 볼카(Volker)와 함께 그림을 그린다. 피트라는 요새 타로에 빠져있고 요가를 하는 인도의 공주처럼 정좌 자세로 앉기도 하며 신비의 세계에 빠져있다. 볼카는 누나 같다며 잘 따른다. 그런데 남자다운 큰 척을 하는 마티아스와 볼카는 동갑이다. 그런 마티아스를 보며 피터는 ‘마티아스가 요새 많~이 큰다’라 말하고 샤샤와 나는 그 말에 웃음으로 동감했었다. 저녁 퇴근 후 우리는 다 함께 클럽의 피터 콘서트에 왔다. 잘 생긴 피터는 애니메이터(Animator)이지만 음반을 5개나 낸 유명한 밴드의 가수다. 무대에는 피터가 더블베이스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고 친구들은 나를 놀리려고 폭탄주를 4잔째 마시게 했으나 까딱도 없는 나를 보고 샤샤와 마티아스가 약올라 하고 우리는 친구들과 웃으며 휘리릭~
나는 이렇게 추억의 구글 여행을 마친다.
작년 초, 요는 회사를 아들에게 맡겼다며 독일에 놀러 온다면, 어디에 있더라도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올해 내 생일에는 페이스북(Facebook)에 생일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COVID-19로 복잡해진 세상에서 작년부터 소식 없는 우도와 친구의 소식을 물었으나 대답은 없다. 전형적인 아이리쉬 이미지의 데스몬드는 고향에서 화가로 생활하는데 가끔 아일랜드의 바닷가 풍경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이마는 나보다 어린데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가끔 사진이 올라온다. 그 큰 키에 살이 오르고 희끗희끗한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 모습이 된 예리한 마티아스는 인터넷으로 쉽게 듣고 볼 수 있는 멋진 유명인사가 되었다. 안부를 걱정하며 올린 추억의 페이스북 사진에 인사와 손도장을 찍고 간 친구들과 함께, 올해는 COVID-19를 이기고 모두 다시 기쁜 인사를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며칠 전, 30여 년 만에 갑자기 영상통화를 걸어온 필리핀의 마크(Mark)와 알란(Allan)처럼.
오늘은 2021년 2월 28일, 어제가 마티아스의 생일이었구나!
( 2022년 고양작가회의 동인지 '작가연대 016' 에 발표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