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皇龍寺址)와 9층목탑 1. 문화재정보센타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하늘에서 본 황룡사지(경주시제공)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황룡사지터(경주시제공)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심초석(경주시제공)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2. 황세욱/한국전통고건축 설계 및 시공자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건조되었다 한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초석(경주시제공)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년(고려 고종 25) 몽골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려 그 후로는 중수되지 못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사적 제6호)에 있었던 목탑.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이 목탑지도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장륙삼존불 대좌(경주시제공)
그러나 목탑지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지(金堂址)와 같이 기단 상면에 초석이 드러나 있어 규모와 초석의 배치형식을 알 수 있었다. 정면과 측면은 모두 7칸의 평면형식이었고, 건물내부는 외진주(外陣柱 : 겉에 내보이지 않게 된 기둥)초석 배치와 같은 주열상(柱列上)에 모두 초석이 배치되어 있어, 심초석(心礎石)을 중심으로 4천주(四天柱)초석·제1내진초석·제2내진초석·외진주초석의 순으로 초석들이 놓여 있었다. 현재 외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28개이고, 안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36개로, 기단상에는 총 64개의 초석과 하나의 심초석이 놓여 있다. 평면 4각형의 탑 자리에는 기둥이 놓였던 주춧돌만 남아 있다.
축소모형(경주시제공)
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 ”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자장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준 경전과 불상·가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공장(工匠)이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운 뒤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찰주기(刹柱記)에 기록된 규모를 보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고,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舍利) 100립(粒)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창건 후 탑의 중수내용을 살펴보면, 성덕왕 17년(718)에 낙뢰가 있어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이후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째로 중수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이 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여섯 차례 중수되는 등 호국성보(護國聖寶)로 숭앙을 받아왔다. 또한, 이 탑은 우리 나라 최초의 목탑양식을 알 수 있는 것으로, 황룡사지와 더불어 사찰 및 목탑의 규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新羅皇龍寺九層塔誌-刹柱本記에 대하여-(黃壽永, 考古美術 116, 1972), 정영호 3 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우리는 중국·일본 등 동양 삼국을 통 털어 가장 많은 석탑을 가지고 있다. 숫자도 숫자려니와 그 아름다움도 다른 나라의 석탑과 비길 바가 아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했을까? 그러나 우리가 석탑만을 조성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웠던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석탑보다 훨씬 먼저 만들었고, 또한 꾸준히 조성했던 것이 다름 아닌 목탑이었다. 잦은 외침과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현재는 조선시대 5층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만이 홀로 남아 우리 목탑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황룡사지, 미륵사지, 군수리사지, 금강사지, 제석사지, 실상사 목탑지, 기림사 목탑지, 안성 죽산리 목탑지 등 10여 개가 넘는 사지들이 우리 목탑의 자취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불일사 금동 9층탑 그 중에서도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탑의 상륜부만 42척(18m), 총높이는 225척(80m). 몽고 침입 때 불타고 말았지만 21층 빌딩 크기의 거대한 모습과 문헌상에 기술된 그 화려함은 우리 목탑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드러내는데 손색이 없는 대표격 건축물이다. 많은 문화재 전문가와 관련 학자들이 끊임없이 복원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도 이런 아쉬움 때문이다. 그런데 1991년 북한에서 발간한 고려박물관(영문판-사진자료실 참조) 유물도록에서 황룡사목탑 복원의 실마리라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료가 발견됐다. 북한에 남아있는 고려 초기 대표적 유물인 불일사 5층 석탑 내부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목탑 양식을 한 금동 9층탑이 발견된 것이다. 이 금동탑은 전체 높이가 37cm, 기단 부분의 길이는 13.8cm로 옥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돼 있는 단아한 모양으로, 기단 4면에 걸쳐 8개 문을 달았고, 각 층마다 창문을 냈으며, 처마마다 기와를 아름답게 조각한 거의 완벽한 형태의 목탑 양식 금동탑이다. 특히 계단과 문과 창문의 정교함은 실제 목탑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표현이 사실적이다.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황룡사목탑을 재현하기 위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 북면에 새겨진 9층목탑 형식의 마애탑과 호암박물관에 소장된 5층 금동대탑 정도가 거의 유일한 자료일 정도다. 그나마 탑골 마애탑은 황룡사와 비슷한 시기에 새겨진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부조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호암박물관의 금동대탑은 9층이 아닌 5층이라는 점과 고려중기 양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자료로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금동 9층탑은 신라에서 고려로 나라가 넘어간 직후의 고려초기 작품이라는 점과 백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호오류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등 양식상에 있어서도 황룡사목탑의 동시대 작품들과 유사성이 많다. 금동탑이 출토된 불일사가 고려 4대 왕인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도 빼 놓을 수 없다. 광종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부인 낙랑공주와 남매 간으로 한 어머니 원당을 세우는 과정에 사위인 경순왕도 일정부분 참여했을 개연성이 많다. 또 경순왕이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까지 황룡사목탑이 웅장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동 9층탑의 모델이 됐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1991년판 고려박물관 도록에 따르면 불일사 5층 석탑 내부에서 금동9층탑 함께 비단 금니 사경(사진자료실 참조)과 발원문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종이(사진자료실 참조)도 함께 수록했다. 이 탑지도 입수하여 국역을 해보면 경순왕과 불일사와 황룡사탑과의 관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불일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금동9층탑에 관한 내용은 이와 같이 일부 관심자들에 의해 그 사실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한국 학계는 자료수집의 한계에 부딪혔다. 2001년부터 일부 언론과 2004년 11월 한 인터넷 블로그에 사진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실제 북한에서 발간된 도록을 입수하기는 처음이다. 아니 도록은 입수했는지 모르지만 5층탑 내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과 황룡사탑과의 연관관계를 규명하는 하는 연구는 미진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인은 불일사5층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을 황룡사9층 목탑의 축소형이라고 단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국내에서 발견된 유물 중 9층탑에 관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통해 황룡사9층탑의 복원과 우리나라 목탑건축사 연구에 진일보한 성과가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바이며, 남한 학자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은 자료를 공개하여 남북한 모두 뜻 깊은 문화재 공동 연구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
출처: 경주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천년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