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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토요일이다.
오늘은 송두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장봉섬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1박2일로 영종도 위의 장봉도에 아내와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아침 9시경 평촌에서 출발하여 영종의 삼목항에 도착하니 10시가 되었다. 그런데 주말이라서 장봉도를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도를 거쳐 장봉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차를 배에 실으려면 1~2시간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라서 일단 40분 정도를 기다렸다. 배타는 시간은 40분이건만 기다리는 시간은 한두시간이 걸리니 정말 맘이 급한 사람은 힘들어 했을 것이다. 아내가 10시 45분 티켓을 끊어 10분을 남겨 놓고 줄을 서 있는 차 있는 곳까지 300미터를 찾아와서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나를 안 찾아 왔으면 그저 1시간 넘게 마냥 기다렸을 것이다. 순간의 결단과 기지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배를 타니 봄바람은 시원하고 갈매기는 배를 따라 날아 오는데 그게 다 승객들이 먹을 것을 던져주어 받아 먹는 습관이 되어 배를 따라 오는 것이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습관인지 본성인지는 모르나 먹을 것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배가 출발한 삼목항은 이복례 선생이 살던 섬마을이라고 한다. 이복례 선생에 의하면 1959년 송두용 선생이 삼목항에 들어와 당시 10대중후반의 소녀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송두용 선생의 일기에도 삼목의 30여명의 소녀들에게 전도한 것을 아주 인상 깊게 잡지의 일기란에 적어 얼마전 이를 읽어 본 적이 있다.
삼목도는 매립되어 영종도에 속하고 그 위의 신도, 시도, 모도라는 세 섬이 붙어 있어 삼형제 섬이라 불리 운다. 세 섬은 현재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 그러나 그 옆의 장봉섬은 삼형제 섬과 아직 다리가 연결되지 않고 있다. 언제인가는 영종도와 신도를 지나 강화도로 가는 바다위의 다리가 생긴다고 한다. 또한 강화에서는 북한의 해주나 개성으로 바다위에 다리를 놓는다고 하니 남북의 경제교류가 발전한다면 인천대교에서 북한까지 바다위 다리가 생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장봉도는 해방 이후 노연태 선생이 의료 선교를 한 곳이다. 강화와 장봉을 넘나들었다. 노연태 선생은 장봉도의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이 섬에 1967년 중학교를 세웠으니 바로 푸른 학원이다. 학교라는 말 대신에 학원이라 했고 지금도 마을 사람은 푸른학원이라 부른다. 조사해보니 100여명이 졸업했고 홍성의 풀무학교에도 매년 3~4명이 진학했다고 한다. 송두용 선생이 노연태 선생의 권유로 이 섬에 들어 온 게 1969년 3월 경이다. 교장이라 했으나 이곳 아이들은 할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송두용 선생이 1981년경 까지 장봉도에 사셨으니 거의 13년 정도 장봉섬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하셨다. 푸른학원은 16년 정도 운영되었다. 송두용 선생의 흔적이 이 곳 장봉에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하고 마을 사람들의 푸른학원에 대한 추억들을 듣고자 장봉행을 결정한 것이었다. 사실 인천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장봉섬이 궁금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전이라 승객들은 많았다. 나는 2천원으로 새우깡을 사서 반은 아내와 같이 먹고 반은 갈매기가 채 가도록 손가락에 새우깡을 들고 서 있기를 반복하였다. 갈매기는 날렵하게 사람 손을 다치게 하지 않고 새우깡만을 부리로 채가는 신공을 발휘하거나 허공에 날리는 새우깡을 기가 막히게 부리로 받아먹었다. 나는 먹이를 낚아채는 갈매기를 보며 참으로 그 재주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어느 생명체든 제각기 살 길이 있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10분만에 중간 기착지인 신도에 사람과 자가용 몇 대를 떨구어 놓더니 배는 다시 장봉으로 향하였다. 30분 정도 우렁찬 엔진 소리와 뱃고동 소릴 들으니 어느덧 장봉항에 다다랐다.
