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편집: 묵은지
여름내 폭염으로 찌들었던 날씨는 간곳없고 이젠 아침 저녁에는 제법 서늘한 한기마저 느끼는 전형적인 늦가을 날씨에 접어들었습니다. 요즘 한낮과 밤의 온도차를 크게 느끼고 있는 묵은지도 며칠전부터 긴 팔 상의를 꺼내어 입기 시작하면서 환절기에 대한 건강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는데 문득, 요즘 날씨처럼 은근히 살 떨리게 온몸을 휘감아도는 서늘한 기운이 마치 문정왕후의 섭정 정치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좀 억지같은 비유였을까요? ㅎㅎ 안그래도 조선의 여인천하 문정왕후에 대한 무궁무진한 이야기는 조선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또하나의 관심사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연유로 하여 묵은지는 굳이 요즘 서늘한 날씨와 연관을 시켜 보았을 뿐입니다. 문정왕후는 그의 나이 17세 때 조선의 제11대 왕인 중종의 세번째 왕비가 되었는데 이 과정이 공교롭게도 훗날에 자신과 철저한 앙숙관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 임의 천거로 간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윤 임은 같은 파평 윤씨의 집안이었기에 안심하고 적극 추천을 하였으며 왕비가 된 문정왕후는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앞서 요절한 장경왕후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의 아들인 원자(훗날 인종)를 맡아 기르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여겼으며 처음에는 이를 충실하게 고분고분 실천하는 윤 임의 입맛에 맞춘 참한 왕비로서 궁중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문정왕후는 비록 세자가 자신에게는 양자였지만 친자식 이상으로 지극 정성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세자가 정비를 통해 태어난 유일한 적자였고 후에 보위를 확실하게 물려받을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비를 통해 얻은 하나뿐인 원자의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보니 매사가 불안하였는데 그런 와중에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가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음모설이 궁중에 나돌아 이를 불안히 여긴 문정왕후는 세자의 친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김안로와 짜고 '불에 태운 쥐를 동궁 뜰 은행나무에 매달아 세자를 저주하였다'는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變)'을 조작하여 경빈 박씨와 복성군 그리고 좌의정 심정 등을 역모죄로 몰아 사약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세자의 안위 만을 생각하던 문정왕후였지만 이러한 자신에게 주어진 충실한 역할은 줄줄이 딸만 넷을 낳아 낙심속에 지낼때와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아들을 낳기전까지였습니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나이 34살이 되던 해에 그렇게 고대하던 아들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입장이 돌변하였는데 그 당시 궁중생활에서 34살의 나이로 출산을 하기에는 거의 희박한 일이었고 임신자체가 위험스러운 늦은 나이였는데 그의 무서운 집념은 결국 왕비가 된지 무려 17년이 지났음에도 기어코 아들을 얻고야 말았습니다.
자신도 아들을 얻기에는 상당히 늦은 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체념속에 오로지 양자만을 믿고 거두었던 문정왕후였건만 뒤늦게 얻은 아들로 인해 득의양양해진 문정왕후는 이때부터 태도가 돌변하여 자신의 아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며 그동안 애지중지 해오던 세자를 모질게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문정왕후가 세자를 미움으로 막대하는 못된 모습은 궁중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심술이 꽉찬 계모의 바로 그런 모습이었으며 나쁜 계모의 노골적인 적대감과 구박에도 불구하고 심성이 착한 세자는 비록 친모가 아니었지만 아들로서 예를 다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세자를 향한 적대감은 지나칠 정도였는데 어느날 세자가 거처로 머물던 자선당에 큰 불이 일어나 항간에는 문정왕후가 세자를 없애려고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자신의 동생들을 궁에 불러들여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앞서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 임을 '대윤(大尹)'이라 불렸다면 문정왕후가 끌어들인 자신의 동생인 윤원로와 윤원형은 '소윤(小尹)'이라 불렸습니다. 이러한 세력 형성은 장차 있을 왕권 자리 다툼에 힘을 다지기 위한 문정왕후의 포석으로 보였는데 실제로 이들은 팽팽한 대립 속에 서로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중종은 38년이라는 비교적 오랜기간 집권을 하였음에도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이렇다할 변변한 치적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는데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왕의 주변에 있는 외척들의 전횡은 상당하여 특히 윤 임의 세도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1544년 중종이 죽고 세자가 보위에 올라 인종이 되니 그나마 문정왕후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던 소윤의 세력은 윤원로가 귀양까지 가면서 점점 더 밀려나게 되었고 인종의 외숙인 대윤의 세상은 기고만장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인종은 보위에 앉은지 불과 9개월만에 병사하고 말았는데 병약하긴 했지만 인종의 죽음에 대해서 문정왕후와 소윤 세력들의 소행으로 소문이 떠돌기도 하였습니다. 어쨌거나 인종이 급사를 하는 바람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불과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13대 임금인 명종입니다.
