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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짐의 미학 Ⅱ Malevich, Kazimir Severinovich 알렙? 그래. 전혀 흐트러짐 없이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있는 곳이지 -보르헤스 ?알렙?- 아르헨티노라는 사내가 ‘나’에게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것은 부엌의 지하실에 있어. 그건 내 거야, 그건 내 거야. 나는 그것을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어린 시절에 발견했었지... 나는 몰래 지하실로 내려갔고, 금지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지. 눈을 떴을 때 나는 알렙을 보게 된 거야.” “그렇지만 지하실은 아주 어둡지 않나?” “만일 알렙 속에 지상의 모든 장소들이 들어있다면 거기에는 모든 조명기구들, 모든 등불들, 모든 빛의 원천들이 들어있지 않겠어?” 그의 말을 듣고 지하실로 내려간 ‘나’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마침내 알렙을 보게 된다. “층계의 아래쪽 오른편에서 나는 거의 눈에 감기 어려운 광채를 빛내고 있는 형형색색의 작은 구체 하나를 보았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회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잠시 후 그 움직임이 그 구체 속에 들어 있는 어지러운 광경들 때문에 생겨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렙의 직경은 2 또는 3 센티미터에 달할 듯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크기의 축소 없이 우주의 공간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알라누스 데 인술리스는 모든 곳에 중심이 있고, 어떤 곳에도 원주가 없는 어떤 구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구약성서 에스겔에도 동시에 동서남북을 볼 수 있는 한 천사의 얘기가 나온다. 이처럼 알렙 속에서 “하나의 사물은 무한한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으르렁거리는 바다를 보았고, 새벽과 저녁을 보았고, 아메리카 대륙의 군중들을 보았고, 검은색 피라미드의 중앙에 있는 은빛 거미줄을 보았고, 부서진 미로를 보았고... 세계의 모든 거울들을 보았고....... 세속적 천지창조 히브리인들은 야훼의 말 한 마디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빅뱅 이론’이라는 세속적 천지창조론을 믿는 모양이다. 이 이론은 조지 가모프라는 이름의 러시아 태생 미국의 학자가 내놓은 학설로, 여기에 따르면 우주는 200억 년 전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응축된 하나의 점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단 하나의 점 안에 들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거대한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다 쑤셔 넣은 그 점의 크기와 무게가 얼마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아니, 그걸 묻는 게 도대체 의미 있는 질문이기는 할까? 듣자 하니 거대한 우주를 토해놓는 그 점을 ‘우주의 특이점’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어떤 이론에 따르면 최초의 폭발이 일어난 단 1초 사이에 우주의 크기가 10억×10억×10억×10억 배로 팽창했다고 한다. 지하실의 ‘알렙’을 생각해 보자. 크기가 2-3 센티미터에 불과하나, 그 안에는 우주 전체가 들어 있다. 아마도 최초의 폭발이 일어난 후 1초 이내의 어느 시점에서는 우주가 실제로 알렙처럼 직경 2-3 센티미터의 구슬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게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의 주인공이 목격한 알렙은 그 아득한 옛날 폭발하여 팽창하다가 도중에 멈춘 우주였을까? 먼저 하나의 점이 순식간에 폭발하여 시간을 토해 놓고, 공간을 토해 놓고, 은하계를 토해 놓으며 끝없이 팽창해 가는 장관을 상상해 보라. 이 창조의 과정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후 그 필름을 거꾸로 돌린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보이겠는가? 우주 전체가 점점 크기가 줄어들어 하나의 점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이윽고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주 공간에는 시간을 빨아들이고, 공간을 빨아들이고, 물질을 빨아들이고, 빛을 빨아들이는 그런 점들이 존재한다. 그걸 ‘블랙홀’이라 부르는 것으로 안다. 검은 사각형 과거의 예술이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면, 현대예술은 세계를 빨아들여 블랙홀이 되려는 모양이다. 1915년 전시회에서 말레비치는 이제까지 없었던 하나의 극단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화면 위에서 모든 것을 추방하고, 하얀 바탕 위에 달랑 검은 사각형 하나만 그려 넣었던 것이다. 세잔느 이후에 시작된 구체적인 형태의 사라짐이 여기서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는 하나의 절대적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때부터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은 서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아이콘으로 통하게 된다. 말레비치는 러시아의 농민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가시적인 대상들을 기하학적 도형에 가깝게 단순하게 처리하곤 한다. 여기서 순수한 색과 기하학적 도형들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색깔도 없애고, 구성도 포기한 채, 그저 사각형, 원형, 십자가를 무채색으로 그리던 시절이리라. 이렇게 화면에서 가시적 대상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비대상적 세계’, 즉 아무 대상도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자신의 예술적 실천을 그는 ‘절대주의suprematism’라 불렀다. 