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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본선개관
개최도시 : 버밍핸, 리버풀, 런던, 맨체스터, 미들스브러, 세필드, 선더랜드
월드컵축구대회가 시작된 뒤 36년의 긴 세월, 여덟 번째 대회에 이르러서야 축구의 본고장 잉글랜드가 대망의 제전을 개최하게 됐다. 1963년은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창립 100주년이기도 했다. 서독과 스페인이 유치경쟁에 뛰어들었었다. 1960년 FIFA 총회에서 투표결과 근소한 차이로 잉글랜드가 서독을 앞섰다. 스페인은 투표 직전에 유치를 철회했다.
본고장이 무대라서 그런지 얘기 거리도 많았고 시비 거리도 많았다. 가장 큰 사건은 개막 3개월 전부터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전시되고 있던 황금의 쥴 리메 컵이 대회 개막 8일을 앞둔 1966년 7월 3일 자취 없이 사라진 것이다. 영국 경시청이 발칵 뒤집혀 수색작전을 폈으나 컵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고, 대회 개막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국제적인 망신살이 뻗친 잉글랜드 경찰당국의 수사력도 아무런 효과 없이 이제는 컵이 없는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낙망하고 있을 때, 개막 하루 전날, 엉뚱하게도,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쥴 리메 컵은 나타났다.
런던 교외 노우드의 산속에 사는 '코베트'라는 농부의 '피클스'라는 개가 집 뒤뜰 숲속에서 그토록 목마르게 찾던 월드컵을 물어온 것이다. 쥴 리메 컵의 도난사건은 세계 각 국에 보도돼 월드컵축구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돌아온 쥴 리메 컵은 대회 기간 동안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은행에 은밀히 보관됐고 30만 파운드의 보험에 들었다.
처음으로 월드컵본선에 나온 나라는 북한과 포르투갈이었다.
1966년 1월 6일, FIFA는 런던의 로얄가든 호텔에서 월드컵본선 조편성을 했다.
1조 우루과이 프랑스 잉글랜드 멕시코
2조 아르헨티나 스페인 서독 스위스
3조 브라질 포르투갈 헝가리 불가리아
4조 칠레 이탈리아 소련 북한
브라질은 개인골 700호의 대기록을 세운 펠레가 전성기인 25세의 나이였고, 팀 전체의 가공할 공격력이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돼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아르헨티나도 나름대로의 작전과 전술을 내세워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도 두 번 우승한 관록과 1-4-2-3시스템의 빗자루(Sweeper) 수비축구로 우승을 넘보는 팀이었다. 포르투갈도 빠른 경기와 득점력을 과시할 것으로 기대됐고, 헝가리는 활기 있는 경기를, 불가리아는 그들의 정력적인 축구로 우월감을 가지려 할 것이었다. 이밖에도 프랑스와 소련도 우승을 바라는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 있는 나라는 개최국 잉글랜드였다. 자존심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 벼르고 벼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66년 7월 11일, 제8회 월드컵축구대회는 영국 여왕과 10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막됐다. 개막경기는 1조에 속한 개최국 잉글랜드와 두 차례 챔피언이었던 우루과이가 벌였다. 처음부터 우루과이는 수비 일변도였고 잉글랜드의 공격은 소득이 없어 목만 마르게 했다. 0-0으로 끝났다. 이 경기는 앞으로 치를 경기들의 예고였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대관중이 보내는 야유에 쫓기듯 잉글랜드 선수들은 허겁지겁 라커룸으로 사라졌다.
이 대회에서 가장 충격을 준 팀은 북한이었다. 가장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잉글랜드와의 준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라틴이 퇴장 당한 일이었다.
먼저 기적의 팀 북한에 관해 살펴보자.
김기수를 단장으로 대거 65명(70여 명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 안됨)에 이르는 북한 선수단은 선수22명, 임원 7명, 통역 6명, 국제심판 1명, 의사 2명, 요리사 3명, 그밖에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24명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대회개막을 11일 앞둔 6월 30일 참가국들 중 가장 먼저 런던에 도착했다. 북한선수들은 잉글랜드에 오는 도중 동유럽에서 두 차례의 경기로 컨디션을 조절했다.
