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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로마라는 서양사극을 보고 있습니다. 뭐 폼페이와 시저가 집정관을 같이 하는 이야기에 시간을 드라마의 내용으로 맞추려고 늘렸다 줄렸다를 하니 역사적인 사실에는 거의 근접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 둘이 집정관을 같이 한 적은 없습니다. 사실상 로마 공화정을 붕괴시키는 둘이 삼두정치는 했으니까 그 것을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에 한 것으로 보이는 데 이정도면 뭐 이해할수 있습니다. 사실 변수는 많았지만 그 당시 집정관은 삼두에서 고르는 대세였으니까요.) 다만 로마 사회를 표현하기 위한 고증이나 생활사는 매우 정확하였습니다. 보통 서양의 보는 시각에 로마는 사치로 표현되어서 먹는 것도 고기 같은 것으로 나오는 데 그 당시에 로마인들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상에서 원로원에서 근엄하게 앉아 있어도 밤이 되면 희극을 보면서 낄낄되는 쾌락주의자인 로마인들의 모습은 실체와 근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등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까지 표현한 것이 저는 매우 부러웠습니다.
하여간 그럼 달리겠습니다.
지난이야기
돌궐과의 마지막 대전을 앞둔 영강(永康) 1년 을미년 겨울
외척 주씨가문의 폭정으로 대혼란에 빠진 신미년 고구려의 지배자인 주씨가문은 신라에게 남쪽으로 안정을 보장받는 대신 한수와 동예의 백성들을 팔아버린다. 고구려에게 배신 받으며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비참하게 사는 것을 본 평민 온달은 나날이 커갈수록 고구려의 지배층에 대한 증오를 점점 키워가고 있었다.
한편 양원태왕이신 아버지를 철저히 능멸하는 것을 본 태왕 양성은 하루아침에 주씨가문을 멸족시키고 자신의 부인인 폐비 주씨를 자결로 몰아 버린다. 수많은 백성들은 강력한 지도자였던 태왕을 열광한다. 이에 힘을 얻은 태왕은 강력한 왕권을 세워 귀족들을 견제하고 대 고구려 재건을 노린다.
그리고 태왕과 폐비 주씨의 자식으로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던 명화공주 단희는 온달의 도움으로 슬픔을 잇고 서서히 홀로서기를 시작하는데.......
태자가 이문진박사와의 원행 길에 오른 뒤인 어느 겨울날
온달과 아가씨는 장문고(고구려 최고의 도서관)에서 책들을 읽으며 있었다. 아가씨는 이제는 거의 울지 않았다. 처음 그녀는 온달의 슬픈 과거를 듣고 울음을 바로 멈춘 것을 아니었다. 하지만 울음소리만 들으면 온달의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난 뒤 소리 내서 펑펑 울지를 못했다. 점점 큰 울음을 참으면서 울지 않는 날이 늘어가더니 지금은 어머니 생각이 해도 슬프기는 해도 눈물이 안 나왔다. 어쩌면 아가씨인 명화공주는 남을 배려한다는 것을 온달을 통해 배웠을 지도 모른다.
울지 않는 동안에 아가씨는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서 태학에 있는 장문고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책을 너무 보아 눈이 아파서 참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던 중에 한 쪽 구석에서 덩치 큰 온달이 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실 아가씨는 최근에 온달에 대해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어도 목표가 뚜렷하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은 좋은데 글공부는 배척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음....... 잠깐 그런데 이름은 무엇이지’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을 몰랐다. 오라버니인 태자 대원(大元)의 스승이었던 이문진박사에게는 고흘 할아버지의 추천으로 태학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런데 고흘 할아버지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살리려고 하셨던 어머니가 자결하는 날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 이제는 거의 나았고 생각했는데.’
울적해지는 공주는 그 기분을 잇기 위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마음을 떨쳐 버린 그녀는 졸고 있는 온달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는 그날을 생각을 하지말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온달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는 이제는 조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의자위로 누어서 자는 정도였다.
어린 그녀는 정말 심각하게 졸고 있는 온달을 쳐다보다가 재미난 생각이 났다.
꿈속에서 온달은 말을 타고 홀로 수십만 돌궐군과 치열한 혈전을 하고 있었다.
“푸하하하 다 죽이겠다.”
무자비한 그의 창 솜씨에 수천 돌궐군들은 가을에 낙엽처럼 쓰러졌고 그들은 무서워서 말을 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온달이 그 자식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활을 잡고 그들을 조준하며 소리쳤다.
“내 앞에서 어딜 도망가....큭.”
그런데 갑자기 숨이 막혔다.
“윽 내가 숨이 막혀 죽다니. 으 살고 싶다.”
괴로운 고통을 느낀 그는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서 가슴을 쳤다.
‘숨을 쉬어야 돼! 아직 죽을 수는 없어!’
“꺼억.”
온달은 눈을 갑자기 떠서 급한 숨을 쉬었다. 눈앞에 웃으며 11살 장난꾸러기 아가씨가 온달의 얼굴에 여린 손을 대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웃음을 지었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온달은 아가씨가 이상한 일을 한 것으로 보였다.