11시 반경 장봉에 도착하여 우측으로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며 10분 정도 내려가니 해수욕장이 나왔다. 선착장에서 평촌에 이르는 도로는 육킬로 정도인데 노연태 선생의 땀방울로 닦인 도로라고 한다. 그 전에는 걸어다녔다. 노연태 선생의 의료선교 활동도 누군가 정리를 해야 할 듯하다. 장봉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인 듯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을 많이 하고 있었다. 내가 숙소로 정한 ‘토속점펜션’ 이란 곳도 이곳 옹암 해수욕장 근처이다. 그러나 푸른학원(신협)을 먼저 보고 싶어 바로 평촌으로 향하였다. 장봉에서 넒은 벌판이 많아 평촌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 같았다. 나는 오늘 평촌(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평촌(장봉)을 가는 길인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도로를 따라 국사봉 아래 말문고개를 넘었다. 옛날에 말목장이 이곳에 있었나 보다. 진촌으로 올라가니 곳배가 있었다. 곳배는 일종의 어선으로 이 배를 몇 척 소유할 정도면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선주들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어민들은 곳배에서 일하거나 갯벌에서 낙지나 조개를 잡을 수 밖에 없어 그리 넉넉하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관광지라서 많이 바뀐 듯하다. 1,200명 중 외지인이 4분의 1정도 된다고 한다. 진촌의 건어망 단지를 보고 평촌으로 내려와 푸른신협 건물을 보았다. 이 곳의 전신이 바로 푸른학원이다. 1970년대에는 이 정도 건물이면 그런대로 학교 분위기도 났겠지만 2018년인 지금에는 세월의 흔적과 바닷바람에 시달린 자취로 늙은 티가 완연하다. 1982년 경 푸른 학원이 폐교되고 1~2년후에 푸른신협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후 33년을 경영하다 지금은 문을 닫고 있다. 푸른신협의 조합원은 200여명 정도로 회원 가입비는 1천원이었다고 한다. 은행문턱이 높은데 비해 급전이 필요한 섬마을 사람들에게 조합원 2명의 보증만 있으면 5백~1천만 정도는 바로 대출이되니 어민들에게는 유용했을 것이다. 신협을 많이 물어 보지를 못하였다. 이곳 신협은 장봉만의 한 가운데에 자리해 장봉에서 경치가 으뜸이다. 이곳은 정자도 세워져 있고 바다가 지척이라 황혼녘에 낭만적인 노스텔지어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김선만 선생을 찾아갔다. 푸른학원 졸업생을 만나고 싶다 하니 펜션 주인이 가르쳐 준 분이다. 김선생은 푸른학원 5회 졸업생이고 풀무학교 출신인 동시에 20대 중반에 푸른학원 선생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장봉항 북쪽의 별바다호 선주인 동시에 횟집 주인이시다. 그 분 식당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송두용 선생이 학생들에게는 엄하셨고 ‘정직’을 특히 강조하였다고 한다. 성서 공부 시간에는 송두용 선생과 박정수 선생이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창해호 식당의 전창섭(푸른학원4회) 선생을 만나보니 송두용 선생의 조회가 너무 길었다고 한다. 일종의 교장 훈시인데 장장 1시간을 했다고 한다. 말하는 분이나 듣는 학생이나 기적이었으리라. 어찌 한 시간을 서서 말하고 또 듣겠는가. 학생들의 인내력이 대단하다. 송두용 선생은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인자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노연태 선생이 장봉섬 사람들에게 의료약품을 제공해주고 항구에서 평촌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닦아주었다고 한다. 그 도로를 따라 수도 없이 좁은 섬을 드라이브했다.
다음날 일요일은 비가 내렸다. 어제 무교회 신앙인들의 주일 예배 집회가 이 섬에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아쉽게도 없다고 한다. 주일 아침 일찍 그 섬의 제일 유명한 식당인 ‘식객’이란 곳에서 식사를 하며 물어보니 마을 사람 모두 송두용 선생과 노연태 선생을 알고 있고 그분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무교회 신앙인들은 남몰래 봉사하고 헌신하는 분들인데 모두 隱者들이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다.
푸른학원과 풀무학교를 위해 일심회 회원들이 그 얼마나 도와주었는가. 그러나 잘 알지 못하는 게 우리들이다.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못하나 하늘에서는 알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옹암 해수욕장에서 ‘그랜드 마트’를 운영하는 정호화 선생을 잠시 만나 다시 찾아 오겠습니다 하고 연락처를 받았다. 그 분은 나와 동갑이고 살아온 이력도 나와 비슷하다. 장사하느라 바빠 어제 많은 이야기를 못 나누었다. 그 분은 푸른학원과 풀무학교 출신인 동시에 얼마전 까지 푸른 신협 직원이었다고 한다. 신협에 대해 물어 보아야 할 것이 많다. 다시 오겠노라 작별 인사를 하러 마트에 들러 매출이라도 올려 주려 이것저것 샀는데 웬걸 백합과 바지락을 두 봉지나 주었다. 2만원을 주려하니 하도 거절하여 결국 1만원만 주는 꼴이 되어 미안하였다. 정선생 사모님의 친절이 너무 고마웠다.