대왕대비인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인 명종이 불과 12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보위에 올리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시작함으로서 또다시 외척 세력에 의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원로의 귀양으로 위축되었던 소윤의 세력을 만회하고자 대윤인 윤 임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작당을 하였는데 이 사건이 문정왕후(대왕대비로 바뀌었지만 편의상 호칭) 섭정으로 생겨난 피의 숙청인 바로 1545년에 있었던 '을사사화'입니다. 을사사화의 시초는 소윤의 윤원형이 대윤인 윤 임의 세력들이 희빈 홍씨의 차남인 봉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고 무고를 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로인해 대윤의 윤 임과 이조판서 유인숙, 좌의정 유 관 등을 귀양 후 사사 시켰고 이어 봉성군과 계림군을 포함한 왕족과 수십명의 대신들도 같은 이유로 잡아들여 죽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화의 여파는 장장 6년 여 동안을 이어졌는데 문정왕후와 소윤의 윤원형 일파는 그 와중에도 목숨을 부지하고있던 대윤의 잔재 세력까지 모두 없애버리려는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어진 사건으로 부제학 정언각의 밀고가 발단이 된 '전라도 양재역 벽서'사건이 잇달아 터졌는데 많은 신료들을 떼죽음으로 몰고가 정미사화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이듬해 충주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살육사건으로 '충청도'를 한때 '청홍도'로 까지 바뀌어 불리게 했던 이홍윤의 옥사 등은 문정왕후의 섭정기에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온 사건들이었습니다.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조선을 통치한 8년간의 섭정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왕권을 발휘한 여왕 그 이상의 위상이었으며 수많은 대신들의 목숨을 빼앗은 폭정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이에 더하여 그의 동생인 윤원형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도 그들의 엄청난 권력에 힘입어 만만치 않게 유명해진 여인입니다. 본래 정난정은 도총부 부총관인 정윤겸의 첩에서 태어난 서녀였는데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눈에 들어 역모죄의 집안으로 몰린 전처인 김씨부인을 쫒아내고 첩이었던 자신이 정실부인이 되었으며 문정왕후의 든든한 배경으로 정난정은 수시로 궁궐을 출입하며 부를 축적, 나중에는 외명부 종 1품의 정경부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정난정은 문정왕후에게 승려 '보우'를 소개시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변화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문정왕후의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깃들어 있었으며 당시 복수전으로 일관하는 자신의 정치를 거슬리게 하는 눈에 가시같은 사림들을 멀리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조선의 불교는 이때까지 사림들에 의해 멸시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문정왕후는 사림들의 이러한 유교에 여봐란듯이 보우를 통해 판선종사의 중책을 맡게하여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부활시켰고 승려들에게 나라가 신분을 증명해 주는 제도인 도첩제를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에 문정왕후는 섭정을 끝내고 명종으로 하여금 친정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음에도 문정왕후나 윤원형 일가의 권세정치는 계속되었고 미약한 왕권을 이용한 이들 소윤 세력들의 극심한 부패된 정치로 인하여 대부분의 백성들은 조정과 관리들에 대한 원성으로 들끓었고 갖은 착취로 인해 살기힘든 백성들은 도처에 도적질을 해서라도 먹고 살아야 했으며 양주 일대에는 임꺽정이라는 도적떼가 출현하여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 등과 같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컫기도 하였는데 관군과도 맞서 싸우는 대담한 도적들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 일부에서는 탐관오리들과 맞서 싸우는 이 도적들을 의적같이 여기며 동경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라안 도처에서 이렇게 난리로 들끓고 있으니 가뜩이나 호시탐탐하던 왜구들이 가만 있을리가 만무하였는데 왜구들은 70여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해남의 달랑성 어란포를 기습 공격함으로서 영암, 강진, 진도 등 이 일대를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고 함락시켰으며 이곳을 지키고 있던 조선의 군사들과 수많은 백성들의 사상자가 나왔으니 이를 '을묘왜변(1555년, 명종 10년)'이라 하였습니다. 