“잠 깨우기.”
“예?”
그녀는 온달의 코와 입을 막고 잠을 깨운 것이다.
“잠시 재미난 생각이 나서.......”
아가씨의 능청스러운 말에 온달은 기가 막혔다.
“그건 재미난 생각이 아니고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졸면 생사가 위태로울 것이야.”
단호한 표정을 진 아가씨는 그 옆에 자리에 그냥 앉아서 책을 잡았다. 온달은 그녀를 통해 오랜만에 전장에서 느꼈던 생사의 공포를 다시 체험하였다.
‘다시 한 번 졸면 죽음을 각오해야겠군.’
“잠깐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아가씨는 잠을 깨워서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 지금 떠올랐다.
“예?”
“이름이 무엇이냐?”
“성...은 온이고 이름이 달입니다. 온씨성은 고흘장군님께서 왕실의 허락을 받아 받았습니다.”
온달은 우물주물 하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온달이 고흘장군이 아끼는 청년이라는 것에 마음을 놓았다. 그녀에게서 고흘은 자신의 마음속에 할아버지였고 어머니의 마지막 날에 그토록 큰 도움을 주신 분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그와의 벽이라는 것이 점점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나의 이름은 안 물어보느냐?”
“예? 무슨..”
온달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지.”
아가씨가 퉁명스럽데 대답하였다.
“하지만 웃전의 존함을 함부로 묻는 것은?”
온달의 그 말에 아가씨는 고개를 위로 올려서 장문고 천정을 한동안 처다 보더니.
“다짜고짜 아닌 밤중 방에 쳐들어와서 세상 살던 이야기를 다해주고 나를 보름동안 울린 분이 웃전 아랫전을 따지시다니?”
“윽.”
온달은 충격적인 말에 머리가 쨍했다. 아가씨는 울지 않으면 이상하게 활달하고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제가 그렇습니까?”
온달의 말에 그를 쳐다보며 아가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소이다. 온달님.”
그때 온달은 태왕께 혼쭐나고 어머니생각도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귀한 귀족으로 예상되는 아가씨에게 너무 무례하게 행동했었다.
“그때의 일은 반성.....”
“내 이름은 안 물어볼 것이냐?”
아가씨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온달의 사과를 끊고 아까전의 질문은 안할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온달은 좀 고민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존함이............?”
“단희.”
아가씨 즉 명화공주의 휘(諱) 즉 이름은 단희였다.
“성은 무엇인지?”
온달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는 이 기회에 여세를 몰아 아가씨의 정체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성만 알면 그녀가 누군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중에 알려주마.”
그 질문을 들은 표정을 싹 바꾸고 아가씨는 말을 끊고 일어서서 장문고의 밖으로 나갔다. 아가씨는 그의 마지막 질문이 자신을 알려고 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이상하게 그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하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
홀로 남기어진 온달은 갑자기 아가씨와의 사이에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온달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에 선(線)을 두고 있었다.
‘............ 참나.’
중리부 수장인 고필장군의 설득으로 태왕은 태자를 이문진박사와 열흘간의 원행을 허락하였다. 다만 태왕은 폐비 주씨의 무덤에 가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태자는 말을 듣고 크게 낙담했다. 하여간 이문진는 태자전하를 모시고 평양을 돌아보았다. 태자가 찾아가는 곳은 보통 태학이나 군부대였지만 박사는 시장에 저자거리에 모셨다. 태자는 의야 했지만 스승의 뜻에 군말 없이 따랐다. 이문진도 사실은 어디로 갈까를 고민했었는데 온달의 인형극의 떠올라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인형극이나 연극을 하는 곳, 광대들의 놀이를 구경하였다.
태자의 옛 스승이었던 이문진은 전문 광대들에게 훈육되는 작은 아이들을 훈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태자 자기또래에 수백 명의 애들이 일제히 공2개와 봉2개를 한꺼번에 돌리는 연습을 하는데 거의 모두 실수를 많이 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듭된 실수도 끈기 있는 모습으로 한 밤중에도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솔직히 태자는 궁에서 광대들에게 구경하는 것밖에 안 보아서 저런 것은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저렇게 필사적으로 배워도 광대가 되는 사람이 수백명중에 5명도 안 된다는 말에 굉장히 놀랐다. 평양을 한번 둘러본 후 한 객주에서 이문진은 풍채 좋은 얼굴을 한 태자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왜 이곳으로 태자전하를 모시고 온 것으로 보이십니까?”
태자는 이문진을 보면서 스승님은 나를 아직 포기를 안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제 기대 받는 것이 싫었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문진은 순간 말을 멈추었다.
원행 나가는 데에서도 아버지인 태왕은 태자에게 어머니문제를 집고 넘어가셨다. 아마 자신이 태자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외척 주씨는 치명적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태자는 이 당시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위해서 이렇게 무모하신 일을 하신 것입니까?”
태자는 화를 내며 일어서서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자전하 미천태왕님의 고사를 생각하시옵소서.”