비가 내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아내가 티켓팅을 하여 11시 배를 타고 나왔다. 배타고 나오며 지금쯤 오류동집회가 열리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또 한달 내에 다시 들어오자 하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배가 삼목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 장봉도에 송두용 선생과 노연태 선생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한 학교는 홍성의 풀무학교와 인천 앞바다 장봉섬의 푸른학원이 있는 줄로 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낮은 곳으로 찾아 들어가 농촌과 어촌을 살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최태사 선생과 오영환 선생 등 일심회 회원들의 수고와 후원의 땀방울이 녹아 있다. 그 분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도왔다.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홍성의 풀무학교는 풀무농업고등학교로 그 전통을 지켜 유기농업이나 정농회 활동의 밑거름으로 씨알의 사명을 다해 오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푸른학원은 신입생이 줄어 들어 문을 닫고 말았다. 섬마을의 경제가 나아지고 교통이 좋아지자 인천으로 진학을 하게 된 것이다. 푸른학원은 16년 정도 운영되어 장봉섬의 청소년들에게 중등교육의 혜택을 주어 그 사명을 완수하였다. 폐교가 되어 인간적으로야 아쉬움도 있지만 어쩌랴. 하나님의 뜻이고 그분의 뜻이 향후 어디에 있는지 그 누가 알랴. 지금 장봉섬의 주축은 대부분 푸른 학원 출신들이다. 100여명 졸업생 중 장봉섬에 사는 분들이 30여명은 되는가보다. 푸른 학원을 계승한 게 푸른 신협이라고 본다. 학교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고 신협은 어민들을 도와 주고자 출발하여 30년이 넘도록 운영되어 급전이 필요한 분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신협은 2년전 문을 닫았다. 신협 역시 무교회 신앙인들이 핵심 멤버이자 경영인들이었다. 성덕환(또는 성명심) 선생과 송기영 선생이 30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삶을 보냈다. 노연태 선생은 강화와 삼목, 그리고 장봉 일대에서 의료선교를 한 분이다. 오영환 선생도 의료선교회 총무로 거의 한평생을 헌신하였다. 그분들은 너무 겸손하셔서 자기를 드러내지를 않으시니 이 글을 쓰는 내 자신이 너무 죄송한 일이다. 그 분들은 송두용 선생처럼 비범을 평범으로 실천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실천하였다. 평범하게 사는 길이 가장 어려운 길이다. 그길은 겸손한 길이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길광웅 선생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무교회 신앙인 세분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 듯하였다. 함석헌은 말씀, 김교신은 성서조선 잡지, 송두용은 사랑의 실천에 방점을 찍었다고 추모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송 선생의 사상은 위대한 평범의 정신이다. 평민의 정신이다. 지식과 사상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인류의 희망임을 송 선생은 일찍 깨달아 자기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에 바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송두용 선생과 노연태 선생은 변방으로 밀려나고 비주류의 교회사에서조차 한 줄의 언급도 없으니 어이된 일인가. 평범과 평민의 정신을 알아주는 이 없으니 오직 주님만이 아시리라 본다.
이제 푸른 학원과 푸른 신협의 역사를 정리하자. 인간이 한 일은 세월이 흘러 역사가 되고 귀감이 된다. 강화와 장봉, 삼목도, 덕적도 등 인천 연안의 섬에는 무교회 신앙의 역사가 남아 있다. 신앙은 삶이다. 하루가 산 예배이고 기도이다. 一日一生이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 예수의 복음에 힘입어 하루 하루를 온전히 그리고 거룩하게 살고자 할 뿐이다. 늘 성령의 임재를 소멸시키지 말고 성령의 인도로 순간 순간 결단하고 실천할 뿐이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해 주께 나아가자. 무교회 신앙의 선배분들이야말로 보화를 하늘에 쌓은 분들이 아닐까한다.
그 곳 푸른신협에서 노연태 선생, 송두용 선생, 박정수 선생, 그리고 권정임 선생을 생각하였다. 이곳에 대안학교를 만들면 어떨까. 권정임, 송두용, 노연태 세분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교명으로 하면 어떨까하는 것이 나만의 공상에 불과할까.
첫댓글 그곳에 아직 송두용과 노연태 선생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군요. 마치 함께 동행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성정환 선생님이 푸른학원 터를 매입했다고 하니, 대안학교의 꿈이 공상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장봉섬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신앙의 선배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소네요.
저도 나중에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비범을 평범으로 바꾸어 살 수 있는 믿음의 선배님들이 계셔서 참 감사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