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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연설 6
요점으로 돌아가, 운명의 여신은 생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무모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반면 지혜는 사람을 소심하게 만드는바, 결국 지혜로운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와 헛된 희망 가운데 천대받으며 각광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여러분은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돈을 굴리며, 국가의 통솔에 참여하여 손쉽게 모든 면에서 성공을 구가합니다. 만일 군주들의 마음을 얻어 금은보화로 치장한 흡사 신들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이런 면에 있어 지혜만큼 쓸모없는 것이 무엇이며,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머무는 것보다 더한 저주는 무엇입니까? 부를 획득하고자 할 때, 만일 자본가가 지혜를 따르고 억견을 배척한다면, 거짓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힌다면, 사기와 고리대금에 대해 현자의 양심으로 작으나마 가책을 느낀다면 어떻게 재산을 긁어모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교회의 위엄과 재산을 얻고자 한다면, 이런 데는 당나귀나 물소가 현자보다 빠르게 도달할 것입니다. 만일 쾌락을 원한다면 말하거니와, 여인들은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바 -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반하기 마련이며 현자들은 마치 전갈을 피하듯 두려워하며 도망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보다 조금 더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주변에서 지혜는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것이며 무엇이든 동물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교황들이나, 군주들이나, 재판관들이나, 행정관들이나, 친구들이나, 적들이나, 지위가 높은 자들이나, 지위가 낮은 자들이나 할 것 없이 여러분이 고개를 돌리는 곳 어디에서나 돈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자들은 돈을 조롱하고 있으니, 이런 자들을 치워 버리는 데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나 우신의 칭송거리로 말하자면 끝은 없으며 한계는 무량하다 하겠습니만, 연설은 무릇 언젠가는 끝나야 할 것입니다. 하여 이제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연설을 끝맺기 전에 잠시 위대한 작가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이들은 그들의 글솜씨와 실천을 통해 나 우신을 빛나게 하였는바, 이들을 소개하는 것은 나 우신이 어리석게도 그저 나 잘난 맛에 취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혹은 까다로운 자들이 내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다고 고발하지 않도록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들로써 내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저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선 널리 사람들이 인정하는 격언에 이르길, “진짜가 없는 곳에서 진짜를 가장한 것이 최고다”하였고, 어린아이들에게 “적당한 때에 어리석음을 가장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지혜다”가 올바른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바, 여러분은 벌써 이로써 나 우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짐작할 텐데, 나 우신을 가장한 거짓 그림자 내지 모방물조차도 그와 같은 커다란 칭송을 현자들로부터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한 이보다 훨씬 분명하게, 포동포동 살진 에피쿠로스와 돼지가 표방한바, ‘잠깐 동안’이라는 제한이 붙긴 했어도 “어리석음을 지혜에 섞으라” 명하였습니다. 곧이어 “때로 어리석음도 즐거운 일이다”라고도 하였습니다. 또 호라티우스는 다른 곳에서 “차라리 나는 넋 나가고 못 배운 시인으로 보이며 형편없는 시를 즐겨도 이를 아예 깨닫지 못하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시인 호메로스에서 여러 방면에서 텔레마코스를 칭송하며 그를 ‘어리석다’고 하였으며, ‘어리석다’라는 단어를 비극 시인들은 순진무구의 뜻을 담아 기꺼이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에게 별명으로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일리아스>라는 성스러운 서사시를 ‘어리석은 군주들과 백성들의 뜨거운 열정’말고 달리 무엇이라 정의하겠습니까? 또한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다’는 키케로의 말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칭찬이라 하겠는바, 대저 좋은 것일수록 널리 퍼져 있으며 그만큼 빛난다 하였던 격언에 비추어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작가들이 신통치 않게 느껴질지 모르겠는바, 이제 나 우신을 칭송하였던 증거를 가능하다면 성서적 증언들에서 찾아보거나 혹은 학자풍으로 논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ㅏ. 먼저 교회 학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바, 그들이 내게 이를 허락해 주었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이런 험난한 과제를 시작하게 되었기에 하는 말인데, 무사이 여신들을 헬리콘 산으로부터 여기까지 길고긴 여정을 감당하시라 불러 모시는 것도 불경스러운 일이려니와, 더군다나 무사이 여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므로, 또 이왕 교회 학자 시늉을 내기로 하여 고행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므로 어쩌면 차라리 스코투스의 영혼을 소르본 대학으로부터 불러 내 가슴속에 들어가게 하는 편이 좀 더 합당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그러고 나서 신경질적이며 고슴도치보다 가시가 많은 그를 그가 원하는 곳 아무 데로나 보내거나 혹은 ‘까마귀밥’이 되도록 버려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교회 학자의 옷을 입는 것을 허락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래도 두려운 것은, 내가 신학과 관련된 많은 것을 제시하는 것을 보고 내가 나를 따르는 신학 박사들의 은밀한 비밀을 표절하였다고 행여 누군가 나를 절도범으로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과히 놀라운 것도 아닌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학식들은 가깝게 지내던 교회 학자들로부터 내가 주워들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로 깎은 남근상 프리아포스도 신학 박사들이 읽는 소리를 듣고 희랍어를 외웠다 하며, 루키아노스가 말한 수탉도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사람들의 대화를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럼 양해를 받았다 치고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코헬렛>의 첫머리에 이르길, “어리석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하였습니다. 여기서 헤아릴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인간 족속 모두를 포섭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극소수는 예외를 둘 수 있지만 나로서는 언제 누가 이런 예외적 인간을 만났을까 싶습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분명하게 <예레미야서>에 말하되 “사람은 누구나 그 지식으로 인하여 어리석다”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지혜를 오로지 하나님에게 돌렸으며, 인간 일체에게는 어리석음을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이에 조금 앞서 “인간은 제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까, 예레미야여? 예레미야는 대답하여 말하되, 놀라울 것도 없는바 인간은 지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다시 <코헬렛>으로 돌아와 “허무로다, 허무! 