절대주의는 몬드리안처럼 상을 통해 모든 대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근원적 형태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칸딘스키처럼 자유로운 구성을 통해 형과 색의 미적 유희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회화에서 정신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을지 모르나, 말레비치가 ‘절대주의적 형태’라 부른 사각형, 동그라미, 십자가는 복잡한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여 얻어낸 시각적 추상이 아니며, 형과 색의 자유로운 미적 구성과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저 무거운 검은 침묵으로써 대상이 사라진 근원적인 무無의 상태를 가리킬 뿐이다. 형상의 금욕주의 20세기에 들어와 회화에서 대상성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인 ‘진리미학’은 힘을 잃게 된다. 고전회화와 달리 현대회화에는 도대체 ‘내용’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성이 사라진 추상회화 앞에서 사람들이 의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론은 칸트의 ‘형식미학’이었다. 한 마디로 예술의 본질은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형식의 아름다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추상이 ‘절대주의’의 단계에 도달하면 형식미학도 더 이상 우리를 돕지 못한다. 저 검은 사각형 안에서 형과 색의 자유로운 유희는 갑자기 멈추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즐거움을 준다. 우리에게 미적 쾌감을 주는 한 추상이든, 구상이든 아직 미적 쾌락주의 아래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 그림을 보라. 대체 저 검은 도형의 어느 구석이 아름답단 말인가? 외려 형을 보는 쾌감, 색이 주는 쾌감이 금지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검은 사각형>은 우리에게 미적 쾌감을 주지 않는다. 거기서 우리는 외려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미적 금욕주의다. 감각적 쾌락pleasure을 포기한 고통스런 금욕의 대가는 그 모든 감각적 쾌락을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정신적 열락delight. <검은 사각형>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지향한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 신은 인간들에게 십계명을 내려 명하기를 이 세상의 어느 것이든 눈에 보이는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헬라의 신들은 아름다운 형태의 유한성 속에 갇혀 기꺼이 조각이 되었으나, 히브리의 신은 자신의 무한성을 유한한 형태에 가두어 놓기를 거부했다. 절대주의는 이 ‘형상금지Bildverbot’의 세속적 형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은 고귀한 침묵으로 눈에 뵈는 모든 대상을 집어삼키며, 그 검은색으로써 세계의 죽음을 애도한다. 있음과 없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원래 세상에는 ‘하나’의 거대한 의지가 있었다. 이 의지가 개별화 원리에 따라 갈라져 우리가 보는 이 표상의 세계가 탄생한다. ‘의지’라는 근원적 존재에서 갈라져 나온 파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들은 조그만 ‘의지’의 파편들, 뭔가 하려고 하는 조그만 욕망의 조각들이다. 각자 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기에 개별 의지들은 서로 부딪혀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 얽히고 설킨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덧없는 가상의 세계, 매트릭스의 세계라는 뜻이다. 우리가 저 근원적 의지 속에서 하나였을 때, 우리들 사이에는 갈등이 없었다. 그때는 ‘우리’도 없었고, ‘세계’도 없었다. 일자가 개별 의지들로 갈라질 때 표상의 세계가 토해 내고, 의지들의 차이가 지워질 때 표상의 세계는 한때 그것을 뱉어놓았던 존재의 영점零點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차이는 세계를 낳고, 차이의 소멸은 세계를 지운다. 말레비치는 사각형으로 모든 형의 차이를 지우고, 검은색으로 모든 색의 차이를 무효로 만든다. 이때 그의 캔버스는 모든 피조물들의 차이를 지우고, 세계 전체를 들이마시는 블랙홀이 된다. 말레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아무런 차이들이 없다면 하나의 절대적 균형이, 즉 하나의 절대적인 영(0)이, 무대상성이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페르시아인들은 하나의 새이자 동시에 모든 새들인 것을 신성神性의 상징으로 보았다. <검은 사각형>은 바로 그 새를 닮았다. 그것은 모든 것이자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있음을 내포한 없음이다. 한 점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모든 점이기도 한 알렙이다. 아니, 저 검은 사각형은 알렙을 보았던 그 지하실의 어둠일까? 그 어둠 속에서 보르헤스의 주인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동시에 보았다. 그렇다면 당신도 저 검정색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동시에 봐야 한다. 보이는가? 한 가지 명백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자네가 그것을 못 본다 할지라도 그건 자네의 무능력의 탓이지 내가 한 증언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일세 글 : 진중권(『미학 오디세이』 저자 / 문화평론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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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e Harvest. 1912. Oil on canvas. 72 x 74.5 cm.