월드컵대회를 위해 3년여 동안 인민군 특수부대와 같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평균키가 165cm 정도밖에 안 되는 약점을 보완했다. 당시 월드컵본선에 나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북한이 한 경기라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1%, 우승확률은 100:1이어서 강팀들의 노리개 감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다. 유럽과 남미나라들 속에 북한은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북한은 이탈리아 소련 칠레와 함께 4조에 속했다. 명례연 감독 밑에 김광섭 노택림 연승철 등 의외로 많은 코치들이 선수들을 부문별로 나눠 연습을 시켰다. 북한팀은 런던 교외의 한적한 호텔에 묵으면서 철저한 보안 속에 비밀 연습을 했다.
7월 19일, 미들스브러 스타디움. 관중은 2만여 명. 월드컵 역사에 기록될 북한과 이탈리아의 4조 예선 마지막 경기.
북한은 소련에 3-0패, 칠레에 1-1무승부였고, 이탈리아는 칠레에 2-0승, 소련에 1-0패의 전적이었다. 이기는 팀은 2회전에 진출하고 지는 팀은 탈락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는 더욱 절박한 입장이어서 베스트 멤버를 출전시켰다.
이탈리아는 긴 패스로 제공권을 장악해 키 작은 북한선수들을 압도하려 했고, 북한은 빠른 주력을 이용한 기습을 노리는 작전이었다. 이탈리아의 포화는 초반부터 북한의 문전을 괴롭혔다. 미드필드에서 불가렐리와 파케티가 띄워주는 고공 볼은 전방의 `달리는 전차' 리베라, 페라니, 마졸라, 바리손의 머리에 이어지면서 북한의 수비를 유린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골키퍼 이찬명이 이탈리아의 세 차례에 걸친 결정적인 슛을 잘 막아낸 후 10여 분이 지나면서 북한의 공격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특수훈련으로 단련해온 북한 공격수들, 특히 한봉진의 주력은 번개와 같아 빗장수비로 이름난 이탈리아 수비진도 우왕좌왕했다. 이탈리아의 파브리 감독은 북한의 빠른 주력만 차단한다면 승리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판단해 박두익을 불가렐리가, 한봉진을 자니치가 봉쇄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의 속도가 북한 공격진의 속도를 따를 수 없었다는 데에 불행이 있었다.
전반 35분, 불가렐리가 드리블 질주하는 박승진의 발을 걸어 쓰러뜨렸다. 박승진의 몸이 공중에 떴다가 불가렐리의 발목 위에 떨어졌다. 발목을 다친 불가렐리는 들려 나가 이탈리아는 10명으로 줄었다. 이 대회까지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다. 이 시각부터 전반 끝까지 15분 동안이 월드컵축구역사에 길이 남을 북한의 짧은 전성기였다. 불가렐리가 못 뛰게 되자 박두익은 자유로이 활개를 치며 이탈리아 진영을 휘젓고 다니더니 드디어 결승골을 터뜨렸다.
(아래 사진 : 이탈리아에 1-0승의 결승골을 넣은 박두익(왼쪽)과 이탈리아의 공격수 바리손을 잘 막은 임중선)
전반 41분, 하정원이 중앙원에서 전방으로 높게 띄우자 박승진이 리베라를 제치면서 헤딩으로 페널티박스 정면에 떨어뜨려 줬다. 달려 들어오던 `동양의 진주' 박두익이 페널티에리어로 접어들면서 땅볼로 강슛!
이탈리아 GK 알베르토시가 몸을 던졌지만 공은 이미 왼쪽 포스트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0. 그토록 난공불락의 요새라던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빗장수비)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은 측면에서 센터링이 올라오면 4명의 공격진이 순서대로 떠오르며 헤딩슛을노리는 '사다리 전법'으로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교란시키며 값진 개가를 올렸다.
