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슬슬 연말 분위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때는 한 해가 끝난다는 게 그렇게 안타깝고 민감하게 다가오더니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올해 제가 본 국내 극장 개봉작 중 '베스트&워스트'를 뽑아 약간의 촌평을 붙임으로서 지난 한 해의 영화들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편의상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나누고, 오락성이 뛰어난 영화들은 따로 모아봤습니다. 영화들에 순위를 붙인다는 게 얼마나 우스울 수 있는 행동인지는 알지만, 뭐 또 이렇게 한번 죽 늘어세워보는 것도 그만의 재미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 외국영화 베스트 12
1위: 매그놀리아-영화라는 매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재가 나이 서른에 삶에 대해 이처럼 아픈 통찰까지 지닐 수 있다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재능은 언제나 우박처럼 덩어리져서 한 사람에게 퍼붓는 것일 게다.
2위: 소나티네-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씩 웃을 때의 서늘한 감동. 죽음을 관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단연코 기타노 다케시의 최고작.
3위: 아이즈 와이드 셧-스탠리 쿠브릭이 천재일 수 밖에 없는 이유.
4위: 내 어머니의 모든 것-페드로 알모도바르같은 악동도 이처럼 휴머니즘 가득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을 보면 시간은 역시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 것.
5위: 화양연화-아픈 사랑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환부를 그리움이란 메스로 다시 건드린다. 뒷걸음질쳐 엇나간 모든 사랑에 바치는 낮은 휘파람 소리.
6위: 감각의 제국-퇴폐적 유미주의의 아찔한 매력을 보여준다. 군국주의에 대한 이 영화의 은유는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상관없다.
7위: 존 말코비치 되기-올해 나온 할리우드 영화 중 가장 독창적인 작품.
8위: 키즈 리턴-좋은 성장영화가 갖고 있는 모든 장점을 다 갖추고 있다.
9위: 하나 그리고 둘-세필(細筆)로 삶에 대해 이렇게 거대한 벽화를 그릴 수 있다. 에드워드 양의 빼어난 스케치 능력을 알 수 있는 작품.
10위: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존 레넌의 노랫말 'Love Is Touch'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영화적 주석.
11위: 포스트맨 블루스-영화의 활동사진적인 쾌락을 극대화한 흥미로운 작품. 일본 감독 사부의 영화는 아이러니의 대단한 정서적 파워를 보여준다.
12위: 집으로 가는 길-80년대만 해도 중국 제5세대의 선두주자 중 첸카이거가 장이모우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요즘, 첸카이거는 장이모우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 한국영화 베스트 10
1위: 박하사탕-이창동 감독은 지나친 언론의 호들갑이라고 겸손해하지만, 난 정말 그의 이 영화가 '잊을 수 없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에도 이런 영화가 나올 수만 있다면!
2위: 오! 수정-극장문을 나서며 잔뜩 기분이 나빠져도 한가지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홍상수는 천재다.
3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재미있고 재치있고 감동적이다. 더 이상 뭘 바랄까.
4위: 플란다스의 개-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올해 가장 불운한 수작.
5위: 공동경비구역 JSA-전국 600만명이나 동원하는 초대형 히트작이 이처럼 멋진 만듦새를 갖출 수 있다니.
6위: 반칙왕-김지운 감독의 유머 감각은 국보급. 그의 영화 흥행성이나 오락성만 그간 주목받아왔지만, 사실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그의 영화들은 작품성의 측면에서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7위: 춘향뎐-예술에서 형식은 때로 모든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형식.
8위: 순애보-두번째 연출작이야말로 감독의 숨결이 가장 많이 담겨 있기 마련. '정사'보다 훨씬 생생하고 명징하다.
9위: 정-배창호 감독이 다음 영화도 재정적 어려움 없이 잘 만들 수 있기를.
10위: 킬리만자로-영화 전반부에 관한 한 이미지 조형술에서 주연 배우 연기력까지 전혀 흠 잡을 데 없다.