우리말로 하면 '호밀 추수'정도가 되겠네요. 1912년에 그린 그림이니까 본격적으로
야수파 및 큐비즘 경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의 그림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말레비치의 작품에는 유난히 추수를 한다든가 농부들이 노동하고 있는 그림이 많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태어난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 싶네요.
체구에 비해 튼실하고 큰 손발을 가진 게 그림의 특징이라고 해요.
Black Suprematistic Square. 1914-1915. Oil on canvas. 79.6 x 79.5 cm.
그런데 위에서 보았던 투박한 농부들의 그림과 달리, 이때즈음의 그림부터는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본래 라리오노프를 중심으로 한 미술전이 열렸을 때에, 그의 색채가 편중되어 있는 것이나
형태를 경시한 면에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조형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국 1913년즈음 이후부터 자신이 맺고 있던 본래의 영향관계들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도 그 이후에 발표되어, 입체주의를 버리면 공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Black Square. 1920s. Oil on canvas. 106 x 106 cm.
위와 비슷한 것으로 1920년대에 제작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작품이 더 있어서 함께 올려봅니다.
사실 저는 1913년에 그린 '절대주의 기본요소 : 사각형'이란 그림을 찾아 올리고 싶었는데,
제가 들어가 확인한 사이트에는 그 그림이 없네요.
위의 그림은 유화이고, 제가 올리고 싶었던 그림은 단순히 종이에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인데요.
생긴 건 위의 그림과 거의 일치합니다-.-;; 다른 게 있다면 크기 정도일까요.
위의 그림이 가로, 세로 각각 1m에 육박하는 대형그림이라면, 스케치는 가로 11.5cm, 세로 18cm에 불과해요.
Red Square. 1915. Oil on canvas. 53 x 53 cm.
일단 너무 길어서 제가 제외했는데요, 'Red Square'라는 제목 옆에
'Visual Realism of a Peasant Woman in Two Dimensions.'라고 조금 더 긴 이름이 붙어있어요^^;
본래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제창하며 다양하게 탐구했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절제'를 표상하는 검은 사각형을, 이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상징하는 빨간 사각형을,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색의 사각형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은 그 중 빨간 사각형이 되겠네요.
이 그림 뒤에 '흰색 위의 흰색 사각형'을 더 덧붙여 보려고 했으나, 역시 사이트에선 못 찾았습니다;;
'검정색 -> 다양한 색 -> 흰색'으로의 발전을 거듭한 말레비치의 극단적 순수성을 볼 수 있거든요.
Suprematism. 1915. Oil on canvas. 101.5 x 62 cm.
자, 이제 사각형 그림 말고 다른 절대주의 구성 요소가 듬뿍 담긴 그리을 볼게요:D
위의 그림은 '절대주의'라는 제목을 가진 1915년작입니다. 현재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보존중이에요.
위에서 말했던 '여러가지 색의 사각형'을 탐구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이에요.
검정, 노랑, 파랑, 빨강, 초록 등 다양한 색상의 사각형들을 불규칙적으로 나열하면서
절대주의적인 미학이란 어디에 있는가를 고뇌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겠습니다.