물론 후반에 이탈리아의 공격은 거세었지만 북한의 공격에 오히려 곤욕을 치르곤 하는 상황이었다. 우승을 노리고 있었던 두 번 우승한 이탈리아의 자존심이 잔혹하게 꺾이고 마는 한판이었다. 50년 브라질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이긴 이후 월드컵축구 사상 두 번째의 이변이었다. 북한이 1승1무1패로 준준결승에 진출했고, 이탈리아는 1승 2패로 탈락하는 세기의 경악을 낳았던 것이다. 북한에 대한 경악은 4일 후에도 연출된다.
북한이 포르투갈과 놀라운 준준결승전을 벌이던 날, 이탈리아선수단은 수모를 당하면서 귀국했다. 열성팬들의 난동을 피하기 위해 로마공항과 시간을 변경해 제노바공항으로,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입국했다. 그러나 성난 팬들에게 들켜 썩은 토머토세례를 받았다. 분노한 팬들이 던진 썩은 토마토의 명중률은 이탈리아 선수들이 북한 골에 쏜 슛들보다 정확했다고 한다.
7월 23일, 북한과 포르투갈의 준준결승전이 벌어지는 리버풀 스타디움에는 5만 1천여 명이 몰려 소문난 북한의 경기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북한은 이탈리아를 꺾은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북한은 전광석화 같은 공격을 펼치더니 53초만에 첫 골을 터뜨린 것이다. 미드필더 임승휘가 한봉진에게 길게 넘겨주자 뒤따라오는 박승진에게 빼줬다. 박승진이 탄력 있게 받아 찬 공은 대포알처럼 날아가 포르투갈 문 왼쪽 모서리에 꽂혔다. 1차리그에서 브라질을 3-1로 물리친 포르투갈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내친 김에 상대를 완전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북한은 파상공세를 폈다. 작은 체구였지만 쏜살같이 빠른 북한선수들의 쇄도는 과연 놀라웠다.
21분에는 신영규가 상대의 패스를 가로채 한봉진에게 밀어 줬고, 한봉진은 전방에 나가 있는 이동운에게 길게 연결, 오른쪽으로 밀고 들어가던 이동운이 강슛! 포르투갈의 GK 페레이라가 몸을 던져봤지만 공이 더 빨랐다. 2-0.
이로부터 1분. 또 한 골이 터졌으니, 관중들은 물론이고 포르투갈선수들도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두익의 패스를 받은 양성국이 왼쪽을 돌파해 갑작스런 방향전환으로 정면을 뚫으면서 슛! 3-0. 세 골 차! 전문가들도 이 골 차는 따라잡거나 뒤집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먹이를 보면 결코 놓치지 않는 모잠비크 태생 '검은 표범' 유세비오라는 불세출의 선수가 있었다. 전반 27분, 포르투갈의 왼쪽날개 시모녜스가 골라인 부근까지 몰고 들어가 조금 길게 센터링한 공이 다시 돌아왔다. 시모녜스가 달려 들어오는 유세비오에게 밀어 주자 그대로 때린 것, 세 골을 지고 있던 포르투갈의 첫 만회골이었다. 포르투갈의 반격이 결실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밀고 밀리는 공방전과 함께 시간은 40분을 넘어섰다. 정면돌파를 시도하던 토레스에게 북한의 신영규가 반칙을 범해 페널티킥이 주어졌다. 전반 42분이었다. 유세비오가 골을 성공해 3-2, 한 골 차로 따라 붙었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유세비오가 2골을 만회한 후에야 다소 침착성을 찾은 모습이었다.
후반 들어 양 팀은 격돌을 계속했다. 전반에 두 골을 빼앗긴 북한은 수비위치에 변화를 줬다. 즉 유세비오를 집중 방어하던 임중선의 역할을 토레스, 시모녜스, 그라샹의 침투를 저지하도록 변경했다. 따라서 유세비오는 해방됐다. 이것이 북한에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후반 10분 경에 이르러서는 북한선수들의 주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공격과 수비의 조화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를 감지한 포르투갈의 날카로운 공격이 파고들었다. 후반 11분, 기어이 유세비오에게 3-3 동점골을 빼앗기고 말았다. 유세비오가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이다.