이문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태자께 고했다.
“미천태왕께서는 폐주 봉상에게 의해 아버지이신 고추가 돌고께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셨나이다. 그리고 목숨이 위협해지시자 백성 속으로 숨어 음모의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고 사수촌 여인에게는 누명까지 쓰시는 비참한 청년 시절을 사셨습니다.”
태자는 뒤에서 외치는 이문진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국상 창조리의 힘으로 옹립되었지만 그분은 1년도 안 되어 곧 고구려를 장악하시고 선비족에 맞아 칼을 차시고 웅대한 초원을 달리셨나이다.”
그 말을 들은 태자는 고개를 돌려서 이문진을 쳐다보았다.
“태자전하께서는 그때 미천태왕님 보다는 더욱 처지가 났사옵니다.”
이문진은 고개를 떨어뜨리면 말을 이었다.
“소신은 아옵니다. 태자전하께서는 미천태왕님 못지않은 큰 꿈이 있는 것을 ........”
태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꿈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행복이라는 것 그리웠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런 세상을 위해서 태자는 이문진박사님 밑에서 옛날에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부여나 고조선 또 그 선대에 수많은 국가들의 사회를 공부하였다.
어떤 시대가 과연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모든 사람들이 다툼 없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
하지만 태자는 자신을 포기 못한 이문진을 쳐다보면서 절규하였다.
“하지만 저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태자는 언제나 아버지인 태왕에게 감시당하는 입장이었고 백성들은 무조건 태왕의 편이었다. 또한 귀족들은 모두 동부대인 발안에게 모여서 폐태자를 논의하고 있다.
왕실 원로중 고흘 장군과 고필 장군이 자신을 지지하지만 두 분은 태왕가 폐태자 하라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자들도 태자 그의 편이 아니었다.
박사는 태자를 일단 진정시킨 뒤에 아직은 절망하기위해서는 이르다고 위로하였다. 하지만 당대의 학자인 이문진은 태자만큼이나 절망하고 있었다.
‘태자전하에게 아무런 힘도 못되어 드리는 스승이라는 자인 나야말로 죄인 아닌가?’
온달은 장문고에서 졸지 않고 강제로 공부 당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스승이 된 아가씨는 하도 닦달을 해서였다.
“정말 이것도 해석할 줄 몰라.”
어린 아가씨의 언성이 높아지고.
“.........모를 수도 있지요.”
온달은 어린 아가씨가 몰아세우니 자존심이 좀 상해서 시선을 따른 데로 돌리고.
“휴우!”
아가씨는 친절히 해석해준다. 이런 식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온달의 신념인 남의 일이라고 방관하지말자가 단희 아가씨에게도 신념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온달이 너무 공부를 안 해서 누가 보아도 너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을파소나 창조리가 남긴 책들을 강제로 4권이나 읽었다. 그 후 아가씨가 온달에게 내용을 정리해 보아라고 말했는데 그는 한 줄로 끝냈다.
“백성들을 잘 먹이면 된다.”
아가씨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두 댕기를 양 손으로 잡고 한 숨을 푹 쉬며
“확실한 결론이지만 성의는 전혀 없군.”
하지만 온달은 아가씨덕분에 나름대로 인상적인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능력이 없었고 아가씨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창조리가 반정(反正)후에 쓴 책들이었다. 창조리는 고구려 희대의 폭군인 봉상태왕시절에 그 당시 최고 관직인 국상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모시던 봉상태왕을 폐위시키고 평민군주인 미천태왕을 옹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에서 그를 주군을 버린 배신자라는 비판이 많았다. 이에 창조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위해 많은 역사서와 저술을 남기었다. 온달은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이것이었다.
<미천태왕은 고구려왕에서 유일하게 몇 년간 평민생활을 체험한 군주였다.>
[독제를 펼치는 폭군이나 겁쟁이가 즉위하면 그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나 창조리는 폐주 상부(봉상태왕의 이름)의 폭정으로 수많은 백성들의 고통의 목소리를 들었다. 폐주는 시기심이 많아 자신의 숙부이자 숙신을 정벌하여 백성들이 추앙하는 안국군(安國君) 달고(達賈)를 처참하게 살해했고 그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동생인 태왕의 아버님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백성들을 수탈하여 그 돈으로 황금궁전을 지려고 하였다. 궁궐공사에 성인여자들까지 동원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못 짓고 자식들은 배고픔에 울면서 나라와 부모를 원망하였다.
