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봉화(奉化)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고사마현(古斯馬縣)이라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옥마현(玉馬縣)으로 바뀌었고, 내령군(奈靈郡: 榮州)의 영현(嶺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화현(奉化縣)으로 개편되어 현재의 지명을 갖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안동(安東) 속현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설치하여 독립하였는데, 이때 안동부 소속의 미량부곡(彌良部曲)·매토부곡(買土部曲)을 편입하였다.
조선 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현이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운동으로 순흥부가 혁파되어 문수산 이동지역을 나누어 받았다가 1683년(숙종 9) 순흥이 복구되면서 이양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 대에 오지인 이 고을 태백산 각화사 근처에 선원각과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설치되어 태백산 사고로 불리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安東府) 봉화군(奉化郡)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로 이속되었다. 1913년에 교통편의를 위해 군 청사를 춘양면(春陽面)으로부터 봉화면(奉化面)으로 옮겼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군내면과 북면이 봉성면으로 통합되었고, 1956년에 내성면이 봉화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8년 봉화면이 봉화읍(奉化邑)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올 때 함께 건너온 금응(琴應)이 가문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고증할 자료가 없다. 금응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도 시조로 전하는데, 금용식의 6세손까지 기록이 유실되어 유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금씨 성을 쓰는 인물로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 금의(琴儀)를 시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과 고종사이의 명신이었는데, 1184년(명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1217년(고종 4)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태보(太保)에 올랐다. 또한 당대의 명신으로 지공거(知貢擧)로 있을 때 많은 인재를 등용했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금학사(琴學士)라 하였다.
봉화금씨가 봉화에 세거한 시기는 10세 금우공(琴遇工) 이후부터라고 한다. 금우공대 이전까지 금씨는 강화, 용인, 옥천, 담양, 영암 등지에 세거하였다가 금우공이 경상북도 봉화에 입거한 이후로 봉화를 관향으로 정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
금씨의 본관은 봉화 외에도 계양(桂陽: 김포), 강화(江華), 안동(安東), 평해(平海), 문화(文化)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봉화금씨의 분파이고, 봉화의 옛 이름이 봉성(鳳城)인 까닭에 봉성금씨라고도 하였으나, 현재는 모두 봉화금씨로 단일화되었다.
부위공 미파(副尉公美派), 동래공 휘파(東萊公徽派), 군위공 계파(軍威公啓派), 장사공 척파(長沙公滌派), 관찰공 숙파(觀察公淑派), 사정공 주파(司政公柱派), 판서공 유파(判書公柔派)가 있다.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봉화군
경상북도 문경시
경상북도 영양군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봉화금씨는 6,476가구 총 21,07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