체력의 저하로 동점골까지 내준 북한이 심기일전, 대반격에 나섰다. 북한의 총공격에 포르투갈의 문전이 위협 당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르투갈의 수비 바티스타가 전방으로 차낸 공이 유세비오에게 이어졌다. 기습에 말린 북한의 수비가 당황하는 순간을 비호같은 유세비오가 파고들었다. 페널티박스로 돌진하는 유세비오, 뒤에서 슬라이딩으로 저지한 임중선, 가차없는 페널티킥이 선언됐다.
이때가 후반 14분. 19세의 어린 골키퍼 이찬명과 노련하고 탁월한 유세비오의 두 번째 단독 대결이었다. 먹이를 향해 조심스럽고 침착하게 전진하는 유세비오와 그의 숨소리까지도 감지하려는 이찬명 사이의 긴장이 관중들을 침묵 속에 잠기게 했다. 군중 속의 적막도 잠시, '검은 표범' 유세비오의 번개같은 슛에 이찬명이 나동그라졌다. 4-3 역전. 따라잡거나 뒤집기가 극히 어렵다는 세 골 차를 뛰어 넘어 혼자 네 골을 기록해 역전극을 연출해 낸 유세비오였다.
(아래 사진 : 이탈리아를 물리친 주역들-왼쪽부터 박성진 임중선 박두익 임승휘 양성국 이창명 명례현감독 한봉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북한이었지만, 이미 체력과 사기와 전세의 우위에 있는 포르투갈 선수들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포르투갈은 후반 33분에 얻은 코너킥에서 아우구스토가 헤딩으로 또 한 골을 추가해 승리를 굳혔다. 5-3이라는 역전극은 남은 시간 북한의 분투에도 더 이상 변화가 없었다. 포르투갈이 3-0을 역전시키는 월드컵 사상 두 번째의 기록을 남겼다. 그 첫 번째 기록은 54년 스위스대회 8강전에서 오스트리아가 스위스에 전반 23분에 3-0으로 지고 있다가 24분부터 추격해 7-5(월드컵 최다골)의 대 역전극을 연출한 경기였다.
북한의 패인은 세 골을 앞선 다음에 수비전술로 성급하게 전환한 점, 후반에 체력 저하로 조직력이 흐트러진 점, 신장의 열세로 제공권을 빼앗긴 점, '검은 표범' 유세비오를 계속 묶어두지 않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오른쪽 그림 : 북한이 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8강에 오른 기념으로 만든 포스터)
다 이긴 경기를 놓치고 힘없이 퇴장하는 북한선수들에게 5만여 명의 관중들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월드컵본선 처녀출전에서 세계 최강의 이탈리아를 귀국시키고, 브라질을 이긴 포르투갈을 선제하면서 태풍을 일으켰던 북한! 극동 아시아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데다 분단된 나라의 반동가리로 월드컵이라는 무대에 나와, 서로 뽐내는 세계 열강들의 눈길도 받지 못하며 무시당했던 북한이 오만한 자들을 혼비백산시킴으로써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북한선수들은 세계의 초점이 됐음은 물론이고 그들 중에서 특히 박두익과 신영규, 한봉진은 경이로운 인상을 남긴 선수들이었다.
그렇듯 훌륭한 경기를 해낸 북한은 1966년 제8회 잉글랜드월드컵축구대회 후에는 국제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후 북한의 영웅들에 관한 소식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 없는 소문만 이따금씩 떠돌았다. 그런 소문 중의 하나가, 이 영웅들이 포르투갈에 3-5로 역전패하기 전날밤 외국여성들과 파티를 벌인 죄로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는 곳이었다.