그때 신료들은 폭군의 귀가 없는 곳에서 백성들을 위해서 ‘폭군이 하늘의 이치를 다시 계달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가?’ 아니면 ‘군주를 폐하고 새로운 성군을 모시야 되는가?’를 논하였다. 나는 미숙하게도 전자의 마음을 정하고 하늘의 이치와 선대왕의 가르침을 말하면서 폐주를 옳은 길로 모시고 갈려하였다. 하지만 폐주는 나의 충언에도 자신이 하늘의 천손임을 잇고 백성들의 원성을 외면하고 자신의 독재를 강화하려하였다. 만약 내가 그를 설득한다고 1년만 더 기다렸다면 백성들은 만 명이 굻어 죽고 여기저기서 나라를 노리는 적당들이 쳐들 와서 국내성을 불태웠을 것이다. 나는 진실로 고백하는데 반정이라는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후회하는 것은 보다 빨리 폐주를 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 학자들이 한 논쟁의 답을 후자인 새로운 성군의 추대라고 생각한다. 폭군이나 겁쟁이가 통치하는 하루에도 나라는 그냥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태왕이라는 자리는 언제나 옳은 생각을 하는 성인만이 앉는 자리이다. 천손이라 하여도 폭군이나 겁쟁이는 절대로 태왕에 앉을 수는 없다.]
온달은 창조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그렇지만 창조리의 책에 대한 평가는 그 책이 쓰인 직후부터 지금까지 고구려 지배층 사회에서 변명뿐이라고 잡서라 취급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가 폭군이거나 겁쟁이라고 생각된 것이 아닐까? 호기심이 생긴 온달은 장문고에서 창조리가 쓴 책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 국상 창조리는 반정직후에 자신이 옹립했던 패기만만한 미천태왕과 최고 관직인 국상 폐지를 두고 마찰을 일으키자 폭군이라면 몰라도 명군(名君)과는 싸울수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모든 권력을 내놓고 물러났다. 이후 초대 국상인 노장군 명림답부이후 최고의 국상 을파소, 혁명가 창조리까지 수십대를 이어지며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국상이라는 관직은 정복전쟁에서 잇따른 승리와 평민층의 열렬한 지지로 왕권강화에 성공한 평민군주 미천태왕의 칙령으로 고구려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후 재야에 내려간 창조리는 미천태왕의 감시속에서도 많은 귀족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책을 쓰면서 살았는데 32여권의 책을 남기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지금은 장문고에 모두 32권이 남아있었다.
<국상: 고구려 8대 신대왕때 선대 차대왕을 몰아낸 최고공신인 명림답부에게 준 관직으로 이전까지 사용했던 대보- 우보 좌보보다 한단계 높은 자리로 국정 전반을 책임지며 군사권에 영향력을 가진데다가 제가회의 의장까지 종신으로 겸임하는 최고 관직이었다. 보통 현직 국무총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국회의장(물론 제가회의를 국회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까지 겸임하니 그 권력은 상상이상이다. 이 관직은 미천태왕기이후에 사라지는 데 이시기부터 강력해지는 왕권에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후반기인 평원태왕 시절에 국상에 비견되는 관직은 대로회의 의장인 대대로인데 선출방식과 임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아가씨는 책만 보면 졸던 온달이 스스로 장문고를 뒤지고 다니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후후. 이제야 책 읽는 재미를 느꼈나본데……. 그런데 무슨 책이지.’
살짝 다가간 아가씨는 온달이 찾는 것이 국상 창조리의 책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알았다. 사실 그녀가 잘 아는 이유는 이 나라의 태자이신 오라버니가 매일 읽는 것이 창조리가 쓴 태왕의 자질을 논하는 책들 때문이었다.
폭군의 출현을 뼈아프게 느낀 창조리는 무엄하게도 선대왕들의 평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태왕이 가져야 될 덕목을 덧붙어서 펴낸 책이 종류별로 열권이 있었다. 이 책들을 본 미천태왕은 고개 흔들면서 정말 위험하다고 할 정도로 냉정하게 선대왕들을 평가하였다. 특히 유리명왕에 해명태자 자결이나 대무신왕에 호동 자결 같은 왕실사에 민감한 문제들을 골라서 그에 따른 왕들을 평가를 담았으니 미천태왕도 읽다가 창조리의 입이 무서워서 자주 책을 덮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실에 대한 평가를 보약으로 생각한 명군 미천태왕은 앞으로 후계를 이을 태자는 이 책들을 읽으라가 아니라 달달 외우도록 명령했다. 그 후 이 책들은 많은 왕후께서 어린 태자가 한글자라도 틀리게 말을 하면 바로 회초리를 들었다는 정도로 왕실역사에서 유명하였다.
그러고 보니 5살 때부터 오라버니도 그 책들 때문에 돌아가신 어머니께 많이 맞았던 기억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가씨는 창조리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펴낸 53권의 책들을 뽑아서 온달에게 주었다.
“한쪽만 보면 사람이 편협해지네요! 온달님.”
“제발 부탁인데 님자는 부치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온달은 내심 자신이 32권을 책을 찾을 동안 두 배에 가까운 53권의 책들을 뽑아준 아가씨에 대해서 놀랐다.
‘11살에 불과한데 어디서 이런 지식을 얻었을까?’