■ 오락성 베스트 20-무순
☆러브 오브 시베리아-지극히 감상적이지만 몇몇 장면에서 정말 눈물을 쏙 빼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꿈꾸고 있는 모든 환상이 비극의 형태로 녹아있는 멜러 영화.
☆듀스 비갈로-졸지에 남창이 된 순진남의 이야기. 코미디 영화에서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얼마나 재미를 줄 수 있는지 증명한다.
☆프리퀀시-만일 이 영화의 주인공이 데니스 퀘이드가 아니라 탐 크루즈였다면 대박이 터졌을 거다. '백 투 더 퓨처'의 시간여행 아이디어를 가장 뛰어난 완성도로 계승한 판타지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대기업의 유해물질 불법 폐기를 캐내려는 법률회사 직원의 이야기란 지극히 지루해보이는 소재를 이 정도로 재미있게 영화화할 수 있다니.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강박적으로 해피엔드에 집착하는 결말만 제외하면 영화를 보는 두시간 내내 즐겁게 웃을 수 있다.
☆U571-잠수함을 소재로 한 영화는 왜 다 재미있지?
☆와호장룡-눈이 즐거운데도 마음은 바쁜 것 하나없이 넉넉해진다. 무협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멋진 무협영화.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정도는 못 되어도 상당히 재미있는 패럴리 형제의 코미디. 단, 짐 캐리를 싫어하신다면 좀...
☆무사 쥬베이-자극적이고 폭력적이어서 그렇지 이렇게 뛰어난 오락성을 가진 애니메이션이 극장 개봉에서 1만명도 못 끌어들인 것은 정말 미스터리.
☆사무라이 픽션-로큰롤과 사무라이 활극의 행복한 만남.
☆갤럭시 퀘스트-가장 유쾌한 외계인 영화. 스타트랙을 본 적이 있다면 더 재미있을테고.
☆존 말코비치 되기-이 영화의 독특한 상상력이 주는 재미는 다른 영화에선 결코 찾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쉘 위 댄스-보고나면 당장 볼룸댄스장으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있는 춤 영화.
☆에일리언 2020-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고른 영화가 재미있으면 더 즐거워지는 게 사람 마음. 제목은 비록 지극히 촌스럽지만.
☆미션 임파서블 2-오락성으로만 따지면 이 영화만한 블럭버스터가 있을까.
☆데스티네이션-도토리 키재기 같은 공포영화들 사이에서 빼어난 시나리오로 우뚝 선 수작. 귀신도 살인마도 안 나오지만 충분히 스릴있고 흥미롭다.
☆반칙왕-김지운과 송강호 콤비는 현재 한국 코미디 영화가 내밀 수 있는 최선의 카드.
☆플란다스의 개-봉준호 감독의 허허실실 유머가 주는 탁월한 재미.
☆공동경비구역 JSA-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듯.
☆박하사탕-작품성 뿐만 아니라 재미도 상당하다. 보기에 좀 고통스러워서 그렇지.
■ 외국영화 워스트 10
1위: 겟 카터-실패도 이 정도면 기념비적이다. 연기와 연출과 스토리텔링 그 모든 것에서 실패한 졸작.
2위: 배틀 필드-이렇게 많은 제작비를 들여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존 트래볼타에게 '제3의 전성기'가 찾아올까.
3위: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이데올로기적으로 지극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법정영화로서도 요령부득.
4위: 사이먼 세즈-스타일에만 경도된 액션이 얼마나 지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5위: 미션 투 마스-지구 문명의 비밀이 풀리는 결말부는 정말 탄식이 절로 나오는 수준.
6위: 나인스 게이트-로만 폴란스키가 어떻게 이런 맹한 악마주의 영화를 만들 수 있지?
7위: 왓처-키아누 리브스만큼 영화를 못 고르는 배우도 없을 듯.
8위: 비치-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감독 대니 보일 모두의 경력에 오점으로 남을 사례.
9위: 결전-이젠 이런 식의 홍콩 액션영화는 그만 보고싶다.
10위: 패트리어트-감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블럭버스터를 왜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