이 영웅들은 잉글랜드월드컵으로부터 35년이 흐른 2001년에 잉글랜드에서 제작하는 기록영화 "The Game of Their Lives"에 모습을 드러냈다(위 사진). 그리고 이들 중 생존자 7명은 2002년 10월 15~28일까지 잉글랜드에 초청받아 그들이 이탈리아를 1-0으로 이겼던 미들스보로 Ayresome Park 스타디움 현장을 방문한다. 그런데 당시의 스타디움은 길을 내기위해 철거됐으나, 중앙원 킥오프 마크였던 자리에 동으로 만든 공이, 양 골대 앞 페널티 스파트가 있던 곳에는 동으로 만든 축구화 한 짝씩이 각각 놓여있다
. 잠시 유세비오(본명 : Eusebio da Silva Ferreira. 왼쪽 사진)에 관해 짚고 넘어가자. 1942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출생한 유세비오는 '축구의 신동'으로 이목을 받으면서 15세에 리스본의 명문클럽 스포르팅에 입단한 후 19세에 벤피카로 이적해 7차례의 리그챔피언과 7차례의 득점왕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1965년에는 유럽최우수선수로 뽑혔고, 67∼68시즌에는 26경기에서 42골을 넣는 놀라운 득점력을 과시했다.
FIFA가 선정한 20세기 베스트 플레이어 3위(1위 펠레, 2위 마라도나)에 오른 유세비오는 60세의 원로로 2002년 1월 25일 유로2004(포르투갈 개최) 예선 조 추첨식에 참가했다. 리스본의 에스타디오 다 루즈 경기장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고, 그의 일생을 담은 영화도 제작됐다.
다시 1회전으로 돌아가자. 3연속 우승을 노리는 브라질은 3조에서 두 번째 상대로 헝가리를 만났다. 54년 스위스대회에서 '베른의 난투극'으로 악명을 떨쳤던 앙숙이 8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이 경기는 8회 대회에서 북한 : 포르투갈 경기와 함께 가장 극적이고 열띤 경기였다는 평을 받았다.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불가리아를 2-0으로 이겼고, 헝가리는 포르투갈에게 3-1로 진 상태에서 각각 두 번째의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펠레는 벤치의 결정으로 이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헝가리는 세계 최강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54년 월드컵 결승에서 서독에 우승을 빼앗겼었다. 그 뒤 한 동안 전력이 약화됐다가 다시 기력을 회복해 유럽 최강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펠레가 결장한 브라질은 헝가리의 우세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공격수 알베르트와 오른쪽 날개 베네의 공격으로 초반부터 헝가리가 압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헝가리가 베네, 파르카스, 메스졸리의 골로 토스타오가 한 골을 넣은 브라질을 3-1로 무너뜨렸다. 이것이 1954년 이후 월드컵대회에서 12년만에 브라질이 당한 첫 패배였다.
북한이 이탈리아를 쓰러뜨린 날, 브라질은 조 예선 마지막 경기로 포르투갈과 리버풀 스타디움에서 만났다. 브라질은 1승1패로 탈락의 위기에 몰려 있는 반면, 포르투갈은 헝가리를 3-1, 불가리아를 3-0으로 물리쳐 준준결승에 진출이 확정돼 여유를 갖고 있었다.
브라질은 탈락을 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경기에 펠레는 출전은 했지만, 그러나 가린샤, 벨리니, 산토스 그리고 노련한 GK 질마르를 망가로로 바꾸는 등 7명이나 신인으로 교체해 필승의 한 판을 노린다는 브라질 지휘부의 이상한 판단이었다. 반면 포르투갈은 '검은 표범' 유세비오를 내세워 펠레와의 대결을 시도하면서 정면 충돌했다. 그러나 펠레는 포르투갈 모라이스의 태클로 부상을 입고 들려 나가 브라질은 열 명이 뛰었다. 결국 포르투갈은 유세비오의 두 골과 시모녜스의 한 골로 릴도가 한 골을 넣은 브라질을 3-1로 꺾었다. 3조에서는 포르투갈과 헝가리가 준준결승에 올라갔다.
우승을 노리다가 월드컵 처녀출전의 가당치 않아 보이는 북한에 패해 탈락한 이탈리아의 수모가 브라질에도 닥쳐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58년과 62년에 이어 3연속 우승을 노렸던 브라질이 월드컵에 처음 나온 포르투갈에 패해 1회전에서 탈락할 줄이야...