하얀 바탕 위에 단순하게 존재하는 사각형들이, 그러나 형식적인 무질서를 질서로 만들고 있죠.
그럼 아래에서부터는 '절대주의'라는 제목을 가지고 발표했던 말레비치의 그림 몇 점을 더 볼게요.
그림마다 따로 부가설명은 덧붙이지 않고 통괄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말레비치에 의하면 '회화는 진실의 욕구'이고 '부재는 강한 존재의 확신'이라고 합니다.
즉, '오브제 없는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조금 어려운 말이죠?^^;;) 말할 수 있어요.
말레비치가 직접 쓴 에세이 중 '오브제 없는 세상'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몬드리안이 신지학에 의존했다면, 말레비치는 러시아의 신비주의와 허무주의를 통해
추상회와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의 허무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밑바탕이 되었을 정도로 존재감이 컸던 모양이에요.
훗날 말레비치는 이와 같은 절대주의의 실현을 단순한 미술작품에서 건축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실용화되지는 못하였으며 리시츠키에 이어서야 말레비치를 충실히 따르던 그가
말레비치의 건축관에 따라 '바우하우스'를 건축할 때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자, 그럼 절대주의를 향한 말레비치의 노력들을 그림으로 차례차례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말레비치는 1918년 이후 매우 다작했으나 절대적 시간에 열중하기 위해서
작품들에 날짜를 써넣지는 않았다고 해요. 즉, 말레비치의 그림에 표기되어 있는 연대는
제작일이 아니라 전시회에 발표된 날짜를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h t t p : / / b l o g . n a v e r . c o m / y j y y 0 0 1
Suprematism. Two-Dimensional Self-Portrait. 1915. Oil on canvas. 80 x 62 cm.
Suprematism. Soccer Player in the Fourth Dimension. 1915. Oil on canvas. 70 x 44 cm.
Suprematism with Eight Rectangles. 1915. Oil on canvas. 57.5 x 48.5 cm.
Suprematism. 1915. Oil on canvas. 87.5 x 72 cm.
Suprematism. 1915. Oil on canvas. 88 x 68.5 cm.
나뭇꾼 (1912) ]
로봇과 같은 모습의 이 나뭇꾼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레비치의 대표작입니다. 그는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서 역동적 구성이라 칭하기도 하였는 데요. 따뜻한 색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카롭게 떨어진 선과 빛의 각도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소 경건한 분위기가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기도 하죠.
폭풍 후 마을의 풍경 (1912) ]
다소 산만한 듯 한 빛의 방향과 빨강, 파랑, 흰색의 강렬한 색이 인상적입니다. 지난 밤의 폭풍우가 마을을 눈으로 뒤덮고, 아침 햇살의 강렬한 빛이 마을을 덮은 눈 위에서 반사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시기의 말레비치는 모든 물체를 분해하는 입체주의와 차가운 금속미의 미래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 (1912) ]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처음 전시되었을 때 파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정교의 성상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해요. 그래서 말레비치가 죽은 후 러시아 미술가 연맹에 안치되었을 때 그의 머리 위 벽에 이 그림이 걸렸다고 합니다. 십자가 대신으로 말이죠.
붉은 땅의 수확자 (1913) ]
러시아 민족주의의 감정을 실은 이 작품은 앞의 나뭇꾼과 같은 스타일의 그림이죠. 말레비치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의 농부들의 생활을 단순하고 장엄하게 그려내었습니다. 명암대비와 원색으로 강조된 곡면의 입체감이 앞의 나뭇꾼보다 훨씬 단순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비행사 (1914) ]
말레비치 특유의 명암대비 인물표현이 엿보이네요. 물고기, 문자, 카드 등 다소 비행사와는 상관없을 듯한 여러가지 물체들을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입체주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 하네요.
모스크바의 한 영국인 (1914) ]
나뭇꾼과 흡사하게 그려진 인물을 뒤에 두고 재미있는 물체들이 화폭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단어들, 물고기, 촛불, 총검, 교회, 칼 등이 일관성없이 나열되어 있는 데요, 이는 영국인의 도시에 대한 경험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네요.