온달이 자주 글이 막힐 때 그녀에게 물어보았는데 마치 압록수에 물 흐르듯이 해석이 나왔다. 태학은 귀족가문의 자제가 10살부터 입학하여서 성인이 되는 15살 늦으면 16살까지 졸업하는 것이 보통이니까. 이곳에 다니는 학생들과 아가씨는 나이는 똑같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통귀족들 자제보다 수준이 틀렸다. 좀 자만이 섞어 있겠지만 그녀는 자주 장문고의 수십만 권이나 되는 고서에 반 정도는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사실 그녀를 보면서 그 정도는 아는 것으로 보였다. 그 정도면 태학학생들 정도가 아니라 예비박사님들 수준의 학식이었다.
하여간 해석을 많이 해준 아가씨는 졸리다 며 저녁에 일찍 누었고 그 옆방에서 온달은 책들을 빌려서 읽고 있었다. 260여년전에 수많은 학자들이 봉상태왕폐위에 관한 논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격론이 오가고 그 결과가 이 많은 훌륭한 책들로 남게 되었다. 보통 온달의 독서태도는 벌러덩 누어서 보다가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는데 이 책들을 읽을 때는 재미가 좀 있어서 의자에 앉아서 읽었다.
그런데 창조리와 수많은 학자들이 논쟁하는 파란 만장한 역사를 읽던 도중 불연 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고구려에 그 많던 학자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는가? 지금 같은 혼탁한 시대에 왜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는가?’
단기 2899년 서기 566년 영강(永康) 2년 평원태왕 8년 병술(丙戌)년 정월
정월이 되자 온달과 아가씨이자 명화공주인 단희는 각자 집으로 갔다가 보름이 지난 후에 둘 다 태학을 돌아왔다.
“하하하하하.”
태학에 돌아온 그 날 온달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집에 오면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바로 내쫒았을 것인데 그래도 보름정도 있도록 해주시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건강이 많이 나아지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한결 편하고 기뻤다.
온달은 틈을 내서 다리 밑으로 가서 어린 시절에 같이 거지 생활했던 사람들과 모여서 술을 마셨다. 또 태왕께서 참관하시는 정월의 돌싸움에도 빠질 수가 없어서 그 사람들과 함께 했는데 수레 안에 계시는 태왕의 눈에 안 띠려고 싸움은 적당히 하였다.
‘지금은 뵐 수 없다. 조금 더 수련을 해서......’
그런데 주의 사람들은 그냥 적당히 했다는 온달의 말에 다음에 힘주어서 하면 몇 명 초상 내겠다고 어이 없어했다. 그 말을 들은 온달이 반대편 강가를 보았는데 수많은 장정들이 그의 돌에 맞아서 쓰러져있었다.
하여간 온달은 이제 20살이다.
“졸려. 잘 거야!”
태학에 돌아온 그 날 명화공주는 피곤하였다. 정월에 맞이하여 잇따른 왕실행사에 참가하라는 명을 받고 이곳저곳에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태학에 돌아왔을 때는 너무 힘이 들어 온돌에 불 때우고 평상에서 꼴아 떨어졌다. 사실 공주는 아버지에게 왕실 행사에 참가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상당히 놀랐다. 소문에는 고필장군의 강력한 주청이 있었다지만 아버지의 마음이 한 결 누그러진 것이 아닌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버지를 오랜만에 뵈었을 때 조금 훌쩍였는데 아버지인 태왕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중간에 온달이라는 사람에 자신의 정체가 들킬 번한 때가 있었다.
정월이 되면 강가에 모여서 평양의 40만 사람이 함께 노는데 아버지인 태왕은 물론 왕실 사람과 귀족들까지 참가하는 큰 축제이다. 그 정월축제의 절정은 돌싸움이었는데 태왕이신 아버지께서 비단옷을 강에 던지면 온 평양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서 돌과 물로 싸움을 한다. 그런데 그 중에 백발 백중의 솜씨로 무척이나 잘 싸우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공주가 자세히 보니 그중에 한 명이 온달이었던 것이었다.
‘어! 저 사람이 여기 왜 있지!!!’
그녀는 깜짝 놀라서 행사도중에 그냥 나와서 안학궁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공주는 태왕이신 아버지와 태자이신 오라버니에게 변명거리가 있어야 되어서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시작한 그것으로 둘러대고 나왔다.
사실 그 주기도 맞아서 그날이 다음날 이었다.
하여간 명화공주는 이제부터 12살이다.
“???”
태자의 마음은 이상했다.
이번 정월에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보인 행동은 동맹제때랑 정반대였다. 참가도 금지시켰던 왕실행사에 나가라는 반 강제적인 명령을 내리셨고 태학으로 추방했던 명화공주까지 궁으로 불러들였다. 게다가 백성들의 투석전 구경하는 중에 명화공주가 생리 때문에 배가 아프다며 물러가자 태왕은 시녀들에게 언제부터 시작했느냐를 물었다. 저번 달부터 시작되었다고 그 시녀가 고하니 옆에 수행하던 왕실 원로출신 고필에게 빨리 결혼시킬 자제를 찾아야겠다고 웃으며 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아버지께서 갑자기 태자 자신을 쳐다보더니 “한명 더 있군.”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보다도 너무 급격한 변화였다.