펠레는 첫 경기인 불가리아 전에서 선제골을 넣었는데, 그 골은 결국 이 대회에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골이었다. 그가 입은 부상도 심각해 다시는 월드컵에 나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불굴의 정신력과 노력으로 4년 뒤에 다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대회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킨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준준결승 경기를 보자. 잉글랜드의 안방인 웸블리 구장에 9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서독사람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이 주심으로 진행한 이 경기는 주심의 미숙한 운영과 양 팀의 난폭한 플레이로 얼룩진 한 판이었다.
주심 크라이틀라인은 경기장 이곳 저곳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부지런은 떨었으나 오히려 패스를 가로막는 등 경기에 방해되기가 일쑤였다. 0-0으로 계속되던 전반 끝 무렵, 아르헨티나의 주장 라틴이 잉글랜드 스타일스의 계속되는 거친 경기를 항의하자 곧 바로 퇴장명령이 내려졌다. 라틴은 주심의 퇴장명령을 승복할 수 없다고 버티면서 통역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동안 경기는 10분 이상 중단됐다. 결국 15분만에 라틴이 퇴장해 아르헨티나는 10명이 뛰었다. 열세인 아르헨티나는 수비위주의 비기기 작전을 폈다. 잉글랜드는 산발적인 공격을 계속하다가 후반 33분 피터스의 도움으로 허스트가 헤딩골을 성공시켜 1-0으로 이겼다.
라틴을 퇴장시킨 주심 클라이틀라인은 스페인어를 몰랐기 때문에 큰 소리로 항의한 라틴의 말을 욕설로 간주했다는 것이 경기 후의 변이었다. 이 문제는 국제적인 논란으로 확산됐다. 게다가 잉글랜드의 알프 램시 감독이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가리켜 '짐승들'이라고 말해 아르헨티나는 물론 국제적으로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FIFA는 아르헨티나의 라틴과 페레이로 그리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를 징계했으나 주심에게는 아무런 조처도 내리지 않았다.
셰필드에서 벌어진 서독과 우루과이의 준준결승도 순탄치 못했다. 전반전은 우루과이가 주도해 훌륭한 슛과 좋은 기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11분에 역습으로 서독의 헬트가 먼저 골을 넣었다. 후반에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우루과이가 동점골을 얻을 기회였다. 페드로 로사가 헤딩슛한 공이 독일의 골키퍼 틸코브스키에 맞고 골로 들어가는 것을 수비 슈넬링거가 손으로 쳐냈다. 주심 잉글랜드의 핀니는 수많은 관중들도 알아본 핸들링을 못 본 체 넘겼다.
이때부터 우루과이 선수들은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서독선수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후반 5분 경 서독의 에머리히가 우루과이의 주장 트로체를 발로 찼다. 트로체는 즉시 에머리히의 배를 걷어찼다. 주심이 트로체에게 퇴장을 명했다. 10분 경에는 헥토르 실바가 넘어지면서 할러의 급소를 잡고 늘어져 퇴장 당했다. 9명으로 줄어든 우루과이는 베켄바우어가 맡고 있는 서독의 초기 리베로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서독은 할러 2골, 베켄바우어와 우베 젤러의 한 골씩으로 4-0 대승을 거뒀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는 서독의 주심이 아르헨티나 선수 1명을 퇴장시켰고, 서독과 우루과이 경기에서는 잉글랜드 주심이 우루과이 선수 두 명을 퇴장시켜 남미나라들을 탈락시켰다는 험담이 나오기도 했다.
소련은 우세한 체력과 38세의 믿음직한 GK 야신 을 바탕으로 보로닌, 치스렌코, 헝가리 태생인 사보가 엮어내는 공격력으로 헝가리 선수들을 압박해 주도권을 장악했다. 반대로 헝가리는 계속되는 실수와 골키퍼 겔레이의 엉성한 방어로 두골을 빼앗겨 2-1로 패했다.
이렇게 해서 남미나라들은 모두 탈락하고 유럽의 잉글랜드, 서독, 포르투갈, 소련 네 나라가 준결승전을 갖게 됐다.
