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잔칫상에 오른 개고기
말복과 입추가 지났지만 여전한 폭염 속에 다음 날인 8일 점심에 보신탕을 하게 되었다. 생일이던 6일 저녁 큰 집 큰 조카딸로부터 ‘작은 아버지 생신을 축하드린다’며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보신탕을 함께 하시고 싶어 하신다’고 온 전화 약속에 따른 것이다.
이왕이면 잘 다니는 보신탕집으로 가자하여 다니는 집을 안내하게 되었다. 대전 동구 가오동 네거리 근처에 있는 탕 집 ***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몰려든 차들로 주차장은 물론 꽉 막혀 안내원의 안내를 받고서야 주차할 수 있어 탕집의 인기를 짐작하게 했다.
들어가려던 탕 집 홀 안은 빈자리 하나 없이 자리마다 손님들로 만석을 이뤄 문 앞에서 한동안을 기다려서야 나오는 빈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주문을 받은 여종업원은 ‘손님이 밀렸으니 끓여 나오는 대는 시간이 좀 걸린다’며 미리부터 늦어진다는 예고.
시간이 걸려 나온 탕 국물을 떠서 맛을 보신 큰 형수님은 ‘탕 국물이 아주 진하고 옛 보신탕국물 그 맛’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시며 흡족한 미소. 조카딸도 똑 같은 보신탕국물 옛 그 맛이라는 반응.
탕국물에 밥을 말아 식대로 보신탕을 즐기던 조카딸, ‘작은 아버지 개고기에 얽힌 사연 아세요?’라며 탕국물만큼이나 끌리는 질문.
조카딸은 후배로부터 받은 이메일에 실려 온 내용이라며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東國歲時記에 우리 선조들이 복날에 개고기를 즐겼음이 나타나 있으며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줄 때 잔칫상에 개고기가 올라왔다는 것은 여름에 왕실에서 개고기를 즐겨왔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동국세시기에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짐승의 고기는 도무지 먹지를 못하고 있다’는 형 丁若銓에게 동생 丁若鏞이 야생 개 잡는 방법을 비롯해 개고기 요리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지에 써 보낸 개고기 요리법은 ‘朴楚亭(초정은 朴齊家 호)의 개고기 요리법’이라고 하는 것.
한편 중종실록에는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얻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 중종 31년(1536년)3월21일 반석평, 남세건, 김희열, 황기, 진복창에게 관직을 제수했던 날의 기록이다.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봉상시 참봉 李彭壽가 날마다 개고기 구이를 만들어 김안로에게 제공하여 마침내 淸顯職에 올랐다. 당시의 권력 실세 김안로에게 아부하기 위해 개고기를 뇌물로 바친 진복창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로보아 개고기가 당시에 매우 귀한 요리의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후기에는 서민층까지 확대되어 복날에 개고기를 즐긴 백성이 많았다.
형수님과 조카딸은 ‘옛 맛 나는 보신탕을 모처럼 잘 먹었으며 생각나면 이 집으로 보신탕 먹으려 다시 함께 오자’고. (2012. 8. 19 .)
첫댓글 나도 가오동 그 보신탕 집에 간일이 있었는데 국물맛이 다른집보다는 진국이었음을 느꼈었네.
보신탕 먹을때 마늘은 먹지 말아야 하고 살구씨를 먹는 것 알고 있나? 살구의 한자는 殺狗인데 개를 죽인다는 뜻으로 살구씨가 개고기를 잘 소화시킨다는 의마라네. 보신탕을 제대로 알고 파는 음식점에서는 살구씨를 꼭 내놓더라구.
동네에 있는 한 보신탕 집의 상호 자체가 살구. 헌데 살구씨는 주지 않던 걸.
살구씨 내놓는 집이 진짜 보신탕 알고 파는 집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