‘아마도 요즘 들어서 너무 정국이 잘 풀리시니까 그냥 기분이 좋아지신 것일 것이다.’
태자는 갑자기 자식들에 대한 사랑에 눈을 떠서라기보다는 어머니 가문인 주씨가문숙청이후 정치적인 상황이 안정이 되고 돌궐족들도 겨울 대공세를 안 하자 아버지의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그런 것일 뿐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정치라는 것이 이외에는 신경을 안 쓰시는 분이라는 것을 태자는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실제로 명화공주가 행사가 모두 끝나자 다시 태학으로 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아버지가 자신의 딸인 명화공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 어머니가 떠올라서 그럴 것이다. 이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우리에 대한 태도도 다시 안 좋아 질 것이다.’
하여간 태자 대원(大元)의 나이는 쌍둥이 동생인 명화공주와 같이 12살이었다.
좀 이른 아침에 태왕과 중리위두태형 고필장군은 중궁이 아닌 태왕의 침전에서 남쪽의 급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남쪽의 국경 특히 고구려의 영토인 옥저방면에서 신라군의 군사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고필은 새벽에 일찍 들렸는데 태왕이 침전에 그냥 오라는 명을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날 밤에 시침을 들던 여인을 빨리 내보낸 태왕은 고필의 보고를 듣고 남동쪽 국경의 총책임자인 남옥저성주에게 방비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고필은 마음속으로 아마 단순한 군사훈련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적대적인 백제라면 모르겠지만 고구려와 동맹으로 큰 이득을 얻고 있는 신라가 괜한 도발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라는 전성기라지만 고구려에 비해 4분이 1에 지나지 않은 국력을 가지고 있었고 3년 전에 대가야를 두고 백제와의 대규모 군사충돌로 매우 지친 상황이다. 실제적으로 이번 겨울에 신라는 가야지역 재편과 백제에 대한 방비에 힘을 쏟고 있었고 옥저지방의 움직임은 고구려의 군사적 대응 즉 잠시 떠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라왕 삼백종(진흥태왕의 이름)은 사신을 보내 화려한 금세공품이나 염색으로 화려하게 꾸민 100척 길이에 모직물 융단을 바치면서 태왕 양성의 마음을 맞추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태왕이 생각하는 신라는 이상한 나라였다. 엎드릴 때는 바싹 엎드리고 기회가 생기면 들고 일어나고 종을 잡을 수 없었다. 하여간 3년 전 대가야쟁탈전으로 힘을 소모한 신라에게는 지금 기회가 될 수 없으니까 태왕도 별로 이번 일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가장 큰 문제는 돌궐강경파 이계찰대와의 전쟁이 터질 경우에 신라의 움직임이었다. 간교한 신라는 고구려가 북방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만 배후를 치고 들어왔다. 특히 신라왕 삼백종이 고구려가 신라령 동예지방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령 옥저방면이 매우 걱정이었다. 물론 적대관계인 백제도 고구려에게는 주시대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태왕은 침전에 여인이 두고 간 머릿수건을 잠시 보았다.
“태자와 명화공주가 장성했으니 이제 혼사를 빨리 논하고 싶은데 자네에 생각은 어떤가?”
태왕은 왕실종친 중에 고흘 장군과 고필 장군을 신임했지만 내심 쓴 소리 잘하는 고흘을 부담스러워해 자신의 명에 군소리 없이 따르는 고필에게 마음속에 이야기를 털어 놓는 편이었다. 고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혼사에 대한 논의가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다. 사실 외척인 주씨가문은 무단적으로 태자와 명화공주 둘 다 자신의 가문 소생으로 정혼자를 정해놓았다. 하지만 태왕의 명령으로 왕실을 능멸한 주씨가문의 남녀들은 모두 주살되었기 때문에 혼사에 대한 약속은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제 태자와 공주가 3년 뒤면 15살 성인이니 급한 상황이었다. 고필은 그런데 태왕께서 갑작스럽게 두 자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자 태자를 후계자로 생각하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상대는 둘 다 왕족으로 정하고 싶다.”
“아! 예 알겠사옵니다.”
고필장군은 태왕께서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아예 자녀들의 배우자를 왕족 중에 고를 생각을 예전부터 짐작했고 있었다. 태왕은 즉시 후보자를 생각하라고 하시니 고필은 즉시 왕실 사람들의 여식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고흘 장군에게 여식이 셋이나 있다고 들었는데. 아! 맞아 장녀의 이름이 미한이라 했던가?”
