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엇일까,
또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의 사전적 풀이는 '살아가는 일'을 말한다.
죽음은 '삶을 끝내는 일'을 말한다.
그럼 이 두 개의 화두에 생물학적 정의가 아닌, 철학적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 손 함 들어 보셈?
그렇다... 누구도 자신의 발밑으로 흐르는 시간의 강, 즉 삶을 자신있게 정의할 수 없으리라.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터이다. 어떤 위대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가 살아있는 한, 죽어 본 일은 없을 테니까.
'어린아이가 삶을 배워가는 존재라면 어른은 죽음을 배워가는 존재다'
공포스릴러 장르의 대인으로 알려진 스티븐 킹의 말씀이다.(사실 그는 장르소설로 출세하긴 했지만 그의 필모그라피엔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더 많다. 이 이야기는 차후 따로 한번 다루기로 하자.)
우리는 어린아이인 동시에 어른인 존재들이다.
늘 자신보다 나이든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설사 자신이 200살 먹은 노인이라 해도 그 위엔 시간을 먼저 거쳐간 '선조'라는 귀신이 버티고 있을테니까.
따라서 죽을 때까지 삶을 배워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체득해 가는 존재일 것이다.
쇼생크 탈출(Rita Hayworth & Shawshank Redemption )과 그린 마일(The Green Mile)은 이 두가지의 대별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그것도 골 쪼개는 철학 냄새 하나 풍기지 않고, 아주 재미있고도 감동적인 스토리로 풀어나간 작품들이다.
나는 이것을 타고 난 재능이 아니라면 실현이 불가능한 내공이라 생각한다.
이름하여, 천재
우선 두 작품의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보자.
첫 번째 둘 다 가막소를 소재로 한 영화&소설이라는 점.
두 번째 둘 다 원작자가 스티븐 킹이라는 점.
세 번째 둘 다 프랭크 다라몬트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는 점
네 번째 둘 다 원작의 훼손이 거의 없는 영화라는 점.
*공연히 잘난 척 하고 싶어 덧붙이는 말: 글쟁이라면 아마도 유무명을 막론하고, 감독이 자신의 원작을 훼손해 영화를 만들 경우, 몹시 기분 상해 할 것이다. 작품성이나 완결성과 무관하게 말이다.
그래서인지 스티븐 킹은 원작에 충실하게 봉사해서 영화를 만들어주는 프랭크 다라몬트 감독을 꽤 좋아한다고 한다.
반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원작을 너덜너덜하게 잘라버리고 만든 작품, '샤이닝'은 영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전혀 정통하지 않은 소식통의 '추측'에 의하면 큐브릭감독이 킹을 까메오로 출연시켜주지 않아서 삐쳤다고도...^^.
(킹은 까메오로 영화에 출연하기를 좋아한다.)
사실, 큐브리칸인 나로서는, 그저 비디오를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감사한 마음으로 봤던 영화가 '샤이닝'이다. 당시 이블데드라는 영화와 맞붙어 흥행에서 뒤졌다는 작품이긴 하지만, 작품성에선 전혀 뒤지지 않는다.
또한, 잭 니콜슨의 광기 어린 연기나 눈 덮인 오버룩 호텔 토피어리 미로에서의 스태디 캠 카메라를 이용한 무시무시한 추격장면 등은 원작훼손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샤이닝에 대한 원작과 영화의 썰은 차후 밤샘 수다로 함 풀어보기로 하고...
^^;;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린 마일과 쇼생크탈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제다.
쇼생크 탈출이 '삶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 그린 마일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유명한 영화들이니 많은 분들이 보았으리라 짐작한다. 따라서 영화는 딱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기로하고 원작소설을 가지고 이야기할까 한다.
삶과 희망-쇼생크 탈출
이 소설은 일인칭 소설이다.
하지만 주인공 앤디 듀프레슨(영화에선 이 역할을 팀 로빈스가 맡았다.)이 화자는 아니다.
쇼생크란 주립 교도소에서 40년째 복무하고 가석방된 레드라는 죄수가 감옥에서 만났던 앤디의 이야기를 기술해가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앤디는 아내와 아내의 정부를 살해한 혐의로 (당빠 본인은 무죄를 주장한다)유죄를 선고받는다.
젊고 잘생긴 앤디는 교도소에 들어가자마자 시스터라 불리는 남자들의 표적이 되어 자주 강간의 위협을 당한다.
그들은 대개 이성애 성향의 동성애자, 즉 생활환경 때문에 동성애자가 된 사람들이다.
