董狐直筆(동호직필)
晉(진)나라의 史官(사관)인 董狐(동호)가 나라 일에 대하여 直筆(직필)을 잘했다는 데서 유래하여 역사의 기탄없는 집필을 이르는 말. 동호는 누가 뭐래도 꿋꿋하고 곧은 붓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대로의 역사를 정직하게 기록한다. 기록을 맡은 이상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권세에 두려워하지 않는 동호의 곧은 붓에서의 기록을 말함. 董狐之筆(동호지필). 太史之簡(태사지간).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에 서술한 이야기로, 대신인 趙盾(조순)이 靈公(영공)인 임금 夷皐(이고)를 시해했다 에서 나오는 말이다.
조순(조천, 조돈 등 이름이 학자 간에 다름)은 晉(진)나라 文公(문공)의 중신 趙衰(조쇠)의 아들이다.
진의 문공이 세상을 떠나고 양공이 즉위하여 조순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당시 사람들은 조순과 그의 아버지 조쇠를 진나라의 공신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공 때에 어떤 사람이 대부 狐射姑(호사고)에게 물었다.
조쇠와 조순은 어떤 사람인가?
조쇠는 겨울날의 해와 같고, 조순은 여름날의 해와 같다 하고 호사고가 대답했다고 한다(趙衰 冬日之日也 趙盾 夏日之日也 : 조쇠 동일지일야 조순 하일지일야). 여기서 말하는 夏日(하일)과 같은 뜻으로, 秋霜(추상)이란 말도 많이 쓰이는데, 모두가 정직하고 인격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夏日秋霜 : 하일추상).
양공이 죽은 뒤 어린 나이로 즉위한 夷皐(이고)인 靈公(영공)은 아주 어리석고 포악한 임금이었다.
조순이 국정에 참여하여 영공 이고가 폭군 傑王(걸왕)과 같으니, 이고는 항상 조순 때문에 마음대로 못하여 항상 조순을 감시하다가 아예 무사 영철을 자객으로 보낸다.
그 자객은 영공 이고의 측근 시중을 들었던 용사 鉏霓(서예)로 서예가 조순의 침실로 들어가 문이 열려 있음을 알고 그 방을 엿보다 긴장 한다.
조순이 출근하려고 의자에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것을 본 서예가 발소리를 죽이며 뜰로 나오니 생각이 달라진다.
아! 그야말로 재상의 자세며 백성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며. 저 분을 죽이자는 어명도 거역할 수 없고 어명을 받을 수 없음은 오직 죽음 뿐.
이를 안 조순은 싸워도 이길 수 있지만 임금을 능멸하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국외로 망명하니, 얼마 후 사촌형인 趙穿(조천)이 죽고 영공도 시해 당하였다. 그럼에 조순은 수레를 타고 강성으로 가니 문무백관이 다 모인다.
조순은 영공의 시체에 엎드려 대성통곡하니 그의 애달픔을 백성들이 다 알아준다. 백성들 모두 임금의 잘못을 알고 있어 조순을 전과 같이 다시 위정자의 선위에 올라서게 한다.
조순은 임금을 옹립하는 대표자가 되어 成公(성공)을 임금을 옹립한 후에 영공의 피살에 대한 사관의 기록을 보게 된다.
역사의 기록에는 조순이 도원에서 황제인 영공 이고를 죽이다' 로 쓰여 있어 조순이 태사에게 말하며 동호가 잘못 기록한 것이오. 하며, 그때 나는 강성해서 이백 리 인 하동 땅에 몸을 피하고 있었소.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니, 그때 동호는 냉정히 대답하길, 승상은 국경을 넘지 않았으며 서울에 와서도, 임금을 죽인 자를 찾아내어 그 죄를 벌하지 않으니 변명이 아쉽겠소.
조순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 기록을 고칠 수 있겠소 하니, 동호는 단호하게 대답하길,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는 것. 사관의 책임이요, 승상이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이 기록만은 고치지 못합니다(董狐直筆 : 동호직필).
조순이 탄식하며 슬프다 훌륭한 사관의 붓은 권력의 정승보다 더 하구나!
훗날 公子(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했다. 조순도 훌륭한 대신이었다. 법을 바로잡기 위해 오명을 감수했다. 국경을 넘어 외국에만 있었으면 책임은 면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