고필은 ‘아차’라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했다. 고필 자신과 왕실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고흘장군의 여식을 태자비로 들이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15년 전에 고흘장군은 두 아들이 사내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돌궐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막내 고주는 자식을 생산할 수 없게 되어서 대가 끊길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의에 종친들은 다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성화로 밀려 50대에 고흘은 15살의 대씨부인을 새 반려자로 맞이했다. 전쟁터에 나가 있음에도 고흘은 부인이 있는 부여성에 자주 들러 나름대로 대를 잇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딸 셋만 낳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이 것은 하늘의 뜻이라면서 양자를 들이기로 마음을 정하기로 하였다. 사실 태왕 양성 즉위한 직후 막내 고주가 주씨가문에 모살 당한 그 당시 고흘은 세 아들들이 모두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딸이 태어나서 안심을 했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흘은 아들을 못나 마음고생이 많았던 대씨부인과 어린 딸들에게 사랑을 아끼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딸들이 모두 총명하여서 사람들이 유화자매의 세 여신으로 비교 될 정도였다. 태왕은 그 세 명중에 한 명을 고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왕실원로의 수장은 고흘이 되는 것인가.’
고필장군은 낭패라고 생각했지만 태왕의 말씀을 거역 할 수 없었다.
<해모수와 유화부인은 고구려의 건국자인 고추모의 부모님이 되신다. 유화부인에게는 훤화(萱花)와 위화(葦花)라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유화부인은 지모신(地母神)과 무녀, 창조의 여신이고 둘째 훤화는 부인을 상징하는 꽃으로 다산을 뜻하는 것이고 셋째 위화는 물가에서 사는 갈대로 여성미를 상장한다. 참조: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아 그러면 고흘장군도 불러 들여야겠군.”
태왕은 고흘부부와 빨리 만나서 혼약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예 전선에 있는 장수를 불러들이는 것은 ......”
“고흘 장군은 현재 그쪽에서 직책도 없지 않은가?”
태왕이 주씨가문 숙청에 반대한 고흘을 전선으로 추방했을 때 직책도 없이 그냥 보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명장인 고흘도 할일 없이 전선 사찰만 하고 있다가 요즘은 부인과 딸들이 있는 부여성에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태왕은 이제는 주씨가문숙청에 반대한 고흘에게 화가 다 풀린 상황이었다. 게다가 알아본 바로는 고흘은 명화공주 출궁에도 관여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한 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던 태왕은 이번 혼약을 맺은 뒤에 고흘을 아예 전군을 통솔하는 막리지로 임명하고 군부를 대 돌궐전쟁에 일체화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구했고 고필은 매우 옳은 생각이라고 아뢰었다. 고구려는 주씨가문과 친 주씨계열 가문들이 태왕의 명으로 모두 주살되어서 요직을 맞고 있던 막리지 세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막리지는 관등일 가능성이 더 높다. 아마 한명만 맡는 직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맞았을 것이다. 예로 고구려 마지막 권력자인 연개소문이 막리지였음에도 보장태왕의 둘째 아들도 서기 647년 에 막리지이었다. 사실 고구려의 관직과 관등은 기록미비로 불분명하게 전해지거나 아주 구분이 없을 가능성이 있다. 참조: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사실 앞으로 있을 이계찰대와의 전쟁에서 북방에 배치될 20만의 군을 맡아서 대전략을 짤 장군은 상승의 명장 고흘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동부대인 발안이나 북부대인 구성은 전술은 뛰어나지만 전군을 모두 아우를 만한 능력은 부족하고 백제전선에서 용맹을 떨진 연자유나 강이식은 너무 어리고 직책도 낮았다.
고흘이 군 통수권자가 되어 명성이 놓아지는 것은 고필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라를 위한 일에는 경쟁자라도 무조건 협력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는 고흘의 막리지임명을 대로회의에서 동의를 할 까가 걱정이었다. 귀족들 입장에서 왕실 출신 명장인 고흘이 세를 불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관등인 막리지같은 고위직책은 대로회의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흘의 막리지임명은 왕실과 귀족간에 치열한 표 대결로 갈수도 있다.
이 당시 주씨가문 몰락후 2관등부터 5관등까지 고위직책이 많이 비어있었는데 자리를 놓고 왕실과 귀족들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굉장했다. 한 가문이 맡으면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가문이 세습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고위직을 차지하지 않은 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왕 양성은 귀족들의 나누어먹기 담합을 단호히 거절했다. 태왕은 이 자리들에 자신의 친위세력들을 심어 둘 생각이었는데 주씨가문과의 항쟁에 힘을 너무 소모해서 아직 그런 세력을 양성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여간 태왕과 고필은 고흘을 평양에 불러들여 군을 전시체재로 재편하고 그곳은 당분간 전선은 그쪽 사정을 잘 아는 고흘이 임명한 장군들로 맡기고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태왕은 바로 명화공주의 배필을 논하는 데 뾰족이 떠오르는 왕족출신 남자 자제가 없었다. 그 이유는 주씨가문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생을 태왕을 택하기 위해서 근친 내에 남성왕족들 제거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앞서 말한 고흘의 셋째 아들 고주의 의문사도 그런 가능성이 있었다. 항간에는 왕실과 군부의 강력한 실력자인 고흘과 대씨부인 사이에서 딸들만 태어나자 주씨가문은 춤을 추었다는 말도 있었다. 정말로 외척으로써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그 권력에 스스로 취한 주씨가문은 이 나라와 왕실에 도움이 안 되는 추악한 일족들이었다.
그런데 고필이 한 명의 왕족을 말하였다.