앤디에겐 두 가지의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싸우다 당하느냐, 얌전히 대주느냐.
그는 싸우다 당하는 걸 선택해 번번이 싸우다 당한다. 하지만 당할 때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빈다.
그런 앤디에게 시스터들은 겁을 먹게 되고 얼마 안가 흥미를 잃어버린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몸을 내주면(?) 습관성으로 당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쩝... 사실, 그거 함 하자고 할 때마다 멀빡 터질 거 각오하고 덤빌 인간이 얼마나 되겠냔 말이지...
오늘의 교훈: 당할때 당하더라도 디지게 함 붙어나 보고 당하자.
앤디는 죄수들에게 몰래 물건을 구해다 주던 레드(이 소설의 화자)에게 접근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질학에 취미가 많다. 남는 게 시간이니 암석조각이나 함 해볼라칸다. 니가 돌 다듬는 작은 망치 좀 구해도!'
망치를 전해주는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아, 얼마나 가슴 설레는 단어냐. 친구...
오랜 수감기간동안 앤디는 은행가였던 경력을 살려 간수들의 세금상담을 해주게 되고 나아가 교도소장의 눈에 들면서 그의 재산축적을 도와주게 된다. 당근 불법적으로.
동시에 그렇게 얻은 쥐꼬리만한 권력으로 교도소 안에 방치돼 있던 도서관을 새롭게 단장해 메마른 죄수들의 정서에 휴식처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레드에게 얻은 리타 헤이워드의 포스터를 감방 안에 붙여둔다.
그의 성격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언제나 위험에 맞서 싸운다. 항상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때로는 이길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그렇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마음 속의 희망을 결코 지워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에의 갈구, 삶다운 삶에의 열망,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의지와 끈기.
이런 재산을 가진 그에게 돌 다듬는 망치와 리타 헤이워드 포스터가 주어졌다.
충분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자유로운 삶을 향한 행진을 시작할.
소설의 마지막 감동은 앤디가 탈출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레드가 가석방되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그는 오랜 교도소생활로 인해, 비굴함에 길들여져버린 자신을 사회에 적응시키지 못하고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방황을 한다.
그러다 문득 앤디와 교도소내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그의 흔적을 좇아 벅스톤의 북쪽 끝에 있다는 암벽을 찾아간다.
앤디의 약속대로 그 암벽의 큰 바위 밑엔 '피터 스티븐스'라는 이름으로 보낸 편지와 오십 달러짜리 지폐가 스무 장 들어있다.
그는 가석방범임에도 법을 어기고 '지후아타네조'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겠다고 결심한다. 그에게 자유와 희망의 상징이 된 앤디를 찾아서.
떠날 결심을 하면서 그는 또 중얼거린다.
내 선택은 둘 중의 하나야, 살려고 발버둥치거나, 죽으려고 발버둥치거나.
작가는, 발버둥을 쳐야 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살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 듯 하다.
쇼생크 탈출은, 삶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작은 망치로 상징되는 그 무엇으로라도 반드시 쟁취해 낼 수 있다는 희망과 희망을 현실로 쟁취하는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 하겠다.
(울나라에서 번역본을 구하려면 그 뜻이 하늘에 닿아야만 한다는 것이 스티븐킹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조만간 황금가지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쇼생크 탈출은 장편이 아닌 네 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Different Seasons'이라는 소설집 가운데 봄편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가을편은 그 유명한 리버 피닉스가 주연한 영화, 'stand by me'되겠다. 공포장르인 겨울 편 '라마즈 호흡'을 제외한 나머지 봄, 여름, 가을편은 재미와 더불어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들이다.)
죽음과 사랑-그린 마일 (The Green Mile)
이 것은 1996년 발표된 작품이다.
우선 멋진 영화음악을 하나 소개하기 위해 영화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가련다.
영화 The Green Mile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회상의 장치로 삽입된 영화 속의 영화장면이 있다.(소설에서의 회상장치는 폴 에지콤이 쓰는 소설이다)
1935년에 제작된 뮤지컬 영화 'Top Hat' 이라는 영화로 Fred Astaire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어빙 벌린의 대표작품으로 알려진 30년대 미국의 사교댄스음악인 'cheek to cheek'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도 삽입되었다.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만 봐도 참 감동적인 것이 그린 마일이다.
흑인죄수 존 커피 역을 맡았던 보디가드출신의 배우(콘 에어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조연 남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었다.
