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도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냐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행하는 일들은 세상사람들도 부러워하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못하는 것이 영광입니까? 자녀가 공부를 이미 마치신 분은 자기 자녀가 좋은 직장에 치직하는 것이 영광입니까? 취직도 못하고 있는 것이 영광입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물어 볼것도 없이 공부 못하는 것보다 공부잘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취직도 못하는 것보다 일류회사에 취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자녀가 다른 자녀보다 공부를 더 잘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좋은 회사 취직을 해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안에서 조차 이상한 경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교회안에서도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교회가 가는 방향은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아들을 믿는 다는 것은 그 아들이 말씀하시는 바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이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도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제쳐 두고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일단 접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을 예수님깨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이 무엇인지 이 한가지를 살펴보고서 우리도 그 영광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듣고서 살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낮아지셔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상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분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5:41-42절입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영광이라고 하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실 자신들의 영광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광이 아니더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아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들이 온갖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니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들 그것이 어찌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영광을 챙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데 이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을 믿을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일체의 의나 선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도대체가 믿을수 없는 인간입니다.
완전히 구제 불능입니다. 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인데 출발부터 자기로부터 출발이 되어 있으니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온갖 일을 다한다고 하여도, 엄청난 돈을 바치고, 금욕적인 일을 행하고, 초인적인 일들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과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들끼리의 잔치를 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에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2: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씀을 하시고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내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8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영광스럽게 하였고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은 결국 에수님의 하신 일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1-32절입니다. "저가 나간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민일 하니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셧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리 곧 주시리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가는 사건을 가지고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시는 것은 곧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느 인간도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인인 채로 나님께 나아가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뇌성으로 울릴 때 그 강퍅하던 바로왕도 두려워서 떨지 않습니까?
다니엘서에는 그 거대한 제국의 바벨론 왕 벨사살이 하나님의 성전의 그릇으로 술을 마실 때 그 왕궁의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가 쓰여질 때 얼마나 두려웠는지 안색이 변하고 무릎이 부딪혀 달달 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 이렇게 놀랍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육신으로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을 보니 그 안에 은혜과 진리가 충만하고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 볼 자가 누구 입니까?
요한복음 16:13-14절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리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영광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야 예수님의 영광이 어떤 영광인지를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오늘 22절 말씀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행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사귐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원리가 우리안에 가득하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무엇이나 업적중심입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나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영업사원만 얼마나 실적을 올렸는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평가가 모두 업적중심입니다. 학생의 성적도, 그래서 고등학교가 명문이다 아니다는 것이 서울대에 몇 명이 갔는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미술학원은 얼마나 홍익대에 많이 들어 갔는가입니다. 그러니 바로 앞의 상가벽에 무슨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까? 어느 피아노 학원에서 자기 학원의 학생이 어느 피아노 대회에서 금상, 최우수상, 대상, 특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일등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것으로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홈런을 많이 쳤느냐? 골을 많이 넣었느냐로 승부가 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도 누가 많이 헌금을 하였느냐? 누가 많이 전도를 하였느냐로 사람의 등급이 매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도대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이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시는 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 내시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께 영광의 길이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는 십자가란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21:1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우너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베드로가 자기가 원하지않는 삶이 주어질 것이며 그것은 결국 순교의 희생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서 큰 일을 행함으로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으로서 죽음이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이란 아무리 큰 일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그사람이 죽어 버리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죽음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떠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까? 남에게 지는 것을 통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기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지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자신이 실력이 없어서 지고 나서는 자기 변명용으로 내가 져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길수 있음에도 져 줄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까? 내가 손해보고 짐으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도 역시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증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십자가의 방법으로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악착같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일등을 해야 영광이고 꽁지를 하면 영광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저주 받아 죽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을 가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그 영광을 오늘날도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백성들에게 십자가의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광을 버려 두고 세상의 영광을 주님께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한 주님은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영광을 거절하셨는데 그 영광을 달라고 하고, 그러한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것이 어찌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사귐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영광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8절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여기서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실이 무엇입니까? 주님과의 사귐의 열매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으로 계실때에 하나님과 늘 교제하였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형태로 나타났고,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3:34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안에 하나님이, 하나님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있으시기에 아버지의 원하는 열매가 나온 것입니다. 단 한번도 아버지의 뜻을 어긋나게 하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볼때는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도 않고, 율법도 지키지 않고, 성전도 헐어버리라고하는 극단적인 이단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8:29에도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16:32에서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계속된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온전히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독단적인 어떠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으로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한 순종이 바로 낮아지심과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이러한 영광을 자기의 제자들에게도 주시기를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디에서 세상의 영광을 누렸다는 말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길로, 좁은 길고, 자신을 죽이는 길로 들어가는 것이 예수 믿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헛된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살면서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은 외면한채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버린 돌입니다. 건축자들이 쓰다가 쓸모없다고 자신들에게 보탬이 안된다고 버린 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다른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영광이 주님이 원하시는 영광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 되지 않을 까요? 역시 주님과의 사귐의 문제입니다. 일요일 한번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들이 다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신앙의 전부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일요일 하루 예배를 잘 드려주었으니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지 하는 생각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사에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광,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가지셨던 그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건, 어떠한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사건속에서 주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 교육도, 취직도, 결혼도, 가정의 목표도, 교회의 목표도 분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의 그 풍성한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비록 고난이 겹치더라도 그러한 것이 그 영광의 교제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옥도, 핍박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그 주님과의 교제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나타난 그러한 열매들이란 자신들의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열매들인 것입니다.이러한 주님과의 사귐의 열매가 범사에 풍성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