포르투갈은 준결승에서 최강의 잉글랜드를 만났다. 잉글랜드는 이 대회 처음부터 웸블리 스타디움을 떠나 본 적이 없다. 홈팀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원래 계획은 서독과 소련의 준결승전이 웸블리구장에서,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준결승전이 리버풀에서 열리게 돼 있었다. 그러나 웸블리구장의 10만에 가까운 관중들의 입장료 수입문제로 경기장을 변경했다.
94,000명의 관중이 지켜본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경기는 반칙이 거의 적발되지 않은, 이 대회에서 가장 훌륭한 경기로 꼽힌다. 전반 30여 분까지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보비 챨튼, 허스트, 알란볼이 형성하는 잉글랜드의 공격과 유세비오, 토레스, 시모녜스가 엮어내는 포르투갈의 공격은 관중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전반30분, 드디어 첫 골이 터졌다. 잉글랜드의 윌슨이 왼쪽을 뚫고 들어가 정면에 있는 헌트에게 밀어 줬다. 헌트의 슛이 GK 페레이라에 막혀 튀어나오자 보비 찰튼이 슛! 선제골이었다. 후반 34분에는 허스트가 공격의 실마리를 풀었다. 오른쪽 코너 부근까지 몰고 들어간 허스트가 문전으로 센터링해 주자 보비 찰튼이 가슴으로 받아 떨어지는 공을 강하게 때렸다. 두 번째 골이었다.
2-0. 3분 뒤인 후반 37분에는 보비 찰튼의 동생인 수비수 잭 찰튼의 핸들링으로 포르투갈이 얻은 페널티킥을 유세비오가 성공시켜 한 골을 만회했다. 동점골을 만들기 위해 포르투갈 선수들이 무진 애를 썼으나 변동이 없었다. 포르투갈을 2-1로 물리친 잉글랜드가 사상 최초로 월드컵 결승에 진출했다. 경기장을 떠나는 유세비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준결승전 서독과 소련의 경기는 이탈리아의 로 벨로가 주심을 맡았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 팀은 마치 2차 대전을 재연이라도 하듯 했다. 경기 초반부터 서로 반칙경쟁을 벌였다. 소련의 사보는 서독의 베켄바우어에게 태클하려다가 오히려 스스로 부상을 입어 경기장을 떠났다. 전반 44분에는 서독의 슈넬링거가 태클로 치슬렌코에게 부상을 입히면서 공을 빼앗았다. 슈넬링거의 이 공이 할러로 이어지면서 서독의 선취골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잠시 치료를 받고 들어온 치슬렌코가 헬트에게 발길질을 하다가 퇴장 당했다. 아홉 명으로 줄어든 소련이었다. 서독은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처럼 어렵지 않은 2-1의 승리를 거뒀다. 서독은 1954년 우승 이후 12년 만에 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의 상대는 헝가리가 아니라 개최국이며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였다.
7월 30일 오전 11시, 비가 내리는데도 95,000명의 관중이 만원을 이룬 웸블리 스타디움. 스위스의 고트프리드 디엔스트 주재 하에 결승전은 시작됐다. 선제골을 얻은 쪽은 서독이었다. 전반 13분 잉글랜드 문전에서 윌슨이 약하게 차낸 공을 할러가 슛! 골로 연결됐다. 19분에는 서독진영 정면 한복판에서 오베라트가 반칙을 범해 잉글랜드의 프리킥이 선언됐다. 서독선수들이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무어가 문전으로 띄워 준 공을 허스트가 헤딩으로 득점했다. 전반은 1-1.
후반 32분에 역전골이 터졌다. 잉글랜드의 알란 볼이 낮게 넘겨준 코너킥을 허스트가 논스톱으로 슛했으나 수비에 맞고 나오자 피터스가 다시 강타해 성공했다. 서독의 반격으로 숨가쁜 시간이 계속되던 44분 경, 잉글랜드 페널티에리어 외곽에서 얻은 프리킥을 에머리히가 문전으로 찼다. 수비사이를 뚫고 들어가는 공을 베버가 슛해 동점골. 2-2.
