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에서 만나는 예수님 사랑
스테파노 M. 마넬리 지음
1. 오, 신성한 성체성사여
성체성사의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아르스의 작은 외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에는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을 거요.” 이에 그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야 될 일이겠군요.”
비안네 신부는 곧장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 어두운 성당의 제대 앞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성무일도를 바치고, 묵상을 하고, 미사를 준비하고, 미사가 끝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정오까지 멈추지 않고 기도했다. 한 손에는 묵주를 들고, 감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계속해서 기도를 드렸다.
비안네 신부의 이와 같은 일과는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얼마 후에는 이 일정을 대폭 변경해야 했다. 성체의 예수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바친 그의 열렬한 기도가 조금씩 사람들을 본당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성당이 비좁아 보일 정도였고, 비안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려는 이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는 하루에 10시간, 15시간, 또 어떤 때에는 18시간씩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그가 오기 전까지 이 성당은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제대와 감실은 버려져 있었고. 낡은 고해소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비안네 신부에게는 돈도, 재주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훌륭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산조반니 로톤도의 비오 신부
우리는 똑같은 질문을 이탈리아 가르가노 산 위에 위치한 촌락, 산조반니 로톤도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많은 이름 없는 벽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산조반니 로톤도는 영적·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곳에도 역시 병약한 수사신부 한 사람과 낡고 무너져가는 작은 수도원, 버려진 작은 성당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당의 제대와 감실은 그 가난한 수사신부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었다. 신부의 손끝과 묵주알들은 그의 쉼 없는 기도 때문에 닳아 반질거렸다.
산조반니 로톤도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 아르스와 산조반니 로톤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기에 수십 만, 아니 수백 만의 순례자들이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오는 것일까?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1코린 1,28)을 택하심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렇다. 그러한 변화는 오로지 그분에 의한 것이었다. 성체의 신성하고 무한하신 힘에 의한 것이었다.
아르스와 산조반니 로톤도의 감실로부터 뻗어나가는 그 힘이 두 신부의 활동을 통하여 숱한 영혼들에게까지 닿게 된 것이다. 그 신부들은 감실의 봉사자였고(히브 13,10참조),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이었다.
임마누엘
“성체성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일 것이다.
성체는 성당의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당신의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지니신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빵의 형상 안에 숨어 계시지만, 축성된 제병 안에 물리적으로 현존하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며, 우리에게 맡겨져 계신다. 성체의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마태 1,23)이시다.
교황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쳤다. “성교회의 신앙은 이러합니다. 즉 말씀이신 하느님과 십자가 상에서 수난하시고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며 천국에서 통치하시는 분, 즉 마리아의 아드님은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체의 예수님은 우리의 형이요, 친구이며, 영혼의 생명을 위한 양식이 되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당신 신비체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시어 영원한 사랑의 지극한 행복 속에 살게 해주고자 하신다.
하느님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이 이상 더 주실 수는 없으시다. 지극히 지혜로운 분이시지만, 더 이상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 알지 못하신다. 무한히 부유한 분이시지만, 더 이상 줄 것이 없으시다.”
상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생필춤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아주 초라한 집에 머물게 되었다. 어떤 이가 이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또 다른 이가 성인을 측은히 여기는 말을 하자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에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이 은총을 받기 위해, 또는 도움과 위로를 얻기 위해 찾아 왔을 때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이 구하는 모든 것은 성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듣고자 하는 따뜻한 말들, 또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적들…. 예, 그렇습니다. 성체 안에는 기적들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 우리를 하느님다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당신 것으로 만드시고 당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예수님께로 향해야 한다.
성녀 젬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영혼의 양식이신 예수님,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저를 정화시켜주시고, 성화되게 해주소서.”
우리는 깨끗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셔야 할 것이다. 성인들은 바로 그렇게 살았던 분들이다. 우리는 이 표현할 수 없는 신비와 더 친근해지기 위한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하루 일과에 있어서 성체성사에 대한 묵상, 공부 및 사고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루 중에서 가장 축복을 많이 받는 시간이 바로 영성체 시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혼과 육신에 유익함을 얻게 될 것이다.
교황 성 비오 10세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성인이 살자노의 본당 신부로 있을 때, 하루는 복사단 소년이 병이 들어서 그 소년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똑같은 시간에 의사도 도착했는데 의사는 소년에게 몸이 어떠냐고 물었다. 소년은 그날 친구들에게 성체성사에 대한 도리를 설명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몸이 좀 가볍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 대답을 들은 의사는 한껏 조소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오! 거 참 대단하구나. 나는 지금껏 교리를 좀 가르친다고 해서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이 말을 들은 성인 신부는 즉시 그 소년을 옹호하며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당신이 배운 의학의 효과들은 아주 잘 볼 수 있습니다. 근시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잘 볼 수 있지요. 공동 묘지에 가면 병으로 죽어간 이들의 무덤으로 꽉 차 있으니…. 그러나 그리스도교 교리는 지적으로 근시안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 즉 천국을 사람들로 채워줍니다!”
성체는 천국의 “누룩”(마태 13,33)이다. 이 누룩은 모든 사람의 인성과 영적·현세적인 선 안에서 발효될 수 있다. 성체 그 자체가 너무나 고귀한 선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 안에 예수님, 인간이 되신 하느님,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몸과 피가 되신 말씀이신 그분을 소유한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는 임종 시에 마지막으로 좋은 말씀을 남겨달라고 청하는 수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을 남겼다.
“나는 당신들에게 더 해줄 말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성체를 모시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 성체성사에서 만나는 예수님 사랑 / 스테파노 M. 마넬리 지음 / 가톨릭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