날으는 비행기 (1915) ]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물질주의 세계관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말레비치의 초기 절대주의 작품인데요, 물질주의적인 제목이 붙어 있네요. 하지만 예술의 효용성만을 따지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사회흐름에 그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타나게 되는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에는 <절대주의>라고 제목을 붙이죠.
절대주의 No.58 (1916) ]
오페라 <태양에의 승리>의 무대디자인을 하면서 말레비치는 위의 그림과 같은 절대주의 스타일을 활발히 전개시켜 나갔습니다. 대비적인 색채들과 다양한 크기의 물체들을 명확한 공간감을 가지고 배치시키고 있습니다.
절대주의 (1917) ]
절대적 감각의 추구와 새로운 기호의 창조에 자신의 예술세계인 절대주의를 설명한 말레비치는 위의 그림과 같은 스타일을 시리즈로 그려내었습니다. 훗날 이 절대주의 감각은 바우하우스를 통해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전해졌고, 아직까지도 그 감각적 흐름은 현대 디자인의 주류가 되고 있습니다.
노란 옷의 반신상 (1932) ]
그의 초기작품에서 많이 보았던 명암대비의 물체 표현이 약간 보이지만, 그동안 추구해왔던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작품입니다. 하지만 감각적인 원색의 대비는 그의 디자인 경향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집 한 채를 바라보고 있는 외로운 사람의 뒷모습은 고독한 말년의 말레비치 자신을 연상시키고 있네요.
말레비치는 칸딘스키, 몬드리안과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미술가입니다. 하지만 말레비치가 실제로 태어난 곳은 우크라이나 키예프 입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광활한 러시아 대지에서 느낄 수 있는 형상과 색채에서 추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습니다. 그가 그린 나뭇꾼이나 농부, 기사 등은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열병처럼 번졌던 입체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기에 그가 그린 작품들은 원통형을 주로 하여 인물을 극도로 단순화시킨 것입니다. 아래에서 소개시켜 드리는 나뭇꾼을 비롯하여 당시의 많은 작품들은 큐비즘적 미래주의 경향을 나타내죠. ( 여기서 잠깐!!!! 미래주의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기존의 가치와 전통을 타파하고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며, 새롭게 등장한 기계문명과 도시가 보여주는 역동성, 속도미를 찬양하는 20세기 초 예술사의 한 흐름입니다. )
1915년 12월 한 전시회에서 말레비치는 35점의 그림을 출품하며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에서 절대주의로. 회화의 신사실주의> 라는 선언문 책자를 배포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말레비치가 주도하는 절대주의 회화가 현대미술에 당당히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수성 밖에 없다. 이 길을 통해 절대주의 예술은 순수 표현에 이르게 된다.”
그는 화가가 그리는 형태적 존재를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도둑이 사슬에 묶인 자신의 발을 찬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연기처럼 사라질 형상을 바라지 말고, 진실만을 보자고 했던 그는 직선, 원, 삼각형, 사각형, 십자가 등 가장 기본적인 도형으로 복잡한 물질 세계를 부정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초월한 절대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던 거죠.
화폭 자체를 회화 공간으로 삼고 가장 기본적인 도형과 색채들만으로 그림을 그려낸 말레비치 회화는 새로운 시각예술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국립응용미술학교의 교수로 지내기도 하고, 독일의 바우하우스와도 협력하면서 모더니즘 디자인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제외한 실험적인 미술은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게다가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따지던 동료 예술가들과의 불협화음과 정치적 박해 등으로 인해 그의 말년은 고독하게 지내야만 했답니다.
독특한 절대주의 미술로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빠질 수 없는 말레비치는 그 후 페레스트로이카에 힘입어 66년이란 긴 시간 후 1988년에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추상화가로 기적처럼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활한 말레비치의 나뭇꾼은 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미술이 주는 감동을 알게 했죠. 여러분도 그 감동을 전해 받으시겠어요?
첫댓글 친구의 딸 졸업작품전을 관람했었는데(멀티미디어 디자인)... ^^ 모양이 비슷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