모듯것이 허무로다”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이 말은 결국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인간 삶은 다만 어리석음의 연극이라는 것인데, 이로써 코헬렛은 매우 정당하게 여러 번 언급되어 마땅한 키케로의 말, 다시 언급하면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다”에 찬성표를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집회서>의 저자는 “미련한 자는 달처럼 변하나, 경건한 이의 말은 태양처럼 항상 지혜롭다” 하였습니다. 흔히 달은 인간을 가리키고, 모든 빛의 원천인 태양은 하나님을 가리키는바, 이로써 그는 인간 종족은 모두 어리석으며, 오로지 지혜롭다는 이름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고한 뜻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에 찬동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복음서에 기록된바, 오로지 하나님을 제외하고 누구도 선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하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것이며, 지혜롭지 않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므로, 결론적으로 스토아적 논리에 따라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리석음에 포섭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솔로몬은 <잠언> 15장에서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자에게 즐거움이다”혀였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어리석음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달콤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동일한 뜻을 전하는 것으로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을 늘리면 근심도 늘기 때문이다”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설교자는 다시 7장에서 대단한 고백을 합니다. “지혜로운 이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하여 이 설교자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생각하며, 나 우신을 또한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면, 이 설교자가 직접 기록한 말을 들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지혜와 지식, 우둔과 우매를 깨치려고 마음을 쏟았다”. 여기서 말의 순서에 주목해야 하는데 어리석음을 마지막에 언급함으로써 어리석음을 칭송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설교자 코헬렛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교회 서열에 따른 것인데, 위엄에 있어 최고 어른이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 교회 서열이니, 이런 부분에서 나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분명하게 44장에서 어리석음이 지혜로움보다 빛난다 하였으니 이를 인용으로 입증하지 않고, 나의 문답 유도에 맞추어 플라톤의 작품에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문답식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였듯, 여러분이 알맞은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를 설득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숨겨 두는 물건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고 값진 물건입니까, 아니면 흔하고 값싼 물건입니까? 여러분, 왜 침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모르는 척 외면해도 희랍인들이 널리 사용한 격언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대답하고 있습니다. “물동이는 문밖에”라는 속담인데, 이를 논거로 인정하지 않으실까 봐 말씀드리자면, 나를 따르는 박사들이 신처럼 모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격언을 언급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금은보화를 길가에 버려둘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귀중한 보석들은 아주 깊숙이 땅을 파고,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철옹성으로 보호막을 둘러 만든 굉장히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길 것이며, 지저분한 쓰레기는 밖에 둘 것입니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감추고, 천하고 지저분한 것은 밖에 버려둘 것인바, 이를 미루어 지혜를 은폐하기보다는 어리석음은 감추라고 하셨으니,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값어치가 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집회서>의 증언을 전하자면 “어리석음을 감추는 사람이 자기 지혜를 감추는 사람보다 낫다”.
성경에서는 영혼의 정결함을 어리석은 자에게 두었는데, 지혜로운 자는 누구도 자기에게 견줄 만하지 못하다고 믿는다 하였습니다. 하여 나는 코헬렛이 10장에 기록한 바를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길을 걸으면서도 지각이 모자라서 만나는 사람마다 바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놓고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에서, 모두에게 자신의 명예를 같이 나누려고 하는 것은 정결함의 매우 훌륭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임금 또한 이런 호칭을 부끄러워하지 않아 <잠언> 30장에 “정녕 나는 여느 사람보다 멍청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만백성을 가르친 선생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기꺼이는 아니지만 아무튼 스스로에게 어리석다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나는 훨신 더 어리석게 말합니다”라고 하였는바, 그는 어리석음에 있어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창피스러운 일로 생각한듯합니다.
저기 희랍어를 좀 안다는 인문학자들이 내게 야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까마귀들 혹은 오늘날의 교회 학자들을 눈멀게 만들고 있는데, 마치 연막 같은 주해서들을 다른 사람들에 유포시킴으로써 말입니다. 이들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는 아니더라도 제2인자는 되는 자가 바로 나의 시종 에라스무스입니다. 나는 칭찬을 위해 이 이름을 여러 번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이 저기서 이렇게 악을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우신다운 인용이라 하겠다. 사도의 생각은 댁이 꿈꾸고 있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바울은 자신이 남들보다 어리석게 보이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나도 그러합니다’라고 했던 것은, 이런 일에 스스로를 떠벌리는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짐짓 동등하게 놓은 것이며, 하지만 이어 바로 ‘나는 훨씬 더 그러하다’라고 고쳐 말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자신이 여타 사도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 거짓 사도들보다 자신이 월등함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알림에 있어 아무튼 잘난 체하는 발언으로 다른 사람들의 귀를 거스르지 않도록 바울은 ‘어리석은 내가 말하노니’라는 말로서 어리석음을 가장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특권은 오로지 어리석은 자들에게 주어져 있음을 바울이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런 발언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를 따지는 일은 그렇다면 저기 희랍의 인문학자들에게 맡겨 두겠습니다. 나는 덩치 크고 풍성하고 무게 있고 대중에게 인정받는 교회 학자들을 따르겠습니다. 대부분의 박사들도 이들을 추종하여 제우스에게 맹세코 기꺼이 아무렇게나 해석하길 원하기 때문이며, 희랍 문헌학자들처럼 희랍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등 외국어 3종을 배워 정확히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