(사진 : 쥴 리메 컵을 들고 우승을 기뻐하는 잉글랜드의 보비 무어)
결승전의 연장전은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대회에 이어 두 번째였다. 연장 전반 10분 경 베켄바우어에게서 공을 빼앗은 잭 찰튼이 미드필드에 있는 형 보비 찰튼에게 보냈다.
보비는 스타일스에게 연결했고 스타일스는 오른쪽으로 질주하는 알란 볼에게 패스했다. 다음에 정면으로 들어가는 허스트가 이어받아 슛을 때렸다. 크로스바에 강하게 맞은 공이 수직으로 떨어지자 서독수비가 걷어냈다.
그러나 잉글랜드 선수들은 골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주심 고트프리드 디엔스트(스위스)는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 부심인 바하라모프(소련)와 협의한 후 잉글랜드의 득점을 선언했다. 3-2로 잉글랜드가 앞섰다. 그러나 후에 이 장면을 녹화필름으로 확인한 결과 골이 아니었다. 36년이 흐른 2000년 5월 17일, 이 경기의 독일 골키퍼였던 한스 틸코브스키(Hans Tilkowski)는 “그것은 결코 골이 아니었다”고 확신에 찬 주장을 했다.
이날 잉글랜드의 웸블리 경기장 자선 경매에 참석한 틸코브스키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잉글랜드의 스트라이커 죠프 허스트(Geoff Hurst)가 슛한 공은 크로스바에 맞고 땅에 떨어졌다. 분명히 골이 아니었지만 주심의 판정을 거부할 수 없었던 우리는 대단히 언짢았다. 그래도 두 팀 간에 별 탈이 없었던 것은 훌륭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서독은 전원공격으로 만회작전을 펼쳤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연장 후반에도 서독의 소득은 없이 진행됐다. 주심이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기 시작할 무렵, 보비무어가 왼쪽 측면으로 달려들어가는 허스트 앞에 밀어줬다. 허스트는 회심의 왼발 일타로 추가골을 따냈다. 4-2. 허스트는 월드컵결승 최초의 해트트릭을 기록(현재까지도 유일한 결승전 해트트릭)하면서 조국 잉글랜드가 자존심을 걸고 그토록 노려왔던 월드컵을 안았다. 축구의 본산지 잉글랜드에게 월드컵의 첫 우승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잉글랜드의 보비 찰튼과 잭 찰튼은 월드컵 결승에서 뛴 두 번째의 형제다. 첫 번째는 30년 아르헨티나의 후안과 마리오 형제였다.
경기 후에 사람들은, 후반에 동점골로 연결된 독일의 프리킥과 연장전에서 잉글랜드가 얻은 세 번째 골의 낙하지점에 관해 논란을 벌였다.
3위는 포르투갈이 차지했다. 소련을 2-1로 물리쳤다.
제8회 월드컵대회의 특징들을 보면, 전 대회와 같이 수비위주의 유럽세와 공격위주의 남미세가 부딪쳤지만 남미나라는 4강에 한 나라도 오르지 못했다. 3연패를 노리던 브라질과 세 번째 우승을 목표로 했던 이탈리아는 8강에도 끼지 못했다. 가장 주목받은 팀은 이탈리아를 탈락시키고 8강에 진출했던 북한이었다. 북한이 이탈리아를 물리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면밀한 관찰과 전술과 전력투구에서 나온 결과였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리베로'라는 새로운 역할이 등장한 점이 특징이었다. 선수교체가 허용되지 않아 부상으로 뛰지 못하게 되는 선수 대신 보충할 방법이 없는 불합리한 문제점이 정식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는 4명의 선수가 부상으로 뛰지 못했고 5명의 선수가 반칙으로 퇴장 당했다. 우루과이와 소련은 한 경기에서 2명씩이나 퇴장 당하는 불미스런 일도 있었다.
이제 월드컵은 유럽 나라가 4회, 남미 나라가 4회씩 우승함으로써 동률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