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白冶記念館)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 전경
김좌진 장군 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지를 복원, 1998년 1월 기념관을 설립하였다.
‘김좌진 장군 기념관’에는 김좌진 장군의 출생, 계몽운동, 독립운동, 청산리 대첩 등의 업적과
전투 당시 사용된 무기 등이 전시되어 충의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야기념관(白冶紀念館) 현판
백야기념관 현판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의 글씨임
백야 김좌진 장군 흉상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셨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후 국권회복 운동에 참여한다.
1910년 10월 21일~26일까지 벌어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큰 공을 세우지만
이 전투 후 다음 해인 1921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하게 되면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대표적인 명언은 '나는 군인이다. 나의 무기는 총이다. 그러나 나의 적은 총이아니다. 나의 적은 부당함이다.'이다.
이 명언은 김좌진 장군이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나타낸 말이다.
김좌진 장군은 무력으로 독립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당함과 불의를 막기 위해 싸우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다른 명언은 '먼저 핀 꽃은 먼저 진다. 하지만 그 꽃잎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이다.
백야 김좌진 연표
1889년 홍성지역 대부호 자제 안동김씨 명문가 일원 백야 김좌진 출생
김좌진 친필 서한(복제품)
1901년 9월, 13살 김좌진이 스승에게 보낸 편지
백야 김좌진은 지역의 한학자이자 서당훈장인 김광호에게 한학과 글을 배우고
홍성으로 내려온 개화파 인사 김석범에게서 민족계몽과 근대화에 대한 지식과 신념을 일찌감치 터득하였다.
1909년 기호흥학화 홍주지회 가입 계몽운동 교육활동에 주력
국건회복에 나선 김좌진
1911녀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항일투쟁에 본격 나서 독립군자금 모금, 수감
1919년 만주로 망명 대한정의단 가입
대종교 입교
1918년(음력) 최초의 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 서명
민족대표 39인
1919년 신식무기 도입과 더불어 군도를 차고 부대 지휘
북로군정서 사령관
1920년 북만주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독립군단 결성
김좌진 부총재 임명
1925년 북만주 군사와 민전병행 신민부 결성
김좌진 군사부 위원장 임명
1929년 항일투쟁 한인 자치사회 구현
한족총연합회 결성
김좌진 주석 임명
1930년 공산좌익계열 세력 일제의 사주와 내부 암투로 김좌진 장군 암살
1893년~1945년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역사
갑오농민전쟁부터 임시정부 광복군까지
1906년 홍주선 전투
을사늑약에 분개 거병
항일의병전쟁 최대 승첩
1919년 북만주 독립운동조직 대한정의단 결성, 김좌진 가입
1919년 대한정의단 군사조직 북로군정서 결성
김좌진 사령관 부임
1920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개소
자체 독립군 정예병력 양성
1920년 청산리전투 독립군 참가부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군,국민회군,의민단,신민단
1920년 청산리전투 독립군 연합 홍범도 장군 대한독립군 조직편제
각 독립군 연합 아군 1연대 1,200명
1920년 청산리전투 독립군 주력
김좌진 장군 북로군정서 부대
조직편제 직할 제1제대, 제2제대 800명
체코군단에서 무기인수 중무장
1920년 청산리전투 출병 주력
조선 주둔 일본군 제19사단 조직편제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사단본부
제37여단 아즈마 지대 편성
실제 북로군정서와 교전부대
1920년 청산리전투 출병 지원러시아 연해주 일본군 11,13,14사단 조직편제
블라디보그톡 시베리아 파병사령부 14사단 제28여단 편성
북로군정서 외곽차단 견제부대
1920년 청산리전투 일보군 작전분쇄
2만5천명 대병력을 동원 독립군 섬멸작전 기동을 했으나 수백명의 전사자 피해 발생
독립군 포위탈출로 작전 실패
보복으로 경신참변 한인 대학살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진행된 전투이다.
1920년 10월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 19사단과 20사단 예하병력 5천여 명을 사살한 큰 승리이었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만주의 한국 독립군 토벌작전을 중지하게 되며
청산리 전투 당시 상황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은 대대적인 보복전을 준비하였다.
간도지방 한인사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청산리 전투는 매우 치열하였다.
백운평 골짜기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고
어랑촌 마을에서는 안무장군이 이끄는 국민회군이 두 번째 공격, 이어서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세 번째 공격을 감행하였다.
무려 5천여 명의 일본군이 사살되는 대승이었다고 전해지다.
북로군정서는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연합부대로 총사령관은 김좌진 장군, 부관은 이범석 장군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이라는 명칭 아래 만주지역 여러 독립군 단체 및 중국 관내의 한국독립군 등 약 2천여 명이 참가하였고
그리고 나중에 자유시 참변(1921) 이후 러시아 연해주일대의 무장세력 통합과정에서 고려혁명군정부라는 군사조직으로 개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