주인공 폴 에지콤 역은 내가 세번째로 좋아하는 배우 톰 행크스가 맡아서 열연했다.
특히, 탐의 오줌을 누는 표정연기는 영화를 통틀어 단연 압권이다.
요도염에 걸린 남자의 오줌누기 장면...
벌겋게 상기된 얼굴, 미묘하게 떨리는 얼굴근육, 통증과의 사투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애처로운 눈빛.^^* 웬만하면 요도염 따위는 걸리지 말자.
폴 에지콤은 미국 대공황시절에 사형수감옥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한다.
사형수들을 다루므로 사형집행까지도 맡는다.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날, 죄수가 감방에서 나와 전기의자에 앉기까지 반드시 걸어야 되는 복도 - 그 죽음에 이르는 길이 그린 마일이다.
(바닥이 초록빛인 그 복도를 간수나 사형수들은 그린 마일이라고 불렀다.)
소설 The Green Mile은 폴 에지콤이 죄수들과 그린 마일을 수없이 걸으면서 겪은 일들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그려낸다.
어느날 사형수감옥에 존 커피라는 덩치가 대단히 큰 흑인이 들어온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탐 행크스는 그 배우의 가슴에 겨우 닿는 정도다.
(영화를 찍을 때 커피의 역을 맡았던 흑인배우는 높은 발판을 딛고 찍었다고 한다.)
그는 쌍둥이 소녀 둘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들어온 사형수다.
그러나 위압적인 덩치와는 달리, 그는 전혀 위험하게 느껴지지도 사납지도 않다.
저런 인간이 어떻게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할 정도로 순박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늘 눈물이 그렁그렁 차있는 선량한 눈이며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태도까지...
폴은 마시는 커피와 스펠이 같다고 말하는 존 커피에게 첫 눈에 호감을 느낀 나머지, 교도소내 규칙을 어기고 악수를 청하는 일을 저지른다.
그 즈음에 또다른 신입생이 나타난다.
한 마리의 쥐. 이름하여 '딸랑씨' 되겠다.
딸랑씨는 실패를 굴리는 묘기를 부릴 줄도 알고 착한 사람과 심술궂은 사람을 구분해내는 영특함을 지닌 쥐다.
딸랑씨는 사형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인 죄수 들루아크루아와 친하게 지낸다.
그러나 낙하산 타고 내려온 심술궂은 교도관은 들루아쿠루아를 미워해 딸랑씨를 잔인하게 구둣발로 밟아 죽여 버린다.
이에 충격을 받은 들루아크루아는 난리법석을 피운다.
그러자 존 커피가 특유의 순박한 어조로 딸랑씨의 시체를 자신에게 갖다 달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배가 고픈 나머지 딸랑씨를 생으로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거나, 쥐포로 만들어 말려둔다든가 하는 엽기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좀 신비스런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하느님이 내려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받은 대상은 꽤 오랜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된다.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액션과 스릴을 동반하며 줄기차게 치고 올라간다.
뇌종양에 걸린 교도소 소장의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한밤중에 교도소를 나가기도 하고 폴은 커피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기도 한다.
폴은 기어이 커피가 무죄임을 알아낸다. 그는 죽은 쌍둥이 아이들을 살려보려다 떠돌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도리어 살인의 누명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백인 배심원들의 유죄판결을 뒤엎을 힘은 갖지 못했다.
존 커피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순순하고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사형을 당하기 직전, 그는 목사 대신 폴이 마지막 기도를 해줄 것을 청한다.
그리고 단 둘만 남게되자 폴을 붙들고 자신의 남은 힘을 그에게 모두 불어 넣어버린다.
폴은 딸랑씨와 더불어 존 커피의 영적인 힘을 나누어 갖게 된다.
그리하여 아내가 죽고, 친구가 죽고, 동료가 죽은 후까지 혼자만 살아남아 같은 양로원의 섹시한 할머니와 사랑을 나누고(못말려...) 이 긴긴 소설을 써나가는 것이다.
소설은 백 수십 살을 먹은 딸랑씨가 드디어 그 생명을 다하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역시 백 수십 살 먹은 할아버지가 된 폴이, 유일한 친구였던 딸랑씨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나오는 내레이션은 죽음에 대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갚아야 할 빚이다. 예외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어떨 때는... 후... 나의 그린 마일은 너무도 멀기만 하다... -
나는 이 소설만큼 끊임없이 웃기고 울렸던 소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 읽고 나서 거울을 보니 가관이었다.