사실 묵은지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어떤 사학자는 이때에 임진왜란의 전조 정황으로 보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은 조선이 을묘왜변을 통해 철저하게 왜구로부터 심한 타격을 받았고 이에 대응하는 방비력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입니다. 왜군들은 장흥부사 한 온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며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던 장수 강진현이 도리어 겁을 먹고 주춤거렸습니다.
좌도 방어사 남치근이나 우도 방어사 김경석 역시 겁을 먹고 진압을 꺼렸는데 이러한 조선 장수들의 치졸한 행동들은 왜군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조선의 땅을 자기들 마음대로 활보하면서 노략질을 해댔던 것입니다. 다행히 장수가 아닌 문신이었던 이윤경과 이준경이 가세하면서 군사를 독려하여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인근의 장군들은 무서워 나올 궁리를 하지않아 더는 진압을 하지 못했고 유유히 퇴각하는 왜군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뒤늦게 이런 전세의 상황을 보고받은 명종은 조선의 무능한 장수들의 비겁하고 멍청한 짓들을 크게 개탄해 하면서 비록 문신이었지만 용감하고 지혜롭게 군사들을 잘 이끌어 왜구들을 물리치고 전세를 뒤집은 이윤경과 이준경 형제를 크게 치하 하였습니다.
조선은 을묘왜변 이후 그동안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를 상설 기구로 만들고 나름대로 외침에 대한 대비를 한다고는 했으나 그 효과는 매우 미흡하였는데 무기력한 왕권과 부패한 조정의 사정, 그리고 그동안의 나라안 도처에서의 부패가 워낙 만연해 있었던 것도 그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이후 문정왕후는 1565년 창덕궁에서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하필 그때 죽음을 부른 독감 사태로 찬물 목욕을 권했던 승려 보우가 관련이 되었다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었는데 그곳에서 불교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제주목사에게 직권 처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보우가 그렇게 죽고나니 불교 융성책들은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으며 그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던 윤원형과 정난정 마저 함께 몰락하였습니다.
이렇게 명종은 그동안 자신에게 옥죄고 있었던 외척들의 전횡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으며 자유롭게 정사를 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정왕후가 죽은지 불과 2년뒤 아깝게도 그 역시 보위에 오른지 22년만에 체질적으로도 약하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34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드센 어미 덕에 제대로 정사도 펼쳐보지 못한 명종은 도리어 외척들의 전횡을 뻔히 알고도 눈물을 삼켜가며 참아내야 했으며 그저 이들의 극심한 부패로 시달림을 받아야할 백성들의 고통만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는데 이러한 명종의 심정은 조선왕조실록 명종 31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해치고 자식마저 닥달을 해가며 살아가야했던 문정왕후의 삶도 어찌보면 불행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데 이런 눈살찌푸리게 만드는 모습들이 마치 권력욕에 눈이 멀어 친자식까지 살해한 악랄한 중국의 여제인 측천무후나 서태후와 유사해 보여 비교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