“내부 고부에게 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부? 그 멍청한 자말인가!”
주씨가문이 너무 멍청해서 건들지도 않았다는 왕족이 있었는데 고부라는 자였다. 그자에게 9살난 아들이 있었기는 하였는데 그 아들도 아버지를 닳아서 멍청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역시 안 되겠습니까?”
고필장군은 아무리 생각해도 명화공주님의 배필로는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명화공주님은 양식적인 귀족집안의 남자로 배필로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좋아! 아주 딱이야!”
고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못난이에게 공주님을 시집보내다니!
“태왕폐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무능 자가 배필이 돼야 왕의 사위임을 내세워 세도를 부리지 않겠나!”
그 말을 들은 고필은 태왕께서 명화공주의 아버지가 정말 맞는 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아니 그래도 자신이 낳은 딸인데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런데 그 뒤로 한 말로 고필은 태왕께서 자식들의 결혼을 서두는지 알 수 있었다.
“태자의 배필 될 여식도 너무 똑똑하다는 말이야! 하지만 귀족 놈들 때문에 시간도 없고..”
고필은 마음속으로 경악을 하였다. 태왕은 자식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앞으로 귀족들이 자신 자식들의 배필을 두고 논쟁이 붙어 정국혼란이 되기 전에 그냥 밀어붙이기로 결정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배필의 부모들도 태왕의 권위를 넘볼 수 없는 자들로 한 것이었다. 고흘은 야심이라는 것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만약 그가 야심이 있었다면 혼란스러웠던 선대 양원태왕때 나라를 뒤집었을 것이다. 고흘이 역모를 꾸민다면 패수(浿水 대동강)의 물이 거꾸로 흐르는 날일 것이라고 풍문이 돌 정도였다.
고부 그 사람도 며느리가 될 명화공주를 이용하여 세도를 부릴 용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냥 왕실에서 떡고물이나 받아먹을 무능한 사람일뿐이다.
고필은 갑자기 태자전하와 명화공주님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는 태왕폐하의 마음속은 오직 왕권강화와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만 생각하시는 분임을 느낀 것이다. 태왕의 마음속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자전하와 명화공주님의 앞일이 걱정이다.’
만약 고흘장군이라면 결사적으로 이런 결혼은 반대했을 것이지만 고필장군은 태왕의 말에 그냥 따를 줄만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필 그는 평소답게 그냥 명을 받고 물러갔다.
글쓴이 그리고 저작권자. 김원식
이 소설에서 시나리오 각색, 도용, 표절을 절대 금합니다.
9편은 다음주 토요일 8시에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다음편을 금요일에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기다리다 지치겠는데요 -_-ㅋ
매번 감사합니다. 요즘 일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편 밖에 쓰지 못해서 너무 시간이 빠듯합니다. 좋은 글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꾸벅^^
좋은 글 언제나 읽고 있습니다.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
예 매우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국상 주석을 달을까 말까 했는데 결국 못참고 수요일 오늘 달았습니다. 미천태왕하고 창조리이야기는 솔직히 너무 쓰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글 중간에 (온달이 창조리의 혁명에 관한 글 읽은 다음에 그의 책을 찾는 부분)국상주석 바로 윗 내용도 한 줄 추가했습니다. 자꾸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손이 가는 군요.(전편도 한줄씩 사라지거나 새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전체 줄거리는 수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읽으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올릴때 완본으로 올려야 하는 데 죄송합니다. 그리고 국상 주석 뼈대를 이루는 참조는 고구려 토론방 2184번 소장님 댓글입니다.
댓글을 이제서야 답니다.ㅋ 오타 몇개 보이네요.^^ 고조신-> 고조선, 독제-> 독재^^ 온달과 평강의 대화 재밌습니다.ㅋㅋㅋ 백성들을 잘먹이면 된다!!
하하하 오타 죄송합니다. 온달이 정치적인 것은 단순하게 가려고 해서 말을 재미있게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다음 편에 머릿글로 올리겠지만 평원태왕기에 연호로 보이는 영강(永康)을 달기로 했습니다 논란도 있지만 일단 쓰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연호를 쓰지 않고 평원태왕 8년이라고 쓰면 기분이 좀 ....... 고구려는 연호가 당연한 일인 것인데 하여간 수정하겠습니다.
여담이지만, 환단고기에는 대덕이라고도 되있더군요.ㅋ
환단고기가 이상한 것일 것입니다.(참조로 저는 환단고기는 위서진서논란은 중립적입니다. 다만 소장님 말씀대로 고구려- 돌궐과의 전쟁와 유목민족 매우 빈약것을 보면 ...) 영강이라는 연호는 북한에서 발굴된 금석문에서 나온 것이니까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돌궐과의 전쟁은 빈약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죠. 영강 그거 금동광배였던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정도입니까 아 참조할까 했는데...쩝쩝 지금 인터넷으로 영강 7년 금석문 실물좀 찾아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디 있을 것인데 이번에 서울 와서 ,, 이거 괜히 연호 쓰는 것아닌가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