눈은 퉁퉁 붓고 코 끝은 벌겋게 헐어있었다.
이소설을 읽고 난 직후 가졌던 아리에스의 생각.
죽음은 삶의 일부지만 희망은 죽음까지 포함하는 삶의 전부이다.
********************이 글에 필요한 일부 자료를 나 혼자만 친하다고 생각하는 모님의 홈피 자료실에서 발췌해 왔음을 알려드립니당~~~~!
새벽 (2003-07-07 10:56:53)
저도 엄청 좋아하는데..스티븐 킹.
꽃사슬 (2003-07-07 12:30:13)
글을 읽다보면 아리에스님의 표정이 보이는듯합니다
제 얼굴도 그 표정을 닮아가는듯합니다..^^
그래서 아리에스님의 글을 읽다보면 자꾸만 자꾸만 이뻐질듯 합니다..ㅎㅎ
너무나 감사^^*
개장수 (2003-07-07 12:50:46)
여보쇼!! 아리 낭자!! 내가 언제까정 배달 싸~~아비스 노가다럴 해야 하오? 버럭!!^^
인자 직접적으로다가 올려 주셔!! 동프에도!!
유디트 (2003-07-07 12:52:47)
자유만큼 소중한게 있을까...
신체의 자유.또 그보다 더 소중한 마음의 자유.
어떨때는 마음의 자유를 얻기위해 신체를...목숨을 버리기도 하니까 ..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끝없는 투쟁.그건 신체가 구속됨으로서 마음도 즉,정신도 구속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수 없는 것이겠지.
자유에의 갈망.
어디든 갈수있고 무엇이든 꿈꿀수 있는 우리 보통사람들은
일견 자유로운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한다.
모두가 자기만의 감옥들을 갖고있기 때문이겠지.
감옥에 있던 사람은 그곳은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자유를 느낄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억누르던 짐이나 고민이 사라지면 자유를 느낄수 있을것이다.
자유는 그럼 언제나 한시적으로만 느낄수 있는것일까?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의 행복처럼?
그러고 보면 자유는 간단하게 정의하기가 불가능한 단어겠구먼..
완벽하거나 혹은 지속적인 자유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걸까..
아리에스님께 전함/ 아리에스님 대문 표지 위에 칼럼 컨셉이 마음의 쉼터로 되어 있는데 그거 제목 바꾸시고 싶음 말슴해주세요.. 원하는대로 바쭤 줕테니까요.^^ 매일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일 표지 바꿔야 하는 웹마스터가 힘들겠지만..^^
하얀수족 (2003-07-07 13:30:51)
삶과 죽음을 돌아보게 하는 글 감동적입니다.^^*
아리에스 (2003-07-07 13:41:43)
새벽/^^ 움...푸헤헤헤... 걍 함 웃어봤으요... 방가버서. 요 밑에 글에도 쪽글 남겨주셨져? 자주 만납시대이.
꽃사슬/흘... 빵가루입니당. 저도 정말로 감샤하옵니당. 흘... 군뒤 왜 꽃사슬이란 필명이 꽃사슴으로 뵈는징(흐... 요상한 상상) 틈만 나면 ... 여기서 잼나게 놀아보시십시다여. 자주오세여~
유디트/음... 내도 자유에 대한 생각 많이 한다. 음 다음 번 글은 그거 가지구 구라 점 풀어보까? 어때?^^*
프라냐/여기까지 와줬네... 정말 고마워요. 히^^ 여서라도 우리 자주 보자요...
개장시성! 버럭 버럭 버러럭! 나 부끄러움 무쟈게 많은 거 암시롱 시방 그런 말이 나왓!!!! 계에에에에속! 배달 해줘!!!!!^^
아리에스 (2003-07-07 13:47:13)
와이드 샷님, 휴일 잼나게 보내셨나여? 흐으.... 아네요. 컨셉 맘에 쏙 들어요. 감샤감샤! 흘... 방 좀 데우느라고... 요새 무리를 하고 있슴다. 조만간 편집장에게 제목이 땡고당 할지도 몰러여~~~흑흑... 혹시 여와서 저를 찾거들랑 절대 그런 사람 모른다고 말해주떼염. ^^* 글고 웹마님에게는 제 감사의 하트 하나를 꼭 전해주떼염~
수족사부/주말 잘 보내셨져? 돈도 마니 버셨떠염? 흘... 전 그냥 수족사부가 여 계신 게 가장 좋아여. 히히... 이쁜 사진 자주자주 올려주세여~
그럼 두분 모두 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